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고, 다만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편이었던 나는 그저 자식 된 도리로서 습관처럼 알파벳을 외웠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에 와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당시의 자식 된 도리란- 확실히 뭔가를 외우는 일에서 시작해 뭔가를 외우는 일로 끝을 맺곤 했다. 예컨대 구구단을 외우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고, 국민체조의 순서를 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애국가의 1,2,3,4절 가사를 외우고, 교과서를 외우고, 공책을 외우고, 전과를 외우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압권은 단연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실로 지극한 효성의 자식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그 도리를 다할 수 없을 만큼이나 그것은 길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쪽
꿈과 낭만이라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나 야구에 있어서나 적어도 5할대 이상의 승률을 유지하고 있을 때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3할대 정도의 승률로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야' 따위의 개똥 같은 대사를 읊으며 웃고 떠들 수 있겠지만, 도무지 1할 2푼의 승률로 꿈과 낭만을 간직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생이라면, 대부분 4할에서 5할 정도의 승률을 유지할 것이며, 운이 좋은 인생이라면 6할에서 7할 정도의 승률을 유지할 것이고, 비록 운이 없는 인생이라 해도 아무튼 3할에서 4할 정도의 승률은 유지하기 마련인 것이다. 더군다나 소년이라면, 하늘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쉽게 꿈과 낭만에 젖어들 수 있는 소년이라면 - 그 승률은 좀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1할 2푼의 승률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사는 소년들이 있었다. -60쪽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선수와 팀을 가지고 있다. 60년 동안 야구를 사랑해온 늙은이에게도, 바로 어젯밤부터 야구가 좋아진 중학생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을 뽑거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와는 달리, 적어도 야구에선 '다 똑같은 놈들이야'라거나 '전부 도둑놈들이야'와 같은 태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야구에 관심이 없는 이라 해도, 경기를 죽 지켜보다 보면 어쨌든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거나 어떤 팀의 선전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야구란 그런 것이다. -80쪽
잘 관찰해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 위치로 돌아온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결코 사라지거나, 떠나거나, 달라질 리 없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운명'과 같은 것에도 질량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진정코? 진정코! -104쪽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과연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고, 거의 이대로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은 인생이었다. 타율로 치면 2할 2푼 7리 정도이고, 뚜렷한 안타를 친 적도, 그렇다고 모두의 기억에 남을 만한 홈런을 친 적도 없다. 발이 빠른 것도 아니다. 도루를 하거나 심판을 폭행해 퇴장을 당할 만큼의 배짱도 없다. 이대로 간다면.... 맙소사, 이건 흡사 삼미 슈퍼스타즈가 아닌가. -124쪽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볌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 원년의 종합 팀 순위로 그것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126쪽
6위 삼미 슈퍼스타즈 : 평범한 삶 5위 롯데 자이언츠 : 꽤 노력한 삶 4위 해태 타이거즈 : 무진장 노력한 삶 3위 MBC 청룡 :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한 삶 2위 삼성 라이온즈 :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한 삶 1위 OB 베어스 :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삶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126쪽
시골 출신의 신입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촌티와 사투리를 숨기려는 스타일과, 자학을 하듯 그 오버액션을 연출하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물론 더 큰 상처를 받는 쪽은 후자지만, 클립턴 행성의 인간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행성인들은 술자리가 심심하다 싶으면 이들의 촌티와 사투리를 부추겼고, 이들은 이미 15:0이라는 심정으로 자학적인 희극과 코미디를 연출하곤 했다. '소속'의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이른바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집단에서도 이 '소속'의 콤플렉스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사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144~5쪽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적어도 패션과 외모에 관한 한, 나는 김치사발면 속의 동결건조김치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물을 붓고, 불려도 그것은 절대 진짜 김치가 되지 않는다. -168쪽
청춘은 고장난 탱크와 같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내일의 문 앞에 서 있었다. -185쪽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199쪽
제대를 하면서, 나는 '소속'의 고민과 비슷한- 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그곳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계급'이었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소속 안에서, 또 다시 여러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구가 위도와 경도로 나뉘어 있듯- 결국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이 세계를 분할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위도 몇에 경도 몇... 결국 그곳에 한 인간의 좌표가 위치해 있고, 우리의 삶은 여간해서 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xx사단 xx연대 xx중대 xx소대 ooo상병이라든지, xxx주식회사 xx부 xx팀 ooo대리라든지, 그런 소속과 계급이 없는 듯 보여도 결국은 xxx주식회사 xx부 xx팀 ooo대리의 아내라든지. -203쪽
이 땅에서, 보편적인 결혼의 대부분은 <가정을 버려야 직장에서 살아남는다>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의 결합이다.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그래서 누구나 사는 게 고달프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의 하나였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아내의 외눈이 그 사각(死角)을 봐주기를, 자신의 사각 속에서 나는 늘 갈망했었다. 물고기는 끝끝내 그 사각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그 보편적인 인생 속으로 조성훈이 찾아왔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다소 신기한 것이었고, 이제 나는 그 '다소'나 '신기함'에 대해 그대에게 말하고자 한다. 즉 이것은, 그해에 펼쳐진 우리의 야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217쪽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입사 시험을 치를 때 면접관이 던진 질문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라고 나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자본주의를 사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 살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이도, 투자가 없이도 노력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누구에게나 사는 건 마찬가지다. 재미없고, 힘들다. 또 바보가 아니라면, 세상을 더 이상 재미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철부지들도, 물신 풍조를 우려하던 몽상가들도, 때가 되면 자신의 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좋은 습관, 그리고 사는 건 원래 힘들고 재미없다는 사실에 대한 빠른 인식이 필요하다. 그 세 가지만 제대로 갖춘다면 누구나 이 세계에서-먹고, 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이다. -220~1쪽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 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225쪽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혼을 하고 실직을 당한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서서히 인생을 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자 하나씩, 하나씩 할 일들이 생겨났다. 우선 그날 이후 나는 하릴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고, 어느새 산보를 하며 하늘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늘을 즐겨가면서 나는 점점 낙천적인 인간으로 변해갔다. -241쪽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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