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절판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캔버스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가끔 들었는데, 그들은 서로 잘 통했다. 그들의 평가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것만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완전히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세상이 있다면, 내 운명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가지고 무엇을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아직 아무것도 그려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러한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 -9쪽

나는 내가 햇볕을 볼 수 있게 마치 화장지 조각처럼 쫙 펼쳐진 해(年)에 "절망했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간들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단지 기다리는 것만 배운 게 아니라 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을 배웠다.-11쪽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만들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런 사람들은 미지의 것에 대해 집착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확신을 위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한다.

내가 먼 훗날 무언가가 된다면, 나는 원래 의도되었던 것이 되고 싶지 않다. -33쪽

보호받지 못하는 이 상태, 사람들의 눈길로부터 감출 수 없는 이 무능력함을 사람들은 수치라고 부른다. -4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장의 시계장치
마티아스 말지외 지음, 임희근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2월
절판


1874년 4월 16일, 에든버러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길 없는 이상 강추위에 도시는 꽁꽁 갇혔다. 오늘이 세상에서 제일 추운 날일 거야. 노인들은 생각했다. 해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고, 눈송이는 바람보다 가벼이 떠다녔다. 흰색! 흰색! 흰색! 흰색의 소리 없는 폭발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흰색이었다. 집들은 증기 기관차처럼 보이고, 굴뚝들에서 뿜어져나오는 회색 연기에 강철 같은 하늘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9쪽

사랑 때문에 느끼는 즐거움이나 기쁨은 언젠가는 모두 고통으로 되갚음 받게 되어 있어. 많이 사랑할수록 앞으로 닥칠 고통은 두 배, 세 배가 되는 거야. 넌 허전함을 느낄 거고, 그 다음엔 질투의 괴로움,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통, 버림받는 느낌, 부당하다는 느낌을 알게 될 거다.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느낄거고, 네 살갖 밑에 얼음장 같은 피가 흐르는 것 같을 거야. 네 심장의 시계장치는 폭발할 거야. 내 손으로 직접 달아주었으니 그 기능의 한계야 내가 완벽하게 알고 있지. 어쩌면 강도 높은 쾌락에는 그런대로 견딜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랑의 슬픔을 견뎌낼 만큼 강하지는 못하단다. -40쪽

첫째, 시곗바늘을 건드리지 말 것.
둘째, 화가 치밀어도 꾹 참을 것.
셋째, 절대로,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말 것. 사랑에 빠지면 심장 시계의 긴 바늘이 네 몸을 뚫고 나오고, 뼈는 산산이 부서지고 심장의 시계장치는 다시 고장나버릴 테니까. -45쪽

불가능한 것을 믿게 되는, 우스꽝스럽지만 멋진 순간은 항상 있단다. -49쪽

아픔을 두려워할수록 아플 가능성은 더 높아지는 법이란다. 줄타기 광대들을 보렴. 그들이 외줄 위를 걸어갈 때 떨어지면 어쩌지, 하고 생각할까? 아니야. 그들은 위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감수함으로써 즐거움을 맛보는 거야.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평생을 보내면, 사는 것이 끔찍하게 지루할 거다. 알겠니? ...... 내가 알기로 무모한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건 없어! 너만 봐도 그렇지 않니? '무모함'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잖아! 아아! 열네 살에 한 여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유럽 대륙을 종단할 결심을 했다면, 무모한 기질이 있는 게 확실해. 안 그러니? -92쪽

네 말마따나 꿈속의 그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네 심장에 있어. 네가 태어날 때 인공으로 갖다붙인 시계 모양의 심장 말고, 진짜 심장, 그 시계 밑에 있는, 살과 피로 이루어져 고동치고 있는 심장 말이다. 넌 그 심장으로 작업해야해. 인공 심장장치 같은 건 잊어버려라.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될 거야. 신중하게 행동하지 말고, 계산하지도 말고 다 주는 거야. 너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라고! -93쪽

포커 치는 노름꾼처럼 굴면 안 돼. 네 두려움이나 의심 같은 걸 절대 드러내면 안 된다는 뜻이야. 이 게임에서 네게 가장 중요한 패는 바로 네 심장이야. 넌 그게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연약함을 감수하고 네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넌 그 심장시계 덕분에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어. 네 남다른 점이 널 매력 넘치는 존재로 만들어줄 거라고! -10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장바구니담기


에미,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 참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환상 속의 가상 인물을 만들어내 서로에 대한 몽타주를 작성하고 있어요. 질문을 하지만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게 그 질문들의 매력이죠. 그래요, 우린 서로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걸 피하면서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꾸 자극하고 계속 부채질해대고 있어요. 우린 행간을 읽으려 애쓰고 낱말과 낱말, 철자와 철자 사이에 숨은 뜻을 읽으려 애쓰죠. 상대방을 정확하게 평가하려고 안간힘을 써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본질적인 면만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조심 또 조심해요. '본질적인' 것이라는 게 뭘까요? 우린 자기 생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어요. 자신의 일상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자기에게 중요한 무언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지요. -32~3쪽

우린 공허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자기가 어떤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는 점잖게 고백했지요. 당신은 저에게 이론적으로 멋진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고, 저는 그 대가로 당신에게 현실적으로 (형편없는) 언어심리 평가서를 작성해줄 수는 있겠지요. 이게 다예요. 우린 이 도시에서 발행되는 별 볼일 없는 잡지 덕에 우리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알지요. 그것말고 또 뭐가 있죠?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우린 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이도 없고, 얼굴도 없어요. 우리에겐 밤낮의 구별도 없어요. 우린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두 개의 모니터뿐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하나씩 각자 따로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우린 공동의 취미를 가지고 있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관심 갖기. 브라보! -33~4쪽

에미, 우리가 이메일을 사흘이나 쉬었군요. 슬슬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레오. -145쪽

진지하게 말씀드리면, 우리에 대해 "그 여자한테 메일 쓰는 게 자기한테 좋다면 얼마든지 써", 이렇게 말하는 여자는 제가 이해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과는 멀어도 한참 먼 여자예요. 마를레네는 레오를 사랑하지 않아요. 레오도 마를레네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은 상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데서 열정을 얻는 법이에요. 저로서는 이것 이상으로 지혜로운 조언은 해드릴 수가 없네요. 이제 일해야겠어요. 곧 또 봐요. 가상의 대타, 에미. -185쪽

에미, 당신은 미아가 아니에요. 나는 미아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고, 미아도 나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미아랑 나는 어떤 두 사람이 사귈 때 대개 그렇듯 출발선에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에미, 당신과 나, 우리 경우는 달라요. 우린 골라인에서 출발하는 셈이에요. 따라서 나아갈 방향은 하나밖에 없죠. 되돌아가는 것. 우린 미몽에서 깨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해요. 우리가 쓰는 글이 우리의 실제 모습, 실제 삶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며 그렸던 많은 이미지들은 우리의 실제 모습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당신이 내가 아는 에미보다 못하다면 실망스러울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아는 에미보다 못할겁니다! 내가 당신이 아는 레오보다 못하다면 당신도 우울하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이 아는 레오보다 못할 겁니다! 우린 만나면 미몽에서 깨어나 헤어질 테고, 일 년 동안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타게 기다리면서 몇 달씩 지지고 볶았으나 막상 먹어보니 입에 맞지 않는 기름진 식사를 하고 났을 때처럼 속이 거북하겠지요. 그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끝나는 겁니다. 끝. 우리의 첫 만남은 곧 마지막 만남이 되겠지요. -278쪽

지나간 시절을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시절이고, 새로운 시절은 지나간 시절과 같을 수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쇠잔해요.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해서는 안 되죠.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늙고 불행한 사람이에요. -292쪽

베른하르트는 저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요! 그 사람은 저에게 온갖 자유는 다 주고 제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줘요. 아주 교양 있고, 사심이라고는 없고, 침착하고, 유쾌한 남자예요.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틀에 박힌 일상은 사람을 숨 막히게 하죠. 프로그램 순서는 정해져 있고, 예기치 않은 깜짝쇼 같은 건 없어요. 우리는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비밀이란 없어요. "아마 너한테는 비밀이 필요한 걸 거야. 아마 넌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과 사랑에 빠진 걸 거야." 미아는 이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어떡하지? 갑자기 베른하르트를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로 만들 수도 없고" 레오, 제가 베른하르트를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로 만들 수 있을까요? 팔 년간의 가정생활을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로 만들 수 있을까요? -326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09-03-0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비도 내리더군요^^

이매지 2009-03-03 22:06   좋아요 0 | URL
오후 세시, 역시 비가 내리더군요 ㅎㅎ
 
아톰의 슬픔
테즈카 오사무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품절


인간이 어떻게 진화하든, 물질문명이 얼마나 발달하든 간에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며, 그 어떤 과학의 진보도 자연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 나아가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나는 미래사회를 다룬 만화를 많이 그려왔지만 우주 저편까지 날아가는, 혹은 작은 벌레 속까지 파고드는 상상력의 기반은, 내 안의 '자연'이었습니다. 압도적인 자연의 기억이, 일에 쫓기는 도시의 생활인이 된 나를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샘물처럼 적셔주고 있는 것이지요. -12~3쪽

돌아보면 <우주소년 아톰>을 그리기 시작한 1951, 52년 무렵, 교사와 학부모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일본이 고속열차나 고속도로를 만들어낼 리가 없다' '로봇이 웬 말이냐' '황당무계하다'며 분노했고, 심지어 '테즈카 오사무는 엉터리 만화나 그리는, 어린이들의 적'이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그렸습니다. 그 맹렬한 비판의 폭풍 속에서도 만화를 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로봇의 격렬한 싸움을 그린다 해도 내 만화의 주제는 항상 자연에 뿌리를 둔 '생명의 존엄'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13쪽

이제까지 미래사회를 다룬 만화를 많이 그려왔지만, 사실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 대표작이라 불리는 <우주소년 아톰>을, 기술혁신만이 미래의 번영과 행복을 가져온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주소년 아톰>은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나는 자연과 인간성을 외면한 채 오직 진보만을 추구하며 질주하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얼마나 깊은 균열과 왜곡을 가져오고 얼마나 많은 차별을 낳는지, 또 인간과 모든 생명에게 얼마나 무참한 상흔을 남기는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로봇공학이나 생명공학과 같은 첨단과학이 폭주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을 위한 기술이 인류 멸망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22~3쪽

수많은 나라가 저마다의 '정의'를 내걸고 전쟁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정의'란 참으로 편리한 말이어서 국가의 수만큼, 혹은 인간의 수만큼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거창한 '정의'의 속뜻은, 노인부터 순진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참한 살육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자신의 아이와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이 두려워 다른 이를 죽여야만 했던 병사들도.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육체의 상처 이상으로 치유되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제 우리 세대에서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어린이들이 건전한 비판정신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재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53-4쪽

이 세상에 '한심한 아이'나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딱지가 붙은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정신이 궁핍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일지라도, 그 내면엔 어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저마다의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 그 보물과도 같은 재능을 발굴해 낼 수 있도록, 어른들은 보다 깊고 따스한 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58~9쪽

무척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아름다웠노라는 식으로 포장되는 것, 이것이 추억의 본질입니다. 추억이란 본래 그리움이 만드는 것이어서 재미 없는 일은 떠올리지 않는 법이지요. 아무리 괴로운 기억도 지나고 나면 그리운 삶의 한 토막으로 한없이 감상에 빠져들게 합니다. 그것이 자기 혼자만의 그리움이라면 문제 될 게 없지만, 개인사의 형태를 띰으로써 마치 보편적인 사회현상인 것처럼 바뀌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그 옛날 전쟁중에는 이랬지.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하던 것이 '훌륭한 전쟁이었어. 누가 뭐래도 위대한 시대였다고'와 같은 위험한 발언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61~2쪽

어린이는 어른들이 진실한 메시지를 보내주기를 기다립니다. 또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감수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호기심 또한 가장 왕성할 때인데, 그러고 보면 현대의 어린이들은 몹시 안타까운 환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룰이 있어서, 어떤 정보가 어린이들 사이에 확산되면, 예를 들어 '슈퍼마리오'같은 게임이 나와서 크게 유행하거나, 또는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새로 시작한 경우, 그것을 모르는 아이는 완전히 따돌림을 당해 아이들 사회에서 밀려나고 맙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모두가 그것을 사거나 보고서 또래집단 안에 들어가려 노력하지요. 그 결과,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상업주의를 조장하고 선동하는 어른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퍼붓는 일방적인 정보가 어린이들을 규격화된 인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64~5쪽

주위에 정보가 넘쳐흐르는 시대, 스스로 정보를 취사선택할 힘이 없는 어린이들이 하릴없이 정보 중독에 빠져드는 오늘이야말로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것만을 제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그러한 것을 손에 쥐여주기보다는, 어린이들 스스로가 재미를 느껴 직접 접해보고 유익함을 알게 되는 식이 더 바람직하겠지요.
우리의 메시지를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은 권위적이거나 고리타분하거나 어려운 것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66~7쪽

사람들 모두가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쓸모없고 부정적인 시간을 보낼 때도 많지요. 살면서 또 아까운 세월을 허비했구나, 하고 가슴을 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인간은 번뇌가 많아 수많은 방황과 고민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참 후에 잘못을 깨닫고 반성할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젊은 시절에는 젊음의 에너지를 분출하기에도 바빠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젊어서부터 노화와 죽음을 내다보고 전전긍긍하며 시간에 얽매여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젊은 힘을 한껏 발휘해내는 충실한 삶이란 무엇인지,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 있는지 깊이 성찰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85~6쪽

전쟁중에 수도 없이 겪은 일이지만, 정보는 제공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도록 비판적인 안목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카탈로그 문화'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정보나 뉴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그것을 해석하고 음미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젊은이들에게는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분석하여 상황에 맞게 활용해나가는 능력이 요구될 것입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현상 자체는 나쁠 게 없지요. 정보는 끊임없이 공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정보를 과신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87~8쪽

판에 박은 듯 획일적이고 정형화된 인생을 각자의 개성을 가미해 독특한 것으로 변화시켜나갈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몇 번이고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유한한 것입니다. 굳이 좁은 울타리 안에서 숨 막히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 국경을 초월해 다양한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많은 것들을 발견해나갔으면 합니다. 다른 세계를 유랑하며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배울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나라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119~120쪽

무미건조한 빌딩숲을 거닐며 행복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뒷골목을 걷다보면 여러 가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그것이 곧 놀이인 것이지요.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살 수도 있고, 주인장과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그런 아늑한 공간은 점점 사라지고 실용적인 편의점이나 빨래방, 자동판매기만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지 못하는 까닭도 어쩌면 그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24~5쪽

인간의 '선'이 항상 '악'보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먼저 나아갔으면 합니다. 생명의 비밀에 다가간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인류의 염원일 것입니다. 하짐나 그 비밀의 수수께끼가 풀리건 풀리지 않건,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인간이 생명의 신비에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생명 자체를 멸망시키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8~9쪽

정치에서도 '이것이 악이다'라는 명확한 판단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내려집니다. 중국의 4인방(四人幇, 문화대혁명 당시 권력을 휘두른 마오쩌둥의 측근 그룹. 1981년에 사형 등의 판결을 받았다)도 죄를 추궁받고 나서야 비로소 잘못을 규탄하는 논설이 발표되었듯이, 악은 훗날 결과론적으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틀러 추종자는 악이다'라는 인식도 이미 히틀러라는 관념 안에 그가 저질러온 악행의 카테고리가 있어, 그중 하나를 들이대야만 비로소 악으로 수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행기 납치는 악이다, 21면상은 악이다, 탈세는 악이다, 폭력교사는 악이다, 라는 식으로 우리가 잘 아는 악의 공식에 억지로 끼워맞춰 악을 납득시키려 합니다.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픽션의 기본입니다.
모든 인간이 성인군자일 수는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행뿐만 아니라 악행도 저지르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 없이,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에 따라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징후라고 생각합니다. -144~5쪽

만화는 본래 감성의 영역이므로, 리얼리즘에 속박되면 꿈이나 낭만은 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만화가나 어린이는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유치하다는 이유로 부모나 교사가 그것을 짓밟는 것은 어른들의 파시즘이지요.
모든 지뢰를 제거해주는 대신 실패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어린이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갖가지 도전의 기회를 주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품어 안을 수 있는 여유로운 사회, 그리고 어린이가 한번 넘어져도 다시 도전하는 정신을 기를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154~5쪽

어린이들은 진실한 메시지에는 반드시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물며 꿈을 심어주는 재미있는 메시지라면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좋아할까요?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진실한 메시지를 담아 만화를 계속 그려나가려 합니다. -159~160쪽

오랫동안 <우주소년 아톰>처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만화를 그리다보니 어떻게 이처럼 미래를 생생하게 예측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은 우리 모두가 늘 미래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If의 발상'이라 부릅니다. 나의 공상은 모두 '만약 ~라면'이라는 발상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오늘 비가 오면 집에 어떻게 돌아가지?'라는 걱정을 한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적어도 그 시점에는 비가 오지 않고 있으니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상상입니다. 즉, 무의식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셈이지요.
꼭 21세기의 사건만이 미래는 아닙니다. 1년 뒤도 미래이고 극단적으로 말해 1시간 뒤도 미래입니다. '만약 비가 온다면?'이라는 가설하에 우리는 '집에 갈 때까지 쫄딱 비를 맞겠군' '택시를 잡을 수 있을까?' '우산을 가져올걸 그랬어'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미래에 대한 훌륭한 상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66~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구판절판


한 시간 가까이 차를 몰아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 준비를 했다. 예술학교의 영민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선생으로서는 별 재능이 없는 편이다. 선생에게는 지식 외에도 많은 것이 요구된다. 친화력, 학생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잘 제시할 수 있는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선생에게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식의 신념이 없다면 수업은 맥이 빠진다. 내겐 그런 믿음이 없었다. 과연 소설 쓰기라는 게 배워서 되는 것일까? 내가 가르치면 뭐가 좀 나아지는 것일까? 오히려 재능 있는 학생들을 망치는 것이 아닐까? 늘 이런 의심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는 강의 시간이면 더 큰 목소리로, 더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럴수록 내 내면은 더 쪼그라들었다. -20쪽

방송 역시 강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것 역시 한 편의 쇼다.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어야 하고 또 끝나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손님들이 다녀간 빈자리에 남아 나는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내 내면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버스가 왔는데, 와서 모두들 그 버스를 타고 떠나는데, 나만 정류장에 남아 있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저 버스에 타고 떠나야 하는데, 타고 떠나버려야 하는데, 아, 그러나 나는 정류장에 남아 있는 대가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전적인 저주의 형식을 닮았다. 너는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소설 쓰기에 대한 얘기를 해도 좋다. 그러나 절대로 그 시간에 네 자신의 소설을 써서는 안 된다. 너는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해 얼마든지 말해도 좋다. 신나게 떠들어라. 하지만 그 시간에 네 소설을 이야기하거나 그것을 써서는 안 된다. 나는 그 저주의 대가로 월급과 연금을 보장받고 꽤 쏠쏠한 출연료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었다. 쉬익쉬익,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들렸다. -21쪽

소설 연재를 시작한 것은 학교를 그만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퀴즈쇼>는 고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 전업 작가로서의 운을 시험하는 장편소설이었다.매일 책상 앞에 앉아 새로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래도 즐거웠다. 강의 준비를 하고 학교 운영에 관한 이런저런 회의에 참석하는 대신, 오롯이 소설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실로 진귀한 경험이다. 단편소설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의 세계와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자신만의 테마파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논다는 점에서, <찰리와 초콜릿공장>의 윌리 웡카 같은 인물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장편소설을 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리고 그 세계가 자신의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나와 일상을 마주하기가 점점 싫어진다.일상은 어지럽고 난감하고 구질구질한 반면 소설 속의 세계른 언어라는 질료로 견고하면서도 흥미롭게 축조되어 있다. 무엇보다 내 소설은 나를 환영하고 있다. 나를 초대하고 언제나 내가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자신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24~5쪽

여러분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 예술가가 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실수는 그 어린 예술가를 데리고 예술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이곳은 좋은 학교이고 훌륭한 선배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질투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성운이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친구나 선생들은 본래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여러분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다. 그건 이 세계에선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선생은 평가를 해야 하고 동료들도 당신의 작품에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새로운 예술을 알아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게다가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마음껏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픈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다. 여기, 이 게토에 갇혀 있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린 예술가가 신나게 붓을 휘두르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따라서 주변 모든 예술가의 어떤 새롭고 참신한 시도에도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아니 냉혹하다. 우리, 두꺼운 껍데기로 방어막을 둘러친 얼치기 애늙은이 평론가들은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를 노리고 있다.-26쪽

사자가 어린 치타 새끼를 물어죽이듯, 그것은 그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쩌면 여러분 자신도 동료들에게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일단 여기 들어온 이상,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가 겹겹의 방어막으로 단단히 자신을 감싸 끝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정신적 불구가 되지 않도록 잘 아끼고 보호하여, 학교 밖으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배움은 다음 문제다. 학교에서는 평생을 함께할, 평가와 비난이 이나라 격려와 사랑을 함께 나눌 예술적 동지를 구하라. 타인의 재능을 샘내지 말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훗날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 양분으로 삼고 그 어린 예술가의 벗으로 키우라. -26~7쪽

떠나기로 마음먹은 후, 나는 천천히 집 안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책들을 헌책방에 내다 팔기로 했다. 책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책을 팔자니 속이 쓰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저 줄어들 줄은 모르고 오직 늘어나기만 하는 무시무시한 책들을 껴안고 살 수는 없었다. 우선은 지난 5년간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책, 그리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책들을 먼저 골라냈다. 읽었으나 아무 감흥도 받지 못한 책들도 그 위에 얹었다.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내 서가의 책들에도 그런 기준을 적용했다. 나를 감동시켰거나 즐겁게 해주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책들은 살아남았다. 그 세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 집을 떠났다. -29~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