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소울플라워(61.84.34.79)  조회: 3232  리플수: 18  추천점수: 69  작성: 10/15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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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light


 



 부천영상단지內에 위치한 아인스월드


 



 


 


 웨스트민스턴 사원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서쪽(West)에 있는 대사원(Minster)’이란 의미이다. 8세기 경에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그 후 11세기 참회왕
에드워드, 13세기 헨리 3세에 의해 각각 개축이 됐다. 원래는 노르망디 양식이 강한 건물이었으나 헨리 3세가 고딕양식으로 다시 변형시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내부에는 긴 스테인드글래스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화려한 멋을 더해준다. 길이 1백56m, 너비 61m,
그리고 높이 31m의 크기이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 공이 이곳에서 왕위대관식을 한 이래 많은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이뤄진 장소로 유명하다.
프랑스에서 온 노르만 출신인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모두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트 사원을 대관식 장소로
선택했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지금의 국회 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과 한쌍을 이루고 있던 건물. 웨스트민스터 궁은 16세기까지 왕이
거처한 궁궐이었으며 바로 길 건너 위치해 있는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원래 왕실 직속의 특수 교회였다. 그래서 공식 명칭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성 피타교회’이지만 흔히 사람들은 그냥 ‘애비(Abbey)’ 라고 부른다. 사원 안에는 역대 왕들과 유명 인사들의 묘와 기념비가 많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사한 무명용사를 위한 비석도 함께 세워져 있다. 특히 본당에는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와 엘리노어 왕비, 헨리 5세
등의 묘가 있다. 역대 왕들이 대관식용으로 사용한 의자 ‘코로네이션 체어(Coronation Chair)’도 명물로 꼽히고 있다. 글래드스턴을
위시한 정치가, 문학가인 워즈워드와 엘리어트, 과학자인 뉴턴, 왓트, 음악가 헨델 등이 이곳에 묻혀있기도 하다. 이처럼 역사적 인물의 묘지가
산재해 있는 까닭에 사원 내부로 들어서면 한순간에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의회정치의
총본산이자 또한 종교개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643년부터 1649년까지 이곳에서 열린 총회에서 칼빈의 사상이 구체화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작성되기도 했다. 이는 종교 개혁가인 칼빈의 대표적인 신조이자
오늘날 장로교회의 표준적인 신앙원리가 되고 있다. 또한, 왕의 대관식 장소와 무명전사의 추모비가 함께 있음으로 인해 영국 입헌군주의 진정한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정문의 녹색 대리석에서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remember winston churchill)’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 석판이 눈에 띈다.


 


  


 


에펠탑




 프랑스 파리의 만국 박람회장에 위치한 높이 984피트(약320m), 무게 7000톤의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시공자인 프랑스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으로 불리고 있다. 1887년부터 약 300여명의
철강기술자가 동원되어 2년 동안 공사를 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변형을 거쳐왔다. 이제까지 이곳을 찾은 관광객은 연평균 6백만명으로 총 2억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파리지앤(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각종 행사를 이곳 근처에서 치루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에펠탑은 애초에는 특별한 송수신 기능이 없게 만들어졌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55피트의 안테나가 덧붙여져 TV송신탑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건설 후 1930년까지 약 40년간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이 탑이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세느강 근처 땅은
모래가 섞인 연약한 지반이라는 점과 높이가 300m를 넘어가면 바람이 건물을 미는 힘인 횡력이 급격하게 높아진다는 점 때문에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미 파나마 운하의 수문건설과 뉴욕 자유의 여신상 건설에 참여했던 에펠의 뛰어난 건축능력은 이런 한계점을 극복했고, 이 탑은 11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건재하다. 에펠탑은 건설 당시에도 파리 시민들의 숱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파리의 건물들이 보통 5~6층 높이인데 비해
에펠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연과 조화되는 도시미’를 강조하던 파리 사람들이 ‘오만할 정도로’ 높은
에펠탑을 묵과하기도 힘들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인 모파상, 에밀 졸라, 뒤마 등 3백여명이 탄원서를 제출할 정도로 반대는 격렬했다. 특히 에펠탑
건설에 가장 많은 반대를 했던 모파상은 에펠탑이 완공된 후 내부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곳이 흉물스런 에펠탑을 보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파리의 유일한 곳’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에펠탑에 오르면 파리시 전체는 물론, 바로 옆 세느 강에서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유람선을 감상할 수 있다. 내부에는 세군데의 테라스를 비롯해 레스토랑, 카페, 영화관이 들어서 있으며 리셉션,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는 귀스타브
에펠 홀도 있다. 에펠탑은 그간 자연적인 변화를 겪기도 했는데, 기온으로 인해 높이가 15cm상승하고 바람 때문에 12cm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탑 전체를 휘감고 있는 조명은 어두워진 후부터 새벽까지 매 시간마다 10분간 화려하게 빛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1931년 뉴욕 시에 건설된 102층의 철골 구조 건물이다. 높이 약 381m인 이 빌딩은 1971년 세계무역센터가 생길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지난 2001년 9.11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역사속으로 사라지자, 시카고에 있는 시어즈 타워(442m)와 말레이지아의
페트로나스 타워(452m), 중국 상하이의 진마오 빌딩(421m) 등과 함께 ‘세계 4대 초고층 건물’로 꼽히고 있다. 이 건물은 창문이
106,400개이며, 화장실도 무려 2,500개인 그야말로 매머드급 빌딩이다. 이 건물은 지금도 뉴욕시의 명소로 손색이 없다. 마천루(摩天樓)의
대표적인 예로서 수용인원 약 1만 8000명이며 65대의 엘리베이터가 각 층을 연결한다. 주로 임대 사무실용으로 되어 있는데, 86층과
102층에는 전망대가 있어 시내와 근교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951년에는 꼭대기에 약 67m 높이의 텔레비전 안테나 기둥이 설치되었다.
120㎞까지 보인다는 102층 전망대는 한 번 올라갈 볼 만한 관광 명소로 꼽힌다. 방문객만 하루 평균 7000명 정도이고, 연간 300만명이
이곳을 찾고 있다. 건축적으로는 1910~1920년대에 걸쳐 유행한 울워스 고딕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은 뉴욕 중부 맨해튼 34번가
51번 도로변에 약 0.8㏊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건축가인 슈립과 람하먼이 설계해서 건축했으며,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뉴욕시의
별명으로도 불린다. 총 40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졌으며 현재는 그 주위로 한인타운이 형성되어있다. 1986년엔 국가 기념물로 지정됐다.
1945년 2차대전 중 폭격기 B-25가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79층을 들이받았을 때, 비행기는 완파됐어도 건물은
끄떡없었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특히 이 건물은 영화의 공간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맥라이언이 주연한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킹콩’, ‘러브 어패어’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인의 자존심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소유주는 일본의
부동산 재벌이라는 점이다.


 


 



 


 노트르담 사원


 현재 노트르담 사원이 위치한 곳은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후 4세기경에 카톨릭이 국교로 지정되면서 이곳에 성당이
만들어졌고 1163년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파리 주교에 의하여 본격적인 개축이 시작되면서 길이 130m, 폭 48m,
높이 35m의 전형적인 고딕양식 건물이 만들어 졌다. 많은 건축가와 기술자, 예술가들이 참여해 무려 170년 동안 건설됐다. 프랑스혁명 기간
중에 첨탑이 파괴되기도 했고 한때 포도주 창고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9세기 비올레르 뒤크(Viollet-le-Duc)에 의해 재건됐다. 원래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말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의미이며 성모마리아를 지칭한다. 정면에 보이는 두개의 종탑과 장미창이 있으며
입구에는 3개의 문이 있다. 정면에서 왼쪽 문이 ‘성모마리아의 문’, 가운데가 예수님과 12제자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최후의 심판의 문’,
그리고 우측에는 ‘성녀 안나의 문’이다. 이 문들 위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을 상징하는 28개의 입상이 나열되어 있으며 2층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가 천사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화려한 장관을 볼 수 있다. 좌우에는 각각 인류의 시초인 아담과 이브의 조각이 있다. 성당 내부는
무려 9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3개의 장미창과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등이 걸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장미창은 직경이
13m에 이르며 햇빛의 각도와 강약의 변화에 따라 창의 모습도 시시각각 변하게 돼 ‘신비의 색깔’이라고도 칭해진다. 3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세느강과 파리의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노트르담 사원의 또다른 특징 중의 하나라면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앞면 보다는 뒷면이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건축되었다는 점이다. 노트르담 사원은 그간 잔다르크의 명예회복 심판, 나폴레옹 대관식, 드골 장군의 장례식, 그리고 미테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등이 치러져 프랑스인들에게는 유서 깊은 현장이자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원으로 깊이 각인되고 있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 방문하면
4명의 연주자에 의해서 연주되는 파이프 오르간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연주 소리를 듣다보면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신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위대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이곳을 배경으로 종지기 콰지모도의 사랑과 자유를 담은 소설 <노틀담의 곱추>를
쓰기도 했다.



 


 


 


 샹보르 성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샹보르 성은 프랑수와 1세의 제위 시기인 1519년에 착공되어 15년 뒤인 루이 14세 때에
완공되었다. 이 성에는 무려 440여개의 방이 있어 그 웅장한 규모면에서 베르사유 궁전과 곧잘 비교되곤 한다. 총 5,500헥타르의 공간에
32km에 달하는 길고 긴 울타리를 가진 샹보르 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루아르 계곡의 방대한
산림 속에 위치하고 있어 그 모습이 자연 경관과 더불어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성의 외관은 프랑스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유행을 따라 좌우 대칭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중앙 돔 안에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이 있으며 이는 위대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 계단 끝에 프랑수아 1세의 방이 나타난다. 내부에는 금실로 수놓은 찬란한 침대 장식과 테라스에서만 볼 수 있는
수많은 종루와 탑, 그리고 굴뚝의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한때 무도회와 연극이 상연되었던 둥근 천장의 근위실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희극작가 몰리에르가 그의 작품들을 처음 올리기도 한 곳이다. 성 내부 곳곳에는 프랑수아 1세의 상징인 도룡뇽 무늬가 새겨져 있어
관광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샹보르 성은 전체적으로 ‘중세적인 느낌’이 매우 강하도록 설계됐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벽돌과 크고
묵직한 둥근 탑 등 견고해 보이는 형태가 그것이다. 하지만 군사적인 목적은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견고성보다는 지붕 꼭대기의 장식품들을 위해
전체적인 구조가 배열되었다. 샹보르 성은 왕들의 상시 거주 숙소는 아니었고 다만 인근 솔로뉴와 샹보르 숲에서 사냥을 즐길 때만 주로 이용했다.
그래서 1년에 고작 5주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민중들의 분노를 사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는 성난
군중에 의해 점령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현재 총 400여개의 방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것은 10여개 정도이지만 이 정도로도
중세의 고풍스러운 맛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또 성에서는 가을서부터 봄이 오기 전까지 3m에 달하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데, 관광객들의 추위도
녹여주면서 프랑스인들과 따뜻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일몰 때나 안개낀 아침에 샹보르 성을 방문하게 되면 환상적인 중세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게 된다.



 


 


 


 피사의 사탑


한쪽으로 기울진 모습 때문에 더욱 유명한 ‘피사의 사탑’은 본래 피사 대성당의 부속건물이었다. 그러니까 피사 대성당은 성당 본건물과 세례당,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불려지는 종탑 등 세가지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1174년에 착공되어 1350년에 완성된 피사의 사탑은 중세 도시
국가인 피사가 해전(海戰)에서 사라센 함대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 기념으로 세워졌다.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으며 꼭대기의 종루를 포함해
55.8m의 높이와 16m의 지름을 가진 8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게는 1만4,500톤. 탑 내부에는 나선형으로 된 294개의 계단이 있으며
종루에는 각각 다른 음색과 음계를 지닌 7개의 종이 있다. 그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지중해에서 발달한 토스카나풍과 중세 기독교 정신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합쳐졌다. 이 양식은 매우 대담하면서도 종교적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피사의 사탑은 지금보다 2배나 큰 110m
정도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탑을 쌓아가던 중 3층까지 올렸을 때 공사 관계자들은 지반의 한쪽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따라서 이때부터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 그 반정도의 높이로 짓기로 결정했으며 수학자와 건축가들이 모여 원인 파악과 문제해결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연구했다. 새롭게 층을 올릴 때마가 기울어져 있는 쪽을 더 높게 만들기도 했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기울기가 멈춰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국 공사를 몇 번이나 중단하기도 했지만 끝내 1350년 기울인 채로 완공되었다. 매년 1mm씩 남쪽으로 기울어져 현재는 10도
가량이 차이가 나 수직선상에서 5.2m나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 1990년 부터는 내부 관람을 금지한 채 탑세우기에 골몰하고 있다. 현재는 탑의
기초를 강철 케이블로 묶은 후 반대편 지반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올려놓아 1년 만에 5mm를 다시 원상복구하기도 했다. 무려 7백년 동안이나
기울어진 채 쓰러지지는 않았기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그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즉, 물체의 질량 중심이 그
물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 내부에 있으면 쓰러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피사의 사탑은 수세기 동안 조금씩 기울어져 왔음에도 여전히 존재해
있다. 일부에서는 향후 200년을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반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여전히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져 있는 현재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되기를 바라고 있다.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콜로세움’은 거대한 투기장이자 오락시설이었다. ‘글라디아토르’라고 불리는 검투사들의 시합과 맹수들의 싸움 등이 선보이던
장소였다. 원래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가 있던 자리에
착공해 8년 뒤인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다. 당시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100일 동안 격투 경기가 열렸으며 약
5,000여 마리의 맹수가 도살되기도 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당시 콜로세움이 자신들에게 주는 자긍심을 표현했다. 둘레 527m에 직경 188m(짧은 쪽 156m)의 크기를 가진 이 원형극장이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을 얻은 데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유래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근처에 세워진 네로의 조각상을 의미하는 콜로서스(Colossus)에서 파생됐다는 것이다. 타원형을 이루고 있는 웅장한
모습이나 아치가 장식하는 균형잡힌 모습들이 로마 건축 기술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거대한 바위 축대 위에 세워졌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 위에 있었으니 이는 지진으로 인한 흔들림이 최대한 흡수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수용 인원은 4만5,000의 좌석과 5,000의
입석으로 총 5만명 정도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의 콜로세움 천장에는 ‘베라리움’이라고 불리는 천막지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 채광과 환기구의 역할을 했다. 특히 지정된 입구로 들어가 관람을 원하는 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은 오늘날의 많은 경기장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중심부의 ‘아레나(투기장)’를 정점으로 카베아(관객석)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도록 배치되었으며 지하에는 맹수와 검투사가 대기하는
공간이 있고 사형수들이 갇혀있는 감옥도 있었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의 많은 신도가 이곳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완공 후 300년간 피비린내 나는 격투기와 사형이 처해졌지만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그 잔인한 역사가
끝났다. 하지만 이 콜로세움에서 피를 흘리는 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람들이 동물 위로 올라가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기도
하고 동물들이 직접 뒷발로 일어서거나 물 속에서 곡예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다표범이나 사슴, 영양, 원숭이, 개 등도 조련을 받아
갖가지 쇼에 등장했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


 ‘고대 그리스 문화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불리는 ‘아크로폴리스’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 제 1호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도시 중심지에는 약간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이를 ‘폴리스’라고 불렀다. 이곳은 주변 지역을 감시하기에 알맞을 정도로
높았기에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 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 국가 자체가 폴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원래의 폴리스는 ‘높은’이라는
의미의 ‘아크로(akros)’라는 단어가 붙어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아크로폴리스는 각 도시 국가에 있는 언덕과 그
언덕에 위치한 방어벽과 신전을 모두 가르키는데, 오늘날에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아티케 지방의 아테네에 있는 그것을 지칭한다. 또 아크로폴리스에는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을 짓고 여러 신들의 상징물을 만들어 당시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재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성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레아, 아테네 여신을 모신 신전인 파르테논와 에레크테이온, 승리의 여신 니케를 기념한 니케신전이 남아있다. 특히 중앙에 위치한
파르테논은 그리스 건축의 상징 그 자체이며 멀리서 보면 공중에 뜬 것처럼 느껴져 신기함을 자아낸다. 중간부분이 약간 부풀어져 있는 기둥 부분은
딱딱한 신전의 모습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기도 한다. 또한 기하학의 법칙이 엄격하게 적용되기는 했지만 딱딱함과 획일성을 배제하는 건축기법을 사용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근 40여년에 걸쳐 건설됐다. 기원전 447년에 처음 파르테논이 건설되기 시작해 438년에
완성됐고 건물 외벽의 장식은 432년까지 계속됐다. 그 후 기원전 421년과 406년 사이에 에레크테이온과 니케신전이 완성됐다. 성벽 밑으로는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연극장(1만7,000석)과 부유한 귀족이며 철학자였던 헤롯 아티커스가 기원 후 161년에 세운
극장(5,000석)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크로폴리스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1458년 아테네를 점령한 터키인들은 파르테논신전 남서쪽에
첨탑을 세우기도 했으며 1687년 터키인과 싸우던 베네치아인들이 아크로폴리스를 폭격, 신전 안에 있던 화약고가 터져 건물 중심부가 파괴되기도
했다. 또한 1800년대 초기 터기의 허락을 받은 영국의 귀족 토머스 엘진이 조각품을 철거해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팔아 상당수의 유물이 유출되기도
했다.



 


 


 


성바실리 사원




 성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건축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려한 외관과 독자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이반 대제가 2백년간
이곳에 군림한 몽골족 카잔한을 물리친 기념으로 1561년 완성했다. 외세를 물리친 기념으로 만들어진 만큼 당시 러시아 건축 기술을 총동원해
건설했다고 한다. 특히 인근의 또다른 건축물인 크레린 궁전이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진 반면, 성바실리 사원은 러시아 건축가들이 전통적인
기법을 발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란한 색채와 독특한 모양새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양한 탑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부조화 속의 조화’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곳은 건설 당시 바실리라는 수도사가 기거하다 1588년 사망해 북동쪽 별관에 묻혔다. 수도사
바실리는 생전에 이반 대제에게 종교적, 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반대제가 그를 기리기 위해서 ‘성바실리 사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7m 높이의 팔각탑을 중심으로 네 개의 중간탑이 둘러싸고 그 사이에 다시 네 개의 작은 탑이 위치해 총 9개의 탑이 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외부에서는 그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탑은 8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탑들은 또한 서로 다른 형상을 지닌 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실리의 전체 탑은 각기 독특한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전체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이 강해 끊임없는 긴장감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건축기법이 특이하다. 각 탑들은 계단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부 벽면에는 이슬람 양식의 꽃과 기하학적 문양,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16세기경에는 붉은 벽돌이 주요 재료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좀 더 밝은 색조를 띠는 미술적 장식이 첨가됐으며
17세기에 남동쪽의 삼각형 지붕 종탑이 증축된데 이어 남북에 두 개의 출입문이 더 만들어졌다. 애초에 이곳을 설계한 사람은 뽀스뜨닉
야꼬블레프라는 사람인데, 그 사원이 너무 아름다워 다시는 이와 비슷한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눈이 뽑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를 이기지 못한 이반대제의 잔혹함을 엿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바실리 성당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다. 사원 내부는
박물관이자 예배당인데, 성가대가 부른 노래가 지붕 끝까지 올라가 공명되면서 다시 내려오는 음색이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5,895m)는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부근에 위치한 아프리카의 최고봉이자 세계 최고의 화산이기도 하다.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
혹은 ‘하얀 산’이란 뜻의 킬리만자로는 적도 부근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문자 그대로 정상이 항상 만년설로 덮여있다. 1848년 독일인 선교사
레프만(J. Rebman)과 크라프(L. Krap)가 이 산의 모양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그 이후 1889년 역시 독일인인 지리학자 한스
마이어(H. Mayer)가 최초로 키보(Kibo)봉 등정에 성공했다. 킬리만자로의 중심부에는 키보봉 외에 마웬지봉(Mawenzi),
시라봉(Shira) 등 3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라봉은 격렬한 화산 폭발로 정상이 내려앉았고 이후의 침식 작용으로 더욱
깎여져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오래된 마웬지봉의 정상 역시 침식 작용이 심해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로 가장 늦게 형성된 키로봉의 정상은 칼데라로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분지 모양을 하고 있다. 직경이 2km에 달하는 이
칼데라에서 폭발이 계속해서 일어나 제 2의 화산추가 형성됐는데, 그 분화구의 폭이 약 900m이다. 또다시 이 분화구 속에 제 3의 폭발로
생겨난 화산재 언덕이 있다. 적도에서 남쪽으로 330km 지점에 위치한 킬리만자로의 계절은 한국과 정반대로 7, 8월이 가장 기온이 낮다. 연중
3월말부터 6월초까지가 본격적인 우기이며 6월말부터 10월 중순까지가 건조기에 해당한다. 상부는 빙하, 중간은 현무암과 용암 지대, 그리고
하부는 습지대와 산림 지대로 구분된다. 킬리만자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해발 1,700~1,800m의 고원지대는 연중 내내 섭씨 12도에서
25도의 기온을 유지하는 이른바 ‘기후의 천국’이라 할만 하다. 유명한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곳을 작가 자신도 종주 했다고 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1981년 전명철이 최초로 킬리만자로 등반에 성공했다.


 


 



 


 페즈메디나


 메디나(Medina)는 ‘도시’란 뜻으로, 모로코가 프랑스에 의해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도시적인 삶의 중심지를 의미했다. 마치 미로와 같이
복잡한 골목길과 노천 시장들, 그리고 공동체의 공간들로 구성된 메디나에는 모로코 특유의 독특한 냄새가 배어 있다. 모로코의 메디나 가운데서,
현재 약 백만 명의 주민들이 살고있는 페즈 메디나는 역사적인 가치가 풍부한 종교와 문화, 예술,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다. 뛰어난 건축적 면모와
함께, 모로코에서 가장 경이로운 메디나로 알려진 이곳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중세 도시를 대표하며 스페인-아랍 문명의 진수를
이루고 있다. 중세의 고혹적이고 독특한 도시 구조를 거의 변형 없이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페즈는 그 도시 전제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페즈 형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바그다드(Baghdad)의 아바시드(Abbassids)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이드리스(Idriss) 1세가 8세기 말엽 와디 페즈(Wadi Fez) 강변의 오른쪽에 있던 페즈를 발견하고 그곳에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그후
818년에는 기독교 군대에 의해 알달루시아로부터 추방당한 천여 명의 회교도인들이 엘 안두아(El Andoua) 구역을 만들었는데,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과 문화를 이곳에 전파했다고 한다. 그리고 7년 후에 오늘날 튀니지에 있는 카이루안(Kairouan)으로 부터 쫓겨난 약 300명의
부유한 상인과 장인들이 이곳에 합류했다. 문화적으로 발달된 도시에서 온 이 집단은 강가의 왼편에 정착하게 된다. 여기서 9세기 중반에 그 유명한
카이라우인(Kairaouine)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로 인해 페즈는 ‘아프리카의 아테네’라는 명성을 얻게된 것이다. 1912년 페즈
조약(Treaty of Fez)으로 모로코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자, 전통적인 메디나의 외곽에 프랑스 스타일의 넓고 곧은 대로를 만들어 ‘빌
누벨(Ville Nouvelle)'이란 신도시를 건설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에 행정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 페즈를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도시
계획 전략은 결과적으로 구 메디나(Old Medina)가 보존될 수 있게 했고 동시에 행정적인 중심지로부터 면하게 만들었다. 페즈 메디나는
오늘날 이러한 역사적 유산으로 인해 두 가지 양면성을 간직하고 있다. 즉,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손상되지 않은 중세 도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산업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이 도시의 외곽에서 진행되고 있다.


 



 


Night


 


 


 



 뉴욕항의 야경


 뉴욕은 미국의 여러 항구 도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뉴욕항이 세계적으로도 대량의 수출입 화물이 드나드는 대무역항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뉴욕항은 뉴욕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맨하턴에 위치해 있으며, 대서양 항로의 서쪽 끝에 있기 때문에 유럽과의 연결 통로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뉴욕항이 있는 뉴욕만은 1524년 이탈리아의 베라차노가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처음 발견했다. 1609년에는 영국의
허드슨이 뉴욕만에 도달하여 맨하턴섬을 탐험하고, 그 뒤를 이어 네덜란드 탐험가가 이 섬의 남단부에 이주하면서 뉴욕항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800년대부터 뉴욕항에는 레스토랑과 숙박시설, 해상 수공예품 상점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뉴욕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뉴욕이
세계 최대의 항만 도시로 불리는 것도 바로 뉴욕항이 있기 때문이다. 뉴욕 뉴저지주의 항만청이 관할하고 있는 뉴욕항은 ‘미국의 관문’으로도 불리고
있다. 옛날 유럽 등지에서 몰려든 이주민들의 대부분이 뉴욕항을 통해 미국 동부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이주민들이 여객선으로 미국에
들어오는 경우는 많이 줄었으나, 그래도 대형 화물선과 여객선이 왕래하면서 대항구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미국에서 일년동안 수입하는 물량의
절반 정도가 이곳 뉴욕항구를 통해 들어온다. 또한 수출 물량의 1/3 정도가 뉴욕 항구를 통해서 세계각지로 운반되고 있다. 이는 허드슨강 어귀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뉴욕항구의 입구인 리버티섬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은 1884년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민에게 기증한 것이다. 제작자는 프레데릭 바르토르디로서 그는 이 거대한 선물을 제작하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여신상의 높이는 약 46m, 해면에서 횃불까지는 92m, 횃불을 들고 있는 오른손의 지름이 4m이고 길이가 13m로 총무게는 225t에
달한다. 이 여신상은 자유의 나라 미국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뉴욕항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항구를 전체 관광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크루즈 선박을
이용해야 할 정도다. 세계적인 미항으로도 불리는 뉴욕항구와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만 무려 2시간이나 된다.



 


 



 


 


 




 사그라다파밀리아 성당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존 건축의 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파격적인 건물이다. 마치 거대한 옥수수 4개가
하늘로 치솟은 듯 보인다.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해 1882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이 성당은 12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앞으로도 200년은 더 건축을 할 예정이라고. 현재 완성된 것은 지하 예배당과 중앙 지하실 정도이다. 완성된 도면에 따르면 높이
100m 정도의 탑이 12개가 들어서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를 상징한다. 이외에 중앙에 세워지는 170m의 가장 큰 탑은 예수를
상징하고 탑과 탑을 이어주는 돔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또 별도의 돔 4개는 4명의 복음 성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스러운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까지는 전체 건축 시리즈에서 일부분에 불과하다.
‘나시미엔토(탄생)’라는 건축 주제에 이어 ‘글로리아(영광)’와 ‘파시온(수난)’ 부분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다. 향후 200년이라는 건축
시간이 더 소요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당 지하에는 가우디의 스케치와 사진 등이 있다. 현재는 공사중이기 때문에 성당 내부에는
시멘트 포대와 공구가 여전히 흩어져 있다. 이 성당을 구성하는 외벽 선은 거의 모두가 곡선 형태이다. 이는 지금껏 건축역사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개념이다.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곡선 형상에 적합한 구조 역학까지 배려해 건축됐다. 높이 170m를 가진 이 거대한 건물은 바르셀로나의
‘스카이 라인(산이나 건물이 하늘에 그리는 윤곽)’을 바꿨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우디 건축의 특징은 ‘건축물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기능은
반드시 유지하되 그 외형과 내부공간을 어떻게 구성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시킬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흔히 건축물이라고 하면 고정되고
딱딱하고 위치가 바뀌지 않을 듯한 느낌을 주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마치 땅위에 떠서 부유하고 있는 듯 보이며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움직일
듯한 모양새다. 그만큼 전통 건축 양식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다. 특히 해가 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받았을 때 성당의 모습은 황홀경 그 자체다.
가우디는 40년 동안 이 성당 건축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1926년 전차에 치여 사망할 당시에도 성당 앞에서 상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유네스코는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인 구엘 공원과 카사밀라 등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인간의 창조적 천재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라며 극찬했다.


 


 




 밀라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밀라노 대성당’은 높이 157m, 너비 92m에 이르는 거대한 고딕양식의 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통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밀라노라는 도시 자체가 유럽의 동서남북을 잇는 요충지이자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경제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런 밀라노가 자랑하는 두 가지가 바로 ‘세계 최첨단 유행’과 ‘밀라노 대성당’이다. 밀라노 대성당은 3천개가 넘는 거대한 조각군과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수백개의 유리 첨탑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장미창이 유난히 아름다운 것으로 정평이 높다. 첨탑의 경우
굉장히 화려해 보이기는 하지만 일부 통일감이 없고 번잡해 보인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이 성당의 유래는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대성당을 지을 것을 건의한데서 비롯되었고 이에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가가 기공식을 거행했다. 당시 영주와 대주교는
프랑스나 독일에 필적할 만한 거대하면서도 권위 있는 성당을 원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외국 건축가들도 함께 참여시켰고 그래서 다소
이국적인 요소가 강조됐다. 현재 이탈리아 내에 있는 성당 중에 알프스 이북의 고딕적 요소가 가장 농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건축양식이 반영되다보니 건축가들 사이의 의견조정이 어려워 부대 공사가 모두 끝난 것은 1951년이었다. 대성당에는 모두 5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앙문은 ‘천국의 문’으로 불린다. 특이한 것은 이 성당에 있는 모든 문은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 이는 ‘교회가 모든
것을 포용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무료이지만 반바지나 슬리퍼, 미니스커트 차림의 입장은 금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나
혹은 계단을 이용하여 옥상까지 올라갈 수가 있는데 맑은 날에는 알프스산맥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밀라노 대성당에는 대주교 암브로시오의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킨 시민들에 대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지나치게 잔혹하게 처벌을 가한 일이 있었다. 그 후 황제가 대성당에
참배를 하려하자 대주교는 문을 막고 나서서 ‘황제의 손이 백성의 피로 더럽혀졌으니 시민들에게 보상을 할 때까지는 참배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왕의 권력보다 교회의 권위가 더욱 강했던 중세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부심벨 대신전


아부심벨 대신전은 이집트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280km 떨어진 나세르 호수의 서쪽 연안에 있다. 이 곳은 수단과의 국경에서 20km 떨어진
지점이다. 이집트 제 19왕조의 람세스 2세에 의해 기원전 1300년경에 세워졌다. 사암으로 된 절벽을 뚫어서 건립했는데 높이가 33m이고,
너비는 38m이다. 정면에는 높이 22m의 거대한 람세스 2세 상 4개가 나일강을 굽어보는 입구를 지키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곧
대열주실이다. 이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
안쪽 길이 63m이며 방 네 칸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실에는 오시리스신을 본떠 만든 람세스 2세의 상과 전쟁 그림 등이 있고, 제 2실과
3실에는 종교 의식을 그린 벽화가 있으며, 제 4실에는 신격화한 람세스 자신과 세 수호신의 상이 있다. 람세스 2세는 파라오인 아버지 세티
1세의 차남으로서 기원전 1305년에 태어났다.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람세스 2세는 세티 1세가 세상을 떠나자 26세에 파라오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는 이후 67년의 긴 세월에 걸쳐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역대의 왕 중에서도 단연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고대 이집트 역사상에
찬연히 빛나는 위대한 파라오”로 추앙받고 있다. 람세스 2세가 이 신전을 지은 까닭은 몇 가지로 짐작된다. 하나는 변방에까지 태양신의 아들인
자신의 강성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 수호신들을 모심으로써 풍요를 가져다주는 나일강이 해마다 범람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과 아내의 영원한 삶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전은 수천 년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20세기 중엽에 두번째 아스완댐 건설로 이 지점의 수위가 높아져 물에 잠겨 사라지게 될 운명에 놓이게 되자 유네스코 주도
아래 50여개국이 지원하고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1963~68년 신전을 정교하게 1만6,000개의 조각으로 분해하여 60여m 높은 지점에 원형대로
다시 조립함으로써 오늘날 영구히 보존하게 됐다.

 


 




 로도스 거상


 기원전 408년 로드를 비롯한 4개의 도시가 로드를 수도로 하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자 연합했었다. 로드는 상업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고, 주
동맹국이었던 이집트의 프톨레미 1세(Ptolemy I Soter)와도 경제적으로 견고한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305년 프톨레미와 적대적이었던
마세도니아의(Macedonia) 안티고니스(Antigonids)는 로드와 이집트의 동맹을 깨려는 의도로 로드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기원전 304년 평화조약이 채결됨에 따라 안타고니스인들은 값비싼 전쟁 장비들을 내버려둔 채 그곳을 떠나야했다. 로드인들은 그들의 단결을
자축하기 위해서 그 장비들을 팔아 엄청난 규모로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Helios) 조각상을 세웠다고 한다. 콜로수스의 제작 기간은 12년이
소요되었는데, 기원전 282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26년 강력한 지진이 로드를 강타할 때까지 수십년 간 항구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지진으로 로드시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고, 콜로수스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던 무릎이 깨지고 만 것이다. 곧이어 로드시민들은 프톨레미
3세로부터 복구에 드는 비용을 대겠다는 제의를 받게 되지만, 그 재건을 금하라는 신탁이 내렸다고 한다. 콜로수스 조각상은 부서진 채로 그렇게
폐허에서 천 년간이나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기원후 654년 아랍인들이 로드를 침략한 후 콜로수스의 잔해들을 모아서 시리아(Syria)로부터
온 한 유대인에게 그것을 팔아 넘겼다. 일설에 의하면, 콜로수스의 부서진 조각들은 900구의 낙타의 등에 실려 시리아로 운반되었을 것이라 한다.
통설에 의하면, 콜로수스는 로드시의 만라키(Mandraki) 항구의 전면에서 항구의 입구에 다리를 벌린 모습으로 세워졌다고 전해졌지만, 최근의
자료는 이 조각상의 위치가 오히려 만라키 항구의 동쪽 갑(岬)이나 보다 내륙 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로드시민들은 조각가 차레스에게
이 조각상을 의뢰했고, 이 조각가는 조수들에게 청동을 주조하도록 했다. 그는 백색 대리석 판 위에 먼저 다리와 발목을 고정시킨 다음, 청동
주물이 골격과 함께 굳어짐에 따라 서서히 그 구조를 올려 세웠다. 완성된 조각의 높이는 33m에 달했는데, 그것이 쓰러졌을 때 어느 누구도
조각상의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팔로 감쌀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한다. 이렇게 세워진 콜로수스는 56년이 지나서 파괴되었는데, 오늘날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것은 단지 거대한 조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대서양의 아름다운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단결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마추피추


케추아어로 ‘늙은 봉우리’란 뜻의 마추픽추는 옛 페루의 수도 쿠스코(Cuzco)에서 탄생한 잉카제국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갔던 잉카문명 최후의
유적지이다. 안데스 산맥의 해발 2,350m 위치한 마추픽추는 아마존강의 원류인 우르밤바 강 위의 가파른 절벽에 건설되어 있어 산 아래에서는
도저히 그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다. 약 1,200명 가량의 잉카인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추픽추는 커다란 층계와 높은 방호벽, 그리고
수로가 크게 북부와 남부 두 구역을 구분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농업지구가 있고 북쪽은 도시구역이다. 도시구역은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한 사원이나 왕궁, 탑 그리고 귀족계급을 위한 권위적이고 종교적인 건물이 주로 세워진 반면, 동쪽은 일반인을 위한 주거지로
계획되었다. 이 외에도 죄수들을 따로 수용했던 감옥이나 피라미드, 그리고 농사를 짓는 데 사용했을 태양시계 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건축물들은
화강암을 주재료로 해서 매우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졌는데, 돌 조각들이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히 맞물려있다. 젖은 모래를 비벼서 돌의
표면을 매끄럽게 갈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기술적인 수준도 놀랍지만, 20톤이나 나가는 돌들을 바위산에서 잘라내 수십 km 떨어진 산 위로
운반해서 사용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건축술에서 바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잉카인들이 어떻게 이 엄청난 높은 곳에
돌들을 운반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이다. 한편, 잉카인들은 가파른 산 위에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취약점을 보안하기 위해 산비탈을
계단처럼 깎아서 농사를 지었다. 16세기 스페인에 의해 잉카제국이 멸망한 이후, 위대하고 장엄한 도시 마추픽추는 약 400년간 황량한 초목으로
뒤덮여진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결국 잉카제국의 전설적인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잉카제국의 마지막 수도)를 찾으려는 미국인 탐험가
하이럼 빙험(Hiram Bingham)에 의해 1911년 마추픽추의 베일이 벗겨지게 된다. 그후 수많은 탐험가와 고고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했지만,
아직도 이곳이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잉카인들이 스페인 폭정을 피해 안데스 산 높은 곳에 세운
새로운 요새가 마추픽추라는 가설도 있고, 이곳이 바로 잉카제국의 마지막 수도인 빌카밤바라는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빌카밤바는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추픽추 유적에 아무런 공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렇다면 마추픽추는
태양의 신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했던 잉카인들의 열망이 반영된 비밀스러운 의식의 장소였을까? 이곳에서 발굴된 대부분의 미이라들이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것이었는데, 그러면 마추픽추는 선택된 여성들로 구성된 ‘태양의 처녀들’의 집단 거주지였을까? 이렇게 마추픽추의 형성배경이 미증유로
풀리지 않고 있지만, 이 신비의 도시를 살았던 잉카인들이 그들 뒤로 유적만을 남긴 채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역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링컨 기념관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라함 링컨을 기념하고 ‘인간 정신이 갖고 있는 관용과 지조 및 정직의 미덕'을 기리기 위해 워싱턴 D. C.에
세운 기념관이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에 있는 300개가 넘는 기념관과 조각 중 미국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기념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건축가인 헨리 베이컨이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설계한 이 기념관은 콜로라도산(産) 대리석으로 만든 36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36개 각 기둥의 높이는 무려 13.4m로 장중함이 절로 우러난다. 이 기둥은 링컨 시대에 미국 연방을 이루었던 36개 주를
상징한다. 조지아에서 가져온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 테네시에서 옮겨온 대리석 대좌에 앉혀놓은 거대한 링컨 좌상(높이 5.8m)은 조각가인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디자인하고 뉴욕의 피치릴리 형제가 조각한 작품이다. 링컨 좌상은 기념관 내부를 위압하면서 연못 너머 워싱턴 기념관과 국회의사당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기념관 남쪽 벽에는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때 결정적인 전투(1863년 7월1일~3일)가 벌어졌던 펜실베이니아 주의
게티즈버그에서 1863년 11월19일 국립묘지 개관식 때 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 새겨져 있다. 링컨 대통령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은 별로 오래 기억에 남지 않겠지만 그분들의 희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우리는 그분들이
고귀하게 이루려다 못다 한 일을 완수하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즉 명예롭게 죽어간 용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했던 대의를 위해 우리도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하리라는 것, 그리고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라고 연설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기념관의 북쪽 벽에는 그의 재임 취임사가 새겨져 있다. 취임사 위에는 ‘재통일과 전진' 및 ’인종 해방'을 표현한 쥘 게랭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1915년에 짓기 시작해 1922년 5월 30일 전몰장병기념일에 문을 열었다
.


 


 




 마운틴 러시모어 메모리얼


 미대륙의 한 가운데에는 사우스 다코타주와 와이오밍 주에 걸쳐있는 자연의 위풍과 인간의 집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미국역사의 한 페이지가
상징적으로 새겨져 있는 러시모어는 왼쪽부터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위대한 민주국가의 탄생을 위하여 헌신한 조지 워싱턴,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안했고 루이지애나 지역을 구입해 국토를 넓힌 토머스 제퍼슨, 서부의 자연보호에 공헌이 컸고 파나마운하 구축 등 미국의 위치를 세계적으로
올려놓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승리로 미연방을 살렸고 모든 인간의 자유를 지킨 에이브러햄 링컨까지 네 위인의 초상이
조각되어있는데, 각각 미국의 건국, 성장, 보존, 발전을 의미한다. 거대한 바위에 머리에서 턱까지의 길이가 18m, 코길이 6m, 눈의 크기가
3m 씩이나 되어 90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그 위풍을 과시하고 있다. 1927년 보글럼이 러시모어 산의
대리석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커다랗게 기본 틀을 잡았는데, 작업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크게 폭파하는 방법보다, 세밀한
부분일수록 조금씩 신중하게 폭파하는 작업을 통해 자칫 바위가 더 떨어져나가는 부분이 없도록 진행했다. 이렇게 조금씩 폭파되어 떨어진 암석조각은
총 50만 톤이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의 크기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대좌를 만들고 파워 드릴로 얼굴을 조각해 나가던 보글럼은 완성 7개월을
앞두고 작업을 마치지 못한채 1941년에 죽고 말았고 후에 그의 충실한 제자이기도한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현재의 조각을 완성하였다.
횟수로 치면 14년이란 장기간에 걸친 작업이었으나 실제로 작업에 소모된 시간만 따지만 6년 반 정도 소요되었다. 작업이 중단되었던 8년여의
기간은 고갈된 자금을 얻기 위하여 관계자들이 동분서주했으며 한 때는 초등학교 아동들로부터 모금하기도 했다. 이러한 러시모어 산의 조각은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으며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이 되었다
.


 


 




 만리장성


 오늘날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만리장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關)에 이르는
지도상의 총 연장 거리만도 약 2,700km에 이르며, 실제는 약 6,400km에 걸쳐 동서로 뻗어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으로 손꼽힌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전국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의
연(燕),조(趙),위(魏),초(楚) 등 여러 나라가 각각 장성을 구축하였다. 기원전 221년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7년후인 기원전 214년에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대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실질적인 만리장성의 첫 토대를 건축했다. 이전까지 연,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개축하여
이룩한 대 사업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만리장성의 건설 위업은 진시황제가 이룬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 진시황제가 통일후 첫사업으로 만리장성의
구축을 서두른 것은 여전히 북쪽의 흉노족이 부담스러운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의 방어책으로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시킨 것이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그리하여 10여년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랴오둥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 장성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 대 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가 멸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진시황제에 의해 최초 구축된 만리장성은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에 의해 숱한 변화를 겪게 된다. 애초 만리장성의 위치는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당~송~명조를 거치면서 거란 돌궐 몽골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明)나라 대에 들어와서였다. 청(淸)대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한 채, 단지 중국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거의 보수를 하지 않아 원형이 파괴된 곳도 많고, 특히 문화혁명 때에는 농부들이 집 수리를 위해 장성의 돌을 훔쳐가곤 한 적도
있었다.


 


 




 롱먼 석굴


 ‘윈강석굴’ ‘둔황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룽먼석굴’은 뤄양(洛陽) 남쪽 교외 약 14km 지점에 있다. 석굴이 있는
이췌산(伊闕山)은 이허(伊河)를 사이에 두고 서산과 동산으로 갈라지며, 석회암의 암벽에 다수의 크고 작은 동굴을 뚫어놓았는데, 동굴 안에는
저마다 엄청난 수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 수만 해도 동굴 1,352개, 감(龕?불상을 모시는 장) 750개, 석탑 39개, 불상 9만
7,306체, 글자가 새겨진 제기(題記)나 비각이 3,600점이나 된다. 가위 세계적인 불교예술의 보고인 것이다. 뤄양은 역사의 고도로서,
중국의 역사에서 시안(西安, 옛 장안) 다음으로 많은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뤄양이 이렇게 번성했던 것은 중원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힘입은 바 크다. 중국 대륙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중앙인데다 육운과 수운의 연결점이기도 했다. 뤄양의 숱한 문화 유산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룽먼석굴인 것이다. 이곳에 석굴을 처음 파기 시작한 것은 북아시아 유목민의 한 부류인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
왕조. 493년 북위가 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 수?당에 이르는 4세기에 걸쳐 룽먼석굴을 완성했다. 그들은 강북
전체를 통일하자 확대된 영토를 어떻게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인 것인가를 궁리하다 자신의 문자와 성(姓), 복식 등을 버리고 모든 것을 다수세력인
한민족의 것으로 바꾸는 한화(漢化)정책을 폈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다. 룽먼석굴의 건설도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석굴 공사는 그후로도 계속되어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이어졌는데,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전성기에 대개 조영되었다. 그 덕분에 지금 이곳에는 빈양둥(賓陽洞), 구양둥(古陽洞), 완포둥(萬佛洞), 펑셴쓰둥 등의 석굴사원과 많은 조각상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서도 룽먼석굴의 하이라이트는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펑셴쓰(奉先寺)의 본존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이다. 이곳의 대부분의
불상들은 상처를 받아 흠이 많지만 이 노사나불만큼은 온전하다. 거기다가 얼굴에선 온화함이 흘러 넘치고 풍만한 상체에선 원만함이 풍긴다. 대불다운
풍모를 여지없이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작품이며 높이가 17m남짓하고 얼굴은 축천무후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황룡사 9층 목탑


 불교 문화의 융성을 정신적 근간으로 삼아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는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가운데서도 특히 자랑하는 3대 보물이
있었다. 진평왕의 옥대와 황룡사의 장육존불, 그리고 황룡사 9층목탑이 그것이다. 황룡사는 불심이 깊은 신라 제 24대 진흥왕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 원래는 궁궐 남쪽인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으나,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심상치 않게 여겨 신궁 공사를 중지하고
황룡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553년(진흥황 14년)에 처음 공사를 시작한 이래 9층목탑이 완성되는 645년(선덕여왕 14년)까지 무려
92년 간에 걸쳐 건립된 신라 최대의 국찰(國刹)이었다. 643년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 대사의 요청으로 건조된 9층목탑은
아홉 개의 층이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으며, 이 탑을 세움으로써 변방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9층목탑에 관해서는 두 개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 있을 때 자장은 한 신령스러운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신라는 북으로 말갈,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입하니 이런 이웃 나라의 횡포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하자, 그는 “지금 그대의 나라는 덕이 있는 여왕을 섬기고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넘보는 것이오. 지금 본국에 돌아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도록 하오. 그리하면 이웃 나라들이 모두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가 조공해 올 것이며 나라가 길이 평안하리라”라고 하였다. 자장의 요청에 의해 건축된 9층목탑은 백제의 공장(工匠)
아비지가 총책임을 맡았다. 아비지는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조국 백제가 멸망하는 것이 보였다 한다. 이에 의심이 난 아비지가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그리하여 아비지는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만 42척, 그 이하 본탑의 높이가 183척이었다. 총
225척(80m)의 크기는 요즘으로 치면 20층 빌딩 위에 철탑이 하나 더 서 있는 높이였을 만큼 그 규모가 웅대했다. 이처럼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 배경은 삼국통일의 상징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년)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년(고려 고종 25년)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 전체가 불타버린 이후로는 안타깝게 중수되지
못하였다.


 


 




 페트로나스 타워


 파리하면 에펠탑을 연상하고, 뉴욕 하면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듯, 1997년 이후 ‘페트로나스 타워’는 말레이시아의 새로운 국가적 상징이
되었다. 1994년 공사를 시작해 99년 8월 개관한 88층의 쌍둥이 빌딩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정식 명칭은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이다. 연면적 6만 5,728평에 지하 6층, 지상 88층, 전체 높이 452m 규모로, 총 2억 3,000만 달러(한화 2,760억
원)의 공사비용이 들었는데, 1973년 완공된 미국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보다 9m가 높다. 88층부터 4개 층이 하나의 층을 이루는
중층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4개 층까지 합하면 총 92층이 되는 셈이다. 워낙 고층 건물인 탓에 지상 175m 높이의 41층과 42층에 걸쳐
두 빌딩 사이를 더블덱 스카이브리지로 연결해 양쪽 건물의 흔들림이 없도록 하였다. 지상부터 6층까지는 콸라룸푸르 최대의 상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 한쪽에 페트로나스 본사가 있다. 물론 아직도 진정한 ‘마천루’(세계 최고의 건물을 일컫는 말)가 어디인가를 놓고 논란은 남아 있다.
페트로나스 타워가 실제 건물 높이에서는 미국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보다 낮기 때문. 다만 시어스 타워 꼭대기에 있는 안테나는 건물 높이에 포함되지
않는 반면, 페트로나스 타워의 첨탑 부분은 건물 높이에 포함되기 때문에 세계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마천루의 역사는 미국이
주도했다. ‘현대판 바벨탑’이라 일컬어지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1931년에 만들어진데 이어 72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 73년
시카고의 시어스타워 빌딩이 차례로 최고층의 기록을 갈아 치웠다. 하지만 99년 페트로나스 타워의 개관으로 아시아가 최고 빌딩 보유 대륙이
되었다. 이 빌딩 건축에는 우리 나라의 삼성물산과 극동건설이 참여하여 쌍둥이 빌딩 중 하나를 시공하기도 했다. 나머지 하나는 일본에서 건축했다.
말레이시아의 경제 개발을 위해 한국과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벤치 마킹한 것으로 알려진 마하티르 수상은 ‘VISION 2020'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 사업의 일환으로 세계 최고의 빌딩을 올렸다. 세자르 펠리에 의해 설계된 아주 독특한 모습의 이 88층짜리 쌍둥이 타워는 이슬람 건축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유주는 말레이시아의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나스와 콸라룸푸르 시티센터(KLCC)로, 타워 이름
역시 이 석유회사 이름에서 딴 것이다.


 


Photo by
소울플라워
내용출처: 아인스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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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같은 휴식… 발리·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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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기대에 발리를 찾는다면, 아예 발리에 가지 않는 게 좋다. 무위도식을 꿈꾸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찾는다. 바다는 느릿하고, 리조트는 쾌적하다. 밤마다 달아오르는 유흥지의 흥청거림도 휴양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적인 휴양지임에도 아직 순박함을 엿볼 수 있는 발리인의 심성이 세계인의 발길을 불러들이는 또 다른 이유다. 땅과 그 땅의 사람이 평화로운 곳이다.

◇사리 나이트클럽=발리의 평화는 크게 한번 깨졌다. 2002년 10월12일 쿠타 해변의 ‘사리 나이트클럽’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는 200여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피해자는 모두 평화와 휴식을 고대하며 발리를 찾은 관광객이었다. 테러 희생자 중에는 한국인도 포함됐다.



연일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렸던 폭탄테러현장은 이제 그저 평평한 나대지다. 건물 잔해는 테니스 코트로 써도 좋을 만큼 깨끗이 철거됐다. 그러나 추모와 기억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있다. 테러현장과 그 앞 2차선 도로를 갈라놓은 철조망. 테러를 증오하는 ‘FUCK TERRORIST’란 문구가 큼직하게 붙어있다. 자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버지의 사연도 나란히 있다.

테러를 저지른 집단은 ‘제마 이슬라미야’라는 인도네시아 이슬람과격단체로 알려져 있다. ‘제마 이슬라미야’는 미국에 맞서 싸우는 알 카에다와 ‘대의’를 같이한다. 폭탄테러는 ‘대의’에 동참하기 위해 저질렀다. 이슬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중동을 떠올리지만 세계 최대 이슬람국가는 인도네시아. ‘사리 나이트클럽’ 테러가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테러가 일어난 발리섬은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한 힌두교도 지역이다.

발리인은 미국과 이슬람의 전쟁에 관심이 없다. 발리인은 힌두교도인 데다 오랜 기간 관광업에 종사하면서 세계관을 바꿨다. 현지인 관광가이드는 “돈을 내면 모두 다 친구”라고 말한다. 그는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도 땅을 택해 테러를 벌인 데 분통을 터뜨렸다. 테러집단이 ‘대미성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힌두교도 젯밥에 재를 뿌리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았다.



수백명의 원혼이 떠도는 테러현장도 지금은 그저 평화로움을 완성하는 하나의 소품으로 바뀌었다. 발리를 발리이게끔 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발리를 찾는다면 지금은 밋밋한 공터로 변한 폭탄테러현장을 꼭 한번 찾아보는 게 좋겠다.

◇풀빌라=자바섬의 동쪽 해안으로부터 불과 1.6㎞밖에 떨어지지 않은 발리섬에는 2만여개의 사원과 3,333개 신이 있다고 한다. 발리는 ‘신의 섬’이다. 동시에 리조트의 천국이기도 하다. 세계 유명 호텔.리조트 가운데 이곳에서 영업하지 않는 곳은 없다. 신의 숫자에 맞먹는, 또는 사원 숫자에 버금가는 리조트들이 세계인을 기다리고 있다. TV조차 없는 원시 스타일부터 최첨단까지 리조트의 스타일이 다양하다.



특별한 추억을 원하다면 풀빌라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풀빌라는 독립된 빌라 내에 별도 수영장을 갖췄다. 연인.부부.가족끼리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전용 빌라.전용 수영장에서 자신들만의 여행을 만들어갈 수 있다. 소피텔 체인인 로얄 세미냑이 풀빌라로 유명하다.

◇마사지=휴양에서 마사지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인꼬발리는 쿠타 해변에서 5분거리다. 전화(724-431)를 걸면 데리러 왔다가 데려다 준다. 1인당 30달러로 호텔에서 운영하는 마사지센터보다 싸고 만족도도 높다.



◇롬복=더 순박함을 원한다면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는 롬복섬을 찾는 게 좋겠다. 발리섬을 거치지 않고 싱가포르에서 직접 롬복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일단 들어가면 바다를 바라보며 쉬는 것 외에 아무런 선택이 없다. 리조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고단한 섬사람들의 삶이 이어진다. 개발이 덜 돼 쾌적한 리조트가 많지 않다. 노보텔 체인인 롬복 코렐리아 리조트는 객실을 현지 전통양식으로 만들었다.



낮은 담장과 화단 사이로 벌이 날아다니고, 햇볕이 파도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린다. 리조트 앞 한가로운 해변에 누워 추리소설 한권 들고 자다 읽다 하면 어느 사이 열대의 밤이 찾아온다. 허접한 물건따위를 팔러오는 현지 아이들을 상대하는 게 나름의 재미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내용의 영어를 쓴다. 장사맛을 알았는지 커다란 눈망울로 바가지를 씌우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귀엽다.

<발리.롬복/안치용 기자ahna@kyunghyang.com>

◇ 여행길잡이

발리는 위도상 적도 바로 밑에 있는 남반구 섬이다. 온도는 1년 내내 여름 수준. 대체로 10∼3월은 우기, 4∼9월은 건기다. 인도네시아 가루다항공은 월.수.목.금.토 5회 인천∼덴파사르(발리 주도)편을 운항한다. 대만을 경유하며 8시간30분 걸린다. 대한항공에서도 판매한다. 인천∼자카르타는 대한항공.아시아나에서 매일 운항한다. 비행시간 7시간10분. 덴파사르 연결 항공편을 미리 예약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난달 1일부터 관광목적에도 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1인당 25달러가 든다. 화폐는 루피아. 1원은 1,390루피아 정도. 발리.롬복에서는 영어를 써도 대부분 알아 듣는다. 한국말을 이해하는 현지인 가이드도 많다.
작성 날짜 : 200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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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의 진주 모로코

 
북아프리카의 북서쪽 끝자락, 스페인 최남단 지브롤터의 좁은 해협으로 유럽과 거의 맞닿아 있는 모로코라는 나라로의 여행은 뭔지 모르게 시작단계부터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남부 유럽과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시가지이며 드넓은 평원, 그런가하면 황량한 사막과 오아시스에서 옛날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소박한 모습, 고풍스러운 모로코 특유의 성채와 미로 같은 옛 도시의 구시가의 골목들…. 이 모두가 모로코라는 나라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카사블랑카를 출발한 일행은 90km 떨어진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로 향했다. 카사블랑카가 모로코의 상업적인 수도라면 라바트는 행정과 교육의 수도. 이곳에서 먼저 방문한 곳은 우다야라는 카스바(카스바는 성채라는 뜻으로 종종 사용됨)라는 10세기에 건설된 성채로 대서양과 라바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가까이에 현 국왕 모하메드 6세의 조부인 모하메드 5세와 부친 핫산 2세 가 잠들어있는 광장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을 달린 뒤 도착한 곳은 볼루빌리스라는 지역으로 북아프리카 최대의 로마유적이 있는 곳인데, 넓은 평지에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아직도 잘 보존이 되어있었다. 사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이미 기원 전 3세기부터 약 25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을 비롯해 그리스인 유태인 시리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라틴어를 구사하는 수준 높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위의 평원은 밀 생산지로 유명하였으며 수확 후 대부분 로마로 보내졌는데, 아직도 그 때 이용되었던 목욕탕의 타일과 도서관, 신전과 법원 건물, 그리고 개선문의 유적들이 이곳이 당시에는 얼마나 번창한 지역이었었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은 18세기까지는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나 인근에 메크네스(Meknes)라는 이슬람의 도시가 생기면서 그 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건축자재들로 사용하기 위해 많은 유적이 해체되고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볼루빌리스의 방문을 마치고 페스의 메린디호텔에 도착할 무렵에는 해가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호텔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멀리 앞쪽으로 페스의 구시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정은 우리가 묵은 호텔 옆 언덕의 회교도 묘지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묘지였는데, 하나같이 넓은 부지에 흰색의 직사각형 분묘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묘비에는 아무것도 그리거나 적혀있지 않고, 회교도의 묘지 답게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페스의 구 메디나로 페스 여행의 가장 중요한 지역인데, 모로코에서는 도시의 중심지역을 메디나라고 부른다. 모로코의 대도시에는 이와 같은 메디나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특히 페스의 구 메디나는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거대한 미로(迷路)의 시가지에는 수 천 년을 이어 내려오는 페스 시민들의 생활터전이 좁은 골목에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당나귀 한 마리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수많은 골목들은 야채와 의류, 감자, 밀가루, 가죽원단 등을 등에 가득 실은 노새와 상인들이 힘겹게 쉴 새 없이 드나들고 뒤를 이어 이곳에 사는 남녀노소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엉켜서 정신없이 헤매고 있었다.



평생을 가야 햇볕 한줌 들어올 수 없을 이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방과 학교, 회교사원, 심지어 대학교까지 있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함을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는 길을 잃으면 외지인은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페스가 “세계 최대의 미로”라는 별명은 거저 붙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행은 한순간 방심으로 길을 잃게 될까봐 앞사람 엉덩이만 보면서 마냥 부지런히 따라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한참을 돌고 돌아서 유명한 페스의 가죽 염색공장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천년 이상을 전해 내려오는 가죽 염색공장으로, 갓 도착한 가죽 원단을 부드럽게 하기위해 비둘기 똥에 담가서 손과 발로 무두질을 한 다음 염색을 하는 곳으로 과거 한 때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았던 바로 그 '모로코가죽' 원단 생산 공장으로 유명했던 장소이다. 모두 수공으로 하기 때문에 나이 어린 아이들의 손을 빌어 짙은 악취 속에서 작업하는 모습은 무척 측은해 보였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하면 모로코 도시는 대부분 성채를 중심으로 자연지형 그대로 발달한 것이 특징인데, 낯선 사람이 일단 시가지에 발을 들여놓으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얽히고설킨 미로에 정신을 잃게 된다. 모로코 도시가 이처럼 미로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은 성채가 함락되더라도 적군이 대거 밀고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전술이라고 한다. 침입한 적군을 좁은 골목길을 이용해서 게릴라 전법으로 맞아 싸우겠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페스의 메디나는 중세 모습을 거의 완전히 보존한 곳으로 유명하며 세계 최대의 미로라는 별명과 함께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독특한 곳이었다.



다음날 아침, 천년의 고도 페스를 뒤로 하고 일행은 사하라 사막을 향해 출발하였다, 모로코를 여행하는 내내 놀란 것은 언제나 푸른 하늘과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맑은 공기를 들 수 있다. 맑은 햇살이 모로코의 기름진 들녘에 비치고 있었고, 널찍한 평원에는 양떼들이 작은 호숫가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사하라로 가는 도중 산맥을 하나 넘게 되는데, ‘리프’라고 불리는 산맥으로 모로코에서는 아틀라스산맥 다음으로 높고 큰 산맥으로 이 산맥의 높은 곳에는 ‘이프란’이라는 작은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제법 부유한 모로코인들의 휴양지로서 주말이나 휴가철에는 방하나 구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빼곡한 녹지와 아담한 호수, 그리고 그림 같은 집들이 어우러져 지금까지 보아온 모로코와는 너무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산맥을 넘자 이제부터는 여태껏 지나왔던 기름진 풍경과는 달리 척박한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거친 들판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집들은 돌을 주워서 쌓아올린 듯 낮고 투박하였으며 어린아이들과 아낙들의 얼굴은 다소 굳고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일행은 도중에 잠깐 서서 마을의 어린 아이들과 노새를 끌고 가는 아낙들에게 사탕을 쥐어주고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오아시스들을 몇 개 지난 뒤 이윽고 사막 초입에 위치한 도시 에르푸드에 도착한 후 사륜구동 지프로 갈아타고는 사하라사막으로 향했다. 먼지 풀풀 날리는 평원을 한 시간 가량 질주하여 도착한 곳은 사하라사막 모래언덕이었고, 그곳에서 사막의 텐트 야영을 결정, 저녁식사로는 양고기 바비큐가 등장했고 와인을 곁들인 사막에서의 저녁식사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아 별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추억에 남을 만큼 낭만적인 밤이었지만 밤에 잘 때는 너무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다음날 새벽 모래언덕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아직 깜깜한 가운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낙타를 타고 언덕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 처음 타보는 낙타라서 바짝 긴장하고 손과 어깨는 하도 힘을 주어서 뻣뻣해 질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 모래 길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낙타에서 내린 일행은 모래언덕의 제일 위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멀리 서서히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사하라 사막의 모래언덕은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으며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해가 그 모습을 모두 드러내면서 일순 언덕 위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1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사하라 사막은 세계 최대의 사막으로 면적이 860만km에 달한다. 북쪽으로는 아틀라스 산맥 및 지중해, 서쪽으로는 대서양, 그리고 동쪽으로는 홍해와 접해있으며, 해안선의 총연장은 8,290km이다. 나일강에서 대서양안에 이르는 동서길이 약 5,600km, 지중해와 에서 나제르, 수에 이르는 남북길이는 약 1,700km에 달하는데, 이 사막 남부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사막과 지대 사이에 넓고 건조한 스텝 지대가 동서로 펼쳐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가장 건조도가 높은 이 사막지역은 홍해에 접하는 나일강 동쪽의 누비아 사막과 나일강 서쪽의 아하가르산맥 부근까지의 리비아 사막을 합친 동(東)사하라와 아하가르산맥 서쪽의 서(西)사하라로 크게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사하라사막의 일출구경을 마치고, 일행은 다시 텐트로 내려와 컵라면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사막과 인접한 마을과 가축시장, 야채시장 등을 구경하면서 카스바 안에 있는 베르베르인의 집에서'꾸스꾸스'라는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에르푸드로 돌아와 호텔에서 쉬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은 남쪽을 향해서 이동했다. 검은 염소 떼와 유목생활을 하는 베르베르인 노인가족을 잠시 만난 후 중간에 나지막한 모래언덕으로 이어진 곳에서 사진 몇 컷을 찍은 뒤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사막지역을 점차 벗어나며 황량한 광야로 들어서더니 점차 계곡들이 나타나고 언덕에 근사한 카사바가 나타나더니 계곡은 점점 깊어지고 어느덧 깎아지른 절벽사이로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은 토드라(Todra) 계곡이라는 곳으로 황량한 모로코의 생명줄 같은 물줄기가 깊은 산속에서 계곡으로 흐르는 정말 근사한 곳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는 일단의 외국인들이 암벽을 등반하는 아찔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쩌다 보이는 오아시스 외에는 풀 한포기 나무한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황량한 들판이 이어지다 집이 한두 채 나타나는 듯싶더니 이윽고 버스는 와르자자트(Ouarzazate)에 도착하였다.



아침 일찍 호텔을 떠나 부지런히 북쪽으로 달렸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거리를 달려서 오후에는 마라케쉬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행은 와르자자트 지역 내 최고의 명소인 아잇벤하투라는 성채에 도착했다. 이 성채는 아틀라스산맥 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카스바로서 무려 천년에 걸쳐 부분적으로 더해져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불과 몇 가족 살고 있지 않지만 중세의 모습을 한 모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채로서, 17세기부터 모로코 남부의 아프리카 나라인 말리의 팀북투라는 곳으로부터 암염(巖鹽)을 거래하던 무역통로로서 아랍상인들이 이곳에서 하루 이틀 묵고 가던 때 가장 번성했다고 한다. 유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의 일부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그러고 보니 모로코는 또한 예로부터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영화의 주요장면도 이곳 모로코에서 촬영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마냥 있을 수는 없고 카스바를 구경한 다음 우리는 모로코 최대의 산맥인 아틀라스 산맥을 넘기 시작하였다. 산맥의 계곡은 황량하고 거칠고 위험하였다. 산맥을 오를 때만 해도 잔잔하고 맑았던 날씨가 산을 넘어 내려올 무렵에는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하다가 짙은 황사와 함께 바람이 몰아치고 앞이 잘 안보일 정도로 거칠어졌다. 밀폐된 버스 안에서도 먼지가 느껴질 정도여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을 정도였다. 아 이런 것이 모래폭풍이구나 싶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이미 사하라를 지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지금 사막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였다. 이 날 이후로는 우리가 모로코를 떠나는 날까지 여태껏 보았던 맑은 하늘은 다시 보기 어려웠다.



몇 개의 원주민 마을을 지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서 오후 4시 경 드디어 마라케쉬의 자말엘프나 광장에 도착하였다. 원래 이곳은 마라케쉬 최고의 광장으로 전통물장수를 비롯하여 갖가지 전통공예품상점 그리고 관광객들로 하루 종일 붐비는 곳이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서인지 다소 한산한 모습이었다. 바람 때문에 오래 있을 수 없어 일찍 호텔에 체크인 하여 쉬기로 결정하였다. 밤에는 비가 밤새도록 퍼붓고 있었다. 사막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도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는 날씨 때문에 실망하였지만 모로코를 위해서는 잘 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로코는 그동한 7년이라는 오랜 가뭄으로 민심도 흉흉하고 농사를 짓기도 어려워서 서민들이나 농민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므로 이들에게는 이번 비가 정말이지 단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가 온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버스를 타고 마라케쉬에서 30여km 떨어진 계곡의 전통 마을을 향해 움직였다. 비는 계속 내렸고 우리가 산기슭에 도착하자 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던 넓은 계곡은 붉은 흙탕물로 넘실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급히 흘러내린 돌과 흙더미로 곳곳에 길이 끊기고 있었다. 방문하려는 마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차를 돌려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결국 안전을 생각해 어렵사리 버스를 돌려서 마라케쉬로 되돌아 왔다.

마라케쉬로 돌아온 일행은 비속에서 쿠추비아 회교사원을 방문하였다. 이 건물은 마라케쉬의 대표적인 회교사원으로서 12세기에 지어진 것인데, 이곳에는 마라케쉬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높이 70m의 탑이 유명합니다. 이 탑과 닮은 것을 스페인의 세빌리아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무어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할 때 세빌리아 대성당 옆에 건축해 놓은 것으로 히랄다 탑이라 부른다. 사원의 정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하고 있으며 무슬림(이슬람에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외에는 실내로 들어갈 수가 없어, 빗속에 사원을 한바퀴 돌아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음날 다행스럽게도 비는 그쳤지만 날씨는 꽤 쌀쌀했다. 이곳에서 카사블랑카로 항하는 길은 아틀라스 산맥 저편에서 보아왔던 경치와는 전혀 다르게 풍요롭고 기름진 평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일행은 교민회관에서 모처럼 한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는 오후 답사에 나섰다. 모하메드 5세 광장, 왕궁, 메디나 광장, 그리고 아프리카 최대의 회교사원인 핫산2세 회교사원을 들러본 후 아인디압 지역의 해변가와 별장지대를 거쳐 다시 교민회관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는 하이얏 호텔에 체크인 해서 모로코의 마지막 밤을 지내게 되었다. 하이얏 호텔의 1층 바에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연배우인 험프리보가트와 잉글릿버그만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기간은 공교롭게도 라마단(회교도들의 금식월)기간 중이라 여러 면에서 불편을 겪기도 했고, 또한 물가도 생각보다 비싼 편이였으며 현지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여의치 않아 기분이 언짢은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몇 가지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모로코는 아프리카나 유럽의 여행과는 또 다른 신비함이 가득한 세계였다.

<제공 레포츠 365·KBC여행사>
작성 날짜 : 200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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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sizzler(211.56.123.166)  조회: 18096  리플수: 79  추천점수: 255  작성: 10/0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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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불꽃놀이를 찍어봤습니다. new 2004.10.18 (월) 11:45  추천:0 조회:4
  http://blog.khan.co.kr/daihkim/3717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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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꽃축제에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불꽃놀이를 카메라에 담아서 매우 흥분에 흥분을 거듭합니다.

별로 잘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소중한 첫경험~ 첫경험 첫경험~ 랄랄.;

ISO200이라서 조리개를 조금 실제보다 더 조여봤는데 역시나 몇장만(제가보기에) 빼곤 죄다 흔들림과--;

좌절의 사진 연속;;

참!!!;  제목은 제 멋대로 붙인거에요 ; 행사쪽 컨셉이 아님.!

제목 : 루비빛 선인장






제목 : 불경기 63빌딩 야자나무 심어서 매출 증진의 기회를 노리다.





제목 : 쌍가마







제목 : 북한군 박격포 조명탄 쐈네







제목 : 이지메



불꽃놀이 촬영은 처음이라서 릴리즈가지고 정신없이 눌러재끼기만 했네요.
63빌딩이 나올줄 알고 기대했는데 전혀 63빌딩처럼 안나와서 다음주에 또 축제가 있는데
그때는 진지하게 프레임에서 아예 제적시켜버릴예정.;


NIKON D100
AF NIKKOR 24-85D
NIKON AR-3 cable re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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