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북부 하노이시 고속도로의 제한속도는 시속 60㎞다. 하지만 차들은 50㎞ 이상을 못달린다.
차가 낡아서도,도로가 낡아서도 아니다. 고속도로에 게릴라처럼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공안이 무서워서다. 분명히 시속 50㎞를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공안이 “당신,60㎞ 넘었잖아!”하고 우기면 끝이다. 딱지 세 번이면 베트남에서는 평생 면허정지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이 탄 버스는 10㎞를 더 바가지 씌우기 때문에 시속 40㎞ 이상을 못낸다. 공안에게 바치는 뇌물이 우리돈 3만원. ‘걸리면 그 돈 줄테니 제발 60㎞로 가 달라”고 해도 기사는 말을 안듣는다. 혹시 공안이 심사가 틀려 뇌물 안받으면 자기만 죽는다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공안은 최고의 신랑감이다.
유시민의 ‘거꾸로 본 세계사’는 월남전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했다. 한번도 전쟁에서 져본 일 없는 세계 최강 미국과의 전쟁에서 작고 가난한 베트남인들이 승리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책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데 텅빈 고속도로를 40㎞로 기어가야 하는 한심한 처지가 되고 보니 ‘이 사람들,이런 공산주의 하자고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7월 LG칼텍스정유 노조가 한창 파업하고 있을 때 모 신문사 논설위원이 권양숙 여사가 ‘골프를 싱글 친다’고 해서 아,대통령이 바빠져서 함께 못치고 혼자 친다는 뜻이구나…생각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자기 월급으로 평생 골프는 꿈도 꿔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주말이면 고급차 타고 골프 치러 다닌다”는 LG칼텍스정유 생산직 노조원들의 평균 연봉 7000만원에 놀랐고,그래서 월급 10%를 더 올리라고 파업하고 있는 사태에 더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LG칼텍스정유가 불법파업을 주도한 노조원 50명을 파면하고 630명을 정직·감봉 등 중징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노조가 무척 강했던 예전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을 회사 경영진은 하려고 한다. 국내 최고의 연봉을 받던 이 회사 노조의 꼴불견 파업이 시민들의 미움만 잔뜩 받았던 때문이다.
파업권 획득을 요구하며 불법 파업을 벌였던 전국공무원노조도 시민들의 공감은커녕,분노만 샀다. 혹시 직장에서 떨려날까봐 하루하루 전전긍긍하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들의 파업 역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결국 전국의 수많은 조합원들도 현재 파면,해고 등 중징계 절차에 들어가 있다.
이 어려운 시절에 무슨 짓을 해도 끄떡없는 회사와 조직만이 기세좋게 벌이는 불법 파업에 이제 시민들은 동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이런 꼴 보려고 민주화 투쟁을 했고,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나…’ 하고 분노만 커질 뿐이다.
군 출신 대통령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시민들은 기업인들의 부패와 비리에는 눈 감고,노동자들은 착취에 시달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버스가 파업을 해도,지하철이 멈춰서도 시민들은 묵묵히 참으며 노사간에 협상이 잘 마무리되길 기다렸다. 매스컴이 아무리 비난해도 시민들은 속으로는 노조 편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오죽하면 파업할까…’ 어쩌면 사람들은 내심 노조가 승리를 거두기를 바랐을 것이다.
요즘 대부분 직장인들은 자기 권리보다 회사 걱정을 더 많이 한다. 너무너무 경제가 어려워지는데,우리 회사 무너지면 어쩌나…노심초사,자나깨나 회사 걱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회사를 걱정해도 경제가 자꾸 어려워져 회사가 도산하고,직장이 없어지고,가장이 자살하고,가족이 해체된다.
하지만 이번에 단단히 버릇을 가르치겠다면서 ‘버릇 가르치기’가 아닌 아예 그들 가정의 괴멸과 해체를 의미하는 대량 파면,해고라면 적절한 처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도 그렇고,기업들도 그렇다. 이런 극단적 처방과 해결방식이 결국은 온 사회로 번져 우리의 가슴을 꽂는 비수가 될지도 모른다.
사회는 충분히 민주화됐고,할 말은 다 해도 되는 세상이 됐다. 목숨 걸고 투쟁해야 할 명분이 사라졌는데도,여전히 모두들 완장 차고,손에 든 죽창도 버리지 않고 서 있다. 화해와 용서는 다 어디로 갔을까.
김현덕 (정보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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