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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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내 말이 옳았다. 우리는 그 돈이 꼭 필요하다고, 그 돈 없이는 살 수 없다고-형과 루는 아마도 그렇게 주장했을 것이고, 우리 부모가 더 오래 살아서 함께 이 상황에 처했다면 역시 그렇게 주장했을지 모르지만-주장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우리 부부의 삶이 힘겨운 투쟁은 아니었다. 우리는 탄탄한 중산층이었다. 미래를 걱정한다 해도, 어떻게 먹고살지, 고지서를 어떻게 낼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걱정하는 게 아니라, 더 큰 집, 더 좋은 차, 더 세련된 가전제품을 장만하기 위해서 어떻게 저축할지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돈이 절실하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돈을 원하지 않을, 다른 구제 수단으로 보지 않을, 그 돈을 갖기 위해 애쓰지 않을 이유는 없다. -69쪽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나는 행복했다.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새해 전날이었다. 나는 서른 살이었고, 결혼 생활도 만족스러웠고, 곧 태어날 첫 아이도 있었다. 아내와 나는 함께 몸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금 사랑을 나눴고, 우리 밑에는 말 그대로 보물처럼 숨겨진, 4백 4십만 달러가 있었다. 잘못된 일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앞날은 밝았다. 이제 되돌아보면 그때가 여러 면에서 내 인생의 완전한 정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모든 것이 발전되어 상승한 상태고, 이후의 모든 것은 하락하는 지점. 지금 돌아보니, 그때에는 우리가 벌인 일로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우리 범죄는 너무 사소해 보였고, 우리 행운은 너무 커 보였다. -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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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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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에서 출신 성분이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혁명 원로의 손자로서 엘리트 군인의 길을 영웅적으로 밟아 가던 리강은 별반 내세울 것 없는 조명도에게 있어 아예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밤하늘의 별이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바야흐로 여기는 통일 대한민국이니만큼 얘기는 달라도 한참 달라야 했다. 왜냐. 조명도는 자신이 천생 남조선식 자본주의 체질인 데다가 리강은 노동단증을 전투복 안쪽에 품은 채 아프리카 밀림에서 깜둥이들과 충질이나 해 대다 죽어야 어울리낟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명도는 통일 대한민국이 아름다워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26쪽

서일화의 소견으로 북조선과 남조선의 강력한 공통점은 고위층의 속물근성이었다. 서일화는 북조선에서는 그런 식이었으니 남조선에서는 이런 식으로 속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들이 애초부터 서일화는 웃겼다. 그것을 통일 대한민국이 넉넉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서일화에게는 남조선이 사실이고 북조선이 추상이었다. 옳았다. 추상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북조선은 죽었다. 이 천박하고 잔인하게 뭉개진 자본주의의 만상이 서일화에겐 참으로 리얼한 세계였다. 서일화는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수긍하였다. -38쪽

혁명? 혁명은 국회의사당과 방송국에서 총으로 하는 것이다. 파리의 극장과 길거리에서 "금지를 금지한다." 따위의 문학적인 구호를 외치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공연일 뿐이다.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했다. 무덤을 파 시체 옆에서 잠자는 훈련까지 받았던 그들은 27명이 죽고 둘은 도망쳤으며 나머지 둘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유일한 생존자 스물여섯 살 청년 김신조는 수감 생활 중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기독교 신자 소녀와 결혼하여 훗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124부대원 31인 전원이 각기 한 정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 TT33이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혁명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리강은 믿었다. 그는 피를 지불하지 않는 어떠한 혁명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변화시키고 싶은 간절한 모든 것들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71쪽

통일 대한민국이 잘 돌아갔다면 지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것도 조국이라면 조국은 어차피 쓰레기가 됐어. 금주법 시대와 마찬가지야. 혼란에 감사하라고. 네 문제가 뭔지 알아? 너는 항상 매사에 답을 구해. 답을 구하지 마. 세상은 주체철학 용어 사전이 아니야. 답을 구하니까 네가 세상보다 더 혼란스러워지는 거야. 답을 구하니까 망자에게 집착하는 거고. 주도면밀한 거? 사내가 물론 그래야지. 그렇지만 각론은 각론이고 총론은 총론이야. 살아남은 인간은 총론에 강하다. 전체를 읽어야 상황이 파악되고 할 일 안 할 일 구분하게 되는 거야. 혼돈의 시대에 각론은 잘해 봐야 감정싸움일 뿐이야. 답? 세상 어디에도 그런 건 없어. 질문도 성립이 안 되는데 답이 어딨어? 네가 이해는 돼. 우리가 그런 사회에서 살았으니까. 선과 악, 적과 동지를 확실히 정해 놓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북조선에서. -73~4쪽

자본주의란 게 결국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바다야. 어디에도 육지가 없는 바다. 사내들은 제 손바닥만 한 배에 돛을 올리고 조만간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지. 어리석은 짓이야. 정박할 땅이 없는 배가 바다를 이길 순 없다. 파도를 타고 떠돌다 운이 다하면 가라앉을 뿐이야. -80쪽

회사원인 거지. 양쪽 다 회사원. 현실에서 제 잇속만 챙기는 회사원. 짤리거나 진급이 안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회사원. 과자 던져 주면 냠냠 좋아하는 회사원. 국회의원들만 회사원이 아니야. 종교인들과 예술가들까지 전부 회사원이니 나머지 놈들은 말 다 했지. 종교인은 거론하기가 귀찮다. 관두자. 예술가는 뿔 달린 수도승이야. 균열이 없는 가슴에서 나오는 미학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회사원이 되지 말아야 그 사회가 건강해지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진짜 회사원들보다도 훨씬 옹졸한 겁쟁이가 돼 버린 거지. 늑대여야 하는 자들이 모조리 애완견이 돼 버린 거라구. 누가 키우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렇게 알아서 기거나 길들여진 놈들이 더 한심하지만. 현실에서 죽음 이후를 겁낼 필요가 없는 사회는 희망이 전혀 없다. 너 말이야, 뭐하는 놈인 줄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 출세하고 싶거든 절대 비판하지 마라. 비판은 곧 죽음이다. 죽음. 정 하고 싶은 얘기가 있거든 열라 큰 그림을 그려서 얘기해. 못 알아듣게. 회사 중역들이 기분 상하면 그날로 좆 되는 거야. 정말 평생 죽기로 싸우고 나서 져도 절대 후회 안 한다는 열정이 확고할 시에만 비판해. -155~6쪽

넌 통일 이후의 대한민국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 천만에. 그건 이남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야. 여긴 원래 이랬어. 그게 통일 때문에 극심해져서 확연히 드러난 것뿐이지. 구더기는 썩은 살에 천사처럼 갑자기 나타나 들끓는 법이야. 아니라고 믿는 자들에겐 불행의 이유까지 제공하니 얼마나 좋아? 하핫. 나는 남조선이라고 해서 뭐 별것이 있는 줄 알았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케 하는 것이라고? 맞아. 그런데 이북 사람들과 이남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저 끔찍한 시점에 거의 다 다른 것 같다. 머지않아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들이 펼쳐질 것 같아. 나는 여기서 그것들을 겪으며 끝까지 내 거짓의 죗값을 치를 작정이야. 하지만 리 부장 너는 달라. 너는 나라를 지키는 순결한 군인이었잖니? 그 허위로 유지되던 나라가 사라졌으니 어디서든 새롭게 시작할 자격이 네겐 있어. 아직 젊고 영혼이 남아 있을 때 이 화약고를 떠나.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를 데리고 네 조국이 되기에는 서로운 이 조국을 떠나라. 그리고 그곳에서 네가 누구인지를 너 자신에게 물어봐. 네 인생의 답을 구하고 얻어 내. -183쪽

폭동은 논리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화약고에 불을 붙이면 터지고 보는 게 폭동이에요. 다 불타 버리고 나서 이러니저러니 해 봤자 부질없구요. 폭동의 본질은 동기가 아니라 증오의 폭발 그 자쳅니다. 심지어는 국가와 국가끼리의 전쟁도 그래요. 전쟁 전에는 명분을 들먹이지만 전쟁이 진행되다 보면 명분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죠. 그냥 작동되는 겁니다. 폭력이란 게 원래 그래요.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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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서도 출신 성분은 중요한데요.부모가 부자야라지만 비싼 과외를 받고,자사고나 외고에 들어가 SKY이나 외국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 취직하니까요 ㅜ.ㅜ

이매지 2009-08-19 13:05   좋아요 0 | URL
우리도 어느 정도 출신 성분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걸로 모든 게 결정되는 거 같지는 않아요. 뭐 돈을 들이 부어도 안 되는 놈들은 안 되던데요 뭐~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품절


사실, 고교생이 '찐따'가 되는 데에도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눈알이 축소돼 보이는 두꺼운 안경알, 악어가죽도 쥐포처럼 쭉 찢어먹을 공포의 쇠붙이(치아교정기), 뺨에서 기름기를 뽑아 올린 여드름, 더불어 교실용 책상 밑으로 두 다리를 한꺼번에 집어넣기 벅차게 만드는 비곗살. -12쪽

알리앙스 프랑세즈? 나는 아이들의 입에서 모르는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입안의 교정기를 감추듯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나는 외국어고등학교가 외국어를 배우러 들어가는 학교인 줄 알았지, 외국어를 배워서 들어가는 학교인 줄은 미처 알지 못한 채 입학을 한 거다. 이곳은 뉴욕도, 파리도 아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니 국어가 아니라 영어와 불어를 잘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연합고사 평균점수가 이백 점 만점에 백구십오라는 불어과 아이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일이학년 과정을 미리 떼고 온 눈치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나로서는 모를 노릇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과외금지령으로 대학생 과외가 내내 불법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대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나 하다못해 삼촌도 없는 나 같은 아이는 누구에게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고 온단 말인가. 나는 영어교사의 말대로 이곳에서 한번 뒤떨어진 사람은 영원히 따라갈 수 없는 건지, 한번 열등생은 영원한 열등생인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16~7쪽

나는 교사들이 무슨 이유로 아이들을 일으켜세워 질문하는지 궁금할 적이 많았다. 불어교사뿐 아니라 영어교사도 시간마다 아이들을 지적하며 영어해석을 시켰다. 그날이 2일이면 2, 12, 22, 32, 42, 52번 아이들이 바짝 긴장을 했다. 물론 2번 학생을 일으켜세운 후, 그 뒷줄에 앉은 아이들을 주르륵 일으키는 방식도 심심치 않았다. 방식에 일정한 논리가 없다는 점에 아이들은 더 겁을 먹었다. 지뢰는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기에 무서운 거였다.
쉰일곱 명의 아이들 가운데 일으켜세워진 한 명이 입시학원 교재의 영어지문을 읽고 빠른 속도로 해석하는 동안 영어교사는 한 줄이라도 잘못 해석하면 넌 끝장이야, 라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교사들이 그런 수업방식을 고수하는 까닭이 다음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1. 고도의 집중력으로 외국어 습득능력을 높이기 위해.
2. 혼자 다 읽고 해석하면 목구멍이 너무 아프니까.
3. 기분 나쁜 일을 약자에게 풀려는 의도.
4. 학생들의 정신력 강화를 도우려고.
5. 남을 괴롭히는 일에서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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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9-08-20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찐따가 뭐예요?
왕따와 비슷한 말인가요.
암튼 학교 다닐 때 저런 친구들 몇 명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네요.

이매지 2009-08-20 09:28   좋아요 0 | URL
왕따랑은 좀 다르구요,
찐따=찌질이랄까요 ㅎㅎ
 
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절판


라디오 방송작가는 경제적으로 작문하는 법을 배운다. 30초짜리 발언을 15초로 줄일 때 어떤 왜곡도 없이 해내기는 불가능하다. 방송인은 내용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게 편집하고 경제적으로 줄이는 법을 배운다. 원칙을 배워나가면서 기량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52쪽

신문이나 병문안 카드를 읽으려 애쓰지 않을 때라면 실독증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하늘도 푸르게 보였고 태영도 병원 창문에서 빛났으며 갑자기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실독증은 오직 내가 책에 고개를 처박을 때만 존재했다. 내게 실독증을 데려와 '그래, 문제가 있지'라고 상기시키는 주범은 인쇄물이었다. 자연스레 독서를 피하고 싶다는 유혹이 생겼다. '무언가가 너를 괴롭힌다면 그걸 멀리하라. 그래도 지구는 돌고 돌 테니.' 그런 해법이 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작가다. 더구나 끊임없는 독서가였다. 어떻게 독서를 멈출 수 있겠는가?
병원에게 깨달은 것은 책읽기가 아무리 느리고 어려울지라도-지독히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나는 어쩔 도리 없는 독서가라는 것이다. 뇌에 들이닥친 돌풍도 나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나는 열혈 독서광이다. 심장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독서를 멈출 수는 없다. 독서는 내게 뼈이자 골수, 림프액이자 피다. -80~1쪽

작업을 하다가 쓴 지 일이 분만 지나도 못 읽는 글이 화면에서 깜빡이는 것을 보노라면 대체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나 자신도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이 미친 짓을 하는 걸까? 대체 무엇을 증명하려고? 이미 책을 열 권이나 썼는데 이 고생을 자초할 까닭이 있나? 이제 더는 키보드에 손에 얹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불평은 오래가지 않았다. 글쓰기는 '내가 하는 일'이었다. 나는 글에 중독된 사람이다. 비록 진지한 예술가 자격을 요구한 적도 문학을 한다고 행세하여 비난받은 적도 없지만 나 자신이 범죄소설을 거뜬히 써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평생 가장 잘 맞았던 직업이었으니까 말이다. -157쪽

작가로 살아가며 고대하는 것 중 하나가 원고를 집에서 출판사로 보낼 때의 두근거림이다. 아이를 학교에 처음 등교시킬 때처럼 기막힌 기분이다. 이것은 한 권의 책이 뛰어든 여정의 시작이다. 이제 책은 출판 시장의 전쟁터와 서평의 지뢰밭을 거치고 마케팅의 위험성과 구매자들의 변덕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한다.
물론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색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한 권의 책은 작가의 서재를 여러 번 떠났다가 여러 번 떠났다가 여러 번 되돌아온다. 언제나 미지막 순간까지 손질을 거쳐야 한다. 이 마지막 순간이 여러 번 되풀이될 때마다 각종 배송 회사들이 돈을 번다. 작가는 원고를 집 밖으로 보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다음번에는 그 책이 활자로 조판되거나 교정쇄로 넘어갔는데 최소한 최종고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럴 리 만무하다! 최종 순간의 정밀 편집 과정은 항상 더디게 진행되므로 마치 원고가 우리 집 위층 작업실에 투명한 고무줄로 묶여 있어 책이 편집자의 책상에 도달하자마자 도로 튕겨 돌아온다는 착각마저 든다. -182~4쪽

사는 게 그렇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다. 때로는 힘들고 혼란스럽지만 그 다음 날에 일이 쉽게 풀리면 보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면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울 때도 쉬울 때도 모두 같은 것의 부분일 뿐이다. T.S.엘리엇이 항상 지적하듯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싶을 때조차도 나는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나의 작품이 나와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작품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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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구판절판


나는 죽음 담당이다. 죽음이 내 생업의 기반이다. 내 직업적인 명성의 기반도 죽음이다. 나는 장의사처럼 정확하고 열정적으로 죽음을 다룬다. 상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슬픈 표정으로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고, 혼자 있을 때는 노련한 장인이 된다. 나는 죽음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죽음을 다루는 비결이라고 옛날부터 생각했다. 그것이 법칙이다. 죽음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만큼 죽음이 가까이 다가 오게 하면 안 된다. -13쪽

기분이 어떠십니까? 기자에게는 든든한 질문이다. 항상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놓고 묻지는 않더라도, 연민과 이해의 감정을 전달하는 척하면서 조심스레 위장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실제로는 연민과 이해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17쪽

내가 항상 <로키 마운틴 뉴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그렇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이곳의 동료 기자들 중에는 진짜 형편 없는 놈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덴버 포스트>가 그놈들에게 한 방을 먹이더라도 내가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이런 속내를 털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 것이 언론계의 속성이고, 경쟁의 속성이었다. 우리는 다른 신문사와도 경쟁하고, 우리끼리도 경쟁했다. 내가 편집국을 돌아다닐 때마다 일부 기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일부 젊은 기자들에게 나는 거의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남들이 기를 쓰고 갖고 싶어 하는 기삿거리와 재능과 출입처를 갖고 있는 영웅. 하지만 다른 기자들의 눈에는 분에 넘치게 편한 일을 맡은 한심한 놈으로 보일 터였다. 공룡 같은 놈으로. 그들은 나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건 상관없었다. 나도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나도 그런 처지였다면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97~8쪽

글렌의 말은 대부분의 기사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언론계에 이타주의는 별로 없었다. 기사를 쓰는 것이 공공서비스라는 의식도 없고, 국민의 알 권리도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쟁이었다. 신문사들은 저마다 기사를 잡으려고 이전투구를 벌였다. 연말에 발표되는 퓰리처상 수상자 명단도 지대한 관심사였다. 이건 비관적인 생각이었지만, 나처럼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냉소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전국적인 기사를 터뜨려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 뒤를 따라오게 만드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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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1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지요, 재밌지요? ㅎㅎ

이매지 2009-08-10 09:28   좋아요 0 | URL
코넬리는 이 책이 처음인데 완전 마음에 들어요 ㅎㅎㅎ
무지막지하게 두꺼워서 가방에 이거 하나 넣으니까 꽉 차요 ㅠ_ㅠ

다락방 2009-08-10 10:4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이 처음이었어요. 앞으로 더 만날 예정.
저는 너무 두꺼워서 들고 다니며 읽기 부담스러운지라 집에서 읽었지요. ㅎㅎ

이매지 2009-08-10 11:31   좋아요 0 | URL
어제 절반쯤 읽었더니 마저 봐야겠더라구요 ㅠ_ㅠ
다음부터는 집에서 다 봐야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