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절판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13쪽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31~2쪽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33쪽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38쪽

휘몰이 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부러진다. 사유가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대목마다 문장이 하나씩 들어선다. 이런 문장들은 대체로 짧고 다급하다. 문장은 조바심치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긴다. 휘몰이로 몰고 나가는 문장은 거칠다. 나는 이런 문장을 한없이 쓰지는 못한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리쯤으로 내려앉는다. 중모리 문장은 편안하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는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 또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한 개의 문장을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때, 나는 진양조로 나아간다. -58쪽

나는 고향이라는 어휘가 물고 늘어지는 정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화할 수 없는 비논리성이 그 정한의 바탕을 이루는 듯싶다. 나는 고향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이 좋다. 고향이라든지 타향이라든지 하는 그런 어휘가 아예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95쪽

설 연휴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도심은 교통체증에 막혀 헐떡거리고 있다. 사람들이 명절이면 기어이 돌아가는 그 고향이 아직도 그들의 고향일 것인가. 당신들의 고향은 아늑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인가. 정말로 그러한가. 불타버린 남대문의 잿대미를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영원한 허상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람들아, 설에 고향에 다녀온 사람들아, 불타버린 내 고향의 남대문을 보아라. 그리고 내 고향 서울을 다시는 타향이라고 말하지 마라. 타향 위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하는 한 당신들은 영원히 고아이며 실향민인 것이다. 내 고향 서울에 이제 남대문은 없다. -103~4쪽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끝없이 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짓밟혀가면서 또 끝없이 저항하는 것이죠. 이런 모습들을 소설로 감당해내기에는 저의 역량은 부족합니다. 다만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또 그것을 통해서, 그것과 더불어 인간의 아름다움을 증명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140쪽

이 세상에 언어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시나 소설들도 다 소통을 꿈꾸면서 존재하는 예술입니다.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면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해버리면,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인간 사이의 단절을 심화시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언어적 비극은 듣기(hearing)가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채팅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듣기가 안 되니까, 청각장애인들이 다 모여 있는 거죠. 인간의 언어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입니다. 말하기는 쓰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드러내 보이는 행위죠. 그리고 듣기는 읽기입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말하기와 듣기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148쪽

지금은 채팅만이 있고 듣기가 전혀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혼자서 담에 대고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언어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비극적 것은 의견과 사실을 뒤죽박죽해서 말한다는 것이죠.
신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주변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젊은이들은 자기 주변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힘이 너무 부족해요. 우리 젊은이들은 자기 주변과 세계를 정서적으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세계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던 아이들이 자라면 그 아이는 대개 그 세계를 이념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인간이 되어버리더군요.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언어의 훈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현상이나 사태를 보고 이것은 무엇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제기하고 거기에 대답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왜 이런가, 이것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또 이것이 앞으로 변화함에 따라서 이것과 관련된 여타의 수많은 조건들은 또 어떻게 변하는 것이냐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을~-148~9쪽

모색하는 노력이 세상을 과학적으로 들여다보는 태도이겠지요. 소설을 쓰는 사람도 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걸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세계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혹은 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사태는 내 마음에 드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이 사태는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가, 추한가. 사람을 볼 때는 저자는 내 편인가, 아닌가. 저자는 내 적의 편인가, 아닌가. 저자는 내 편인 것 같지는 않은데, 저자는 내 적의 적이기 때문에 저자는 아마도 나의 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난폭한 망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의 차이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라는 것은 정서를 배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배척된 것이 아니지요. -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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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4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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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아볼 것들을 생각하는 일도 근사하지 않나요? 살아 있다는 게 기쁘게 느껴지거든요.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아요. 우리가 모든 걸 다 안다면 사는 재미가 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러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일도 없겠죠? -35쪽

꿈이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잖아요, 그렇죠? 꿈이 실현되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지금 전 완벽에 가까울 만큼 행복해요. 완벽하게 행복할 순 없거든요. -38쪽

"어머, 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에요. 코딜리어라는 이름이 더 좋을 뿐이죠. 전 제 이름이 코딜리어라고 늘 상상해 왔어요.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은 그랬어요. 어릴 적엔 제럴딘이라고 상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코딜리어가 더 좋아요. 그래도 굳이 앤Ann이라고 부르시려거든 제발 'e'가 붙은 앤Anne으로 불러주세요."
"그렇게 부르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니?"
마릴라가 찻주전자를 들고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머, 많이 달라요. 훨씬 근사하게 보이잖아요. 아주머닌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때, 종이에 인쇄되듯 그 이름이 마음속에 그려지지 않나요? 전 그래요. 앤Ann이란 글자는 정말 끔찍해요. 하지만 'e'가 붙은 앤Anne은 훨씬 품위 있어 보이거든요. 만일 'e'가 붙은 앤으로 불러 주신다면 코딜리어라고 부르지 않아도 참아 볼게요."-53~4쪽

전 단지 제라늄이라 해도 이름이 있는 게 좋아요. 사람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냥 제라늄이라고만 부른다면 제라늄이 섭섭해할지도 모르잖아요? 아주머니도 이름 없이 그냥 여자라고만 불리는 건 싫으실 거예요. 그래요, 전 보니라고 부르겠어요. 오늘 아침 제 방 창에서 보이는 벚나무에게도 이름을 붙여 줬어요. 눈이 부시게 새하얘서 눈의 여왕이라고 지었죠. 물론 항상 꽃이 피어 있진 않겠지만 그렇게 상상할 순 있으니까요, 안 그래요?-71쪽

언젠가 책에서 장미는 장미가 아닌 다른 이름이어도 향기가 좋을 거라는 글을 읽긴 했지만, 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만약 장미가 엉겅퀴나 돼지풀 같은 이름이었다면 그렇게 예쁠 것 같지 않거든요. 아버지 이름이 제데디어라고 해도 여전히 좋은 분이긴 하셨겠지만, 전 무척 괴로웠을 거예요. -78쪽

어머, 어떤 일이든 기대하는 데 그 즐거움의 반이 있는 걸요. 혹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기대하는 동안의 기쁨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거예요. 물론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실망할 일도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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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사이언스 북 - 엉뚱하고 기발한 과학실험 111
레토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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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곧장 묻는다. "도대체 이런 괴상한 실험들을 어디서 찾아냈어요?" 그러나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것들을 찾아내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과학자들에게는 묻지 마시라! 정말이다. 내가 해봤다. 과학자들은 대개 이렇게 대답했다. "내 분야에서는 괴상한 실험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발굴한 괴상한 연구를 들고 찾아가면, 그들은 '초록불인데 왜 안가는거야, 빵빵!'이나 '살짝 스치기만 하면 팁이 팍팍!'같은 실험이 왜 우스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이 '미친 실험의 책'에 실린 대부분의 실험들이 괴상해 보인다는 사실이 그 실험들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비록 일부는 정말로 쓸모가 없다는 걸 부인할 수 없지만). 어떤 것들은 언뜻 어리석고 터무니없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정교하고 '과학적'이다. -12~3쪽

"이 책에 실린 실험들은 정말 미친 것들일까?"
대답은 '야인Jain'이다. '야인'은 영어 예스Yes와 노No에 해당하는 독일어 야Ja와 나인Nein을 합친 말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라는 뜻이다. 독일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꽤 많이 쓴다. 왜? 그럴 일이 많으니까. 우리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말할 일이 드물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말하기가 귀찮아서일 것이다.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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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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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특히 나쁜 일은 발생하고 나면 되짚어지는 게 있다. 그때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싶은 것. 가족들은 왜 다른 때와 달리 아버지 엄마가 둘이서 작은오빠 집에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을 따랐을까. 가족 중 누군가 서울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로 아버지 엄마를 마중나가는 것은 늘 해오던 당연한 일이었는데. 도시에서 어딘가로 이동할 때면 가족들이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하던 아버지는 왜 그때 지하철 탈 생각을 했을까.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막 도착한 지하철을 타려 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지하철을 타고 보니 엄마가 없었다고 했다. 하필이면 번잡한 토요일 오후였다. 엄마는 인파에 떠밀려 아버지 손을 놓쳤고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지하철이 출발해버린 것이다. 엄마의 가방은 아버지가 들고 있었으므로 너의 엄마가 빈손으로 지하철역에 혼자 남았을 때 너는 북페어에서 나와서 천안문광장으로 가고 있었다. -18쪽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25쪽

엄마에게 너란 존재가 딸이 아니라 손님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은 엄마가 네 앞에서 집을 치울 때였다. 어느날부턴가 엄마는 방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걸었고, 식탁에 음식이 떨어지면 얼른 집어냈다. 예고 없이 엄마 집에 갈 때 엄마는 너저분한 마당을, 깨끗하지 못한 이불을 연방 미안해했다. 냉장고를 살피다가 네가 말려도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엘 나갔다. 가족이란 밥을 다 먹은 밥상을 치우지 않고 앞에 둔 채로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관계다. 어질러진 일상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엄마 앞에서 네가 엄마에게 손님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26쪽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가 너의 외삼촌을 두고 오빠!부르며 달려가는 그 순간의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엄마도 네가 오빠들에게 갖는 감정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인간이란 깨달음은 곧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구나,로 전환되었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간혹 너는 실제로는 1936년에 태어났으나 호적에는 1938년으로 기록된 엄마의 유년을, 소녀시절을, 처녀시절을, 신혼이었을 때를, 너를 낳았을 때를 생각해보곤 했다. -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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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구판절판


책을 읽는 이유는 자신의 사회신분을 향상하기 위해서다. 공자처럼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던 이라면, 그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조건으로 개선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애초 남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지키거나 더 확장하기 위해서이다. 하물며 전쟁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던 공자의 시대에도 책읽기가 신분상승의 결정적 요인이었다면, 지식 기반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에야 그 중요성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터다. 자본이 지식을 사서 더 큰 이익을 내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오히려 지식이 자본을 구해 더 큰 이익을 남기는 시대이다. -22쪽

책읽기는 괴롭다. 밥숟갈에 먹을거리를 떠서 입에 넣어 주는 장르가 결코 아니다. 하나, 책읽기는 우리를 자극하고 성장시킨다. 사전을 뒤적여 보게 하고, 다른 책을 참고하게 하며,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더욱이 책은 그것을 읽으며 상상하게 한다. 책은 스스로 완결된 구조를 갖추지 않고 있다. 읽는 이가 책을 덮으며 그 의미를 정의할 때 비로소 완결된다. 괴롭지만, 두루 얻는 게 많은 것이 책읽기다. 그렇다면, 단언할 수 있지 않은가. 책읽기는 선한 것이고, 책 읽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다. -47쪽

책읽기는 마치 여투는 것과 같다. 물 쓰듯 써도 모자랄 판에 아껴서 여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절제해야 하며 내일을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다 셈해 보면, 늘어나는 이자는 얼마나 적던가. 그러나 여투는 것에는 미덕이 있다. 지금 당장 목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성실하게 모아 놓으면 언젠가 큰 힘이 되는 법이다. 책읽기가 이와 같다. 읽자마자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온축되면 절로 큰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그 힘이란,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실력으로 나타나기도 하나, 그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삶의 지혜로 드러난다. -53쪽

거인의 무동을 탄 난쟁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내가 더 많은 것을 보고 훌쩍 정신의 키가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거인의 무동을 탔기 때문이다. 내가 잘난 듯하지만, 알고 보면 남의 것을 바탕으로 했다는 말이다. 고전이란 거인이다. 인류의 지성들이 갈고닦은 사색의 결과물이 하나로 합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타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에 올라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에 기대야 비로소 느끼는 것이 있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전이다. 더욱이 인류의 역사라는 게 사건 자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나 구조 자체가 반복되는 경향이 짙다. 살다 보면 정말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일이 오래전 일어났던 일과 너무 유사하다는 깨달음을 얻근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오래된 지혜다.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토하도록 고민하고 이를 대중과 함께하기 위해 펴낸 책이 바로 고전이다. 오늘 우리가 맞닥트린 난제를 풀 지혜의 열쇠가 고전 속에 있다. -70쪽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고 보면 이해되고 상처가 낫는다는 뜻이다. 고전의 바다에 빠져 보면 알겠지만, 읽어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줄줄이 이해되지 않는 책들이 있다. 그것을 읽었기 때문에 비판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도 있다. 고전을 젖줄로 삼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정신적 성장과 성숙이 어렵겠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쏟아져 나오는 새 책들들에 신물이 나고 반복되는 주제를 새롭게 포장해 내놓은 듯한 느낌이 들 때 고전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갈증 때문에 마셨다 더 지독한 갈증에 빠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만그만한 정신적 높이에 진력이 났을 때 고전을 읽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훌쩍 커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71쪽

책읽기는 기본적으로 혁명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꿈꿀 리 없다. 꿈꿀 권리를 외치지 않는 자가 책을 읽을 리 없다. 나를 바꾸려 책을 읽는다. 애벌레에서 탈피해 나비가 되려 책을 읽는다. 세상을 바꾸려 책을 읽는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책을 읽는다. 그러하길래 책읽기는 불온한 것이다. 지배적인 것, 압도적인 것, 유일한 것, 의심받지 않는 것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딴죽 걸고, 똥침 놓는 것이다.
변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픈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76쪽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책은 읽어야 한다. 상상력을 익히고 키우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그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바로 겪어 보지 않아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신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세계 차원에서 타자를 만들어 낸다. '우리'와 다른 것을 타자로 이름짓고, 그들을 차별한다. 다름 때문에 차별받는 무리는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우리'의 무리 속에 머무는 한, 그 아픔을 짐작할 수 없다. 하나, 우리가 상상하는 동물이라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고로, 책 또는 문학은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귀띔해 왔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일수록 억압받고 탄압받는 이들의 삶을 그렸다. -84~5쪽

책읽기는 여행이어야 한다. 돈 벌려고 여행 떠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것은 출장일 뿐이다. 지친 영혼과 육신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떠난다. 세상살이를 하며 우리는 얼마나 숱한 상처를 받고 남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입히던가. 쉼표가 필요하다. 맑디맑은 샘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지난 삶을 성찰해야 한다. 상처받지 않은 강건한 영혼으로 거듭나기 위해, 상처주지 않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과로와 술에 찌든 육체는 어떻던가. 몸 구석구석에 끼인 곰팡이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저 강렬한 햇빛에 우리의 몸을 말리려 한다. -111쪽

책 많이 읽고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정한 양서가 있다. 어제를 되돌아보고, 오늘을 이해하며, 내일을 비춰 보려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고전이 그러하고, 이른바 양서목록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읽어도 도통 모른다면, 읽다가 질려 버린다면 그것이 좋은 책일 리 없다. 그러니까 나는 두 종류의 양서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 하나는 '사회적 양서'이고(고전이나 양서 목록이 여기에 든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 양서'라 이름 지을 수 있을 터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좋은 책이라 떠벌리더라도 읽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책이 아니다. 나만의 양서가 있으니, 극단으로 말해 그 누구도 감동하지 않았으며 사회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더라도, 오로지 읽은 그 사람만을 사로잡은 책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거듭 말하거니와 주눅 들 필요 없다. 남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책을 읽지 못했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은 덕에 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경험하면, 앞으로 책을 스스로 잘 읽어 나갈 수 있다. (나는 이를 일러 '책의 세례'를 받았노라 표현한다) 그러니 남들이 읽어 보라고 하는 책보다 지금 내 눈높-160~1쪽

눈높이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한다. 어려운 책을 잘 읽어내는 사람은 그 단계를 반드시 거쳤다. -161쪽

책은 묘한 존재이다. 들고만 다녀도 효과를 나타낸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읽은 사람다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강박증도 일으킨다. 그러다 보면 놀랍게도 어려운 책에 겁 없이 도전하게 되고, 거기서 나름의 깨달음도 얻는다. 책은 다산성이다. 하나를 읽으면 끝내 열까지 읽게 한다. 비록 니체의 책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니체 때문에 읽은 책, 이해할 수 있게 된 책이 수두룩하다. 믿노니, 청소년 시절 니체의 책을 들고 다녔던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문인이 되거나 인문학도가 되었으리라. 눈높이보다 어려운 책에 도전해야 비로소 성장하는 법이다. -165쪽

행복한 책읽기에는 함정이 있다. 행복을 느끼는 교양 수준에 우리를 가두어 버릴 수도 있어서다. 그것은 마치 양수에 둘러싸인 태아와 같다.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하나, 궁극에는 박차고 나와야 마땅한 것이다. 나는 '각주의 책읽기'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행복한 책읽기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단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애들러의 말대로 하자면 "더 적게 이해하는 상태에서 더 많이 이해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고양하는 것"이며,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크의 책읽기'다. 책읽기가 행복하다는 표현은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책읽기는 고통이다. 하나, 고통 없이 우리가 어찌 성장할 수 있는가, 라고. 새로워지고 높아지니 비로소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다. 과정은 고통이나 그 결과는 행복한 것이 책읽기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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