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무슨 염치로 국회 활동비 받나
기사입력 : 2004.12.14, 18:51

국회가 지난주 여야 의원들에게 1인당 200만원씩 모두 6억원 가까운 돈을 지급했다. 국회 관계자는 이 돈이 연례적으로 지급해오던 상임위 활동비로서,원래 예산집행 내역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못하다.

17대 국회는 지난 6월 개원 이래 정기국회 종료시까지 전체 의안 1066건 가운데 130건을 처리하는데 그쳤다. 처리율은 12.1%에 불과하다. 이 기간 동안 국회에 접수된 청원은 모두 111건이었지만 처리된 것은 2건이었다. 16대 국회는 같은 기간 의안 처리율이 42.4%였고,접수된 청원 182건 가운데 20건을 처리했다. 기록으로 볼 때 17대 국회의 실적은 과거 그토록 비난을 받던 16대 보다 더 형편 없는 것이다.

정기국회 파행에 이어 임시국회에서마저 여야는 극한 대치로 일관하고 있다. 경제와 민생을 챙겨야 한다는 요구를 외면한 채 사생결단식 사상 논쟁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점거한 법사위를 비롯,모든 상임위도 공전 중이다. 이 판국에 상임위 활동비 지급이라니,도대체 무슨 염치가 있어 세비 외에 돈을 더 받는다는 것인가.

국회는 또 내년도 예산을 대폭 증액한 바 있다. 올해보다 400억원이나 늘어난 예산 가운데 100억원의 거액이 의원 정책개발비 명목으로 잡혀 있다. 정쟁으로 날을 지샌다 해도 내년에는 의원 1인당 3300만원이 추가로 지급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상임위 활동비가 정당한 근거가 있느냐에 있지 않다. 예산 증액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국회가 할 일만 제대로 한다면 의원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아까울 리 없다. 여야간 끝없는 정쟁으로 국회를 마비 상태에 몰아 넣고도 돈만은 꼬박꼬박 챙기는 행태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야의 각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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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2-1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노동 무임금 실천은 국회부터 했으면 합니다 ㅠ.ㅠ
 

속초주민 “금강산 살리고 설악산 죽이나”
기사입력 : 2004.12.14, 18:11

“학생들까지 금강산으로 보내면 설악산 수학여행단을 받아 겨우 연명하는 우리는 앉아서 죽으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금강산 관광경비 지원도 좋지만 설악권 등 국내 관광지가 다함께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갈수록 관광객이 줄어들어 시름에 잠겨 있는 속초시 설악동 상가 주민들이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부가 올 겨울방학 동안 중·고교 학생과 인솔교사들에게 금강산 관광경비를 지원키로 결정하자 “가뜩이나 침체된 설악산 관광 경기에 찬물을 끼얹은 발상”이라며 지원 철회를 요구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섰다.

정부는 금강산관광 활성화 등의 명분으로 지난 3일부터 내년 2월27일까지 전국 중·고교생들에게 1인당 17만원씩 금강산 관광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자비 10만원만 부담하면 2박3일간 금강산관광을 할 수 있으며,인솔교사는 공짜여행을 할 수 있다. 정부는 지원 대상 학생을 2만명으로 잡고 있다. 정부는 내년 봄 이후 추가지원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설악산에는 연간 평균 1500여개팀의 수학여행단이 찾는다. 그러나 설악산 주민들은 이런 분위기로는 500팀도 찾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올해의 경우 벌써 끝났어야 할 내년 봄 수학여행단 예약이 전무한 상태다. 특히 학생 위주로 영업을 해 온 설악동 주변 숙박시설과 상가의 경우 이번 정부의 금강산 관광 지원으로 치명타를 입게 됐다.

13일 오후 설악동 C지구 마동 2층 건물. 1층 16개 업소와 2층 7개 업소가 폐업을 해 빈 건물이 된지 오래였다. 계단을 올라서자 화장실 냄새가 코를 찌르고 천장은 곳곳이 떨어져 지저분했다. 흘러내린 오물은 곳곳에 고드름,종유석 모양을 하고 있어 철거건물처럼 흉칙했다. 설악동 상가건물 대부분이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리에는 금강산 관광경비지원 철회를 촉구하는 각종 현수막 350여개가 어지럽게 걸려있어 주민들의 울분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설악동번영회 관계자는 “학생들이 금강산으로 빠져나가면 우린 누굴 상대로 장사하란 말이냐”며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인 설악동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정부당국과 지자체,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분노한 설악동 상가 주민들은 최근 금강산관광경비지원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지난 12일 금강산 관광경비 지원 철회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투쟁위는 “국민의 혈세로 금강산 관광경비를 지원하는 것은 현대아산을 위한 호객행위로밖에 볼 수 없고 예비 유권자인 학생에게는 사전선거운동을 하는 것”이라며 “관계부처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경비지원으로 피해를 입는 곳은 설악동뿐만이 아니다. 수학여행단이 많이 찾는 경주 속리산 제주 등도 설악동 주민들과 연대해 사업권 반납과 휴·폐업,대규모 상경집회 등을 통해 투쟁을 벌일 예정이다.

속초=변영주기자 yzbyo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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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짐승들 보거라’ 시골의사 글 눈길

기사입력 : 2004.12.12, 19:43


[인터넷부 3급 정보]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 대한 네티즌들의 분노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이번엔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이 겪는 육체적·정신적 아픔을 직접 옆에서 치료했다며 그 끔찍했던 경험을 세세히 소개한 글이 눈길을 모으고 있다.

한 시골의사가 지난 2일 썼다는 이 글을 네티즌들은 인터넷 곳곳에 올리며 이번 성폭행 가해 고교생들을 성토하고 있다.

그가 소개한 성폭행 피해여성은 2명. 그는 특히 성폭행을 당한 뒤 염산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던 20살 소녀가 천신만고 끝에 건강을 회복하고 찾고 희망을 다시 찾았다는 ‘감동적인’ 경험을 상세하게 써내려갔다.

글을 읽고 성폭행의 끔찍함을 새삼 느끼게 된 네티즌들은 이번 가해 고교생들을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비난을 일삼으면서도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다음은 시골의사가 썼다는 원본글이다.

사람이 하루에 경험하는 희노애락의 양은 어느정도 일까?

어제 신문에 어떤 할일 없는 친구가 영혼의 무게를 달았더니 (아마 죽기 전후의 몸무게를 비교한 것 일테지만..) 십 그램 정도가 나가더라는 기사를 읽었다.

그 무게를 달았다는 과학자나 그 기사를 쓴 기자나 딱 그 수준이 그 수준인데, 하기는 희노애락의 절대량을 재보고 싶은 나도 어쩌면 그 수준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사는 한 이 네가지의 무게중에서 애(哀)의 절대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삶을 살 수 밖에 없겠지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가만 생각해보면 기쁨이란 얼마 지나지 않아도 내성이 생겨서 금방 둔감해 지지만, 슬픈이란 그보다 몇 배나 여운이 길게 남는 법이다.

오늘 아침에 고등학교 3 학년 여학생이 상해 진단서를 끊으러 왔다.

어제밤에 성폭행을 당하고, 오늘 아침에 산부인과에 들러서 체액을 채취한 다음, 우리병원으로 몸의 외상에 대한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이다. 굳이 여기에다 그 여학생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를 옮겨적고 싶지는 않다.

내가 레지던트 일년차 시절이었으니, 이제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일이다, 나는 그당시에도 지금처럼 그만두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의업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전공과목을 다른과로 바꾸는 것에 대해 고민했었다), 더우기 이미 나는 그 전년도에도 다른 전공을 선택해서 트레이닝을 받다가 중간에 그만두고 외과로 전공을 바꾼 전력이 있어서, 만약 또 그랬다가는 사회 부적격자로 낙인이 찍힐까봐 꾹 참고 견디고 있을 때였다.

그만큼 나는 의사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 이 직업이 내게 가져다준 고(苦)는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나는 26살에 의대를 졸업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해도 가운을 벗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날이 없었고, 실제 삼년전에는 그것을 실행에 옮겨서 가운을 벗고 육개월 동안 환자를 보는 않은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지금의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여간 그렇게 고민이 많았던 젊은시절에, 나보다도 더 고민이 많은 환자를 만났다.

그녀는 그때 나이가 20 살 이었다, 그 힘들던 외과 레지던트시절 삼일동안이나 수술실에서 못 나오다가, 삼일만에 겨우 수술실을 나와서 짜장면 한그릇 먹고 막 눈을 붙이려는 순간에, 응급실에서 페이져가 울렸다.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몸은 천근만근인데, 전화를 걸어보니 염산을 마신 환자가 응급실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속으로 "죽으려면 그냥 아무도 안보는데가서 조용히 목을 매지. 염산을 마셔서 나까지 죽이려 드느냐"는 원망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응급실에 내려가보니 상황이 기가 막혔다.

우선 환자 나이가 겨우 20살 이었고. 더 기가 막힌일은 그녀가 임신중이라는 사실 이었다. 그녀는 6개월전에 성폭행을 당했었고. 그후 임신을 해서 혼자서 고민을 하다가, 자살을 하려고 염산을 마신 것 이었다.

사람이 염산을 마시면 그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하다, 먼저 구강 조직이 타버리고, 두번째로는 식도가 녹아 버리는데, 이때의 식도 손상은 무서운 합병증을 초래한다, 그나마 소위 양잿물과 같은 알카리에 입은 손상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이제 일단 염산을 마신 이상 이제는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식도가 다 늘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평생 음식물을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눈이 부실만큼 예뻤다, 만 20세의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한 사회 초년병의 그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누군가가 끔찍하게 망쳐 놓은 것이다, 일단 응급조치를 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집중 치료를 받은 후, 그나마 생명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망가져 버린 식도는 이제 어떤 음식물도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2주간은 혈관 주사를 통해서 영양을 공급했지만, 사람이 그렇게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그녀는 입원한지 이주째 되는 날, 수술실로 옮겨졌고 우리는 그 희고 고운 배를 명치끝에서부터 10센티정도를 절개해서 소장에 구멍을 뚫고 소장내로 호스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호스의 반대편은 절개한 상처를 통해 밖으로 연결했다, 이제 그녀는 배를 통해 소장으로 연결된 호스로 미음을 투여받으면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나서 상처가 악화되었다, 소장으로 들어가있는 관을 타고 소화액이 바깥으로 흘러 나온 것이다, 강렬한 산도를 가진 소화액은 상처주변의 피부를 녹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의 배에 길게 남겨진 칼자국 위에는 소화액이 입힌 화상 같은 커다란 흉터까지 덧붙여졌다.

그녀의 치료는 일년차인 내 담당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녀의 아픈 사정에 깊은 동정심을 가졌었지만, 그 속에는 아마도 "곱고 아름다운 여자아이의 갈라진 운명에" 대한 어떤 특별한 안타까움이 더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치료했고, 아울러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내내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치료를 하기위해 상의를 벗겨도,,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도, 심지어 못먹어서 말라비틀어진 가느다란 팔에 수액공급을 공급하기 위해 컷 다운(피부를 갈라서 혈관을 꺼집어내는 일)을 했을 때에도 그녀는 그야말로 얼음장처럼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심지어, 수술후 삼 주째 되는날 임신중인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산부인과 분만실로 옮기는 중간에도,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은색 마이마이에 연결된 헤드폰을 귀에 꽂은 채 내내 음악만 듣고 있었다. 결국 정신과에 컨설트를 했고, 나도 주치의로서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그녀는 말을 잃어 버린채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지냈다,

그리고 그렇게 두달후 상처가 좋아진 다음 그녀는 배에 호스를 꽂은 채 퇴원했다 나는 결국 그동안 그녀와 친해지는데 실패를 한 것이다. 그녀가 퇴원한 이후에도 나는 한참동안 그녀를 떠 올렸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첫 인상과, 나중에 음식을 먹지 못해 창백하게 메말라버린 나중의 모습.그리고 상처받은 사슴처럼 세상으로 향하는 창을 닫아버린 그 안타까운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져서, 내게 상당히 오랫동안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재입원을 했다, 퇴원후 외래에서 진료를 받다가 이제 배안의 호스를 제거하고 식도를 새로 만들어주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것이다. 이제 그녀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이 된 것이다. 사람은 호스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사는데는 한계가 있다, 식물인간처럼 에너지 소모가 전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사는데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경우 도리없이 식도를 재건해야 하는데, 그녀처럼 식도가 협착이 되어버린 환자는 협착된 식도 대신에, 목에서 위장까지 연결되는 다른 통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요즘은 좀 다르지만, 그때는 일단 배를 열어서 대장을 일부 짤라낸 다음. 목을 절개해서 식도 입구에 한쪽 끝을 연결하고 다시 다른 쪽 끝은 위나 소장에 연결해 주는 수술을 했다,

그렇게하면 연결된 대장이 식도를 대신해서 음식물을 위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술은 대단히 위험한 것 이었다. 당시 내 경험으로는 5명을 수술해서 한명이 살았었고, 교과서적으로도 생존률이 대단히 낮은 수술이었다, 일단 식도와 대장이 연결되면 , 그 두장기의 성질의 차이 때문에 연결부위가 녹아 버리기가 쉬운데, 이 연결부위가 녹으면 가슴속으로 염증이 진행되고,나중에는 가슴에 고름이 차서 어마어마한 결과를 초래한다,

대개 이 경우 환자는 가슴으로, 배로 고름이 흘러 내리고, 그냄새 때문에 사방 20미터에는 사람이 접근이 곤란 할 정도로 몸이 썩어 들어가면서 죽게된다. 이제 그녀가 그 운명의 시험대에 선 것이다, 불과 몇 달만에 그녀는 거의 미이라가 되어 있었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산다는 그녀가 그동안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녀는 그 가냘픈 몸으로 20% 의 확률앞에 혼자 선 것이다. 나는 수술전에 보호자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녀에게도 수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다만 위험도는 적당히 낮춰서 설명하고 보호자와 본인의 서약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타인에게, 특히 남자에게는 차갑고 냉정했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무려 12시간 반에 걸친 대수술 이었다, 먼저 배를 개복해서, 대장을 적당한 길이로 짤라내고, 짤려져 나간 부분들은 원래대로 다시 봉합했다, 그리고 30센티 정도 길이로 짤라놓은 대장을 목을 절개한 다음 식도에 연결했다, 그리고는 다시 가슴옆을 길게 절개해서 폐를 옆으로 밀어 젖히고, 심장 뒤로 공간을 만든 다음 그쪽으로 한쪽 끝을 내려서, 소장과 연결했다.

주임교수께서 수술을 하는데, 수술실에는 수술시간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주임교수님의 손이 심장뒤로 들어가서 박리를 시작 할때는 심장이 눌리면서 맥박수가 120회를 넘어서고, 혈압이 급상승을 하기도 했고, 아래쪽에서 대장을 짜를때는 속의 내용물이 배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황급히 거즈로 장 주변을 수십겹의 거즈로 둘러싸기도 했다.

수술용 장갑을 낀 내손도 그녀의 배속을 헤집고 있었다. 그녀의 소장과 대장은 배속에서 꺼집어내져서 조교수의 손끝에서 봉합되고 있었고, 나는 일년차라 위쪽 식도 연결팀으로 가지 못하고, 아래쪽에서 대장을 자르고 이어주는 일을 보조했다, 그때 수술용 장갑의 얇은 두께를 넘어 그녀의 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은 내내 나를 묘한 슬픔에 빠지게 했었다.

그리고 무려 12시간 만에 수술이 끝났다.. 수술후에도 나는 1년차로서 중환자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그녀의 상태를 체크하고, 한시간마다 혈액 검사를 하면서 인공호흡기의 계수를 조정했다, 산소와 이산화탄소 농도가 밸런스가 맞지 않을 때 빨리 교정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항상 누군가가 옆에서 지켜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 임무였었다, 수술후 의식은 몇 시간만에 돌아왔지만, 상태가 안정 될 때까지 숨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어야 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 인공 호흡기가 밀어넣는 숨을 그대로 받아 마시고, 기계가 마치 빨대로 빨아 들이듯이 내 가슴에서 공기를 빼내 갈때 내쉬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녀를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해 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필담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 했는데. 그녀가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자기의 마이마이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녀의 마이마이에 담긴 테입이 김광석의 "다시부르기" 음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몇달 째 반복해서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증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가 달린 채로, 그녀의 귀에는 김광석의 노래가 담긴 마이마이 해드폰이 꽃혀 있었다.

드디어 수술 후 7일째 되는 날이 왔다, 이제 선고가 내려지는 날인 것이다. 수술후 7일 째는, 방사선실에서 목을 통해 조영제를 흘린 후 가슴 사진을 찍는 날이다, 만약 대장과 식도를 이은자리가 녹아버렸다면 사진에서 조영제는 가슴으로 흩어져 보일 것이고, 수술부위가 잘 아물었다면 조영제는 목에서 소장까지 곱게 잘 흘러 내릴 것이다, 방사선실에서 주사기로 조영제를 투여하고 "슛"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이었다,,

조영제는 새지않고 곱게 흘러내려서 소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기쁨이 박수를 쳤고, 그녀는 드디어 다음날부터 물을 먹기 시작했다, 무려 8개월만에 처음으로 목으로 무엇인가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컵에 담긴 물을 빨대로 빨아 마시면서,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누구도 감히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서슬이 시퍼렇게 울었다. 나는 그렇게 곱게 생긴 사람이 그렇게 절절하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곡을 하듯 그렇게 울었고, 오랜 인공 호흡기 때문에 쉬어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메아리처럼 그렇게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그야말로 둑이 무너진 것 처럼 눈으로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입으로는 목마른 아이처럼 한 컵의 물을 순식간에 다 마셔버렸다. 그녀는 물을 계속 요구했고,나는 간호사에게 내 허락없이 한방울의 물도 더 주지 말것을 지시했다. 물을 더 마신다고 안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물을 더 주면, 계속 그렇게 울음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수술 후 12일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그로부터 이주후부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을 먹기 시작한 날, 그렇게 펑펑 울고 난 다음날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날부터 그간 먹지 못한 것, 말하지 못한 것이 봇물이 터져나온 듯,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가장 가까운 이야기 상대가 되었다. 결국 병동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내가 그녀와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 그녀가 병실에서 내내 들었던 음악이 바로 여기에 링크한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라는 곡인데, 나는 왜 그녀가 왜 내내 이곡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는지를 짐작 할 것 같았지만 더이상 묻지 않았다. 아마 그녀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누군가가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벼랑에서 밀어 버린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그후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리고 그녀의 요청으로 밖에서 한두번 밖에서 저녘을 같이 먹기도하고. 둘이서 덕수궁을 산책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가끔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그녀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서서히 절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내게도 이제 그녀는 더이상 손을 내밀지 않으면 금방 죽을 것 같은 갸날픈 소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퇴근하자마자 그녀가 내게 보냈던 편지들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한번씩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나도 답장을 했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대책없이 상황에 빠져들기도하고, 또 어떨때는 영 새삼스럽다는 듯이 갑자기 생경하고 어색한 몸짓으로 손사래를 치기도 하는것이다. 나는 오늘 또 누군가의 우연찮은 불행을 매개로 그녀를 기억해 냈지만, 그녀는 아마 신문을 볼 때마다, 혹은 잡지를 읽을 때마다, 어떤 단어 하나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두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그 끔찍한 투병 생활을 떠올리면서, 마지막으로 나를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그녀에게 있어서 내게 대한 기억 역시 반드시 잊어버려야만 하는 커다란 상처중의 일부였던 셈이다,

2004/12/02 시골의사

쿠키뉴스 김상기기자 hrefmailtohrefmailtohrefmailtohrefmailt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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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차범근 감독 데뷔 첫 ‘경사’
기사입력 : 2004.12.12, 19:42

“두리야,넌 골 넣었지? 아빠는 우승 먹었단다.”

‘차붐 부자’가 연이틀 겹경사를 맞았다. 아버지 차범근(51·수원 삼성) 감독은 12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2004 K리그 포항 스틸러스와의 챔피언결정 2차전에서 승리,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아버지의 우승을 예고하듯 아들 차두리(24·프랑크푸르트)는 전날 시즌 2호골을 뽑아냈다. 11일(한국시간) 열린 독일 분데스리가 2부리그 전반기 마지막 경기 부르그하우젠과의 원정전에서 후반 36분 팀의 3번째 골을 뽑아내며 3대0 승리에 힘을 보탠 것.

경사가 겹쳤지만 감격의 크기로 따지자면 차 감독의 우승이 훨씬 컸다. 경기 후 차 감독의 눈시울은 잠시 붉어졌다. 선수로서는 원없이 많은 영광을 누렸지만 그동안 지도자로선 그렇지 못했던 탓이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 맛보는 우승의 기쁨이었기에 코끝이 시큰할 수 밖에 없었다.

화려했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감독 차범근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1년간 통산 308경기에 출장,98득점이라는 ‘차붐 신화’를 남기고 1989년 귀국한 차범근은 91년 프로축구 울산 현대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벤치의 차범근은 그라운드를 질주하던 때만은 못했다. 3년이내에 팀을 우승시키겠다고 했던 호언장담은 공수표가 됐다. 97년에는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올라 1년 후 프랑스월드컵에 나섰지만 네덜란드전 0대5 참패에 책임을 지고 대회기간 중 사퇴라는 수모를 당했다.

이후 프로축구 승부 조작설을 제기해 5년간 국내에서 지도자 활동이 금지돼 중국으로 건너가 선전 핑안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1년 6개월만의 귀국도 금의환향은 아니였다. 해설가로 축구와의 인연을 이어온 차범근 올해 수원과 3년 계약을 맺고 국내 프로축구로 돌아왔다.

4경기만에 복귀 첫 승을 신고할 만큼 출발은 불안했다. 선수들이 ‘차범근식 공격축구’에 차츰 적응하면서 수원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7월 29일에는 아시아 투어에 나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명문 FC 바르셀로나를 1대0으로 격침시키는 이변까지 연출했다.

그러나 후기리그 1위와 플레이오프 승리,그리고 챔피언결정전 우승은 결코 이변이 아니였다. 선수들과 1년간 땀흘리며 동고동락한 끝에 거둬들인 지도자 차범근이 쓰디쓴 인내의 대가로 거둔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수원=조상운기자 swch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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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감독 인터뷰] ″오늘은 눈물이 많이 납니다″
기사입력 : 2004.12.12, 23:51

“아마 제가 얼만큼 기쁜지 여러분은 상상이 안갈 것입니다.”

12일 금빛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수원월드컵경기장 인터뷰룸에 들어선 차범근(51·수원 삼성) 감독의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14년이 걸렸습니다. 굉장히 긴 시간이었는데 우승으로 힘들었던 게 한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입니다. 함께 땀흘린 선수들,구단 프런트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다시 운동장에 서기까지 가족들의 반대가 많았는데 결국은 이해해준 가족들에게 이번 우승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차 감독은 이날 새벽 5시 독일에서 걸려온 아들 차두리(24·프랑크푸르트)의 전화를 받았다. 전날 분데스리가 2부리그 전반기 최종전에서 시즌 2호골을 뽑아낸 아들이 자랑삼아 건 전화였다. 아들은 “아버지도 꼭 우승하세요”라는 말로 결전에 나서는 아버지를 응원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선수시절을 보냈던 차범근. 하지만 지도자 차범근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기에 그는 이날 선수시절엔 한 번도 흘려보지 않았던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오늘은 왠지 눈물이 많이 납니다. 승부차기에 들어갈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의 법칙이지요. 포항이 우리만큼 땀을 안흘린 것은 아니지만 땀흘린 사람에게 보람이 있고,우승은 위(하나님)에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차 감독은 수원의 사령탑에 오르기 전까지 울산 현대와 98프랑스월드컵 한국 대표팀,그리고 중국 프로축구 선전 핑안팀까지 지도자로서 세 차례나 기회를 가졌지만 한 번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때문에 지난 해 말 수원의 영입 제의를 받았을 때도 적잖이 망설였다. 그러나 꼭 한 번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고,고민 끝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시즌 초반 4경기만에 첫 승리를 거두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차 감독은 팀을 후기리그 1위로 이끌며 마침내 자신의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좋은 선수와 좋은 팀을 맡아야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겸손에 불과하다. 생애 처음으로 우승 감독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던 길에 차 감독은 “FA컵도 먹어야지. 이왕 먹는 김에 다 먹어야지”라며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수원=조상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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