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쥬디 조회수 : 76
시드니 야경...

가고싶따...시드니로...-_-;


2004.07.18 00: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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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영영 조회수 : 37
정선 오장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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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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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땅 밴쿠버’ - 내 상처 다 나아버렸네

나는 이십대를 감기약에 취해 종일 자다가 저녁을 맞은 사람처럼 허망하게 떠나보냈다.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대학을 선택했고, 한동안 사막 한가운데 유기된 듯 황막했다. 어느날 캠퍼스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를 오아시스처럼 만났다. 우리는 비슷한 연배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삼십대에 사회 초년생이 된 나는 마치 1초에 18프레임 화면처럼 어설프면서도 성급하게 움직였다. 언니는 끝내 한국에서 직장을 얻지 못하고 미국으로 갔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대학에 왔던 언니는 다시 간호사가 되어 타국에 가게 된 것이다.

초반부를 대학에 떼어준 내 30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20대에 놓쳐버린 시간들까지 되살려낼 기세로 살았건만 30대의 끝자락도 허허로웠다. 나는 40대가 불혹(不惑)인 이유를 금방 알아챘다. 도무지 유혹당할 시간이 없는 공간에 어느새 갇힌 것이다. 14프레임쯤으로 살던 3년 전, 미국 취재 의뢰가 들어왔다. 채플린 영화 속 사람들처럼 종종걸음 치느라 지쳐있던 나는 망설임 없이 취재 제의를 수락했다.



LA에서 일을 마치자마자 나는 두 시간을 날아 한국사람이 거의 없는 서부의 한적한 도시에 당도했다. 10년 만의 만남, 언니는 근사했다. 매너 좋은 백인의 아내가 되어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촉감 좋은 카펫 위에 누워 언니를 마음껏 축하해주었다.

다음날 광활하고 아름다운 레이크 타호에서 언니가 내게 기습적으로 말했다. 나 이혼할까 고민 중이야. 그 순간 눈이 부시도록 푸르던 레이크 타호가 잠깐 잿빛으로 바뀌었다. 너무 합리적이어서 싫다고 했다. 끈끈한 정이 없단다. 생기지 않는 아기를 함께 걱정하지 않는 남편이 섭섭하다고도 했다. 시험관 아기를 만들자는 제의에 남편이 ‘노’라고 했을 때 언니는 사랑이 끝났다고 확신했단다.

기왕 온 김에 캐나다 밴쿠버의 선교사님을 만나고 가느냐 마느냐로 갈등하던 나는 언니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언니가 일상에서 한발 떨어져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음날 밴쿠버로 떠났다. 도착 첫 날 언니는 랍슨가에서 한국말로 떠드는 사람들이 모두 반가운 모양이었다. 언니는 밴쿠버 한국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며 흡족해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느닷없이 불안이 엄습해왔다. 실시간으로 뉴스를 체크하면서 분주하게 살던 내가 열흘 넘게 슬로 비디오처럼 움직이는 일에 갑자기 조바심이 일었다. 나를 멀찌감치 떼어놓고 사람들이 마구 달려가는 환영이 보일 지경이었다. 어느 틈엔가 나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선교사님은 우리들에게 록키산맥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언니는 그냥 밴쿠버에서 지내자고 했다. 우리는 지도에 나오는 근교 관광코스에 가볼 생각도 않고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한국음식을 사먹곤 했다.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로 겸연쩍어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심심하면 자전거를 빌려 스탠리파크로 갔다. 소리지르며 아름다운 해안을 마구 달리다가 호수처럼 잔잔한 잉글리시 베이를 휘휘 거닐었다. 바닷가 동네의 낮은 아파트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랍슨가의 한국 슈퍼에 가서 한국물건을 실컷 구경했다. 언니는 내륙 깊숙이 파고든 밴쿠버의 바다가 한강같아 보여 좋다고 했다.

밴쿠버 시내에서 좀 떨어진 리치몬드의 선교사님 댁에서 종일 지낸 적도 있다. 그런 날은 지도를 들고 마켓에 찾아갔다가 다시 지도를 보며 집으로 돌아와 음식을 해먹었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온 낯선 도시에서 우리는 악착같이 관광지를 섭렵하기보다 이방인처럼 힐끔거리기만 했다. 돌이켜보니 지난 10년 간 변변하게 국내여행조차 한 일이 없었다. 언니도 연방정부 간호사로 일하면서 미국 서부 근교만 겨우 가봤을 뿐이라고 했다.

작열하는 태양과 건조한 공기 탓에 연신 선블록을 발라도 피부는 튕겨 나갈듯이 당겼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틈엔가 나는 선블록도 던져버리고 마치 20대로 돌아간 듯 자유로워졌다. 꼬박꼬박 졸다가 하루를 보내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때처럼. 우리는 낯선 도시에 와서 빈둥거림으로 치유받고 있었다.

1주일이 마치 한달 같던 밴쿠버를 떠나기 전날, 언니가 선교사님을 위한 상을 차리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닭을 밤새 마늘 양념에 재어놨다가 오븐에다 서너시간 동안 구워 상을 차렸다. 그날따라 선교사님은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덕분에 둘이서 근사한 작별 만찬을 했다.

언니는 형부와 한차례 헤어졌다가 다시 재결합을 했다. 아이 생각은 잊었지만 가끔 허전하다고 했다. 요즘 거의 10프레임으로 움직이는 나는 다시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언니와 나에게 여유를 갖게 해준 밴쿠버, 꼭 다시 가서 언니와 함께 어슬렁거리고 싶다.

<이근미 소설가>
작성 날짜 : 200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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