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절판


나는 나를 잘 모른다.
아니 사실은 혼자 있을 적의 나와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의 내가 전혀 다르다고 느낀다. 인호나 정수는 그런 나를 전쟁 때 피난 시절의 경상도 아이들이 그랬듯이 '다마내기'라고 했다. 서울내기는 다마내기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양파처럼 빤질거리는데 속은 아무리 까봐도 모르겠다는 소리다. 상진이가 독서한 깜냥으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누군가 내면에 지닌 것과 외면에 나타나는 게 다르다는 것은 그가 세계를 올바르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나의 내면에 지닌 것과 외면의 것이 조화되게 해주소서'하는 문장은 판 신에게 드리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저 옛날 플라톤이 열었던 아카데미아 학원의 문전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세상을 올바르거나 그릇되게 대하려던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나를 방어하고자 했을 뿐이다. 자유로운 떠돌이 판 신이라 한들 저 혼자 있을 적에, 가령 정신없이 갈대피리를 불고 나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 -42~3쪽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가을은 슬픈 계절이라고 보는 게 어쩐지 통속적이지 않니? 낙엽 태우는 연기에서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는 대목도 겉멋이라구 보이는데. 정서는 생활과 연결이 되어야 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귀에서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아요. 어떤 글이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는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다. 감정을 아끼고 담담하게 냉정하게 쓰되, 문장과 문장사이가 중요하지.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우고 글을 함께 완성해준다. -84~5쪽

당시에는 명문고교의 어린 '신사들의 모임'을 서로가 대단하게 여겼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세상 어느 사회에나 있는 엘리트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좌절하거나 아니면 살아남아서 요 모양의 산업사회를 이끌어갈 사회지도층이 되었다. 그들도 그맘때에 벌써 세계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따위를 모조리 읽어치우고 어른들도 읽기 힘든 사회과학이나 철학책들을 읽고 의젓하게 비평을 하며 토론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들은 사창가를 가거나 어두운 대폿집을 드나들며 퇴폐의 흉내도 냈지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지도자가 되는 길인가도 잘 알았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정말 방기하지는 않았다. 인호나 나처럼 온몸을 던지는 일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는 신나는 모험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끝내는 신중한 충고를 하며 한 걸음 비켜섰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매력 가운데 으뜸인 것은 역시 자기 존재와 생각을 서투르게 드러내지 않는 점이었다. 또한 밖으로 드러낼때도 일부러 그것을 보편적인 사물에의 비유나 실제적인 것으로 바꾸어 표현했다. -184~5쪽

나 권투 좋아해요, 사각 링에 딱 갇히면 각자 무지하게 외로울거야. 온 세상이 바로 코 앞의 적뿐이니까. -205쪽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거야.
거기 씨팔은 왜 붙여요?
내가 물으면 그는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신나니까... 그냥 말하면 맨숭맨숭하잖아.
고해 같은 세상살이도 오롯이 자기의 것이며 남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257쪽

어쨌든 어디서나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고 가장 힘든 고비가 지나면 나날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껴지기 시작한다. -268쪽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27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금을 안고 튀어라 J 미스터리 클럽 1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권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월
절판


먼저 기타가와의 짧은 선언이 있었다.
"태초에 금괴가 있었느니라. 금괴는 우리와 함께 하리라. 우리의 결속은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르지 금괴로부터 생겨난 것이니라. 다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우리가 가지고 나오는 금괴는 5백 킬로그램. 약 10억 엔어치. 한 사람 당 2억 엔씩이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다. 이상."
요한복음의 앞부분을 흉내 낸 말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선언이었으나 기타가와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다들 주먹을 불끈 쥐었다.
-107쪽

각 항목마다 더 세밀하게 검토해야할 문제들이 있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그런 문제들을 하나씩 정리해가야 한다. 계획이란 착수하기 전에는 늘 기나긴 과정이라 생각되지만 마치고 나면 그런 생각은 금세 잊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고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다. 각자 나름의 문제는 있지만 일단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런 느낌이 드는 첫걸음이었다. 누구나 제멋대로 꿈을 꾸고, 마음껏 상상할 여유가 있는, 아직은 그런 시기였다. -119~2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구판절판


별안간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은 커다란 기계에 있는 하나의 톱니바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기계에서 톱니바퀴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60쪽

자신에게 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는가? 아니다. 법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사건에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그도 조금은 알고 있다. 그것을 보면 법원은 범죄자에게 정당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법원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아쓰야와 마찬가지로 가이지도 미성년자이리라. 에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그 인간쓰레기들이 빼앗은 것은 에마의 인생만이 아니다. 그들은 에마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1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6월
구판절판


사이교(12세기 일본 시인)를 읽는 것도, 사가구치 안고(20세기 초 일본 소설가)를 안 것도 봄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닌 벚꽃의 이미지에 압도당한 나는 벚꽃이 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막상 피고 보니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 로버트 B 파커를 읽고 맥주가 마구 당겨서 마시고 봤더니 자신은 맥주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처음에 마음을 사로잡은 이미지가 너무 근사한 나머지 실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나는 벚꽃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소설 줄거리가 꽤 그럴싸해서 본편을 읽어보니 기대에 못 미친다든지, 잘 만든 예고편이 끌려 영화를 보고 실망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1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장바구니담기


영화는 '특선'되었다고는 하나 별로 틀선된 것 같지 않다. 다른 채널에서 하는 것들 역시 너무 유명해서 이미 오래전에 보았거나, 흥행에 실패한 뒤 헐값에 팔린 영화가 대부분이다. 가끔 케이블 티브이에서 개봉된 지 얼마 안 된 따끈한 영화를 틀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브라운관으로 들어오는 즉시 낡아버렸다. 사내는 별로 재밌지도 않은 영화를 광고까지 끼워 토막토막 잘라 내보내는 케이블 티브이의 방영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무엇을 망가뜨리는 일이었다. 비록 안방이 극장은 아니더라도, 로미오가 독약을 들이켜는 순간 스팀 청소기가 나오고, 가위손이 사랑에 빠진 순간 몸매 교정용 거들이 나오는 것은 야비해 보였다. 사내는 젓가락으로 면발을 둥글게 말아 올리며 '내가 예전에 본 걸 왜 또 보고 있지'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채널을 돌리지 않고 그 장면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100~1쪽

노량진에는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혹 오래 머물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잠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나도, 재수생 언니도, 민식이도, 총무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곳에서의 생활,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나는 거리나 지하철에서 나와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137~8쪽

K-59. 오래전 내 책상 번호. 1999년의 나는 어떤 공간이나 시간이 아닌 번호 속에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때가 내겐 어떤 떳떳한 한 시절로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만큼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때만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때보다- 아는 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14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