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 단맛 쓴맛 매운맛 더운맛 다 녹인 18년 사랑
김찬웅 엮음 / 글항아리 / 2008년 4월
절판


내가 늙어서 손자가 없다는 것을 늘 걱정해주었는데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며 너무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 것이니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다. 어린아이를 감싸고 아끼는 데 있어 비단과 구슬로 옷을 곱게 꾸미고, 여러 가지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여 아이의 복을 해치는 일이 많다.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무거우면 조물주가 시기해서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경계하라고 이른 것이다. -75쪽

아이 기르는 일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 필요는 없지만 내가 그리 하는 것은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귀양살이를 하는데 벗할 동료가 줄어들었고, 살아갈 뚜렷한 방도가 없어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혼자 외롭게 지내는 처지였다. 날이 저물 때까지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한가롭게 편지를 펼쳐 읽으면서 그 위에 고을을 다스리는 조희 군과 귀양을 간 조카 이염, 귀양을 온 벗 유감 등이 써서 보내온 차운시를 붙여 훗날 즐길 거리를 만들어놓았다. 아울러 습좌習坐, 생치生齒, 포복匍匐 등의 짧은 글을 적어 그리워하고 연모하는 뜻을 덧붙였다. 손자가 커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문자에 나타나 있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92~3쪽

"네가 전염병을 앓는 것은 사뭇 험한 액운이다. 불길하고 위태로운 상황이 한 달 남짓 계속되어 내 몸이 대신 아프기를 바랐었다. 다행히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매번 스스로 마음 아파했는데 부모님의 은혜 어찌 갚을까. 하늘같은 어머님 은혜 크고 넓다는 것을 손자를 키워보니 모두 다 알겠다. 내 몸을 위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이 본래 곧기 때문이다. 날마다 다른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노니 네 자신이 잘 자라서 마침내 군자가 되어 덕망 있는 훌륭한 가문을 이루게 되면 당연히 아름다움 누리고 쇠퇴해가는 가문의 계통을 밝게 이을 수 있을 것이다. -121쪽

자세히, 천천히 깨우쳐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성급하게 다그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때때로 나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가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133쪽

아이를 때리는 것은 내가 모질어서가 아니다
아이의 나쁜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버릇이 들어 끝내는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몸에 익으려는 바로 그 순간
꾸짖고 야단쳐서 바로잡아야 한다
내가 성내며 회초리를 든 이유는
벌을 주어 화를 잘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이가 가엾다고 오냐오냐 한다면
모든 일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161쪽

네 자신이 그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조상님들이 복을 내릴지 어찌 알겠는가. 모든 일이 막힘없이 잘되어가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고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는 얻기 어렵다. 마음을 갈고닦아 덕을 갖추면 모든 행동에 잘못이 없을 것이다. 나이와 신분이 비슷한 사람 중에서 우뚝 서고 빼어나게 되어 행여 할아비처럼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거칠게 대하지 마라. 사내로 태어난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고 지금 사는 세상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꾸준히 나아가고 날마다 깊이 살피며 한순간도 헛된 것에 힘쓰지 마라. 부디 내 바람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면 항상 돌이켜보면서 오래도록 본받아라. -16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베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5년 4월
절판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밀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7쪽

서른이 된 지금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기쁨이 깊을 때 우수 또한 깊고, 즐거움이 클수록 괴로움도 크다. 이것을 따로 분리하고자 하면 처신을 할 수 없다. 정리하려고 하면 세상살이가 되지 않는다. 돈은 소중하다. 소중한 것이 많으면 잠자는 동안에도 걱정이 될 것이다. 사랑은 기쁘다. 기쁜 사랑이 쌓이면, 사랑하지 않던 옛날이 오히려 그리워질 것이다. 각료의 어깨는 수백만 명의 다리를 지탱하고 있다. 등에는 무거운 천하가 업혀 있다.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으면 아쉽다. 조금 먹으면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음껏 먹으면 나중에 불쾌해진다…….-9쪽

두려운 것도 그저 두려운 그대로의 모습이라면 시가 된다. 무시무시한 일도 자기를 떠나서 홀로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하면 그림이 된다. 실연이 예술의 제목이 되는 것도 순전히 그런 것 때문이다. 실연의 괴로움을 잊고, 그 다정한 면과 동정이 깃든 면, 우수가 어리는 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실연의 괴로움 그 자체가 넘치는 면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눈앞에 떠올리기 때문에 문학과 미술의 재료가 된다. 이 세상에는 있지도 않은 실연을 제조하고, 스스로 억지로 번민하고, 쾌락을 탐내는 자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평가하기를 어리석다고 한다. 미친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 불행의 윤곽을 그리고, 기꺼이 그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산수의 풍경을 그려 넣고 자신만의 별세계에 환히한다는 것과, 그 예술적인 입지를 얻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세상의 많은 예술가는 (보통 인간으로서는 또 모르지만) 보통 사람보다 어리석다. 미치광이다. -4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만히 거닐다 - 교토, 오사카... 일상과 여행 사이의 기록
전소연 지음 / 북노마드 / 2009년 1월
절판


내가 아는 한 사람은 누군가와 마음을 다해 만날 때면 '사귄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산다'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너를 산다" 그 말이 그렇게 근사할 수 없었다. 그 어떤 표현보다 진하게 들리는 '너를 산다'는 것은 어쩌면 여기가 아닌 그곳을 사는 여행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도시에 가서 사는 것. 긴 호흡으로 사는 여행이 불가능하다면 짧은 여행이더라도 일상적인 여행으로 여행의 방식을 바꾸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한동안 그곳에 살았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26쪽

한 권의 책이 여행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할 것이다. 공감이 안 된다면 당신은 취미란에 '독서'라고 한번도 쓴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39쪽

그것은 나에게 빈틈을 만드는 일이었다. 살면서 빈틈을 만드는 일은 삶을 무언가로 채우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쉽지 않다. 언제나 그랬다. 중요한 건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련하고 싶은 내 생의 빈틈은 '산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때로는 '여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겹겹이 쌓여진 일상에서 어떤 빈틈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면에서 산책과 여행은 닮은꼴이었다.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혹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5월의 미루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의 의지 같은 것이어서 자주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다. 다시 말하면 산책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간신히 몸을 돌려 코에 바람을 넣는 일이었고 나는 콧바람을 몹시 좋아했다. -54쪽

여행의 기회가 적은 사람들에게 휴가라는 이름으로 어렵사리 시간이 주어지면 내 인생의 다시 오지 않을 발걸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짧은 시간 동안 빡빡한 일정으로 발도장 찍는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만 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교토에서 맛있는 것을 찾아다닌 것처럼. -115쪽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와 당신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가 시작되기까지 나는 당신을 지켜볼 것이고
가끔씩 미소를 보내기도 할 것이다.
당신과 나와의 거리는 가까워지거나 혹은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깝고 먼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당신이 내 뷰파인더 안에 있느냐 없느냐이다.
당신 주변을 서성거리던 나는 호흡을 멈추고 셔터를 누르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결정적 순간은
불과 몇 초 안에 찾아온다.
그러니 타이밍을 놓치지 말자. 사랑이든 사진이든 타이밍의 문제다. -16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10년 9월
구판절판


등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길을 걷는다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체력에 달려 있다. 재능이란 측면은 극히 사소한 영역에 불과하다. 그러나 암벽을 짚고 오르는 행위에는, 대전제로서 체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다.
밸런스, 리듬, 자기감정의 컨트롤. 바위를 오른다는 행위에는 등반자의 노력만으로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그건 어떠한 이름이 붙은 기술이나 방법도 아니다. 재능이라는 모호한 호칭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체력에 배포도 있고 기술까지 고루 갖춘 클라이머라면 실수하지 않는 한 별 문제 없이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경력이나 기술, 체력 면에서 분명하게 뒤지는 초심자에 가까운 사람이, 베테랑도 일정 속도 이상 내기 힘든 암벽을 너무나 가볍게 올라버리는 일이 있다. 그건 천성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산에서 짐을 짊어지고 오를 때는 둔중한 타입으로 보였던 인간이, 바위에 오르면 전혀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그런 인간의 암벽 등반은 빠를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물살과 같은 리듬이 느껴진다. -105쪽

사람은 살아가야만 한다.
나도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 모르지만 살아가야만 한다. 안락한 시간일지 고달픈 시간일지 모르지만, 죽기 전까지 그 시간을 살아가야만 한다.
어차피 살아간다.
살아야 한다는 걸 안다.
그걸 안다면, 죽기 전까지의 그 시간을, 뭔가로 채워넣어야만 한다. 어쨌든 뭔가를 채워야 한다.
그걸 안다면…… 어차피 시간을 채워야 한다면,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를 이해, 정체를 알아내지도 못할 대답, 밟지 못할지 모를 정상을 향해 발을 내디뎌보는 것도, 그런 식으로 채워가는 것도 나의 방식이 아닐까.
파란 하늘 위로 쭉 뻗은 한 점. 이 지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장소. 지구의 정상. -210쪽

인생도 날씨와 같다. 사람은 살아가며 조우하는 모든 일마다 매번 결론을 맺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 대부분은 그대로 미뤄둔 채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건 뭔가를 미루며 걸어간다는 것이다. 번거롭다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다 내버리고 혼자만 고고히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495~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장바구니담기


조선시대는 조상의 잘못을 후손에게 묻는 독특한 제도가 많았다. 과거 시험을 못 보게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니 어떻게 권신들이 서점 설치를 허가해주겠는가. 또한 서점에 전시될 책들은 시장 논리에 따라 '이념'보다는 '재미'가 앞서게 될 것이었다. 훈신들은 그것이 두려웠다. 연산군 시절 중국에서 건너온 온갖 소설과 패관잡기류가 어두운 곳에 묻혀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게 된다면 도덕이 설 곳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우려했다.
조선의 관료 세력은 백성들이 책을 다양하게 읽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생활에 필요한 유학서들은 이미 성종 시절 서거정이 "경사자집經史子集이 없는 집이 없다"고 할 만큼 충분히 보급되어 있었다. 구더기가 득시글대는 여름에 구태여 장을 담글 필요가 없었다. -46~7쪽

혁명은 이질적인 것을 참지 못한다. 마치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려는 담금질처럼 인간을 내려친다. 깊은 생각과 복잡한 사변은 이데올로기라는 칼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식이다. 조금이라도 거슬린다면 떼어내면 그만이다. 이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책에도 해당된다. 심오한 사유를 담은 책은 시대를 타고 나면 빛을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찢겨지고 불태워진다. -73쪽

예로부터 삼치三痴라 하여, 바보에는 세 유형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책을 빌려달라는 사람도 바보지만 빌려주는 사람도 바보요, 빌려보고 돌려주는 사람도 바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독서가나 장서인들 사이에 떠돌면서 일종의 불문율로 받아들여지고 정착된 단어다.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아무래도 인간이 영원한 물욕物慾, 그중에서도 책에 대한 집착만큼 고집스럽고 병적인 것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43쪽

상상력의 소산이든 현실의 기록이든 실용 지식을 모은 것이든 간에 모든 책은 사유의 결과물이다. 그 사유의 종류와 빛깔, 농도에 따라서 책은 평가를 받는다. 때론 그 평가가 너무 따갑고 아파서 책은 핏빛으로 물들기도 한다. 그것이 합당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러하다. 하지만 어떤 책에는 사유보다는 운명이 앞서 있는 경우가 있다.-15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