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능성이다 - 기적의 트럼펫 소년 패트릭 헨리의 열정 행진곡
패트릭 헨리 휴스 외 지음, 이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절판


그러니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가족이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레몬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이 세상에 온 셈이다. 아마도 우리 가족은 레몬보다 오렌지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오렌지가 더 달고 덜 시니까. 하지만 삶은 원래 이런 것이다. 싫어도 받아들고 가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애를 써본들 레몬을 오렌지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살면서 어떤 일이 생기든 포기하지 말고 맞서 부디쳐나가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러다보면 레몬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며 레몬으로 더 좋은 것 - 이를테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몬 머랭 파이 같은 -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19쪽

엄마는 넘어야 할 수많은 장애를 가진 나 같은 아이의 엄마가 된 것도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본래 한 가족이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면 엄마는 불굴의 의지를 타고난 사람이다. 엄마는 그저 나를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더 멋지게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걸 지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엇지만 엄마는 알 수 있었다. 이 걸음을 떼기 전에 먼저 하느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고. 그러다보면 언젠가 이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 오리라고. -27쪽

우리는 누구나 과거를 바꿀 수 있기를 원한다.
"지금의 '이 일' 대신 '저 일'이 일어났다면 내 삶이 얼마나 멋질까?"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 당신을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할 뿐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이 진리를 터득했기에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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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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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이 절반을 차지하는 여행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여행을 위한 책인지 책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보다 나는 여행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자신을 위한 여행인지 타인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 여행을 과시하는 사람은 진짜 가진 게 없어서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기념품도 사지 않는다. 그건 여행에 방해만 될 뿐이다. 여행은 자유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글을 쓰는 건 좋아한다. 글은 사진이나 기념품보다 덜 사치스럽고 진지하고 사려깊다. 여행지에서 쓴 글은 거짓이 아니고, 그때의 글은 과시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기를 들여다보고 돌보기 위함이다. 우리의 삶 중 머리와 가슴이 가장 열려 있을 때는 여행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곤 한다. -13쪽

절망하는, 절망했던 청춘은 어딘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 앞에 놓인 절망의 종류는 그리 다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쉬었다 가실 거예요, 주무시고 가실 거예요?"처럼. 물론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모텔 카운터 앞에서처럼 절망의 종류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오로지 한 가지뿐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선택이라는 골치 아픈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란, 눈 딱 감고 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 -18쪽

나도 이 여행이 이렇게까지 길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길어봐야 한두 달 정도면 끝날 거라 예상했다. 여행이 길어진 건 다 편지 때문이었다. 나한테 온 답장을 읽기 위해서라도, 답장에 또다시 답장을 하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일찍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집으로 도착한 답장은 한 통도 없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갈 이유 또한 아직은 생기지 않은 것이다. 나중에는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라는 오기가 발동해 지금까지 오게 된 것도 있었다. -78~9쪽

"그때는 왜 장사꾼이라고 했어요?"
"난 틀린 말 안 했어. 소설가도 결국 자기 소설을 팔아야 하는 장사꾼이야.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 좋은 품질의 소설을 써내야 하고, 브랜드 가치를 올려야 하지. 예술을 가장했다는 차이밖에는 없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왜 직접 자기 소설을 파는데요? 서점에 맡기면 알아서 다 팔아주잖아요."
자기가 자기 소설을 파는 일은 자기가 자기 몸을 파는 것만큼 힘든 일 같다. 내가 그 말을 꺼낸다면 여자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가 만든 빵이나 김밥을 자기가 파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러나 누구도 김밥을 사면서 그 김밥을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김밥이란 원래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가 파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남의 손에 의해 팔려나가야 품위가 손상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상업적인 이미지와 결합할수록 천박하다는 누명을 쓴다. 자기 소설을 자기가 팔아야 한다면 과연 누가 소설을 쓰려고 할까?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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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10-07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넘 보고 싶어요.

이매지 2009-10-07 09:44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요.
하늘바람님도 어여 보세요 ~

다락방 2009-10-07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책인데 이매지님이 밑줄 그으신 부분이 다 와닿네요. 특히 13쪽에 '나는 여행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자신을 위한 여행인지 타인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 하는 부분요. 가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남에게 말하기 위해서 여행을 다녀온 것 같다'는 이미지를 받거든요.

보고싶은 책이 또 한권 늘었어요. 조용히 담아갑니다.

이매지 2009-10-07 09:44   좋아요 0 | URL
나온지 얼마 안 된 따끈한 책이예요 ㅎㅎ
오늘 다 읽었는데 다락방님 취향에도 잘 맞을 것 같은 책이었어요~

미미달 2009-10-0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책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책 한 권이 일주일 걸리는데.

이매지 2009-10-08 13:03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책은 열심히 해치우고 있는데,
리뷰 쓸 시간이 없어서 밀린 리뷰가;;;
그리고 미미달님은 영어로! 책 읽으시잖아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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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는 케이케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내가 여자임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웃음을 머금은 케이케이의 눈동자에 비친 얼굴이었다. 양쪽 눈동자에 하나씩, 모두 두 개의 얼굴. 지금의 내 얼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런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만족한다. 분명한 건,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미 오십대 후반이고, 얼굴은 점점 야위어가고만 있다. 그건 주름이 늘어난다는 소리다.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사랑이 뭔지 모른다. 케이케이를 사랑하던 세포들은 이제 내 몸 안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오랫동안 두 눈을 감지 못한다. 눈물이 흘러내릴까봐. -10쪽

뭔가를 예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 뒤 부푼 기대에 가득 차 올려다보는 창밖의 달무리,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건만 똥이 마려운 것인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내게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면접관, 밤을 새워가며 일주일 만에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과제를 모두 끝마친 뒤 제일 먼저 도착해 잠시 책상에 엎드린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나서 깨어나 바라보게 되는 텅 빈 강의실. 둥근 달무리나 똥 마려운 얼굴, 혹은 어느덧 지나가버린 한 시간을 통해 우리는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와 같으니까. 모든 일에는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톱니바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63~4쪽

지금 이 도로가 왜 막히는지 알아? 예, 라디오에서 노점상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지겨움 때문이야. 내가 말했습니다. 신문에서 그 자살한 노점상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 마흔세 살. 내 나이와 같더군.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68쪽

그러다 어느 결엔가 그녀가 내게 말했다. "맞아, 좋았어. 우리 참 좋았어. 그렇긴 하지만 우린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그 말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또 슬프게 만들었다. 우선 '맞아'라는 말 때문에, 그 다음에는 '그렇긴 하지만'이라는 접속사 때문에. 맞아. 그렇긴 하지만. 맞아. 그렇긴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간 나는, 예컨대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주방 테이블 위에 식빵을 일렬로 쭉 늘어놓으면서, 혹은 도서관 앞 휴식공간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마치 나의 앞날처럼 불안하고 흐릿하기만 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말을 되뇌었다. -71쪽

좋은 술과 후회 없는 인생이란 그런 풍토에서 빚어지는 것. 술과 인생은 무더운 여름날 꺼내놓은 생선과 같으니, 그 즉시 음미하지 않으면 상해버리고 만다. -204쪽

"고통에 대해서 직접 말하는 건 소설이 아니고, 에세이죠. 소설은 단지 작가가 아는 고통을 이야기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내가 죽음을 예감하는 그 권투선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난 소설로 쓸 수 있어요."
"그럼 다시 묻죠. 고통이 뭔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소설가에게 고통이란 자기가 쓴 소설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책이 안 팔리는 일이지요."-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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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절판


노부유키는 눈 아래 펼쳐진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거대한 파도는 노부유키에게서 빼앗아간 말과 함께 눈 깜짝할 새에 바다 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경내 한가운데에는 파도가 남기고 간, 물에 젖어 검게 빛나는 바위가 놓여 있었다. 주위 나뭇가지 끝에는 길고 검은 머리칼처럼 해초가 어지러이 걸려 있었다. 그 사이로 은빛으로 튀어 오르는 빛 몇 개가 보인다 싶었는데, 그것은 달빛에 비친 물고기의 배였다.
그 모습은 무(無)였다. 새카만 어둠이 펼쳐질 뿐이었다. -36~7쪽

남편과 두세 번 만났을 때, '이 사람은 사랑을 안다'고 나미코는 생각했다. 눈빛이나 언동이나 세상을 대하는 자세 하나하나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미코는 아무도 사랑한 적 없는 인간들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끝내 배우지 못하는 인간들을 알고 있었다. -136쪽

다스쿠는 어릴 적부터 동정과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는 데 익숙했다. 사람들은 좀처럼 '부모'라는 존재가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일상적으로 구타를 당해온 다스쿠는 매 맞는 자기 자신을 금방 받아들였지만, 아이를 때리지 않거나 부모에게 맞아보지 않은 어른과 아이들은 '부모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해서는 안 된다, 할 리가 없다'고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세상에 자식을 때리는 부모가 있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말을 안 듣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마침내 별것도 아닌 이유로 매를 맞는다는 걸 인정해도 가엽다며 멀찍이서 바라볼 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야단을 칠 거라는 생각에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이 폭력으로 메워지고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갑자기 거북한 듯 시선을 돌려버린다. 폭력도 사랑의 일종이 아니겠냐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이대며 납득하려 든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간단히 뒤바뀔 가능성이 있고 증오로 변질되기 쉬운 것이라는 걸 똑똑히 바라보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192~3쪽

노부유키에게 있어 대부분의 사건은 그저 단순한 점에 불과했다. 작은 점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언뜻 보면 선 형태를 띠는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하나하나는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점이고, 더듬어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생물을 포함해 모든 물체가 원자로 이뤄지고, 그 원자도 더 작은 것들의 집합이며, 개체로서 자립적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빈틈투성이인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먼지가 되고, 단순한 점의 집합체였음이 명확해질 것이다. -227쪽

단지의 한 집에서 밥을 짓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노부유키와 잠자리를 한다. 열중할 일이라고 해봐야 딸의 교육문제뿐이다.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는 아내는 사바나 한가운데 느긋하게 드러누워 있는 초식동물 같았다. 목덜미에 어금니가 박혀도 얌전하게 긴 속눈썹을 내려뜨린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태도라면, 신뢰는 나태와 같다고 노부유키는 생각했다.-243쪽

누구도 그 짐승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거대하고 흉악한 짐승에게 삼켜지고 다시 게워지고, 그걸로 끝이다.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 -257쪽

죄의 유무나 언동의 선악에 관계없이 폭력은 반드시 들이닥친다. 그것에 대항할 수단은 폭력밖에 없다. 도덕, 법률, 종교, 그런 것에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은 단순한 바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비틀리고 고통당한 경험이 없거나, 어지간히 둔하거나, 용기가 없거나, 상식에 길들어 포기했거나 그중 하나일 것이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은 적이 있는 노부유키는 잘 알고 있었다. 폭력으로 상처 입은 자는 폭력으로밖에 회복할 수 없다. 주위의 사랑과 격려와 도움으로 다시 일어선다? 그런 건 무리다. 노부유키는 처자식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야말로 지속하는 사랑의 정체다. 노부유키는 처자식을 거의 사랑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신음한다. 평화로웠던 시절의 섬 풍경이 꿈에 나타나 노부유키를 괴롭혔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식의 땅은 없다. 폭력에 상처 입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263쪽

동정이나 애정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는 한, 형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자기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준 자가 설령 교도소에 3년 동안 갇혀 있다고 한들 아무런 기쁨도 감정도 느낄 수 없다. 형벌은 기껏해야 '이 정도로 참아줘'라며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덮고 얼버무리는, 반창고 정도의 힘밖에 갖지 못한다. 배가 고파 죽어가는 생물에게 먹을 것과 비슷하게 생긴 발포 스티로폼 모형을 주고 배를 채우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마워하며 모형을 베어 무는 놈은 어리석다.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공복으로 몰아넣은 놈을 찾아 죽여서 굶주림을 채우거나, 공복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방법, 둘중 하나뿐이다. 일시적으로 기아를 채운다 해도 언젠가는 또다시 배를 주릴 일도 생긴다. 그러나 한계가 없다고 절망할 만한 일도 아니다. 죽으면 해방된다.
사실은 이 무정한 이치를 누구나 알고 있다. 모르는 체하며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여유가 있으니까. 내일 죽는 일은 없다고 믿고, 애정을 믿고, 죄를 범한 자에게는 벌이 내려질 거라고 믿고, 죽음에도 불행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믿는 척하며 살아간다. -280~1쪽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편하게 운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을 노부유키는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평온과 구원을 찾아내는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미 따윈 없다. 죽음도 불행도 단지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것들은 그냥 다가온다. -281쪽

원하는 대상은 자신을 원치 않고, 원치도 않는 대상은 자신을 원한다. 나도, 미카도. 정말이지, 흔하디흔한 불행이다.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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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5월
절판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크게 한쪽으로 흔들리면 반드시 반대쪽으로도 그만큼 흔들린다. 말에도 그것과 비슷한 데가 있어서, 무언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말은 그 의미가 강할수록 반작용으로 반대 의미도 강해진다. -8쪽

"사람과 개는 공범 관계지요."
다나카 겐조는 흠칫 놀라며 남자의 옆얼굴을 본다.
마치 지금 자신이 한 생각을 간파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지금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던가?
"남자는 항상 구실을 찾으니까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했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도, 자기가 혼잣말을 한 것도 아닌 것 같다.
"회사, 술, 담배, 개의 산책. 모두 남자가 발명한 구실입니다."
"무슨 구실?"
다나카 겐조가 묻자 남자가 대답했다.
"집에서 나가기 위한 구실, 집에 돌아가지 않기 위한 구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기 위한 구실이죠."
"호오, 우리는 마음속으로 집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로군요."
"아마도요. 설령 아무리 마음 편한 장소라 하더라도 말이죠."-197~8쪽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 숨기기 위해.
비밀이란 희안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비밀이어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밀이 아니기도 하다.
그 내용 역시 특별한 기술이기도 하고, 부모 자식 관계이기도 하고, 보물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다. -272쪽

잊는다는 것은 커다란 죄이다. 그러나 잊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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