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구판절판


소박하고 느긋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역시 풍요로운 자연에 기반을 둔 '지속 가능한 친환경 경제'의 구상과 창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씩 뺄셈을 시작하여 서서히 줄여가는 길밖에는 없다. -17쪽

한쪽에 더 빨리 효율적으로 도달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여기서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양자택일의 시험에 빠져들 필요는 없다. 인생에는 그 두 가지 길이 모두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인생을 A지점에서 B지점으로의 이동만으로 여기고, 산책 쪽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즐길 때처럼, 목적과 수단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무엇이든 존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지니고 있는 것일까? 효율성, 생산성 같은 경제 척도로 이 귀중한 자유를 낭비라는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21쪽

노는 즐거움, 자신이 어딘가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해방되어 지금을 사는 자유, 그저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인정하자. 그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라 여기면서, 단순한 취미나 여가에 속하는 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 본질적인 시간의 사용 방식으로서 말이다. -22쪽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무가치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그 자체로는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노동력의 재생산이나 오락 산업의 번영을 위한 것일 때라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용서받기 힘든 일. 그냥 걷기 위해서 걷는다거나 그저 빈둥거리고 싶다거나 또는 그저 멍하니 경치를 바라보는 일은 게으름뱅이나 하는 짓이다. 그저 살아가고 살아 있으니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32~3쪽

두말할 것도 없이 음식과 주택 모두 우리 문화의 근간이다. 슬로 푸드가 먹는 행위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 관계를 다시 보고, 먹는 행위의 의미를 재정립하려 애쓰고 있듯이, 슬로 디자인 또한 주거의 문제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재정립하여 제대로 된 공정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는 친환경적인 삶의 방식으로 '제대로 살기' 위한 하나의 시도인 셈이다. -35쪽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남을 사랑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기다림을 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55쪽

하지만 인생이란 애당초 이러한 잡일의 집적이 아니던가. '할 수만 있다면 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다'고 여기는 일들이 실은 우리들이 '삶의 보람'이라 느낄 만한, 우리에게 깊은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의 흐름들은 아닐는지. -65쪽

지금 세계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의 대전환 속에서, 우리는 바구니 속에 던져 넣었던 것을 다시 하나하나 끄집어 내서 살펴보고 있다. '잡스러움'이야말로 그것들의 키워드인 셈이다. 생태계의 잡초, 숲속의 잡목, 농업과 먹거리의 잡곡처럼, 잡담, 잡역, 잡음, 잡화, 잡학, 잡지, 잡종, 잡념 등과 같은 일이나 사물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스산한 것이 될까. 조잡하고 잡다하고 번잡하고 복잡한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66쪽

소비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갖고 있으니 나도 명품 가방을 사야 한다'는 심리는 혼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근거하고 있다. 새로운 옷을 살 때의 기쁨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줄근해 보일지 모를 자신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소비 행위는 타자와의 경쟁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다. -79쪽

어찌 보면 현대사회가 바로 공포의 체제인 듯하다. 거기서는 돈으로 안심을 사들이고, 경쟁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일종의 '의자 빼앗기' 게임과도 비슷해서, '더 많이, 더 빨리'라고 외치며 늘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아슬아슬한 자세로 영원히 얻을 수 없는 안심을 뒤쫓고 있다. 그것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슬로다운'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의 연쇄로부터 걸어 나오는 일이다. 이 공포 시스템에서 플러그를 빼는 일이다. 공포라는 가파른 오르막 산을 내려와 거기로부터 몸을 돌리는 일이다. 힘들게 오른 산 너머에 안심이 기다리고 있을 리 없으므로. 그렇다면 안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찬찬히 살펴보면 안심의 씨앗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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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느낌 있다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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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놀이, 한참 배우의 길을 걸어오다가 얼마 전에 들어선 또다른 길, 화가라는 이름이 스스로 어색해서 그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뻘춤함을 느낀다고 해서 화가의 길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게 그림은 연기만큼 절대적인 것이니까.
무엇보다 내게 배우와 화가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얼굴이다. 배우가 쌀로 밥을 짓는 일이라면 화가는 그 찌꺼기로 술을 담그는 일 같다고 설명하면 어떨까. 같은 재료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 방법에 따라 결과물은 전혀 다르게 나온다.
운동선수처럼 독하게 훈련하고 경기에 임하는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 그렇게 밥과 같은 연기가 만들어진다. 그러고 나면 몸과 마음에는 잔여물이 생긴다. 연기로는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 그것을 끄집어내어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술과 같은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림이 나를 회복시키고 다시 연기에 정진하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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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1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며 화가 놀이라 하네요. 재미있고 하고 싶어 해야 진짜가 나오겠지요.
멋진 배우네요. 연기의 허무를 그림으로 푼

이매지 2011-05-16 23:09   좋아요 0 | URL
읽고 있는 중인데 참 진솔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중간중간 실린 작품을 보는 재미도 쏠쏠.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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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9쪽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9쪽

처음엔 이치로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향후 30년 동안은 질 생각이 없다니, 모름지기 프로라면 그래야 한다. 승리만을 예감하는 '오만과 편견'이 프로를 아름답게 한다. 그런데 그는 졌다. 지고 난 후의 이치로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화를 냈고 굴욕적이라고 말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국가와 민족에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후지 산이 무너진 것도 아니다. 한 수 잘 배웠노라고 말하고서 쿨하게 돌아섰어야 했다. 프로는 질 수도 있다. 패배조차 즐길 줄 아는 배짱이 프로의 미덕이다. 패배 이후의 첫번째 표정, 그것이 한번 프로를 영원한 프로로 만든다. -232쪽

그래서 '심플'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 의미, 의미, 의미들. 국가, 민족, 국민 이런 거 빼고 그냥 심플하게 즐기면 안 되겠니?" '레종'씨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환상과 나쁜 환상이 있소. 멋진 나라 대한민국에서 온 국민이 하나 되었다는 환상, 좋지 않소. 그대에게 담백한 이성을 권하오." '시즌'씨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니까 쿨하게 가자고요. 스포츠도 인생도. 잊어요. 우리에겐 늘 다음 시즌이 있잖아요." 게임은 그저 담배 한 개비처럼 무의미하고 담백하고 또 신속히 망각될 때 아름답다. 그러니 화내지 마, 이치로. 굴욕이라니, 이치로. 당신은 그저 '게임'에 한 번, 아니 두 번 졌을 뿐이라고. -233쪽

5월은 쑥스러운 달이다. 기념일들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쑥스럽고 자식은 부모에게 쑥스럽고 제자는 스승에게 쑥스럽다. '안 하던 짓'을 할 때 우리는 민망해진다. 364일을 '하던 짓'만 해왔으니 별 수 없는 것이다. 주일날 회개하여 다시 일주일을 죄짓고 살 힘을 얻는 엉터리들처럼, 사랑이 넘치는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364일 동안을 무심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얻는다. 그러니 기념일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알리바이가 필요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말하자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은 어린이와 어버이와 스승을 위한 날이 아니다. 부모, 자식, 제자를 위한 날이다. 이것이 기념일의 역설이다.-236쪽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서 하는 말이다. 기념일의 역설 운운했지만, 어쩌면 이것조차 옛말이 아닌가. 스승의 날이 성립되려면 '스승'이 있어야 하고 스승이 있으려면 자신을 '제자'로 간주하는 이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를 '그분'의 제자라고 믿는 사람, 스승의 날에 별수 없이 쑥쓰러움을 느끼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스승의 날에 가장 쑥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스승의 날' 자신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있는 거지?" 사실을 말하자면,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스승은 TV와 인터넷이다. 거기서 무한경쟁 시대의 생존법과 서푼짜리 지식을 배운다. 오늘 누군가는 옷깃을 여미고 모니터에 카네이션 하나 달아주었으리라. -236~7쪽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환상이 있고 그 환상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그것이 무너지면 삶도 더불어 무너질 것이다. 그가 손목을 그은 이유다. 사랑은 이렇게 순수하면서도 병리적인 감정이다.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것이 '교환'일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그 교환은 늘 어긋난다. 그가 원하는 것을 그녀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차라리 그가 갖고 있는 것을 망가뜨리는 길을 택한다. 그것은 그의 전부였고 그래서 그 훼손은 치명적이었다. 반면 그녀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얻었다. 이렇게 사랑은 부조리한 교환이다. 5를 받아도 +5가 되지 않고, 5를 준다고 -5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적이고 또 사랑의 불행이다. -252쪽

선정성을 둘러싼 이 해프닝 속에서 외려 본질적인 것들은 간과된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런 사례들이 '논란'의 대상이 될 만큼 내실이 있는 것이기는 한가. 이를테면 선정성에도 품격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은 갖추어야 선정성의 사회학을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주류 대중음악의 노랫말은 어설픈 영어 문장들로 맥락도 없이 '들이대는' 유혹의 수사학에 점령돼 있다. 논란은커녕 논의 자체가 불필요할 정도로 의미의 영양실조 상태다.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면 좋겠다. 한국 대중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매직 스틱과 크리스털보다 중요한 것들은 이 세상에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263쪽

확실히 우리네 애국심에는 어딘가 강박적인 데가 있는 것 같다. 잦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 경험 탓이라고 설명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나치게 강박적인 애국심의 이면에 무의식적인 열패감이나 뿌리 깊은 자괴감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자신감이 여유를 낳고 여유가 관용을 낳는다. 사랑이 어디 주입과 단속의 대상일 것인가. 먼저 사랑할 만한 나라여야 사랑받을 것이다. 여유와 관용이 사랑할 만한 나라를 만들지 않겠는가.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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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초 이야기 - 할머니 탐정의 사건일지
요시나가 나오 지음, 송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절판


시골생활의 궁색함은 빤히 얼굴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쳐진, 사슬로 만든 거미줄을 서로 잡아당기는 데 있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이나 다른 것을 시도하려면 무겁게 칭칭 얽매인 쇠사슬을 풀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진을 빼야 한다. 실제로 소우의 결혼이나 이혼 때, 고쿠라야를 신축할 때에도 우는 사람, 화내는 사람, 웃는 사람, 점을 치는 사람 등이 친척이나 친구가 아닌데도 마구 몰려들었다. 당사자가 원한다면 모를까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거리와 세대가 바뀌어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소원해진 지금이 소우로서는 편했다. -20~1쪽

남의 일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 치매노인으로 의심받은 데 대한 억울함에 오른쪽으로, 놀림감이 된 데 대한 창피함으로 왼쪽으로 돌아눕다, 결국에는 손자뻘 되는 경찰에게 이성을 잃고 화를 낸 데 대한 한심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각오도 하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건만 결국 그건 나만이 늙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지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고기와 야채를 써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53쪽

근육은 운동으로 파괴된 조직을 재생시켜 강하게 만들지. 생각해보면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야. 때로는 번거롭게 느껴지는 사람들과의 교제나 타인과의 충돌을 반복하면서 기반이 생기고 무거운 것도 들 수 있는 힘도 키워지지. 운동을 하면 근육통이 생기지만, 그것을 무서워하기만 하면 자꾸 약해지기만 해. ……잊어버리고 있었어. 나도 그런 걸. -164쪽

테이블 옆 쓰레기통에 버려진 주먹밥이 썩어가고 있었다. 소우는 이건 도우미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못 본 척했다. 본래 그 쓰레기통은 못 쓰는 종이만 넣던 것인데, 지금도 유키노의 몸상태가 좋았다면 귤껍질 같은 것도 주방의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친구의 성격을 아는지라 자칫 자신이 청소를 해주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자신의 자잘한 실수나 실패를 깨닫고는 쓸쓸히 미소 짓는 유키노의 모습을 되도록이면 보고 싶지 않았다.
소우는 유키노가 탄 배의 뱃머리가 조금씩 각도를 바꿔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껏 함께 흘러왔던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서서히 돌아서 결국엔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결국 상대도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전사한 오빠의 군복 입은 모습을 처음 보던 날, 열일곱에 죽은 여동생이 병상에서 어른스런 표정을 보여주었던 저녁 무렵, 결국 이혼하게 된 남편을 잠도 자지 않고 기다리던 수많은 밤에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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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0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탐정이라 와 궁금하네요

이매지 2011-05-08 12:01   좋아요 0 | URL
따뜻한 탐정이예요 ㅎㅎ
 
예쁜 여자 만들기 - 미인 강박의 문화사, 한국에서 미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영아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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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살았던 이들은 국제 사회의 새로운 질서, 근대 국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몸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몸을 단련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몸이, 특히 여성의 몸이 왜, 어떠한 방식으로 중요한가에 대한 강조점은 근대화의 진행과 더불어 주기적으로 변화해왔다. 이 변화의 양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은 '육체의 탄생, 그 이후(의 여성)'라는 성격을 띠기도 한다. -8~9쪽

아름다움이란 일종의 '통계'다. 수많은 개체들이 가진 형태들을 간추려 '평균'의 형태를 찾아내고, 거기서 벗어난 좀 더 희귀하고 독특한 형태들에 미美 또는 추醜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일반화할 수 있을 정도의 개별 사례들을 모아 평균치를 내야 아름다움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떠한 몸이 아름다운 몸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일단 몸을 많이 봐야 한다. 존 버거의 말대로 '보는 것see'과 '아는 것'은 동격이다. 즉 '보는 만큼 아는 것'이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여성이 지아비에게만 자기 몸을 보여주는 사회 구조, 기껏해야 돈을 주고 기생들의 몸을 본 일부 사대부가 존재하는 사회 구조 내에서는 여성들의 몸매에 대한 평판이 '공론'으로 형성되기 힘들다. 따라서 여성의 가슴과 다리의 모양이 어떠해야 아름답다라는 통념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곧 사람들이 여성의 가슴과 다리를 많이 보고 품평을 할 수 있게끔 환경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30~31쪽

이전까지의 옷은 유교적, 윤리적 질서를 체현하는 도구 혹은 치장의 요소 중 하나라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의복은 신분의 귀천을 구별해 주고, 상황의 길흉을 분별해 주며, 남자를 구별해 주고, 화이를 나누어 정해주는 것이다"라고 할 만큼 유교 사회에서 옷차림은 곧 신분의 등급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성들의 의복 디자인이 시대, 유행에 따라 변형되기는 했어도 여성들의 몸에 이로운가는 고민되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대 의학적 지식이 유입되어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옷이 위생 차원에서 평가받게 된 것이다. -60~61쪽

처음에는 '편리'와 '위생'을 위해 여성의 치마 길이를 줄여야 한다던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미적 목적, 즉 '패션', '유행'을 위해 치마 디자인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치마의 길이는 유행의 한 부분으로서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는 것이 되었다. -64쪽

하지만 1920~30년대에는 이 '기준'을 명시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심미안'을 가진 '세련된' 사람으로 취급받았던 듯하다. 그들은 미인이 갖춰야 할 요건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언급함으로써 스스로 근대적인 미의 표준을 '알고' '만들어 가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사실이 있다. 이미 이 시기부터 '몸짱'을 선호했다는 점이다. 미인이라면 얼굴이 아름다워야 한다는(물론 그 '아름답다'의 기준은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생각이야 동서고금을 불구하고 늘 있었지만, 몸매가 좋아야 한다는 생각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에 들어 새롭게 형성된 관념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 당시 사회의 유명 인사들이 말하는 미인관이다. -88쪽

이광수는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고, 그 말소리가 사근사근하고 시원하면서 부드럽고, 슬플 때 기쁠 때 괴로울 때의 표정이 천진스럽고 자유롭고, 또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이다"라며 체격, 팔다리, 날씬한 동작 등을 미인의 중요한 조건으로 삼았다. 물론 "얼굴은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이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얼굴 생김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준도 빠트리진 않았다. -88~9쪽

1. 키는 머리 부분 전체 길이의 8배, 얼굴 길이의 10배
2. 얼굴은 머리 난 데에서부터 눈썹까지, 눈썹에서 코 밑까지, 코 밑에서 아래턱까지가 같고
3. 안면은 손바닥과 길이가 같고
4. 두 팔을 벌려서 그 길이가 키와 같다
고 한다. 그리고 남성미와 여성미는 다른 점이 있어서 남자의 키는 머리 부분의 8배, 여자의 키는 머리 부분의 7배 반이라니, 여자도 키가 작아 보이면 앙증스러워 보여도 미인은 못 된다.
위에 말한 인체미의 근본인 전형에 맞은 후라야 비로소 미인 격이 되는 것이나, 누구나 저마다 들어맞는 것이 아니니 미인이 되기 바라면, 얼굴의 단점을 가리기 위하여 얼굴 형편을 따라 머리 트는 형태를 바꾸고 몸맵시에 따라 의복 맵시를 연구해 입어야 하되,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육체의 균형이 잡히도록, 다리 동작만 많이 하는 이는 손발을 잘 놀리기에 마음을 써야 하고, 주야로 앉아서만 일을 하는 부인은 하루 한 번씩이라도 일어나서 전신 활동을 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니, 가정부인보다 여학교 출신의 자태가 더 좋은 것을 보아도 확실한 증거가 되는 일이다. -94~5쪽

문명화는 개항 후 오랜 시간 지속된 조선의 열망이었다. 당시 조선은 사회, 정치, 교육, 제도, 풍속, 예술 등 어느 하나 열등감을 갖지 않은 분야가 없었고, 어느 하나 '개조'가 필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래서 근대의 조선 지식인들은 문명 국가, 문명 인종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내부의 문제점들을 찾아내고, 외부세계의 우월한 점들을 모방하려 노력해왔다. 그들이 모방하려 애썼던 외부 세계의 우월한 것들 가운데 오리엔탈리즘과 함께 흘러 들어온 '인종주의'는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몸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집착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아름다운 여성은 우리가 성취해야 할 문명화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122쪽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푼 낮았더라면 역사가 변하였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거니와 과연 코는 그만큼 위대한 사회성을 띠고 있는 비례로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산이 높기만 하다고 명산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코도 높기만 하다고 명산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코도 높기만 하다고 자랑할 것은 못됩니다. 얼굴에 비례하여 적당히 높지 아니하면 조화가 되지 아니합니다. 조화가 되지 않는 곳에서 미를 발견할 수는 없는 고로 함부로 코만 높이면 오히려 높이지 않은 것만도 못하게 웃음거리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이는 '코만 조금 높았으면 미인이 될 걸'하는 유감을 품게 된 이도 있습니다. 그런 이에게 대하여는 융비술의 발견이 아무 데도 비하지 못할 큰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마음의 미가 제일이라는 말에 대하여 이의를 가질 이는 없겠지마는 융비술을 한다고 마음의 미가 없어질 것은 아닌즉 이상적으로만 할 수 있다면 여기에 반항할 사람도 없을 줄 압니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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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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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0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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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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