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촌 이야기... 2005.1.6 (목) 11:12  추천:0 조회:95
  http://blog.khan.co.kr/sohaj81/3964479

같은 나라에 살아가면서도 왠지 낯설은 곳, 그러나 그곳에 가면 새삼스레 내 자신이 한국인임을 느끼게 해주는 곳... 그곳중 하나가 바로 민속촌인것 같습니다. 민속촌의 이곳 저곳을 사진으로 한번 다녀오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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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튤립의 나라, 네덜란드

 
튤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판 멀리 풍차가 보이고, 전통 복장을 한 어린이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언덕을 뒹굴 것 같은 네덜란드. 온 나라를 ‘붉은 물결’ 로 만든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하면 이젠 튤립이나 풍차 대신 ‘거스 히딩크 감독’ 이 떠오른다.

- 히딩크의 생가와 펍 -

히딩크 생가가 있는 파르세펠츠는 독일과 국경을 접한 헬더란트 주에 속한 작은 시골 마을이다. 암스텔르담에서는 자동차로 2시간 떨어진 거리다. 여기엔 히딩크의 생가와 히딩크가 자주 들렀던 ‘비에르체 펍’ 이 있다. 히딩크의 생가는 여는 위인이나 유명인들의 생가처럼 아담하다. 아담한 정원이 꾸며진 집은 네덜란드 고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네덜란드인의 삶이 그대로 전해지는 곳이다. 히딩크 생가에는 아직도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살고 있다. 히딩크에게는 언제라도 돌아가 편히 쉴 수 있는 집이다. 히딩크의 삶도 축구를 잘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네덜란드인과 다를 게 없다.



이 마을에는 히딩크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히딩크가 자주 들렀다는 바에르체 펍(Pub, 선술집)도 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히딩크는 지금도 고향에 오면 이곳에 자주 들른다. 주인과 친할 뿐만 아니라 혼자 가도 술을 기울일 술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축구선수 출신인 히딩크의 형과 동생도 이 펍의 단골이다.



이 곳 입구에는 우리말로 ‘우리는 Guess를 사랑합니다’ 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또한 월드컵 기간 내내 네덜란드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함께 걸려 있었다. 태극기는 거스 히딩크의 동생이 가져다놓았다고 한다. 한국 경기가 있을 때마다 망을 사람들이 이 술집에 모여 함께 응원하고 경기를 즐겼다.

- 히딩크 집성촌 히딩크 거리 -

히딩크와 관련된 장소를 꼽으라면 ‘히딩크 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독일 국경 인근의 파르세펠츠에 위치한 ‘히딩크 다이크’.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거리는 히딩크 감독을 기리는 거리가 아니다.



파르세펠츠는 ‘히딩크’ 란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사는 집성촌이다. 때문에 동네의 길목 이름이 ‘히딩크 다이크’ 로 정해진 것.

우리에게 거스 히딩크를 기념하기 위해 ‘히딩크 거리’를 지정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물론 히딩크는 네덜란드 축구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조국에서도 영웅이지만, 히딩크 거리는 거스 히딩크와는 관계가 없다. 물론 이 마을에 있는 히딩크 둑과 히딩크 다리 또한 거스 히딩크 감독과는 별 상관없다. 히딩크 거리를 걷노라면 비록 히딩크 감독을 만날 수는 없어도 수많은 히딩크(?)와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 섹스 뮤지엄 -

네덜란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고요하거나 평화로운 곳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역사는 자연과 투쟁하는 역사였다. 또한 15세기부터 유럽의 상업의 중심지 암스테르담은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돈의 흐름에 민감한 도시였다. 오죽하면 ‘내 밥값은 내가, 네 밥값은 네가’를 뜻하는 ‘더치 페이’ 가 속어처럼 쓰이고 있을까.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내리면 눈앞에 ‘섹스 뮤지엄’ 이 보인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섹스란 감춰야 할, 경박하거나 은밀한 것이 아니다. 섹스 뮤지엄은 그야말로 섹스에 관한 모든 것을 모아 전시하는 곳이다. 섹스와 관련된 유물(?)은 물론 섹스의 체위를 설명하는 밀랍인형과 그림이 있다. 멀쩡하게 서 있던 마네킨이갑자기 바바리코트를 열며 놀라게 하는 ‘레인 맨’(우리나라에선 바바리코트맨, 또는 슈퍼맨으로 알려져 있다)으로 돌변해 사람들을 웃기기도 한다.



암스테르담을 지나면서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가 렘브란트 광중 주변의 게이 바.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도시답게 이 곳의 게이 바는 언제나 성업중이다. 광장 서쪽 방향으로 첫 번째 운하와 두 번째 운하 일대에 퍼져 있는 홍등가 또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성의식을 설명한다. 이 홍등가는 사창이 아니라 공창이라는 데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하지만 소매치기가 많은 곳으로 악명 높으니 조심할 것.

-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고향 -

암스테르담은 고흐와 렘브란트의 예술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곳. 국립미술관은 암스테르담에 들렀다면 빼놓지 말아야 할 명소다.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렘브란트의 명작 ‘야경’ 이다. 렘브란트의 어둠침침하면서도 화려한 화풍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야경’ 은이 전시관에서 특별대우를 받는다. 벽면에 ‘야경’ 한 작품만 걸어놓아 그렇지 않아도 큰 작품에 모든 관람객의 눈이 집중된다.



렘브란트가 작업하던 ‘렘브란트의 집’ 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집은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전형적인 맨션이다. 창문이 네 개나 있는 3층 집. 렘브란트는 이 곳에서 20년 동안 그의 대표작들을 완성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던 방과 당시의 물건들, 렘브란트 특유의 느낌이 짙게 배인 동판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월터루 광장 옆에 있어 비교적 찾기 쉽다.

네덜란드가 낳은 거장 고흐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고흐미술관은 국립미술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고풍스러운 네덜란드 스타일의 국립미술관과 달리 고흐미술관은 단순하고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고흐의 일대기와 함께 다소 덜 알려진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 꽃시장, 벼룩시장은 또 다른 명물 -

운하 위에 자리잡은 암스테르담 꽃시장은 이 도시의 명물이다. 시내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 광장에서 로킨 거리를 따라 내려가보면 꽃시장에 이른다. 꽃의 나라답게 꽃의 종류도 다양하고 꽃장식이며 화분, 구근, 꽃씨까지 구할 수 있다.



꽃 파는 아줌마와 아저씨는 꽃 같은 미소로 사람들을 대한다. 꽃을 사랑하고 서로 주고받는 걸 즐기는 국민이다 보니 꽃시장은 늘 붐빈다. 싱싱한 꽃 구경도 하고 사람 구경까지 할 수 있는 꽃시장은 암스테르담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필수 코스다.

좀더 능동적인 시장 순례를 하고 싶다면 벼룩시장으로 가자. 운 좋으면 먼지 덮인 골동품 가운데 꽤 쓸 만한 물건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이 빠진 접시나 손때 묻은 커피잔 세트, 군데군데 녹슨 태엽시계, 네덜란드풍의 푸른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 등 거실 장식소품으로 두면 좋은 것들이 많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뒤적거리게 된다.

가장 큰 재래시장은 앨버트 퀴프 마켓으로 없는 게 없다. 벼룩시장은 워털루 광장에서 열린다. 구제 옷이나 고서, 각종 액세서리, 옛날 흑백 엽서 틈에는 누군가 쓴 편지도 끼여 있고, 사진이 꽂힌 지갑을 발견할 수도 있다. 시장은 월요일부터 토요일 아침에 선다.

<글 윤예림 자유기고가>
작성 날짜 : 200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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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2-30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참 아름답네요- ^^
 

 

이름: 페퍼(61.75.212.196)  조회: 1905  리플수: 16  추천점수: 40  작성: 12/1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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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도시, 캐나다 몬트리올

 
축제같은 뜨거움을 느끼고 싶다면 여기 몬트리올이 있다. 섬 도시, 1년 내내 페스티벌이 끊이지 않는 도시, 화려한 원색에 가까운 도시, 몬트리올로 떠나자.

- ‘북미의 파리’, 캐나다 몬트리올 -

몬트리올은 세인트 로렌스 강 가운데 있는 섬 도시다. 그렇다고 그 크기를 무시하지 말자. 캐나다의 도시 가운데 토론토 다음인 제2의 도시이자, 퀘벡 주의 주도다. 인구 1백80만이 제2의 도시라면 서울 사는 사람들은 코웃음 치겠지만, 넘치는 활기는 서울 못지 않다.



몬트리올은 지리적으로 섬이지만, 문화적으로도 섬 도시다. ‘북미의 도시’, 몬트리올의 별칭이다. 프랑스 파리 다음으로 불어 사용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주변 모든 도시가 영어권에 속해 있다면, 몬트리올은 섬처럼 불어권으로 남아 있다. 주민들도 자신들이 프랑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을 그냥 캐나다인으로 알고 있다.

몬트리올이 에펠탑 없는 파리가 된 이유는 프랑스인이 첫발을 디딘 곳이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제1세의 명령을 받은 자크 카르티에는 금과 향료를 찾아 인도로 가던 중 몬트리올을 발견했다. 이 신천지의 이름을 불어로 ‘Mont Real', 영어로 하자면 ’Mount Royal' 로 지었다. 불어 이름을 영어식으로 부르다 지금의 몬트리올(Montreal)이 됐다. 이때가 1535년. 70여 년 뒤인 1611년 사무엘 드 샹플랭은 이곳에 모피 교역장을 세웠다. 18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비버 모피 열풍 탓에 몬트리올은 날로 번창했다.



땅에 대한 욕심은 인종과 시대를 넘어서 대단했다. 북미 지역에 대한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가 물러나고 영국이 몬트리올의 새 주인이 되었다. 주민들은 옛주인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탓에 언어와 종교를 바꾸지 않았다. 새 주인은 당근과 채찍에도 넘어가지 않는 주민들에게 굴복, 1774년 퀘벡 법을 제정해 불어 사용을 합법적으로 인정했다.

파리가 정열에 휩싸인 도시이고, 뜨거운 가슴을 품은 사람들이 활보하는 거리이듯 이곳 사람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 나와 몰려다닌다. 영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토론토가 차분한 색깔의 옷을 걸친 도시라면, 몬트리올은 화려한 원색이 넘쳐나는 도시라고나 할까. 활발함 속에 감춰진 구시가지의 예스러운 자태가 다운타운의 원색과 대비되며 내면의 역동성을 더한다.



몬트리올을 감싸고 있는 세인트 로렌스 강은 온타리오 호수에서 뻗어나와 대서양 연안까지 이어진다. 이 강 동쪽에서 북으로 펼쳐져 있는 로렌시아 산맥은 휴양객들의 발걸음을 잡는 리조트가 발달돼 있다. 동쪽으로 가다가 강줄기가 좁아들 때쯤 만나는 가스페 반도는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계속되는 절경을 자랑하는 관광지다.

- 전통과 현대가 살아 숨쉬는 도시 -

도시란 살아 숨쉬는 생명체와도 같다. 멈추지 않고 성장하고, 다른 도시의 아름다움과 발전에 질투할 줄 알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옛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물이 자리를 잡으면서 도시는 그 오래된 껍데기를 벗는다. 서울도 그랬다. 이제 조상의 삶이 묻어나는 공간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설사 있다 해도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정도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막연히 향수에 젖어볼 뿐이다.



그러나 몬트리올은 새로움과 예스러움이 화해를 나눈 도시다. 다운타운은 높은 스카이라인과 비조화의 선을 창조해내는 세련된 공간이며, 구시가지는 뿌리의식이 강한 주민들이 조산의 선물을 잘 간직한 탓에 17세기의 고풍스런 자태가 그대로 배어난다.

여흥을 즐기는 프랑스 사람들의 핏줄을 어어받은 이곳 사람들이 모여 있는 다운타운은 캐나다의 도시 가운데 가장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대형 쇼핑센터, 부티크,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여러 유흥업소가 자리잡고 있다. 복제된 기성품이 아니라 남과 다른 것을 찾는 쇼핑관광객이라면 몬트리올이 제격이다. 몬트리올은 북미 도시들 중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유명한 패션 도시이기 때문이다.



볼 것도 많다. 밤이 되면 다시 한번 옷을 바꿔입는 몬트리올은 현란한 네온사인과 불빛, 사람들의 함성소리에 잠이 없는 도시가 된 지 오래다. 불빛만 따라가도 다운타운의 주요 거리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다운타운은 최대 상업 지역인 생 카트린 거리가 중심이 되고, 크레센트 거리, 셰르브룩 거리, 생 드니 거리 등으로 이어진다. 거리마다 특징이 있어 행인들의 차림새도 사뭇 달라 보인다.



기념비가 있는 도르체스터 광장, 푸르른 녹색이 가득한 캐나다 광장,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을 3분의 1 크기로 축소시킨 마리아 대성당, 캐나다 최고의 몬트리올 미술관, 세계적 명문 맥길 대학, 고풍스런 상류층의 셰르브룩 거리, 프랑스계 역사를 볼 수 있는 맥코드 캐나다 역사박물관, 다운타운의 중심지 생 카트린 거리, 다빈치가 고안한 언더그라운드 시티, 예술의 중심지 플라스 데 자르, 현대미술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몬트리올 현대 박물관, 1860년대 철도·광산 노동자가 건설한 차이나 타운 등에 꼭 들러야 할 곳이다. 예술과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뮤지엄 패스를 끊으면 좋다. 월요일은 모든 미술관이 휴관한다.

쇼핑을 하려면 앤티크 로, 언더그라운드 시티, 그린 애비뉴 등 3대 쇼핑 지역을 들르면 좋다. 앤티크로는 골동품점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건물 또한 예스러워서 색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 시티는 29㎞나 되는 지하도시다. 대형 쇼핑 센터, 고급 호텔과 연결돼 있어 쇼핑센터의 길잡이 노릇을 한다. 그린 애비뉴는 고급 부티크와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주차돼 있는 차들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벤츠와 롤러 로이스뿐이다.



다운타운의 화려함과 사이좋게 화해를 나눈 구시가지는 색바랜 석조건물들이 줄지어 선 정감있는 공간이다. 이런 예스러움도 화려함과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인구가 늘어나자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던 성벽이 헐렸고, 다운타운으로 모든 경제가 옮겨졌다. 구시가지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1960년대 초, 퀘벡 주정부의 재개발 사업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지금은 다운타운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남아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몬트리올의 창시자 메조뇌브의 동상이 있는 다름 광장, 1백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몬트리올 은행, 고딕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노트르담 대성당, 몬트리올 주민들의 고고학 자료가 모여 있는 몬트리올 고고학 역사박물관, 몬트리올의 역사를 몸소 대변해주는 구 항구, 1657년 건립된 노트르담 봉스쿠르 성당, 1백5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봉스쿠르 마켓, 2백 년의 역사와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자크 카르디에 광장, 하나의 역사적 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시청, 인디언과 교류에서부터 현재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샤토 람제이 박물관 등이 유명하며 순서대로 돌아다니며 적당한 동선이 된다.



국내에서 몬트리올로 가는 직항 항공편은 없다. 벤쿠버나 토론토를 경유해야 한다. 미국 국적의 항공사는 동경을 거쳐 미국의 한 도시에 머물렀다 몬트리올로 가는 항공편을 제공한다. 가격이 조금 싼 대신 24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다. 국내 관광객들은 몬트리올 다운타운에서 서쪽으로 22㎞ 떨어져 있는 도르발 공항을 주로 이용한다. 북서쪽으로 50㎞ 떨어진 미라벨 공항은 유럽과 연결되는 노선이 많다. 드르발 공항까지 비행기로 벤쿠버에서는 4시간 30분, 토론토에서는 1시간이 걸린다.

토론토에 도착해서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몬트리올로 발걸음을 옮기려면 버스나 기차편이 유용하다. 기차는 4~~5시간을 달려 센트럴역에 도착한다. 메트로 보나방퀴르(지하철역)와 연결되므로 몬트리올 어디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버스터미널은 메조뇌브 불바르와 베리 거리의 코네에 위치한다. 역시 베리 위캄(지하철역) 근처에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몬트리올은 대중교통이 매우 발달해서 초행길인 여행자라도 길을 잃을 위험이 없다.

<글 권오경(자유기고가)>
작성 날짜 : 200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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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그리고 따뜻한 추억, 바이칼호

 
바이칼은 세계지도에서나 봐왔다. 그러나 이제 동토로의 여행도 남의 일이 아니다. 바이칼로 향하는 길에서의 설렘과 그곳에서의 색다른 체험, 그리고 돌아와 잔상으로 남은 추억들.

- 그곳에 가면 바이칼 호가 있다 -

시베리아의 정 가운데에 위치한 바이칼로 가는 길목은 이르쿠츠크.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횡단열차를 타고 5,185㎞를 달려야 만나는 도시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의 관문인 리스트비얀카는 차를 타고 70를 더 가야 한다.



바이칼은 ‘시베리아의 진주’ 로 불린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의 눈처럼 파랗게 보인다고 한다. 바이칼의 나이는 2천5백만 살. 보통 호수의 수명이 3만년인 데 비하면 8백배나 오래 산 셈이다. 가장 깊은 곳이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깊다. 길이는 400㎞, 폭이 가장 넓은 곳은 80㎞에 이른다. 이 호수의 이름은 원주민인 브랴야트 언어로 ‘풍요로운 호수’ 라는 뜻이다. 바이칼에는 26개의 섬이 떠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큰 섬인 알혼 섬에는 징기스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바이칼은 시베리아 최고의 휴양지로 호수 주변에 휴양소가 많다. 이르쿠츠크와 울란우데 등 바이칼 호 주변의 러시아인들은 여름휴가를 바이칼에서 보낸다.



바이칼로 가는 길은 앙가라 강을 오른쪽에 끼고 달린다. 3백36개의 강이 바이칼로 흘러들지만 나가는 곳은 앙가라 강 하나뿐이다. 그 강을 따라 다차 마을이 몰려 있다. 다차는 텃밭이 딸린 별장이다. 1917년 붉은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자기 땅 갖기를 소원하는 인민들에게 1백 평쯤 되는 땅을 나눠줬다. 러시아인들은 그 땅에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오이와 감자, 파 등 식탁에 오르는 대부분의 채소를 재배했다. 1990년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루블화가 휴짓조각이 되었을 때 러시아인들이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차 덕이다. 그러나 다차 풍경도 많이 변했다. 자본주의가 빠르게 침투하면서 다차는 매매가 가능해졌고, 러시아의 신흥부자들은 다차를 여러 개 사들여 화려한 별장으로 꾸미기도 했다. 양가라 강 주변의 다차에는 신축한 화려한 통나무집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 페치카에서 맛보는 훈제 오물요리 -

라스트비얀카의 겨울은 삭막하다. 여름이면 러시아 각지와 유럽에서 온 배낭족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살을 에는 추위 탓인지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다. 한국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면 이곳으로 돌아와 번식을 하는 가창오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에서 휴식하며 바이칼에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오직 광야처럼 넓은 얼음평원에 은빛 햇살만 부서지고 있다.



겨울에는 2m이상의 두께로 언다는 바이칼은 수정처럼 맑다. 이 위로 겨울이면 교통 표지판이 놓이고 차들이 왕래한다. 바이칼의 북쪽 끝 타이가 삼림지대에는 울란우데까지 바이칼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놓아 원목을 운반하기도 한다.

바이칼의 이름난 먹을거리는 ‘오물’ 이라는 물고기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바이칼에만 사는 오물은 백화나무 연기로 훈제를 해서 먹거나 소금으로 간해 말려서 먹기도 한다. 바이칼을 바라보며 맥주와 함께 훈제 오물을 먹는 맛은 남다르다.
한겨울이면 -50℃를 넘나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바이칼. 이곳에서는 극한의 추위를 이기며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우선 보드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독주로 소문난 보드카는 얼어붙은 속을 녹인다. 러시아인들은 집으로 돌아오면 보드카 석 잔을 연거푸 들이켜 속을 달래고 나서 식사를 한다.

- 바이칼이 잉태한 역사의 흔적 -

페치카가 없는 시베리아의 밤도 상상할 수 없다. 난방시설이 잘 된 도시를 제외하고 시골의 러시아인들은 페치카로 겨울을 난다. 앙가라 강에 위치한 시비리스카야 자임카는 러시아의 전통 통나무집에서 하룻밤 머물 수 있는 곳이다. 한밤 내내 식지 않는 페치카의 열기와 몸이 꼭 끼는 작은 침대, 곰가죽으로 장식한 문에서 시베리아에 살던 원주민들의 삶이 느껴진다.



겨울 시베리아에선 사우나도 명물 중의 하나. 러시아의 사우나는 달군 돌에 물을 뿌려 뜨거운 수증기를 뿜어내게 하고, 그 열기고 몸을 녹인다. 이때 여름에 가지를 잘라 말려놓은 백화나무에 물을 적셔 발끝부터 머리까지 온몸을 두들겨야 한다. 사우나로 몸이 달아오르면 밖으로 나와 눈밭을 뒹굴거나 아예 얼음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식으면 다시 사우나로 들어가 뜨거운 홍차와 꿀에 절인 산딸기를 먹는다.

바이칼로 가는 길목인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에서 가장 먼저 열린 도시다. ‘시베리아의 파리’ 라 불리는 이곳은 러시아 시베리아로 영토 확장을 하던 16세기 카자흐스탄 기병대가 발을 들여놓으면 역사가 열렸다. 이 도시에는 1백년 이상 된 전통가옥이 수두룩하다. 전통가옥은 창틀마다 문양으로 장식하고 곱게 채색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가옥은 심하게 낡았고, 지반 침하가 심해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이르쿠츠크의 역사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데카브리스트다. ‘12월의 당’ 으로 불리는 데카브리스트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와 맞서 싸우다 개혁사상에 눈을 뜬 귀족 출신의 청년장교들을 뜻한다. 이들은 18326년 전체 차르를 향해 거사를 일으켰지만 내부 밀고자로 인해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낭만주의 혁명가들은 당시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6,000㎞이상을 걸어서 유배 온다. 그들의 대부분은 20㎏이 넘는 쇠사슬을 차고 광산이나 벌목장에서 일했다. 세월이 흘러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그들은 상트 페트르부르크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르쿠츠크에 남아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을 가르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르쿠츠크에 있는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에는 암울하기만 했던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들이 남긴 발자취로 인해 이르쿠츠크는 러시아인들에게 시베리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 기억되며 ‘시베리아의 파리’ 로 사랑받는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비친 풍경 -

이르쿠츠크에서 230㎞ 떨어진 아르샨은 이름난 온천지다. 징기스칸이 요양을 했던 곳이란 전설이 있는 이곳은 1백50년 전쯤 브랴야트의 사냥꾼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탄산 성분이 함유된 미네랄 온천으로 온천수에 코를 디밀면 숨이 터 막힐 정도다. 눈 쌓인 허허벌판에서 수증기가 치솟으며 온천이 솟는 모습도 신기하다.



브랴야트 자치공화국에 속한 아르샨은 몽골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드넓은 초원이 있고, 말고 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다. 몽골의 피가 흐르는 브랴야트인들은 러시아어를 쓰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한국인과 흡사하다.

이르쿠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동쪽으로 150㎞ 가면 슬루얀카에 닿는다. 이곳에서는 바이칼을 끼고 도는 기차를 탈 수 있다. 슬루얀카에서 리스트비얀카가 마주 보이는 보르트바이칼까지 70㎞를 달려가는 기차다. 이 기찻길은 1957년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다녔다. 그러나 앙가라 댐이 만들어지면서 철교가 물에 잠겨 새로운 기찻길이 놓였고, 이 기찻길은 현지 원주민들만 이용하게 됐다. 바이칼 호수 주변의 원주민들에게 기차는 세상과 이어주는 끈이다. 기차는 식빵을 나르고, 우편물을 나르고, 타지의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도맡아 한다. 최근에는 바이칼을 찾아 나선 유럽인들과 일본인들이 관광용으로 많이 찾는다.



이 기차의 최고 속도는 40㎞. 숱한 터널을 지나고 굴곡이 심해 더 빨리 달리면 탈선하게 된다. 게다가 마을마다 생필품을 전달해주며 달리기 때문에 한없이 굼뜨다. 7㎞0를 가는 데 6시간쯤 걸린다. 정착역은 따로 없다. 기관사가 서고 싶은 곳에 서면 그만이다. 이 기차를 타면 대자연의 무한한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바이칼을 원없이 볼 수 있다.

<글 김산환 여행작가>

바이칼 여행 길잡이

항공편으로 가려면 인천에서 노보시비리스트를 경유하거나 하바로프스크를 경유해야 한다. 블라디보스톡이나 하바로프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해도 된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면 이르쿠츠크까지 3박4일 걸린다.

러시아 여행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선 언어의 장벽이 심하다. 기본적인 영어도 통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라 러시아어를 모르면 여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러시아는 사회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어 불편이 따른다. 3일 이상 머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거주지 등록이나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입출국 절차, 돈을 뜯으려고 눈을 부릅뜬 경찰 등 여행자를 난처하게 하는 일이 많다. 따라서 러시아 전문여행사를 이용해 여행하는 것이 편리하다.
작성 날짜 : 200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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