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구판절판


삶이란 별 게 아니다. 젖은 우산이 살갗에 달라붙어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자 한결 견딜 만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녀는 그 문구를 계속 되뇌었다. 삶, 젖은 우산, 살갗, 참고 견딘다. 삶, 젖은 우산, 살갗, 참고 견딘다……-9쪽

큐브 속의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습니다. 웃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맹렬히 웃고 있습니다. 으하하하하하. 큐브 속의 남녀, 큐브 속의 가족, 큐브 속의 친구들은 오직 웃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 큐브들은 불길합니다. 어쩐지 큐브 속의 사람들, 아크릴 큐브 속에 얼굴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그 사람들은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84쪽

어쩌면 인간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의 울음소리를 완벽하게 흉내내는 폴리네시아의 원주민처럼, 자칼의 가면을 쓰고 행진하는 아마존의 어느 샤먼처럼, 인간은 어떤 순간 완벽하게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정말 인간은 삶의 전 순간을 오직 인간으로만 사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개나 돼지, 새나 물고기인 그 어떤 순간, 그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때가 간혹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이 전생을 믿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의 긴 윤회 과정 어디쯤에선가 왜가리나 멧돼지, 코끼리나 흰소였을 수 있다는 믿음은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일까요?-87~8쪽

"……있는 거야?"
그녀가 묻습니다. 나도 궁금합니다. 나는 있는 걸까요? 정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내 육신이 거기 있다고 해서, 응, 있어, 나 여기 있어, 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아, 대저 존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분명 여기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고 그녀가 느낄 고통을 미리 느끼고 있는데, 그런데 나는 과연 없는 것일까요?-99쪽

혹시, 이 남자(혹은 여자) 때문에 내가 타락해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벌써 회복 불가능하게 타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타락해버린 누군가를, 그런 줄도 모른 채 너무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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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절판


마지막 남자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생겼다. 나이는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른다섯 살쯤 됐을까. 피부가 하얀 것이 흡사 귀족 수재 같았다. 눈은 학자처럼 지적이고 몸에는 시인처럼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도는데다 입매는 스포츠맨처럼 야무졌다. 갈색 양복에 색이 잘 맞는 줄무늬 넥타이를 단정하게 맸고 넥타이핀과 커프스버튼도 튀지 않는 점잖은 취향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하다 형사는 처음에 그를 선망에 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공항이 비에 휩싸인 순간 그 남자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는데도 그것이 비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몇 초쯤 걸리는 모양이었다. "비다, 비다."하고 소리치면서 두 발을 모으고 깡충깡충 뛰었다., 그 뛰는 모습으로 보건대 운동신경 쪽이 영 절망적인 듯했다.
그것을 보더니 볕에 그을리고 깡마른 카메라맨이 "아아, 아아."하고 소리쳤다. 그제야 하다 형사는 그 남자의 이름이 '아아'라는 것을 알았다. -13~4쪽

우연히 일어날 일을 예측할 때, 인간은 대개 세 가지 사고방식을 따른다고 합니다. 지금 이 주사위로 예를 들자면, 처음에 1이 나왔을 때 다음번에도 1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하나. 진짜 도박사 중에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과 같은 사고방식이죠. 두 번째는 처음 나온 눈을 아예 무시하는 생각입니다.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대단히 지성적이고 인정에 좌우되지 않아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남은 세 번째 사람들의 사고방식 말씀인데, 실은 이 중에 시바 씨도 끼어 있습니다. 이 그룹 사람들은 처음에 1이 나왔으니 두 번째는 1이 또 나올리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오늘 비가 좍좍 쏟아지고 있으니까 내일은 안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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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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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아름다움. 고상하고 위엄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향고양이인 양 전신에서 발산하는 성적 매력, 물론 그녀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모르고 있으니까 무서운 것이다. 위험한 것이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남자를 응시한다. 아무 생각 없이 눈썹을 찌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미소 짓는다. 그리고 악의 없이 뺨을 붉히고 한숨을 쉰다. 하지만 표정이 변할 때마다 영혼이 전율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순수한 그녀의 눈이 자신을 볼 때마다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게다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름다운 동백 숲을 헤매면서 긴다이치 코스케는 전율한다. 몇 날 며칠이고 전율한다. 그는 지금 그녀를 여왕벌이라고 칭한 경고장의 문구를 떠올리고 있다.
그녀 앞으로 많은 남자의 피가 흐를 것이다……. 아아, 일단 그녀를 보면 그 불길한 문구를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 같은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리라. -6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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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10-07-2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 '팜므 파탈'이 떠오르네요.ㅎㅎ

이매지 2010-07-21 15:11   좋아요 0 | URL
책 속에서 나름 소박한(?) 섬처녀가 팜므파탈이 되어가요 ㅎㅎ
 
성녀의 구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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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지."
그 말에 구사나기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 미미한 가능성에 걸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시지. 나는 순리의 길을 갈 테니까."
"그래, 자네가 가고 있는 길이 순리라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만사에는 예외라는 게 있어. 과학의 세계에서는 그 예외까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고."-254쪽

내가 소거법 운운했는데, 가능성 없는 가설을 하나하나 제거하다 보면 단 하나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지. 하지만 가설을 세운 방식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다면 아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공룡의 뼈에만 정신을 팔다 보면 때로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얘기야.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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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사는 남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6월
절판


탐정소설가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사실적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발생한 범죄사건에 흥미를 갖고 그 사건에서 소설의 소재를 끌어내려는 작가다. 다른 한쪽은 공상적이라고나 할까, 황당무계한 창작물에만 흥미를 갖고 현실의 범죄사건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작가다. -11쪽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란 게 대부분 결말이 없는 만담 같은 이야기다. 출발점만 상당히 괴기적이지 그 진상은 마치 어린애 짓처럼 단순해 의외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게 보통이다.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도 우연과 발품이 중요한 요소일 뿐 순수한 추리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거의 없다.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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