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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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는 예쁜 것, 더러운 것, 흔한 것, 빼어난 것이 모두 널려 있어 외국에 익숙하지 않은 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음, 혹 오늘 죽는다 해도 괴롭지는 않겠는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48쪽

내게 하루란 늘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커다란 고무공 같은 것이었고, 그 안에서 어쩌다 가끔 무언가를 바라볼 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불쑥 꿀처럼 달콤하고 풍요로운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황홀한 느낌......그 아름다움이 느껴지면 나는 넋을 잃고 온몸으로 언제까지나 그것을 만끽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49쪽

내게 산다는 것은 그런 순간을 되풀이하는 것이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에서 끊어지든 나는 수긍하지 않을까, 하고 여겼다.-49쪽

인생은 수많은 사건의 연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주변에서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길밖에 없다. 실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만이 사랑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다.-139쪽

행복한 때에는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법인데, 그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육체와 정신과 시각과 상황이 모두 조화롭게 어울려 있을 때, 사람은 그렇게 느끼는 것이리라.-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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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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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선물이며,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다.-23쪽

삶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했지만 의미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25쪽

나는 정기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눌러버리려 했고 오랜 시간 동안 성공했었다. 그렇지만 단지 흘긋 들여다보기만 해도 때때로 기억 한 조각이 빛 속으로 끼어들어올 수 있다. -30쪽

눈雪을 읽는 것은 음악을 듣는것과 같다. 눈에서 읽은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음악을 글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64쪽

어쩌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기억했다. 우리가 어떤 시점을, 명확히 구별되면서도 특별한 순간에 일어난 일과 같은, 자신의 존재 속으로 파고드는 돌파구로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어쩌면 그 기억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나, 우리 자신도 언젠가 죽게 될 거라는 통찰의 순간, 눈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는 어떤 급작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절대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65쪽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울을 덮어버리려 할 수 있다. 구세주 교회에서 바흐의 오르간 작품을 들을 수도 있다. 마약 가루라는 형태로 된 즐거운 기분 한 가닥을 면도날 달린 손거울에 담아 빨대로 마실 수도 있다.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전화를 걸어 누가 귀를 기울여줄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런 건 유럽식 방법이다. 행동을 통해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나는 그린란드식 방법을 취한다. 그것은 어두운 분위기에 침잠하는 방식이다. 내 패배를 현미경 아래에 올려놓고 그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147쪽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받았고 많은 것을 원했다. 그리고 진정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끝냈다.-186쪽

그걸 보니 뭔가 내 맘속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나는 그 생각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나는 서른 일곱 살이다. 나이가 들면 어떤 걸 봐도 뭔가 떠오르게 마련이다.-433쪽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긴장할 수는 있겠지만 냉담해질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심지어 증오조차도 자연작 목표물위로 풀려났을 때는 따뜻해진다.그러나 차갑고 걷잡을수 없는 에너지의 흐름이 물리적으로 실재하여 내옆에 있는 이 남자로부터 퍼져나오고 있었다. -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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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22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지다. 나도 이 책 읽어야 할까부다. 알라딘을 살펴보면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져. 으흐흐흐. 큰일이야. 큰일. 이러다 술값아껴서 책 사게 생겼어. -_-a
"우리가 어떤 시점을, 명확히 구별되면서도 특별한 순간에 일어난 일과 같은, 자신의 존재 속으로 파고드는 돌파구로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어쩌면 그 기억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너무 짠하게 와 닿네. 흠... 좋다. 이런 글 써보고 싶어.
매지는 맨날 늦게자.. 나도 맨날 늦게자. 매지도 지각해? 난 지각쟁이야. ㅋㅋㅋ
오늘도 굿나잇 인사 해야겠다. 잘자. ^-^*


이매지 2005-09-22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인데도 감성적이였어 ! 술 값아껴서 책을 사는 긍정적 현상 ! ㅋ
대신 술값은 술값대로 나가고 책값은 책값대로 나가면 낭패. ㅋㅋ
이번주는 수업이 없어서 늦게 자도 돼 ㅋㅋㅋ
굿나잇 !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구판절판


구원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 객관적으로는 우연이고 따라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두루말이에는 이미 쓰여 있다고, 따라서 시간이 [비록 지금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해도] 결국 우리의 선택받은 자의 모습을 드러내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15~6쪽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독특한 면모와 결부되어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클로이가 내 삶에서 하게 된 역할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눈이고,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키스를 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전화를 받거나 머리를 빗는 모습인데.-16~7쪽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21쪽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빠져나가고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어떻게 해서든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22~3쪽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24쪽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도구가 된다. 이야기는 전화를 거는 사람의 손에 놓여 있다. 전화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 이야기의 전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따라가기만 할 뿐이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 대답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전화는 나를 수동적인 역할로 묶어놓았다.-30쪽

서로 이끌리고 있다는 기호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내가 기호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읽을 수 있는 기호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34쪽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 였다. 그 질문의 재귀적인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점점 배반과 비진정성에 물들게 될 수밖에 없었다. -44쪽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에 관계없이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45쪽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을 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트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71~2쪽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 기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은 드물다.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의 애정을 받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72쪽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콤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74쪽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둘 다 똑같은 의존적 요구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그 요구 때문에 상대에게 끌렸다. 우리 내부에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상대에게 비슷한 부족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답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제품만 발견하게 되었으니까.-80쪽

나는 사랑 문제에 전문가가 아니지만 한 가지는 말해두겠네. 결국 누구와 결혼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네. 처음에 좋아한다고 해도 끝에 가서는 좋아하지 않을 수 있네. 처음에는 미워하다가, 결국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가능성도 있지.-96쪽

아름다움이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결론을 보여줄 수 있는 수학공식하고는 다르다. 남자와 여자의 매력을 둘러싼 논란은 어떤 그림이 낫다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예술사가들 사이의 논쟁과 비슷하다.-114쪽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138쪽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161쪽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집을 꾸미는 일을 상상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함께 늙어가며 바닷가의 방갈로에서 틀니를 끼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결한 일이었다.-192쪽

사랑의 비극은 그것이 시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현재의 애인과 함께 있을 때 과거의 사랑을 대하는 무관심에는 특별히 잔인한 면이 있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또는 서점]을 건넌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는가.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사랑이 그 순간의 나의 자아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끝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일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193쪽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195쪽

삐친 사람은 복잡한 존재로서, 아주 깊은 양면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움과 관심을 달라고 울지만, 막상 그것을 주면 거부해버린다. 말없이 이해받기를 원한다.-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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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9-0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보셨군요. ^^ 재밌죠?

이매지 2005-09-0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면서 우울해져버렸어요 -_ ㅠ
 
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구판절판


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의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87쪽

누구나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애절한 마음이 되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잃어버린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133쪽

하지만 나카타 상, 그렇게 말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속이 텅 빈 껍데기가 아닐까? 밥 먹고, 똥 싸고, 시시껄렁한 일을 해서 쥐꼬리만 한 봉급을 받고, 이따금 오만코(성 또는 여성기를 뜻하는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비속어)나 할 뿐이잖아? 그 밖에 뭐가 있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살고 있잖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우리 할아버지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지. 세상이라는 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라고. 일리가 있는 말이지, 그렇지 않아? 만일 드레곤스가 모든 시합마다 다 이긴다면 누가 야구 같은 걸 보러 가겠어?-149~150쪽

자유의 상징을 손에 넣고 있는 것은 자유로움 그 자체를 손에 넣은 것보다 행복한 일일지도 몰라.-167~8쪽

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원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지. 모든 것은 환상이야. 만약 정말로 자유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무척 난감해할걸. 잘 기억해 두라구. 사람들은 실제로는 부자유를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야.-168쪽

결국 이 세계에서는 높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드는 인간이 유효하게 살아남게 되는 거야. 그것을 부정하면 넌 황야로 추방당하게 돼.-169쪽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치기 위한 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171쪽

청년은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매일 근처에 강에 가서 물고기나 미꾸라지를 잡던 시절의 일을. 그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 살아가면 되었다. 살아 있는 날까지, 나는 어떤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자연히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렇지 않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점점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 참 이상한 얘기로군. 인간이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 그런데도 살아가면 갈수록 나는 알맹이를 잃어간다. 그저 텅 빈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게다가 앞으로 살아가면 살수록 나는 더욱더 텅 비고 무가치한 인간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런 사고의 흐름을 어디에선가 바꿔놓을 수는 없을까? -191~2쪽

요컨대 사랑을 한다는 건 그런 거야, 다무라 카프카 군. 숨이 멎을 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네 몫이고,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것도 네 몫이지. 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을 견뎌야만 해.-235~6쪽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는데, 음악에는 사람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말하자면 어떤 때, 어떤 음악을 듣고, 그 때문에 자기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크게 확 변해 버리는, 그런 일 말입니다."
오시마 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죠" 하고 대답했다. "그런 일은 있습니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화학작용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거기에 있는 모든 눈금이 한 단계 위로 올라간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세계가 한 단계 더 넓어졌다는 것을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드물기는 합니다만, 가끔은 있습니다. 연애와 마찬가지입니다." -287~8쪽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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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구판절판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어버리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 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폭풍은 어딘가 먼 곳에서 찾아온, 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조차 없어.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 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 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런 모래 폭풍을 상상하란 말야. -17쪽

세계가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데도, 너를 받아줄 공간은-그건 아주 조그만 공간이면 되는데- 어디에도 없다. 네가 목소리를 구할 때 거기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그러나 네가 침묵을 구할 때 거기에는 끊임없는 예언의 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가 이따금 네 머릿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비밀 스위치 같은 것을 누른다. -27쪽

장소의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화장실과 식사. 형광등과 플라스틱 의자. 맛없는 커피. 딸기쨈 샌드위치. 그런 것에 의미는 없다구. 중요한 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아닐까? 안 그래?-50쪽

모든 것이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 큰 전쟁에 관한 일도, 돌이킬 수 없는 생사 문제도, 모든 일들이 먼 과거의 일이 되어갑니다. 나날의 삶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많은 중요한 일들은 차갑게 식어버린 오랜 별처럼 의식 밖으로 사라져갑니다. 우리에게는 일상적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일도 너무 많습니다. 새로운 양식,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새로운 말들.....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주춧돌처럼 자기 안에 남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결코 마모되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190~1쪽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거야. 인간은 이 세상에서 따분하고 지루하지 않은 것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되고,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은 대개 지루한 것이라는 걸. 그런 거야. 내 인생에는 지루해할 여유는 있어도 싫증을 느낄 여유는 없어.-218쪽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256쪽

"눈을 감아서는 안 되네!"하고 조니 워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규칠일세. 눈을 감아서는 안 되네. 눈을 감아도 사태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으니까. 눈을 감았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아니, 오히려 다음에 눈을 떴을 때, 사태는 더 악화되어 있을 거라네. 우리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걸세, 나카타상. 눈을 똑바로 떠야 하네. 눈을 감는 것은 약자가 하는 짓이야.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비겁한 자가 하는 짓이란 말일세. 자네가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고 있단 말이야, 똑딱똑딱하고." -285쪽

그것이 이야기의 공통적인 구성 요소지. 커다란 전환. 의외의 전개. 행복은 한 종류밖에 없지만, 불행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톨스토이가 지적한 대로 말이야. 당사자 이외의 타인에게 행복이란 교훈적인 우화이고, 불행이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일 경우가 많지.-307쪽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315쪽

세계는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고, 나카타 상. 매일 때가 되면 날이 밝지. 그러나 거기 있는 건 어제와 똑같은 세계는 아니지. 여기 있는 건 어제의 나타카 상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369쪽

주위에서 잇따라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요. 그중의 어떤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어떤 것은 전혀 선택하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를 잘 구별할 수가 없게 됐어요. 즉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한 일도, 실제로는 내가 그 일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기로 정해져 있던 것처럼 생각돼요. 나는 다만 누군가가 미리 어딘가에서 정한 것을, 그냥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리 애써 보았자 그런 것은 전부 헛일이라고 말예요.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점점 더 내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들어요. 내가 나 자신의 궤도로부터 멀어져가는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나에게 아주 힘든 일이거든요. 아니, 무섭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때때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요.-38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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