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순간
빌 밸린저 지음, 이다혜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0월
품절


지구가 정지하고 영원함이 호흡을 멈추는 한순간. 일 초가 평생처럼 느껴지는, 이 세상에서 오롯이 당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나긴 시간. -5쪽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은 뒤 내 인생을 스쳐간 사람들은 이제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작별 인사를 할 때가 되니 힐에 대해서는 감정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기이할 정도로 관대했던 건 사실이다. 이 세계와 인간들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현재의 단편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세계를 날마다 스쳐가는 그림자였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수많응ㄴ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존재다. 선이든 악이든 결국 과거의 산물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는 현재가 없다.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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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구하기 - 개정판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절판


"의사소통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생기지. 그게 바로 내가 요즘 겪고 있는 문제라네. 현대 경제학자들은 내 말을 들을 때조차도 이해는 못하고 있다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아까 그러니까, 심지와 밀랍.... 뭐라고 하셨죠? 경제학자들이 사회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는 바가 대체 뭡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강조하려는 듯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사람들끼리의 상호작용이 사회를 구성하는 중추적인 힘이 되고, '모종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도덕적 행동의 기초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얘기야."-42쪽

"시장은 절대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어. 사람들과 공존하며, 바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지. 시장의 힘이 비인간적이라고 해서 사람들까지 비인간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거야!"
"무슨 의미죠?"
"넓게 보면 감정이 중요하다는 말일세. 시장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사람인 나까지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뜻이지."-43쪽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는 능력, 온갖 편의와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빈부를 판단하지. 하지만 그건 결코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없어. -52쪽

행복이란 평온함 가운데 존재한다. 건강하고, 남에게 갚아야 할 빚도 없으며, 명석한 의식을 소유한 자가 지닌 행복에 그 무엇을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부의 증대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오두막이 아니라 호화로운 저택에 살면 응당 속도 편안하고 잠도 달게 잘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와 반대인 경우가 너무도 분명하고, 빈번하게 발생한다. -60쪽

어떤 제도가 존속하는 것은 그것이 무리 없이 돌아가거나, 혹은 성공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 아니야. 제도란 그 사회의 상황을 비추는 거울이며, 그 근저에 있는 도덕적 지지가 바탕이 되어야 존속하는 것이니까. 미국은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원칙에 의거해 현재 구도를 갖췄다고 생각들 하지만, 그 역시 국가의 정신이 '덕'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둘 다 18세기, 그러니까 통치자들이 계몽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있던 시기에 성장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야. 계몽주의에 있어 '개인'이라는 개념은 상호 권리, 책임, 의무라는 층위를 갖고 있어. 다시 말해, 도덕적 가르침을 통해 개인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이 사회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단 얘기야. 도덕적 규칙에 대해 경외심을 갖지 않는 사회는 결국 몰락하고 말 거야. -78쪽

시장을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인간 본성이야. 그것이 자비심 및 정의와 균형을 이뤄야만 시민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고. 하지만 행동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무시된다면 어떻게 되겠나? 탐욕만이 넘쳐난다면 사람들이 자유시장이라는 체제를 변함없이 지지할까? 비인간적인 논리와 합리성을, 옳지 못한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79쪽

억압의 강도를 높인다고 억압으로 인해 생겨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야. 해결책은 바로 경쟁이니까! 경제가 성장하면 임금은 자연히 오르는 법이고, 그 경제성장을 촉진시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교역 본능이지. 물론 그러한 자유가 주어질 때의 얘기지만... 자유거래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대안적 공간을 획득하게 된다네. 그리고 그러한 선택권을 가진 노동자들이야말로 오만한 지주들을 없애는 데 한몫 할 수 있는 거야.
자고로 도덕이란,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네. 사람들의 내면에서 계발되고 함양되어야 하는 거지. -84쪽

자신의 판단을 선악을 구분 짓는 최고의 기준으로 삼는 독재자의 오만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마련이야. 그 결과 사회는 극도로 비참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어. -85쪽

"사람들은 어떤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므로, 궁극적으로 도덕적 행동이냐 부도덕한 행동이냐를 결정하는 것도 사람들의 감정이라네. 여기서 감정이란, 반드시 그것을 일게 한 동기에 초점을 맞춰 이해해야 해."
"실제로, 자기애와 탐욕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자신의 욕구(needs)를 충족시키고 안정감을 얻기 위해, 그러면서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분별력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 그게 바로 자기애야. 경제적인 문제를 등한시하는 사람을 도덕적이라고 판단하는 건 잘못이야. 누구든지,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의 관심과 목적에 먼저 무게중심을 두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네."
"그게 이기적인 것 아닙니까?"
"결코 그렇지 않아. 이기심이란, 자신의 욕구가 타인의 합법적인 권리와 상충될 때 자기 본위대로, 자기 욕구에만 집착해 행동하는 것을 뜻하니까."
-89쪽

"부를 창출하는 방법이란 아무도 모르는 비밀 같은 게 아니야.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필요한 기술이나 손재주, 판단력 등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그렇다면 사회 차원에서는 어떨까? 루마니아 출신의 가난한 이주민, 그러니까 내가 점유한 이 해럴드라는 친구는 자신의 생산력을 어떻게 높였을까, 응?"
"바로 교역을 통해서야! 인간은 누구나 교역 본능을 갖고 있다네. 자신이 가진 거을 다른 사람과 교환하려는 성향 말이야. 그러면 자연히 전문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사람 개개인의 타고난 재능의 격차는 그리 큰 게 아니야. 기질과 습관, 교육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다는 얘기지. 헤럴드라는 친구는 디젤 엔진 만지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거고, 적어도 최근 들어 몸이 아프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전문가가 된 거지. 이것저것 다 하는 만능선수보다는 한 가지 능력이 뛰어난 전문가가 훨씬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법이지. 그게 바로 분업으로 인해 생산성이 단순히 조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배 향상되는 이유일세!"
-105쪽

훌륭한 정치는 경제적 개선까지 일으키기도 하는 법이지. -113쪽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사람들이 내 사상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의 창출은 단순히 시장이 돌아가게 유지하는 걸 넘어서는, 훨씬 복합적인 과정이라네. 무역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회가 개개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확실하게 보장해 줘야 해.
항상 타인에게 해만 끼치려고 하는 사람들만 넘쳐나는 사회는 절대 존속될 수 없어. 정부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개인이 다른 이의 권리를 마음대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야. 다시 말해, 약자를 보호하고, 폭력을 억제하며, 범죄 행위를 응징하는 일이지.
정의야말로 사회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든든히 떠받치는 대들보라네. 사회가 혼탁해져 그 대들보가 약해지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인간 사회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질 수밖에 없어. -116~7쪽

"인간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 언제 진정으로 행복한가를 모르기 때문이라네. 어느 순간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할 상황인지 모르기 때문이야." 그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영국 시인 존 밀턴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나? '마음은 그 자신의 터전이니, 그 안에 스스로 천국을 만들 수도 지옥을 만들 수도 있다'라고 했지."-142쪽

부를 마다 할 사람은 없지. 하지만 분별이나 정의의 법을 깨뜨리고, 마음의 평온함까지 망가뜨리는 무모한 열정을 가지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표는 아니라는 얘기지. 부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이들만 존재할 테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최대'를 소유하지 않는 한 '가진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구! 우월감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부자들의 만족감은 마음의 온전한 평온과 양립하기 힘들지.
이제 두 번째 요점으로 넘어가지. 부의 증가가 인간을 커다란 만족감으로 몰아넣는 건 극히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곧 거기에 적응해서 익숙해져 버리니까. 행복은 이전 수준, 이것을 나는 자연스런 수준이라고 말하고 싶네. 그러니까 지금 수준보다 한 단계 이전 수준에 의존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지. 마치 진자가 균형을 찾기 위해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처럼 말일세. 부와 권세는 한겨울의 폭풍을 막아주는 게 아니라, 여름의 소나기 정도나 막아주는 것일 뿐이야. 부와 권세는 커지면 커질수록 늘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근심과 두려움, 슬픔, 위험, 죽음 등을 일으키는 법이지. -147쪽

하지만 이런 '자연스런' 질서는 자리 잡기 힘든 법이다. 밖에서 보기에 혼란스런 시장은 모순적이고 심지어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수요가 폭발하면 가격이 급상승하다가, 다음날 새로운 유정을 발견하거나 석유 추출 기술에 변화가 생기면 가격은 곤두박질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명백한 혼란 때문에 정부는 붕괴된 것 같은 체제를 '고치기 위해' 개입하게 된다. 정부가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고치는'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자기규제되는 시장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보이지 않는 손'처럼 중앙의 통제나 계획 없이도 더 많은 이윤을 내는 분야로 자원을 이끄는 시장을 말한다. 자연스럽게 결정된 가격이나 임금, 이윤에 개입하려고 하면 일반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이 결론은 두 가지 중대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첫째는 경쟁시장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오염과 같은 외적 영향이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165~6쪽

스미스가 말하는 '자연스런' 질서는 매머드 원유 회사를 비롯한 석유 생산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다. 장기간의 경쟁으로 인해 이윤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매머드사가 다시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품의 질을 향상시키거나(더 나은 석유 첨가제를 개발해야 한다) 더 적은 비용이 드는 석유 공정법이나 영업 전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미스 이론의 강점이다. 계속해서 꾸준히 이윤을 추구하다 보면 끊임없는 혁신과 기업 변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업체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쇄신해야 한다.
하지만 혁신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그래서 매머드사로서는 감소하는 이윤을 회복시키기 위해 교묘한 계략을 쓰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다. 바로 경쟁을 제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성공한다면 석유의 유입을 감소시켜 소비자 가격을 높일 수 있고 매머드사는 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 있다.-166쪽

결과적으로 일부 국가에서는 진정한 경쟁이 빠진 자본주의가 생겨났다. 권력자들과 재계에 몸담고 있는 그들의 친구들이 손을 잡고 '패거리 자본주의(연고 자본주의)'를 만들어 냈다. 이런 체제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더욱 막강한 정치적 힘을 지니게 되므로 부패한 현실을 개혁하기란 더욱 힘들어 진다. 빈곤층과 학대 받는 계층은 당연히 자본주의는 음모, 착취, 뒷거래라고 생각하게 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계층에서는 정치적 억압을 서슴지 않는다. 경제학을 제대로 모르고 일부분만을 받아들인 사람은 진정한 경쟁 시장에서 이윤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7쪽

"저 사람과의 동감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나요?"
"그가 되어 봐야지." 스미스가 말했다. "진짜로 그가 될 순 없기 때문에 투영을 통해야 해. 질문을 해 보세. '그의 입장에 처하면 어떤 기분일까?' 이건 상상이라는 능동적인 작업이고 동감을 가능하게 하지. 상상은 진정한 인간이 되라고 내려준 조물주의 선물과 같다네."
스미스는 파도를 유심히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건 미묘하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네. 타인과의 동감이란 내 느낌이 적절하다고 타인이 인정해 주는 거야."-236~7쪽

일단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게 되면 나는 감정과 행동을 의식하게 되지. 감정이나 행동이 실제로 적절한지 보기 위해서 그것을 주시하게 된다는 말이네. 그리고 타인이 나를 보는 것처럼 내 자신을 보려고 노력한다네. 나는 이 연극에서 배우일 뿐 아니라 '공정한 관객'이 되는 거야."
잠시 멈춘 뒤 다시 말했다. "공정한 관개의 관점은 양심을 창조하는 데 매우 중요해.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보면, 내가 자신에게는 '중심인물'일 수 있지만 나의 진심을 공유하지 못하는 타인에게는 '중심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네. 더구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건, 우리는 타인이 던지는 외부적인 찬사를 얻으려고 한다는 거야. 그렇지. 마지막으로 놓쳐서는 안 될 요소가 있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이지. 잘 들어봐.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찬사에 부응하려고 한다네. 말하자면 칭찬받기에 마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고."-237~8쪽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가 인정되고 보상받을 때 열심히 일합니다. 스톡옵션은 중요하죠. 하지만 그게 다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중대한 걸 놓치는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보면서 자신의 진가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거죠. 그건 바로 기업의 목표에 자신의 가장 큰 포부를 쏟아 부을 가치가 있을 때를 말해요.
마음 깊은 곳에 감동 받을 때 더 열심히 일합니다. 자신보다 더 큰 꿈을 갖게 만들면 됩니다. 그러면 창의성이 활개를 펴고 머리와 가슴은 하나로 통합되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기업은 완전한 한 인간으로서의 직원의 포부를 담는 매개체인 셈이죠. -249~50쪽

스미스는 시장이 일반적으로 자립적이고 자기 수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시장의 이윤 쟁탈전은 이번 경우에는 성립될 수 없었다. 재산권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양계처럼 복잡한 생태계에서 재산권을 할당하려고 하다가는 엄청난 거래 비용만 떠안게 된다. 따라서 이번 경우에 있어서 시장은 외부 규칙이 없으면 자연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 한 가지 교훈을 깨달았다. 해달을 그것이 속해 있는 환경과 따로 떼어 이윤을 내기 위한 단순한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비슷하게 경제학자들이 경제 발전은 뒤로 한 채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이유는 시장에 작용하고 있는 복합적인 법적, 사회적 환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도 뜻밖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까? 뭔가를 조립할 때는 일단 부속품이 다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시장과 제도적 조직, 사회적 가치가 모두 얽혀 있는 통합 체제다. 비인격적인 시장을 다루는 수학적인 모델을 가지고는 그 복합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255~6쪽

교체할 수 있는 톱니바퀴 부속품처럼 직원들을 고용하고 해고하는 그런 구태의연한 방식은 근로 의욕을 땅에 떨어뜨리기 마련입니다. 두려움이 동기 자극제가 되긴 하겠죠. 직원들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모험하려 하지 않고 너무 움츠리기만 해서 쇄신이나 협력을 피하게 됩니다. 결국 아첨꾼이나 관료주의자, 또는 생각 없이 동의만 하는 그런 사람들로 기업 문화는 질식해 버릴 겁니다. -261쪽

경제학은 하나의 지침이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희소성에 대해, 그리고 희소성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유용한 교훈을 조명해준다. '경제적 사고방식'은 학생과 정치인이 공통적으로 여러 주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때로는 부조리하고 심지어 부정확한 적도 많았던 선입견을 깨뜨려준다. 내가 선택한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제안한 강한 통찰력 덕분에 이 세상은 더 부유해지고 우리의 선택은 더욱 분명해진다는 데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스미스는 그 지침이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느냐는 의문을 내게 제기했다. 현대 경제 이론은 논리적인 정확함을 뽐내고 있지만 사회적, 도덕적인 면에서 인간의 상호연계성까지 다루고 있을까? 상호연계성을 모르고도 진정한 이해가 가능할까? 더구나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적 변화나 쇄신을 위해 개인적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또한 타인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라고 권하지도 않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인정해 주지도 않는다.
반대로 스미스의 고전적인 견해는 더 큰 물질적 안락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스미스는 물질적 편안함이 행복을 가져다줄디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는다-278~9쪽

사람들 대다수의 행복은 내면의 성장과 변화에서,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도덕적 상상력을 통해 성취되는 타인과의 더 나은 관계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소유가 아닌 존재가 해답이다. 이 메시지가 가지는 변화의 능력은 그야말로 엄청나지만 가기에 쉬운 길은 아니다.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생활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79쪽

잘 듣게. 자신의 재산이나 명성을 위한 분별력은 결코 귀하거나 고상한 덕성이라 할 수 없다네. 그런 편협한 분별력 덕분에 부자는 될 수 있겠지만 진리와 정의는 부유함을 기뻐하지 않아.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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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밥벌이 - 어느 소심한 카피라이터의 홍대 카페 창업기
조한웅 지음 / 마음산책 / 2008년 3월
품절


왜 남자 나이 서른 중반이 되면 창업이 하고 싶어질까? 군대를 안 가도 되는 남자라면 시기가 조금 당겨질 수도 있지만 대개 서른 중반의 남자들은 본업이든 부업이든 창업을 꿈꾼다. 키키봉이 생각해보니 일견 당연해 보이는 현상 같기도 하다. 보통의 경우 4년제 대학을 나오면 스물일곱에서 늦게는 스물아홉에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 미래는 말 그대로 찬란한 무지개다. 눈동자는 또렷하고 에너지는 충만해 열심히 일을 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그런 날들을 지나 소위 대리급을 넘기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 이상의 높은 직급이 가까운 미래의 자신일 텐데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분야에 숙련되다 보니 일을 더 빨리 처리하지만 남는 여유는 온통 꿍꿍이로 채운다. 돈을 더 벌거나 인생을 더 즐기고 싶은 궁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출퇴근의 반복 속에 야근을 곁들이면 일상탈출의 꾀가 시작되고 폼 나는 인생을 위해 '창업이나 해볼까'병에 걸리게 되는 거이다. -26쪽

창업은 나이 먹기 전에 저질러야 한다. 현실감 없이 나이 든 후에 한다면 로망은 변질되어 노망이 된다. 로망을 로망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카페를 인수해야 한다. 바로 지금! -39쪽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한다. 무릇 춤 잘 추는 가수라고 하면 노래는 기본 춤까지 잘 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가수가 노래를 잘하는 것은 장점이 아닌 기본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가수가 많은 것 또한 현실이다. 갈수록 경쟁은 심해지고 튀어야 살아남는 세상에 기본을 망각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가수가 노래를 잘해야 하듯 카페는 당연히 커피 맛이 좋아야 한다. 카페의 컨셉도, 인테리어도 모두 커피 맛이 좋고 난 이후에 신경 써야 할 문제다. 키키봉이 커피 맛에 대해 알지는 못해도 홍대의 카페들이 모두 커피 맛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 세상에 기본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경쟁력일지도 모른다.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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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9-01-1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을 지키지 않는 세상에 기본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경쟁력일지도 모른다-저도 밑줄 긋고 싶은 말이네요.^^

이매지 2009-01-12 11:42   좋아요 0 | URL
기본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거겠죠? ^^
 
편집이란 어떤 일인가 - 기획의 발상부터 인간관계까지
와시오 켄야 지음, 김성민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5년 2월
품절


우선 편집자는 플래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안자다. 플랜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아이디어에 따라 베스트셀러도 나올 수 있고 스테디셀러나 명저도 나올 수 있다. 편집자는 그 탄생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 출판계에는 감나무 밑에 세 명은 누워 있다는 말이 있다.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편집자는 모방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물론 표절은 안 된다. 아이디어란 모방의 변형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18~9쪽

대형 서점에는 POS 시스템이 도입됐다.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읽어 하루의 매출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서점에서는 빨리 팔리지 않는 책을 꺼리게 됐고 서점의 서가는 잡지 중심, 코믹 편중의 상품 구성으로 흘러가고 있다. 모름지기 책의 생명은 다양성인데 독자들은 다양한 책을 만날 기회가 줄고 있는 셈이다.
뒤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책은 한 종 한 종의 내용이 제각기 다른 상품이다. 한 권의 책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지만,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무거운 물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후자는 읽고 싶지도 않은 책을 선물로 받아본들 기쁠 리 없다. -48쪽

알다시피 서점의 서가에는 질릴 정도로 별의별 책이 진열되어 있다. 고시점은 더더욱 놀라게 한다. 이 이상 무슨 책이 더 필요하냐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무한한다.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고 풀어 밝히고 싶어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말밖에 없다.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문자와 언어를 능가하는 것을 여태껏 보지 못했다. 언어의 동물인 인간에게 활자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없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64쪽

기획에는 제한이 없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없다. 책이라는 형태를 띠고 독자들이 사서 읽어주기만 하면 뭐든 괜찮다. 나는 늘 기획을 삼각형이라 생각한다. 각 꼭지점은 가치(임팩트), 판매 부수(채산성), 실현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73쪽

거듭 말하지만 책에는 범용성이란 없다. 처음부터 한정되어 있다. 누구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정하기는 책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제나 대상 독자 등을 좁힘으로써 읽는 이의 욕망을 책으로 직격할 수 있다. (중략)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기획하는 사람이 독자의 처지에 설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나란 존재를 잊고 독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제도로 만들지 못하면 '한정'이란 어렵다. 바꿔 말하면 다수를 노리는 게 아니라 확실한 대상에게 미끼를 던지라는 뜻이다. -85~6쪽

편집자에게 헛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단련하고 있다는 증거다. 흔히 경주마를 평할 때 피부가 얇다는 표현을 쓴다. 예민하여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다는 뜻이다. 편집자도 피부가 얇아야 한다. 늘 감성을 갈고닦아야 한다. 예민한 촉각을 지니려면 공부하는 자세는 필수다. 확인하는 의미에서 덧붙이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정삼각형이 큰 책을 편집하기 위한 공부다. -99쪽

그런데 가끔 한 권의 책으로는 훌륭한 장정이라도 서점 매장에 진열되면 다른 책에 묻히는 책이 있다. 반대로 단독으로 보면 특별할 게 없는데 매장에서 독자의 눈을 끄는 장정도 있다. 무엇보다 책은 손에 들고 읽게 만들어야 의미가 있다. 장식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정은 실용품이다. 일부 예술성에 너무 치우치거나 장식만 지나친 장정을 본다. 내용은 별것 아니면서 외양만 멋들어지게 꾸민 책도 있다. 낯뜨거운 일이다. 편집자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창피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장정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내용이 나쁘면 책은 가치를 잃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157~8쪽

선전 문구에는 편집자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원칙 같은 것이 있다. 우선 집필자인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띠지만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본문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광고문구이므로 독자의 눈길을 끌어야 한다. 그 중에는 독선적이고 잘난 척하는 자기만족형 띠지도 있다. 띠지 문구로 문학을 할 셈인지. 어디까지나 책을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띠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요컨대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짧은 문장이 바람직하다. 간결하면서 이해하기 쉽고 강하게. 요점을 명료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띠지는 책상 위에서 뜻을 음미하며 읽는 것이 아니므로 서점 매장에서만 제 구실을 하면 된다. 게다가 감각 있는 띠지 문구라는 인상을 주면 더할 나위 없다. -167~8쪽

거의 모든 신문에 서평란이 있다. 다른 미디어의 소개란에 비하면 상당한 공간이 할애되고 있다. 책의 사회적 역할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광고가 충분하지 못하다 싶으면 어느 편집자든 신문 서평란에 실리기를 바란다. 특히 책은 안목 있는 서평자의 의견이 큰 구실을 한다. 범용성이 없는 대신 특정 영역에 절대적인 후각을 지닌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런 신뢰할 만한 서평자의 안내로 독서의 재미에 눈을 뜨는 사람도 많다. -184쪽

편집자는 하드디스크 같은 존재다. 외부에 얼마나 풍부하고 우수한 소프트를 갖고 있느냐가 편집자의 가치를 결정한다. 개인의 능력이란 뻔하기 때문이다. 저자라는 탁월한 소프트와 관계를 한 번의일로 끝내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알았을 것이다. (중략)
내가 젊은 편집자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점點'이 아니라 '면面'의 교제를 하라는 것이다. 저자와 편집자는 원고를 쓰고 받는 '점'의 교제에서 출판한다. 그런데 5장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집핀을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다. '점'의 교제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다양한 '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생겨나고 나아가서 진정한 인간관계가 싹튼다. -191쪽

편집자를 촉매라고도 한다. 편집자가 저자의 재능을 꽃피운다는 의미로 편집자의 사명이요 기쁨이다. 그리고 촉매에는 다른 의미도 있다. 편집자가 자신의 존재를 통해 다양한 인간을 관계 짓는다는 의미다. 이 또한 중요한 구실이 아닐 수 없다. -199쪽

책의 용도도 다양하며 모호하다. 필요 없는 부분도 많다. 속도경쟁 시대인 현대에 다른 미디어에 비해 뒤처져 보이는 것은 정보량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책은 언뜻 보기에 필요 없어 보이는 부분, 쓸모없는 부분에 존재가치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오감과 비슷하다. 우리는 외계의 일체를 보고 감응한다. 이건 좋은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외계에 둘러싸여 있다. 처음부터 필요 없는 소리, 필요 없는 풍경, 필요 없는 냄새라고 없애버리면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당장은 필요 없을지라도 어쩌면 나중에 가서 큰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꺾는 수가 있다. 단기적인 목적에 맞춰 만들어진 소리, 풍경, 냄새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허무한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러면서도 사회는 그런 공리적, 효율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201쪽

지금 일본의 출판문화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기능이 분화되고 개별화될지언정 편집이라는 기능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출판사를 중심으로 하는 출판 구조는 분명히 바뀔 것이라는 점은 예상해두는 편이 좋다. 그로 인해 오히려 의외의 기회를 낳을지도 모른다. 이 책 첫 머리에도 썼지만 창업한 지 60년 이상 된 출판사는 10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출판계는 변동이 심하다. 상황에 적응할 줄 아는 합리성을 지닌 출판사만 살아남는다. 코믹의 매출 저조로 시작된 이 변화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할지도 모른다. -213쪽

인터넷이라는 한정되면서 폐쇄적인 도구가 오히려 살아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책은 불특정 다수와 불특정 다수를 잇는 역할을 한다. 책을 매개로 화제가 전개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도구로서의 책의 특성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편집자도 출판사도 서점도 그동안 너무 무관심하였다. 좋은 책은 독자들이 알아서 읽게 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냥 놔두어도 서점을 또 찾는 사람이 있다고 낙관했다. 그러나 다른 미디어의 발전과 새로운 자극 때문에 사실은 서점을 찾는 발길이 줄어드는 실정이다. 독서는 습관성 요소도 강하다. 한번 발길이 뜸해지면 귀찮아진다. 그 결과 출판사와 편집자는 독자의 읽는 힘이 저하하였다고 탄식한다.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다. -215쪽

편집자마저 자신의 껍질에 틀어박혀서는 안 된다. 저자에게 정열을 다하듯 독자에게도 정열을 쏟아야 한다. 독자에 대한 참견이야말로 편집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세라 생각한다. 물론 출판사 전체에 요청되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만큼 출판계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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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구판절판


가는 길에 나는 마지막으로 부왕의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일찍이 천하를 쥐고 흔들었던 부왕, 용맹하고 오만하고 대범하고 여색을 밝혔던 부왕. 그가 이제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처럼 관 속에 누워 있었다. 나는 죽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부왕이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었고,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처럼 거대한 관 속에 누워 있었다. -17쪽

제왕의 생애란 그렇듯 하잘것없는 말들을 견디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가운데 흘러가는 거라고. -21쪽

"그대는 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도무지 각공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섭왕인데, 왜 내가 모든 것을 참아야만 한단 말인가? 사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없앨 권리가 있었다. 오동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한밤중의 울음소리까지도. -24~5쪽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연랑을 끌어내리다시피 말에서 내리게 했고, 어서 금관과 용포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금관과 용포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를 깨달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옷 바꾸기 놀이를 통해 나는 내가 그 제왕의 표지에 얼마나 많은 미련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짚더미 위에 엎드려 연랑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의 당혹스럽고 우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내 섭왕의 표지가 다른 사람의 몸에도 잘 어울리며, 심지어 더욱 위풍당당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관의 누런 옷을 입고 있으면 나는 어린 내시에 불과했다. 금관과 용포를 걸치고 있어야만 비로소 제왕이었다. 그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98쪽

나와 팽씨의 혼인은 이 위태로운 바둑판의 포석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동안 나는 국난에 직면한 여느 국왕들과 다름없이 초조하고 불안한 심사를 끌어안고 번심전에 나가 문무백관이 벌이는 날카로운 논쟁을 지켜보며 아무 대책 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무능하여 허울밖에 남지 않은 제왕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모든 것은 황보부인, 맹부인, 승상 풍오의 결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래서 나는 입이 붙은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146쪽

나의 위축되고 비관적인 감정 상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당당한 섭왕이 이 비상시국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앉아 있을 뿐이라는 데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146쪽

혼례식 전날 밤, 나는 기이한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 나는 꿈에 새처럼 궁궐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궁궐의 열여덟 개의 문이 순식간에 내 뒤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꿈속에서 흰 빛이 흐릿하게 반짝이는 공터를 보았다. 역시 흐릿하여 까만 점으로만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터 주위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광대패의 줄타기 줄이 내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하나의 목소리가 하늘 위를 맴돌며 끊임없이 울렸다. 줄을 잡아라, 올라가라, 줄을 타라, 올라가라, 줄을 타라. 나는 줄을 잡았다. 꿈속에서 나는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공중의 줄 위로 사뿐히 떨어졌을 때, 내 몸은 줄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세 걸음, 뒤로 한 걸음. 나는 더할 수 없이 가볍고 상쾌했다. 더할 수 없이 자유롭고 즐거웠다. 그리하여 줄을 타는 동안 내 영혼이 가벼운 연기처럼 하늘 저편으로 둥실 떠올랐다. -148쪽

내가 무슨 빌어먹을 개 방귀만도 못한 왕이란 말이냐? 나는 하늘 아래 가장 유약하고 무능하며, 또한 가장 가련한 제왕이로구다. 어릴 때에는 유모와 환관, 궁녀 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글을 깨우칠 무렵에는 승려 각공이 하라는 대로 했으며, 왕이 되어서는 황보부인과 맹부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 이제 나라의 정세가 크게 변하여 민심이 흉흉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모두 다 늦었구나. 한 자루 칼이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저 여기서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다. 연랑, 말해보아라. 내가 무슨 빌어먹을 왕이란 말이냐?-217쪽

나는 가난과 굶주림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돈이 없어 죽을 지경이 되면 누구든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뺏는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을 막지 못했을까? 왜 두 눈을 멀쩡히 뜨고 평생을 먹고 살아야 할 모든 재산을 순식간에 강도들의 손에 넘겨주었을까? -264쪽

우리 광대패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일종의 세기말적 향락의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앞다투어 공연장에 몰려와서는 소문으로 들었던 줄타기 재간꾼으로 변신한 제왕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했다. 줄타기 왕 광대패는 하늘과 사람이 일으킨 재앙으로 죽어가는 그들의 삶에 한때의 즐거움과 한 모금의 생기를 선사했고, 그로 말미암아 터져나오는 갈채와 환호성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폐위당한 제왕에게 깎듯이 인사를 올릴 때면,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섭왕을 부르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을 때마다, 나는 예전에 내가 썼던 왕관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 같아 크나큰 서글픔을 느꼈다. 일찍이 머리에 왕관을 썼던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함정에서 빠져나와 멀리 왔건만, 궁궐 담장 밖의 이 죄없는 백성들은 아직도 그 검은 표범의 면류관에 속고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사기극의 주요 인물이었던 나는 가까스로 나 자신을 구원했지만, 이 순박하고 우둔한 사람들까지 영원한 미망에서 건져낼 수는 없었다. -329~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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