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
이와사키 나쓰미 지음, 권일영 옮김 / 동아일보사 / 2011년 4월
구판절판


매니저가 된 미나미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건 '야구부를 고시엔 대회에 진출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꿈처럼 어렴풋한 것도 아니었고, 막연한 희망도 아니었다. 명확한 목표였다. 사명이었다. 미나미는 야구부를 고시엔 대회에 '진출시키고 싶다'고 생각한 게 아니다. '진출시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심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목표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없었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여태 고교야구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매니저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미나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될 거다,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미나미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야구부 매니저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야구부를 고시엔 대회에 진출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야구부를 고시엔 구장에 데리고 가겠다'는 결정부터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다음에는 더 고민하지 않고 바로 행동에 옮긴 것이다.
-6~7쪽

잘나가는 조직에는 손을 잡고 돌와주지도 않고, 인간관계도 좋지 않은 보스가 한 명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보스는 가까이하기 힘들고 깐깐하며 고집스럽긴 하지만 종종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인재를 키워낸다. 부하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보다 더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다. 늘 최고의 실적을 요구하고, 자신도 최고의 실적을 올린다. 기준을 높게 잡고 그걸 이루기를 기대한다. 무엇이 옳은가만 생각하지 누가 옳은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적인 능력보다는 진지함을 더 높게 평가한다.
이런 자질이 없는 이는 아무리 붙임성 있고, 남을 잘 도와주고, 인간관계가 좋고, 유능하고, 총명하더라도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매니저뿐만 아니라 신사로서도 실격이다.
매니저가 하는 일은 체계적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 매니저의 업무 능력(예를 들면 서류 작성, 프레젠테이션 등)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익힐 수 있다. 하지만 배울 수 없는 자질, 후천적으로 얻을 수 없는 자질, 처음부터 몸에 배어 있어야만 할 자질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재능이 아니다. 진지함이다. -19~20쪽

자기가 하는 사업이 무엇인지를 아는 건 간단하고 빤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철강회사는 쇠를 만들고, 철도회사는 화물과 승객을 실어 나르며, 보험회사는 화재의 위험 부담을 떠맡고, 은행은 돈을 빌려준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엔 대부분의 경우 대답하기 힘들다. 빤한 답이 옳은 경우는 거의 없다. -26쪽

"그래! '감동!' 고객이 야구부에 요구하는 것은 '감동'이야! 그건 부모님이나 선생님, 학교, 도민들, 고교야구연맹, 전국의 고교야구팬들, 그리고 우리 부원들까지 모두 마찬가지야! 다들 야구부에 '감동'을 원하고 있는 거지!"
"흐음, 그렇군……."
마사요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해석이 재미있구나. 분명히 그런 면이 있긴 하지. '고교야구'와 '감동'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니까 말이야. 고교야구의 역사 자체가 바로 감동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거든. 고교야구라는 문화는 지금까지 수많은 감동을 선사해왔어. 그래서 지금처럼 뿌리를 깊고 넓게 내릴 수 있었던 거지."
"그래! 맞아!"
미나미도 흥분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나도 한 사람 알아. 야구부에서 감동을 원하는 고객이 있지. 그래, 그 애가 고객이었던 거야. 그리고 그 애가 원하는 것이 바로 야구부에 대한 정의였어. 야구부가 해야 할 일은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야. 야구부에 대한 정의는 '고객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조직'이었던 거야."-54~55쪽

사람을 매니지먼트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은 약하다. 가련하리만치 약하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킨다. 절차와 여러 가지 잡무를 필요로 한다. 조직의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란 비용이자 위협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부러 비용을 부담하거나 위협을 감당하려고 사람을 쓰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고용하는 까닭은 그 사람이 지닌 장점이나 능력 때문이다. 조직의 목적은 사람의 장점을 생산으로 연결하고, 그 사람의 약점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118~9쪽

시합에서는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는 매력이 있다. 야구 시합 그 자체가 경쟁이기도 하지만 공격과 수비, 주루 플레이처럼 시합을 이루는 요소들도 제각각 경쟁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투고 싸운다. 그래서 긴장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연습에서는 그런 면이 적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경우가 많았다. -127쪽

성과는 백발백중이 아니다. 백발백중 성과를 올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성과란 장기저긍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실수나 실패를 모르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무난한 일, 별 볼 일 없는 일만 해온 사람들이다. 성과란 야구의 타율 같은 것이다. 약점이 없을 수 없다. 약점만 지적당하면 사람들은 의욕도 잃고 사기도 떨어진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든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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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6-1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곳에 야구장이 있어요.
금요일마다 고등학생들이 야구경기를 하는데 전 스포츠를 안 좋아해서 그냥 지나치곤 해요.
부모들이 와서 응원을 하곤 해요.
잘 지내시죠?
즐거운 오후 되세요^^

이매지 2011-06-10 22:43   좋아요 0 | URL
오, 후애님 댁 근처에 야구장이 있군요.
한국에는 야구장이 너무 없어서 학생들이나 아마추어 야구인들이 야구할 데가 별로 없다고 하더라구요.
후애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
 
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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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이렇게 해도 미스 셀리아가 마음의 상처를 입는 건 당장은 내 걱정거리 축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삶이 일그러진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조금 풀린다.
"걱정되나보네." 아이빌린이 빙긋 웃는다.
"그녀가 볼 줄 몰라서 그래요. 선 말이에요. 그녀와 나 사이에 그어진 선도 못 보고, 그녀와 힐리 사이에 그어진 선도 못 보고." (중략)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네?"
"자네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선이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선이 어디에 있는지 나만큼 아이빌린도 잘 알잖아요."
아이빌린은 고개를 젓는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믿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 선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어. 미스 힐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그 선이 있다고 우기지. 하지만 선은 없어."-128~9쪽

"넘어가면 벌을 받으니까 선이 있는 거지요." 내가 말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네가 남편에게 대들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겠지. 그건 벌이라는 걸 정당화하는 거야. 그 선은 믿어?"
나는 인상을 쓰며 식탁 위로 시선을 내리깐다. "내가 그런 선을 연구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아. 리로이의 머릿속에만 있지. 흑인과 백인 사이에도 없어. 어떤 사람들이 오래전에 꾸며낸 거지. 백인 쓰레기나 사교 모임 여자들이 그걸 이어받은 거고."-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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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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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유지니아." 어머니의 규칙에 따라 가끔이라도 유지니아라는 본명으로 나를 불러준 사람은 콘스탄틴이 유일했다. "진짜 못난이는 가슴속에 살지요. 못난이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야비한 사람이거든요. 아가씨도 그런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안 그런 것 같아요." 나는 훌쩍였다.
콘스탄틴은 내가 앉은 식탁 의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관절이 부어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콘스탄틴이 엄지로 내 손바닥을 꾹 눌렀는데, 이건 우리 사이에서 들어봐요, 내 말 좀 들어봐요, 하는 신호였다.
"아침마다,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 이렇게 다짐해야 해요." 콘스탄틴이 바투 붙어 있어서 그녀의 검은 잇몸까지 다 보였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해요. 저 바보들이 오늘 내게 지껄인 말을 믿을 것인가?"-110~1쪽

콘스탄틴이 자기 엄지를 내 손에 꾹 눌렀다. 나는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백인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 만큼은 나도 똑똑했다. 그래도 비참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잘 봐줘도 나는 못 생겼겠지만 그녀가 내게, 내가 그저 어머니의 백인 자식이 아니라 뭔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살면서 끊임없이 정치에 대해, 유색인에 대해, 여자로 사는 것에 대해 무엇을 믿으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이 내 손에 자기 엄지를 꾹 누른 그 순간, 내가 무엇을 믿을지는 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11쪽

오, 비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짜릿한 일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담배나 어머니의 눈을 피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당신이 기형적으로 키가 크고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생김새가 특이하다는 이유로 당신의 어머니가 조바심치며 어쩔 줄 몰라할 때 누군가 당신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 말없이 눈빛으로, 나랑 같이 있으면 괜찮아요, 해주는 것이다. -114쪽

어느새 생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상황까지 흘러간다. 저 백인 여자들이 우리가 저들에 대한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저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 진실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결국 무슨 일이 생길지 나는 아주 잘 안다. 여자들은 남자들 같지 않다. 여자들은 방망이로 후려치지 않는다. 미스 힐리는 내게 권총을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미스 리폴트가 내 집에 불을 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백인 여자들은 자기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는다. 저들은 마녀의 손가락처럼 뾰족하고 병원 쟁반에 가지런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예리한 치과용 기구들처럼 번쩍이는 도구를 쓴다. 그것으로 당신을 서서히 괴롭힌다. -318쪽

나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평소에는 교회 내부보다 더 시원한데 오늘밤은 여기도 덥다. 사람들이 커피에 얼음을 넣는다. 나는 누가 왔는지 둘러보면서 미스 힐리의 의심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린 것 같으니 더 많은 가정부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서른다섯 명이 거절했다. 아무도 살 사람이 없는 물건을 파는 기분이다. 키키 브라운의 레몬 향 나는 광택제처럼 부담스럽고 냄새나는 무언가를. 하지만 키키와 내가 같은 점은 나도 내가 파는 물건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이 이야기는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것이다.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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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5-31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저 내일 이 책 지르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놓긴 했는데(1일이잖아요!) 이 책 어떤가요, 이매지님? 좋아요?

이매지 2011-05-31 09:03   좋아요 0 | URL
1권 이제 한 100페이지 정도 남았는데요,
아 이제 슬슬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요.
<앵무새 죽이기>와 <올리브 키터리지>를 함께 맛보는 기분이랄까?!
(그나저나 벌써 1일이 다가오는군요!)

다락방 2011-05-31 10:02   좋아요 0 | URL
앵무새 죽이기와 올리브 키터리지를 함께요? !!!!

이매지 2011-05-31 22:43   좋아요 0 | URL
일단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앵무새 죽이기>가 생각나구요,
하나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저마다의 이야기라는 점이나 분위기가 <올리브 키터리지> 같아요.
오늘 퇴근길에 1권 다 읽었는데요, 일단 1권까지 읽고는 주저 없이 추천!
1일에 구입하세요!

2011-06-01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품절


하지만, 감히 예감이라고까지 부르긴 어려우나, 뭔가 어렴풋한 느낌이 그를 꿋꿋이 버텨 내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만의 <이론> 때문이라고 해도 좋았다. 일부러 다듬어 발전시킨 것도 아니고, 아직은 머릿속에 막연한 상태로 떠도는 생각이지만, 매그레 자신이 남몰래 <균열 이론>이라 이름 붙인 일종의 원리 말이다.
이는 한마디로 모든 범죄자, 모든 악당의 내부에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한 이론이다. 사실 그들은 대개 게임 상대, 즉 적의 모습을 취하기 마련이며, 경찰의 눈에 띄는 건 결국 그런 모습이거니와 보통은 그런 모습들과 대결하는 식으로 모든 작전이 진행되기 일쑤다.
가령 어디선가 위법 행위나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치자. 대개 이렇게든 저렇게든 객관적으로 주어진 자료를 토대로 대결이 벌어진다. 그중 몇 가지 밝혀지지 않은 점들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은 머리를 쥐어 짜는 것이다. -64~5쪽

다만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종의 <균열>을 찾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다는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해, 게임 상대한테 생기는 어떤 <틈> 사이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말이다! -66쪽

아침에 마제스틱 호텔의 어느 여자 투숙객이 뇌까린 말…… <저 꼬락서니 좀 보라구!>
세상에! …… <저 꼬락서니>라니! 계속 수작을 부릴 위험성이 다분한 악당들을 처단하기 위해, 그것도 바로 같은 호텔에서 살해당한 동료의 복수를 위해 노심초사 동분서주하는 형사한테 그게 할 말인가!
<저 꼬락서니>라니! 영국 재단사의 솜씨로 멋지게 빚어낸 옷 한 벌 갖춰 입지 못하고, 매일 아침 손톱이나 다듬을 여유 따윈 꿈에도 기대할 수 없는 빡빡한 일정에, 사흘 전부터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주인공 없는 식탁만 꼬박 지키고 있을 마누라를 둔 사내에게 그게 어디 할 소리인가!
<저 꼬락서니>라니! 한 달 2천2백 프랑의 봉급을 받아가면서 매번 사건이 종료되고 범인이 쇠고랑을 차고 나면, 이제 책상에 붙어 앉아 영수증을 포함한 각종 증빙 문서들을 첨부해 가며 그간 들인 비용을 꼼꼼히 서류로 정리해, 그때부터는 경리와 또다시 씨름을 벌여야 하는 베테랑 수사 반장에게 어찌 그런 망발을 내뱉는단 말인가! -16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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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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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강물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일 년의 태반을 버티고 있으니 강물의 주인은 실은 얼음이었다. 터벅터벅 그 강 위를 걸었다. 투두둑. 깜짝 놀라 뒤를 보았다. 방금 디뎠던 얼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검은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단 한발짝뿐. 그 한 발만 내디디면 세상은 숨겨 왔던 그 거대한 죽음의 아가리를 드러낼 것이다. 이옥의 말이 머릿속을 때렸다. 나는 큰 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것이라네. 그 거미는 구중궁궐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거미의 것이었다. -56쪽

세상 모든 것 다 잃은 사람처럼 처량한 글을 써 내려가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참으로 짓궂은 글. 이옥 아니면 쓸 수 없는, 그만의 마음이 담긴 글이었다. 웃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잠시라도 고통을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라질 고통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고통은 그의 글들에 커다란 살점을 툭툭 묻혀놓고 있었다. 그 고통의 정점은 거울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삶과 고통에 찌들어 젊은 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반납해 버린 남자 이옥이 낡아 빠진 거울을 붙잡고 진지하게 질문을 해 대는 꼴이란. -110쪽

내게 글 쓰는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네. 지루해서 할 일이 없기에 쓴 것일 뿐.
이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웠다. 글에 목숨 건다는 말보다 그냥 쓴다는 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옥에게 글은 공기요, 물이요, 밥이었다. 그의 곁에 그냥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이옥은 자기 삶 전체를 글쓰기의 현장으로 승화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114쪽

생각하는 창문, 이는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오른쪽 창문에 붙인 현판이다. 내가 북쪽에 있을 때는 어느 하루도 남쪽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남쪽으로 옮겨 오게 되자 또 어느 하루도 북쪽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게 되었다. 생각이란 이렇듯이 때를 따라 바뀌는 것이지만 그 괴로움은 전날보다 더욱 심하였다. 창문에다 생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때문이다. (……) 무릇 생각은 즐거워도 나고 슬퍼도 난다.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서 있어도 생각나고 앉아 있어도 생각나며, 걸어도 생각나고 누워도 생각난다. 어떤 때는 잠깐 생각나고, 어떤 때는 오래오래 생각난다. 어떤 때는 생각을 오래 할수록 더욱 잊지 못한다. 그러니 나의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여 느낌이 있으니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소리에 따라 운을 붙이니 곧 시가 되었다. -1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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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5-24 0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계시는군요.^^
관심가는 책이에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이매지 2011-05-25 16:23   좋아요 0 | URL
다 읽었는데, 청소년들도 일반대중도 옛글의 재미에 빠질 수 있는 책이더라구요^^
제가 워낙 이옥에게 관심이 있어서 읽은 책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