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이유는 자신의 사회신분을 향상하기 위해서다. 공자처럼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던 이라면, 그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조건으로 개선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애초 남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지키거나 더 확장하기 위해서이다. 하물며 전쟁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던 공자의 시대에도 책읽기가 신분상승의 결정적 요인이었다면, 지식 기반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에야 그 중요성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터다. 자본이 지식을 사서 더 큰 이익을 내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오히려 지식이 자본을 구해 더 큰 이익을 남기는 시대이다. -22쪽
책읽기는 괴롭다. 밥숟갈에 먹을거리를 떠서 입에 넣어 주는 장르가 결코 아니다. 하나, 책읽기는 우리를 자극하고 성장시킨다. 사전을 뒤적여 보게 하고, 다른 책을 참고하게 하며,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더욱이 책은 그것을 읽으며 상상하게 한다. 책은 스스로 완결된 구조를 갖추지 않고 있다. 읽는 이가 책을 덮으며 그 의미를 정의할 때 비로소 완결된다. 괴롭지만, 두루 얻는 게 많은 것이 책읽기다. 그렇다면, 단언할 수 있지 않은가. 책읽기는 선한 것이고, 책 읽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다. -47쪽
책읽기는 마치 여투는 것과 같다. 물 쓰듯 써도 모자랄 판에 아껴서 여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절제해야 하며 내일을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다 셈해 보면, 늘어나는 이자는 얼마나 적던가. 그러나 여투는 것에는 미덕이 있다. 지금 당장 목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성실하게 모아 놓으면 언젠가 큰 힘이 되는 법이다. 책읽기가 이와 같다. 읽자마자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온축되면 절로 큰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그 힘이란,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실력으로 나타나기도 하나, 그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삶의 지혜로 드러난다. -53쪽
거인의 무동을 탄 난쟁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내가 더 많은 것을 보고 훌쩍 정신의 키가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거인의 무동을 탔기 때문이다. 내가 잘난 듯하지만, 알고 보면 남의 것을 바탕으로 했다는 말이다. 고전이란 거인이다. 인류의 지성들이 갈고닦은 사색의 결과물이 하나로 합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타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에 올라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에 기대야 비로소 느끼는 것이 있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전이다. 더욱이 인류의 역사라는 게 사건 자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나 구조 자체가 반복되는 경향이 짙다. 살다 보면 정말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일이 오래전 일어났던 일과 너무 유사하다는 깨달음을 얻근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오래된 지혜다.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토하도록 고민하고 이를 대중과 함께하기 위해 펴낸 책이 바로 고전이다. 오늘 우리가 맞닥트린 난제를 풀 지혜의 열쇠가 고전 속에 있다. -70쪽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고 보면 이해되고 상처가 낫는다는 뜻이다. 고전의 바다에 빠져 보면 알겠지만, 읽어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줄줄이 이해되지 않는 책들이 있다. 그것을 읽었기 때문에 비판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도 있다. 고전을 젖줄로 삼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정신적 성장과 성숙이 어렵겠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쏟아져 나오는 새 책들들에 신물이 나고 반복되는 주제를 새롭게 포장해 내놓은 듯한 느낌이 들 때 고전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갈증 때문에 마셨다 더 지독한 갈증에 빠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만그만한 정신적 높이에 진력이 났을 때 고전을 읽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훌쩍 커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71쪽
책읽기는 기본적으로 혁명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꿈꿀 리 없다. 꿈꿀 권리를 외치지 않는 자가 책을 읽을 리 없다. 나를 바꾸려 책을 읽는다. 애벌레에서 탈피해 나비가 되려 책을 읽는다. 세상을 바꾸려 책을 읽는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책을 읽는다. 그러하길래 책읽기는 불온한 것이다. 지배적인 것, 압도적인 것, 유일한 것, 의심받지 않는 것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딴죽 걸고, 똥침 놓는 것이다. 변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픈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76쪽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책은 읽어야 한다. 상상력을 익히고 키우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그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바로 겪어 보지 않아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신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세계 차원에서 타자를 만들어 낸다. '우리'와 다른 것을 타자로 이름짓고, 그들을 차별한다. 다름 때문에 차별받는 무리는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 '우리'의 무리 속에 머무는 한, 그 아픔을 짐작할 수 없다. 하나, 우리가 상상하는 동물이라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고로, 책 또는 문학은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귀띔해 왔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일수록 억압받고 탄압받는 이들의 삶을 그렸다. -84~5쪽
책읽기는 여행이어야 한다. 돈 벌려고 여행 떠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것은 출장일 뿐이다. 지친 영혼과 육신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떠난다. 세상살이를 하며 우리는 얼마나 숱한 상처를 받고 남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입히던가. 쉼표가 필요하다. 맑디맑은 샘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지난 삶을 성찰해야 한다. 상처받지 않은 강건한 영혼으로 거듭나기 위해, 상처주지 않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과로와 술에 찌든 육체는 어떻던가. 몸 구석구석에 끼인 곰팡이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저 강렬한 햇빛에 우리의 몸을 말리려 한다. -111쪽
책 많이 읽고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정한 양서가 있다. 어제를 되돌아보고, 오늘을 이해하며, 내일을 비춰 보려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고전이 그러하고, 이른바 양서목록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읽어도 도통 모른다면, 읽다가 질려 버린다면 그것이 좋은 책일 리 없다. 그러니까 나는 두 종류의 양서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 하나는 '사회적 양서'이고(고전이나 양서 목록이 여기에 든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 양서'라 이름 지을 수 있을 터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좋은 책이라 떠벌리더라도 읽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책이 아니다. 나만의 양서가 있으니, 극단으로 말해 그 누구도 감동하지 않았으며 사회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더라도, 오로지 읽은 그 사람만을 사로잡은 책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거듭 말하거니와 주눅 들 필요 없다. 남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책을 읽지 못했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은 덕에 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경험하면, 앞으로 책을 스스로 잘 읽어 나갈 수 있다. (나는 이를 일러 '책의 세례'를 받았노라 표현한다) 그러니 남들이 읽어 보라고 하는 책보다 지금 내 눈높-160~1쪽
눈높이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한다. 어려운 책을 잘 읽어내는 사람은 그 단계를 반드시 거쳤다. -161쪽
책은 묘한 존재이다. 들고만 다녀도 효과를 나타낸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읽은 사람다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강박증도 일으킨다. 그러다 보면 놀랍게도 어려운 책에 겁 없이 도전하게 되고, 거기서 나름의 깨달음도 얻는다. 책은 다산성이다. 하나를 읽으면 끝내 열까지 읽게 한다. 비록 니체의 책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니체 때문에 읽은 책, 이해할 수 있게 된 책이 수두룩하다. 믿노니, 청소년 시절 니체의 책을 들고 다녔던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문인이 되거나 인문학도가 되었으리라. 눈높이보다 어려운 책에 도전해야 비로소 성장하는 법이다. -165쪽
행복한 책읽기에는 함정이 있다. 행복을 느끼는 교양 수준에 우리를 가두어 버릴 수도 있어서다. 그것은 마치 양수에 둘러싸인 태아와 같다.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하나, 궁극에는 박차고 나와야 마땅한 것이다. 나는 '각주의 책읽기'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행복한 책읽기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단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애들러의 말대로 하자면 "더 적게 이해하는 상태에서 더 많이 이해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고양하는 것"이며,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크의 책읽기'다. 책읽기가 행복하다는 표현은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책읽기는 고통이다. 하나, 고통 없이 우리가 어찌 성장할 수 있는가, 라고. 새로워지고 높아지니 비로소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다. 과정은 고통이나 그 결과는 행복한 것이 책읽기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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