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처방해드립니다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품절


어떻게 봐도 작가는 자기가 창조한 모든 등장인물이 될 수 있어요. 책 한 권을 쓰고 있을 땐 그 책이 되는 거예요. 책을 쓰는 내내 머릿속이 그 책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작품으로 작가를 기억하잖아요. 우리가 작가들이 겪었던 창작의 고통이나 이웃들과의 불화와 우리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등장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거죠. 앨리스, 그렇지 않니? -34~5쪽

당황할 필요 없네. 젊은이. 내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노심초사할 필요 없다고. 우리도 이 성스러운 곳을 '정신병원'이라고 부르고, 또 우리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불러. 우리도 우리가 정상......인들과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걸 알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공상에 빠져 지내기는 하지. 하지만 그게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드느냐 하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도대체 누가 매사에 제정신이기를 원하겠나? 지나치게 '제정신'인 사람들은 서로 너무 쉽게 얽히고설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는 거야. 으하하하! -47쪽

책! 다른 책들처럼 <보물섬>도 말이야, 하나의 설계도면일세. 일개 집을 넘어서 상상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이 있는 도면 말일세. 매혹적인 인물들이 사는 하나의 세상이지. 그 도면은 간단해. 몇 장의 종이 위에 글자가 줄지어 있을 뿐이지.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독자가 자기 상상력으로 창조해내는 세계는 그 책-도면을 넘엇 무궁무진하다네. 책에 있는 모든 것도 담고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담고 있지. 이 집처럼 말일세. 이 집도 건축가가 도면에 그어놓은 선이 나타내는 것을 모두 다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다른 것들도 많이 있잖아. 바로 우리를 포함해서 말이야! -50쪽

"아까 약국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약국이잖아요. 여기는 서점 약국이에요. 보세요......"
노부인이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창백한 남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침에 열 쪽, 정오에 또 열 쪽, 그리고 자기 전에 스무 쪽 읽으세요."
남자가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더니 겨드랑이에 책을 끼우고는 사라졌다. -54쪽

"정말 돈키호테가 책 때문에 미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야비하고 잔인한 세상에서는 한시라도 더 살 수 없어서 미쳐버린 게 아닐까요? 전 그나마 돈키호테가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비참하게 늙지는 않았다고 보는데요...... 정의가 없는 세상을 체념한 채 사는 사람과 이를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미친 걸까요? 그게 비록 풍차를 상대로 싸우는 것일지라도 말이에요."
"하지만 책은 우리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잖아요."
루크레시오가 말했다.
"거리를 두게끔 돕는 거죠."
노부인이 콕 집어 말했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 환자들과 똑같이 행동해요. 특정 등장인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모험을 재현하지요. 이게 당신이 말한 대로 잠시나마 우리의 일상에서 스스로를 멀어지게 하는 거죠. 하지만 만약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그러니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질문을 하게 만든다면, 나중에 우리가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좀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어줄거예요."-55~6쪽

이야기 책은 사건을 간단하고 정리된 형태로 들려주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배우고, 또 우리 머릿속에 정리하는 걸 도와줘요. 어린애들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어하는 건 자기가 그 정보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고, 또 머릿속에 잘 정리해놓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그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아이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요...... 우리 어른들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죠. 좋은 책이나 좋은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받기도 하잖아요. -57쪽

"좋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나면 머릿속으로 몇 시간이고 그 영화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걸요."
"맞는 말이에요."
에멜리나가 동의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책을 읽는 동안에 비해서 상상력을 펼칠 기회가 별로 없어요. 영화는 다 만들어진 완제품을 제공하거든요. 등장인물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행동을 보여주죠......하지만 책을 읽을 때는 말이에요. 당신 눈앞에 조그만 검정색 부호들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을 뿐이에요. 스무 개 남짓의 문자들이 쉬지 않고 반복되고 조그만 그룹을 지어 서로 뭉쳐 있을 뿐이죠(이 환상적인 존재들이 바로 단어예요). 이렇게 많지도 않은 자료들로 당신은 머릿속에 상상과 생각을 통해 완전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예요......우리가 책을 읽을 때마다 정신이 놀라운 작업을 실현하는 거죠. 이 멋진 훈련이 우리를 단련시키고, 또 내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거예요......-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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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품절


똥주한테 헌금 얼마나 받아먹으셨어요. 나도 나중에 돈 벌면 그만큼 낸다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벼락 맞아 죽게 하든가, 자동차에 치여 죽게 하든가, 일주일 내내 남 괴롭히고, 일요일 날 여기 와서 기도하면 다 용서해주는 거예요? 뭐가 그래요? 만약에 교회 룰이 그렇다면 당장 바꾸세요. 그거 틀린 거예요. 이번 주에 안 죽여주면 나 또 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9쪽

하이고 새끼들, 공부하는 거 봐라. 공부하지 말라니까? 어차피 세상은 특별한 놈 두어 명이 끌고 가는 거야. 고 두어 명 빼고 나머지는 그저 인구수 채우는 기능밖에 없어. 니들은 벌써 그 기능 다했고. -10쪽

나는 아버지를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굳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였다. 비장애인 아버지는 미리 말하지 않아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애인 아버지를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상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숨긴 자식이라며 듣도 보도 못한 근본까지 들먹인다. 근본은 나 자신이 지키는 것이지 누가 지켜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좀 있어 보이게 비웃을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만 가지고 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느는 똥주. 외국인 노동자를 부리는 집에서 태어나, 지금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한다고 그 사람들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똥주. 이것이 바로 내가 똥주를 죽이고 싶었던 진짜 이유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딱지가 앉지 않는, 늘 현재형이라 아물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196~7쪽

"나도 내 몸이 싫었다. 이게 나한테 끝나는 게 아니라 멀쩡한 너한테까지 꼬리표를 달아주더라. 부모가 도움은 못돼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내 아들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말을 한마디씩 해. 그래서 되도록이면 너하고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혼자 있었어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내가, 네 아버지라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길 바랐다. 그래서 너한테서 자꾸 숨었지. 그렇게 나를 숨겼던 게 오히려 너까지 숨어 살게 만든 것 같다."
"그러지 않았어요."
"선생님한테 얘기 들었다. 너, 너하고 관련 없는 일에는 지독하게 무심하다고."
하여간 똥주. 아니 그럼, 나하고 상관없는 일까지 신경쓰고 살아야 하나.
"너 자신한테 이상한 막을 씌워놓고, 가끔 번개처럼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버린다는 거야. 눈뜨면 학교 가고, 해 지면 다시 집에 와서 자고, 그렇게 움직이더래."
똥주가 나에 대해 관찰일기를 쓰고 있는 게 확실하다. 사실 그랬다. 모두들 아등바등 하루를 지내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던데.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은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다가 늙으면 죽고.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면 모를까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197~8쪽

죽으면 게임 끝이다. 제아무리 많은 걸 이루어놓고 죽는다 해도 그건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동네 양아치든 대통령이든 죽으면 똑같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생활에 개입할 수 없다. 그거 아니라고 불쑥 살아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서로 피해 안 주고 조용히 살다 죽는 게 장땡이다. -198쪽

하-. 이 동네 집들 진짜 따닥따닥 붙어 있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기에 딱 좋은 동네였다. 왜 숨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사실은 너무 오래 숨어 있어서 두렵기 시작했는데, 그저 숨는 것밖에 몰라 계속 숨어 있었다. 그런 나를 똥주가 찾아냈다. 어떤 때는 아직 숨지도 못했는데 "거기, 도완득!"하고 외쳤다. 술래에 재미를 붙였는지 오밤중에도 찾아댔다. 그래도 똥주가 순진하기는 하다.......나를 찾았으면 자기가 숨을 차례인데, 내가 또 숨어도 꼬박꼬박 찾아줬다. 좋다. 숨었다 걸렸으니 내가 술래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찾을 생각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찾다 힘들면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쳐 쉬엄쉬엄 찾고 싶다.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착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2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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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5-14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내용을 접하니 좋군요.(웃음)

이매지 2009-05-14 09:12   좋아요 0 | URL
엘신님도 완득이 보셨군요 :)

하늘바람 2009-05-1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밑줄이 새록새록 기억나네요

이매지 2009-05-14 21:11   좋아요 0 | URL
이 책 보신 분이 역시 많네요~
 
도쿄 3S - SUSHI.SOBA.SAKE
은미경 지음 / 달 / 2008년 12월
절판


한국사람들은 감자를 쪄서 소금에 찍어 먹거나, 갈아서 부침개를 하거나, 볶아 먹는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조리거나, 샐러드를 하거나, 고로케를 만들어 먹는다. 미국사람들은 튀겨 먹는다. 그런 차이에 흥미를 느끼는 나는 여행을 가면 그 여행지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뭔가 무척 궁금하고, 꼭 먹어보고 싶다. 그 음식을 눈으로, 혀로, 그리고 온몸으로 먹으며 그곳의 이미지를 내 방식대로 내 영혼 어딘가에 새기게 된다. 그게 바로 문화이기 때문이다. -59쪽

그나저나 한국에도 스시처럼 세계 사람들이 너도나도 먹고 싶어하는 브랜드 음식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탈리아는 피자와 스파게티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고, 미국은 햄버거로 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과자나 빵의 성지처럼 불린다. 한국음식 중에도 비빔밥도 맛있고, 부침개며, 불고기며 삼계탕도 맛있다. 이런 음식들을 외국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언어와 방법으로, 그리고 이를 직접 널리 알릴 만한 요리사와 전문가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세계 몇 위라는 말보다는 '맛있고 건강에 좋은 비빔밥의 나라'라는 말처럼 친근감 있고 정감 넘치는 나라로 세계 사람들에게 인식되면 좋겠다. -6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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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공부법
지쓰카와 마유 외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5월
품절


AFS라는 국제적인 교육 교류단체를 통해 유학을 가보는 건 어떨까, 하고 딸들에게 유학을 권했을 때 우리는 솔직히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가는 것은 학업 면에서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감수성이 풍부한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이 경험해온 것과는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보는 체험이 그후의 인생에 커다란 자산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고등학교 때 유학을 경험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어학력, 특히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유학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영어권 선진국은 성장한 다음에도 유학 갈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좀처럼 살아볼 기회가 없는 문화권에 가서 고등학생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체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AFS의 고등학생 파견 유학의 기본 목표는 문화 교류에 있었는데, 거기에 공감했기 때문에 위험성을 알고도 보낸 것이었다. -60쪽

핀란드에는 입시가 없다. 대학은 모두 국립, 학생들은 매월 나라에서 장학금을 받는다. 입학금도 수업료도 공짜니, 내는 건 교통비뿐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학생들은 집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
인종과 민족이 다양하게 섞여 있는 학교를 기피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조금 먼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처럼 전철이나 버스로 한 시간도 더 걸리는 학교까지 굳이 보내는 부모는 없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체로 기숙사 생활을 택한다.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 그 기숙사비도 공짜다.
고등학교는 일반 고등학교 외에 일본에도 있는 전문학교가 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할지 전문학교로 갈지는 자신이 결정한다.
핀란드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진로를 스스로 정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또 당연한 얘기일 수 있는데, 일본처럼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부모가 아이의 진로를 결정하거나 취직을 고려해서 과목을 선택해주는 것은 핀란드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92쪽

핀란드의 고등학생들 사이에 있으면 학교가 '공부하는 곳'이라는 것을 무척 강하게 느낀다. 물론 학교에서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즐거움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들에게는 학교란 '배우는 곳'이라는 인식이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일부러 학원까지 가서 배우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핀란드 학생들이 수업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에도 나타난다. 그들은 수업중에 절대로 졸지 않는다. -94쪽

그럼 일본 고등학교는 어떨까?
물론 일본의 학교도 공부하는 곳, 배우는 곳이다. 하지만 수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시간과 방과 후에는 클럽활동이 있고, 점심시간에도 학교가 기획한 이벤트가 있으며, 축제가 있고, 운동회가 있다.
학교생활이 그대로 자신의 생활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학교에 구속되어 있다'는 의식이 강하고, 학교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쭉 있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핀란드에서는 학교란 단지 '공부하는 곳'이고, 학교에 반드시 가야한다고 아무에게도 강제당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것이 일본 고등학교과 핀란드 고등학교의 커다란 차이였다. -96쪽

'읽다'. 사실 이것이 핀란드 교육의 열쇳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일본 학생들에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일본에서 나의 공부법은 딱 하나, 암기였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책 내용을 암기하고 시험이 끝나면 머리가 텅 비어버린다. 특히 잘하지 못하는 과목은 공부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지만, 시험 때는 어떻게든 점수를 따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쑤셔넣는다. 즉, 암기하는 것이다. 시험이 끝나면 바로 다음날 잊어버린다.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109~110쪽

그후에도 에베 선생님은 고맙게도 나에게 다양한 과제를 내주었는데, 나는 선생님이 과제를 평가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은 과제에 점수를 매기거나 수준을 판단하는 일이 없었다. 이건 어느 정도의 수준, 이건 몇 점이라는 평가를 절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신에 구석에다 그녀의 예쁜 글씨로 글에 대한 감상을 적었다.
'이 부분이 좋아.'
'이 부분이 마음에 들어.'
이것은 영어를 맡은 한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196쪽

그 밖에 오페라를 보러 가기도 했다. 강제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은 사람만 자유롭게 참가하는 식이었다. 헤르토니에미 고등학교에서는 오페라만이 아니라 견학을 가거나 연극을 보러 가는 수업에서도 대부분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식이다. 가지 않는다고 해서 점수를 깎는 일은 없다. 나는 오페라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참가했는데, 자유 참가인데도 반 학생들 대부분이 와 있었다. -198쪽

이때부터 프리젠테이션이라는 것은 선생님의 수업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이 수업시간을 얻어 직접 수업을 해보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 즉, 학생이 선생님이 돼보는 것이다. 에베 선생님의 수업은 때로는 수업시간의 절반 이상이 학생의 프리젠테이션으로 채워질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학기말시험에는 학생들의 프리젠테이션에서도 문제가 출제된다. -208~9쪽

'중학교 때부터 유급을 시킨다고?' 하며 얼핏 가혹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핀란드 사람들은 유급한 학생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유급한 학생이 널려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후트넨 가의 형제들이다. 내가 유학을 갔을 때 열네 살이던 막내 요카는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해서 중학교 1학년에 머물러 있었다. 학교에서 보면 다른 남자애들보다 삼십 센티미터는 훌쩍 커서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는 비길 데 없는 게이머로 밤에도 계속 컴퓨터에 매달려 있어서 도통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시험 전에는 교과서를 펼치기는 하지만, 불과 몇 분만에 다시 컴퓨터로 돌아가곤 했다.
니나 아줌마는 그런 요카에게 당연히 화를 냈지만, 성적이 어떻다든가 유급한 주제에, 같은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하겠다고 한 것은 해야지!"
이렇게 꾸짖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223~4쪽

다시 유급 이야기로 돌아가면, 핀란드인에게 낙제는 특별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확실히 배우지 않고 졸업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자리잡은 배경으로는 당연히 핀란드의 교육이 무료라는 것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학교에 대한 관점이 일본인들과는 다른 것 같았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학교에 무엇을 기대하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학교는 교육을 받는 곳이라는 것이 핀란드인의 생각이다.
반대로 일본인은 학교는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지만, 그것 외에도 학교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핀란드인도 교육 외에 학교에 뭔가를 요구하겠지만, 일본만큼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핀란드의 학생들은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이 왜 교육을 받는지 똑똑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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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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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처럼 이어진 집들이 계곡 벽을 따라 위아래로 퍼져 있다. 사회적인 사슬, 경제적인 사슬, 먹이사슬이다. 목표는 꼭대기, 언덕의 왕이 되는 것이다. 이기는 것이다. 모두들 옆집을 내려다보며 자기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그는 집의 꼭짓점, 두꺼운 창유리 두 장이 만나 배 앞머리처럼 언덕 위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모서리에 서 있다. 그는 서 있다. 선장, 왕, 주인, 그리고 스스로 만든 감옥의 죄수. -9쪽

그는 그곳에 누워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우고 의무를 없애버렸는지, 얼마나 바보같이 독립적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고자 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의 인생에도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어찌나 철저히 스스로를 의무의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던지 자신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25~6쪽

미국에선 모두가 거물이죠. 이미 많이 가졌는데 다들 더 갖길 원해요. 우리나라에선 모두가 보잘것없어요. 더 쉽죠. 여기 사람들은 언제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해요. 의사에게 가서 새 코를 얻고, 가슴을 더 크게 부풀리죠. 왜 멀쩡한 코와 좋은 날씨에 행복해하지 않는 걸까요? (중략) 설명해봐요. 왜 미국에선 모두가 장님 행세를 하죠? 미국인은 보지 않는 연습을 해요. 차에 타면 휴대전화로 사람을 부르죠. 혼자 있는 건 무서워하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은 보지 않아요. -49쪽

"다행히도 보는 것만큼 지독하진 않아요."
"그게 문제예요. 사람들은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생각하거든요."-87쪽

사람은 자기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는 법이야. 촌스러운 소리인 줄은 안다. -125쪽

"음식이 당신에겐 어떤 의미죠?"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을 의미해요. 사랑, 영양, 편안함, 보살핌. 오히려 물어야 할 건 당신에게 음식이 어떤 의미냐가 아닐까요?"
"처음 식이요법을 시작했을 때는 몸을 가볍고 건강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습관과 삶의 체계가 되어버렸어요."-142쪽

고통은 정상입니다. 아픔은 정상입니다. 삶의 일부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기에 있을까요? 우리는 왜 고통을 두려워할까요? 왜 고통을 피하고 막으려 할까요? 왜 고통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우리는 약을 먹고, 명상을 하고, 고통받지 않으려 애씁니다. 고통이 무엇입니까? 고통이 표현하는 것, 그러니까 감정의 깊이, 우리의 애정,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 자아,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끌어내릴 수 있나요? 이번 주, 여행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느끼는 그대로를 느끼고 그 느낌을 밀어내지 않으며, 그 느낌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직 그에 주목하고, 숙고하고, 알기 위한 의지를 가질 것입니다. 고통의 본질은 무엇이며, 얼마나 무거운가?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통에 닿고, 고통과 가까워지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안녕, 고통, 난 여기 너와 함께 있어. 네 옆에 있어. 난 너야. 난 고통이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세요. 바로 지금. -214~5쪽

고통을 변화시켜라. 변화가 더 나쁜 쪽으로 이루어진다면 받아들여라. 뭔가가 변하면 그것을 참아내고, 인내하라. 그러나 참아낼 수 없다면? -218쪽

"마음에 들었어요. 가치 있었고, 아주 오랫동안 어떤 것에서도 받지 못한 자극을 받았어요. 돌아오고 나니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어색하다는 것만 빼면 아주 좋았어요. 난 내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은 없죠."
"사실 난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전과 같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통증은 어때요?"
"뭐랄까,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통증은 아직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그렇겠죠? 우리 모두 고통 속에 사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게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259쪽

"우리 모두 마음만 먹으면 훌륭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썩을 놈의 짐승들이지. 현실에 VIP실 따윈 없어. 그리고 이 도시에는 현실이 없지. 인터넷 검색으로 답을 찾을 순 없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살라고 지껄이지만 이게 바로 인생이야." 닉은 숨을 몰아쉰다. "다들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든 이미 알고 있어. 다른 나라, 다른 풍경에서 사는 게 어떨지 상상해봐. 열기, 벌레, 공포. 바로 코앞에서 누군가가 철선을 건드리고 지뢰를 밟아서 말을 하다 말고, 담배를 피우다 말고 산산조각나는 걸 상상해봐. 몸에 살점을 뒤집어쓴 광경을 상상해보란 말이야.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녀석과 오 분 동안 이야기 나누는 상황을 상상해봐. 그거랑 뉴욕 북부에서 맥주를 마시고 총각딱지를 떼보려고 애쓰면서 여름 한철 조지 호수에서 구조원으로 일하는 삶의 차이를 상상해봐. 친구들을 시체 운반용 부대에 넣고 잠그는 모습을 상상해봐. 도대체 어떤 놈이 이게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 건지 말해봐. 어떻게 아무도 화내지 않을 수 있지? 돌아버려야 마땅해. -291~2쪽

'이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신주에 붙은 종이에 신경이 쓰인다. 도대체 뭘까. 이 사람은 뭘 원하는 걸까? 그는 포스터를 한 장 뜯어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전화해본다.
남자가 받는다. "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듣고 있습니까?"
"예."
"이 포스터가 무엇에 대한 건지 알고 싶어서요."
"뭔가 봤소?"
"고속도로 아래위에 잔뜩 붙은 종이를 봤지요."
"계속 보쇼." 남자는 전화를 끊는다. -306~7쪽

웨이터가 초가 꽂힌 디저트를 가져온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제가 노래를 부르는 건 원치 않으시겠죠."
"아, 내 생일이 아닌데요." 리처드가 말한다.
"생일 맞잖아요.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신시아가 말한다.
"촛불을 불어 끄세요." 웨이터가 말한다.
세 사람은 디저트를 같이 먹는다. 리처드는 계속 항의한다. "생일이 아니라니까요."
신시아가 말한다. "당연히 아니죠. 생일이라고 하면 공짜 디저트를 주는 식당이 많아서 그렇게 말했어요."-385~6쪽

"어렸을 때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나?" 리처드가 묻는다. (중략)
"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계속 생각하다가 어, 기억이 안 나네, 이런 게 아니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다가 갑자기 작은 부분이 떠오르고 이거 재미있군,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하는 식이지."
"우린 아무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시대에 살아. 우리가 시작 지점에 있는 척 굴지. 우리가 사는 방식을 봐. 절벽 끝에, 단층선에, 지나다니는 길 위에 집을 짓고선 무슨 일이 생겨도 역사에서 배울 줄을 몰라. 똑같은 장소에 다시 짓지. 더 크게, 더 좋게." 닉이 술을 따른다. "몰락만 더할 뿐이야. 지금 우리가 가진 건, 사실과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기로 한 허구의 혼합이야."-388~9쪽

토요일, 그는 벤과 디즈니랜드에 간다. 바스는 앤힐의 집에 가 있다. 운전은 벤이 한다. 벤은 동부 해안에서 온 아이답게, 그러니까 주말에 운전을 배우고 여름에만 운전해본 아이답게 운전을 한다.
고속도로에서 벤은 오른쪽 차선을 고수한다. 수백만 명이 그 차선을 들락거리는 데도 바꾸지 않는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그냥 속도를 조금만 올리면 어떨까. 사람들이 돌아서 갈 필요 없게 말이다. 이 차선으로 차들이 계속 들어왔다 나가는데 시속 45마일을 유지하고 있으니 힘들지."
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속력을 48일로 올린다. -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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