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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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ㅡ [달려라, 아비]
 
한번도 휴일이 없었던 그곳에서 나는 ㅡ나의 필요를 아는 척해주는 그곳에서 나는ㅡ그러므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도 껴안지 않았다. 내가 편의점에 갔던 그사이, 나는 이별을 했고, 찾아갔고,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관대가 하도 낯설어 나는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ㅡ[나는 편의점에 간다]
 
나는 가로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전신마비 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문득 나는, 언젠가 사촌형과 함께 음악을 들었던 날도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은, 그걸 언제 다 고쳐놓았던 것일까?
ㅡ[스카이 콩콩]
 
나는 나의 첫사랑, 나는 내가 읽지 않은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 대화창 앞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ㅡ[영원한 화자]
 
김애란, <달려라, 아비> 中
 
 
+)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순전히 상상만으로 이런 단편들을 써낸 것이리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만약, 김애란의 소설 속 화자가 그녀와 어떤 연계점을 갖고 있다면 나는 과감히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다. 어쩌면 이렇게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가끔 상상하던 것들이 소설로 그려졌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영원한 화자]의 '화자'는 나란 인간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춰 그의 심리를 무장 해제한 작가의 눈높이에 절실히 공감하기에 가능하다. 김애란의 작품을 논할 때 '아비(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 로망스'를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점이기는 하나 나는 가족 안의 한 개인에 중점을 두고 싶다. 그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가족 공동체의 운명을 대변하고 때로 사회 공동체의 움직임을 전망하기 때문이다.
 
가족에 앞서 개인, 가족 안의 개인, 개인과 또 다른 개인(자아와 타자) 등 김애란의 소설에 논의되는 것은 기존의 가족 서사를 극복한 새로운 대안이 되리라 생각된다. 가족 혹은 사회에서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역설적인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에 작가가 서 있다. 가족이 타인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것이 편의점 판매원이 단골 손님을 몰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결국 남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이다. 이제 작가의 소설에서 가족은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로 요약되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김애란은 그 점을 잘 지적한다. 유쾌하게 읽은 소설이다. 인물들의 구도와 상황 설정을 재미있게 정함으로써 소설집 도처에 웃음이 넘쳐난다. 지루한 날 마음편히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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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08-2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쓸쓸하지만, 잘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후에 나온 <침이 고인다>는 아직

못 봤는데 궁금하네요.

우비소녀 2009-08-2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침이 고인다,도 한번 읽어보세요. 생각보다 김애란이란 소설가, 탄탄한 문체와 구성진 사유구조가 꽤 멋지답니다^^
 
2007 젊은 소설
김미월 외 지음 / 문학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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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어란 정말 몹쓸 것이며, 악덕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말이란 한 번 뱉고 나면 농구공처럼 퉁겨져 다시 이쪽으로 날아온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피하면 피하는 대로 날아오는 것이 말의 속성이다. 그는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언어의 비밀을 농구선수라는 단어를 통해 깨우친 것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언어의 심각성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해보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농구에 대한 과도한 과민반응에 시달렸을 뿐이다. 그날 이후 한동안 농구공을 껴안고 자야만 했다.
- 김태용, [중력은 고마워]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하면 안 된다. 어차피 이해가 안 된다. 돈도 안 되는 음악을 만들고 있는 내 상황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런 걸 왜 하고 있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돈 되는 음악도 많은데. 돈 되는 음악을 하는 건 쉬운 줄 알아? 라고 말들 하지만 돈 안 되는 음악을 하려면 얼마나 미쳐야 되는지를 안다면 꼼짝도 못 할 것이다. 바보들이 모르는 건 본질이다. 음악의 본질은 진짜 노래하는 것이고, 의약의 본질은 인류의 고통과 진짜 싸우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 박상, [치통, 락소년, 꽃나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정상의 속도, 그리고 정상보다 빠른 속도. 정상보다 느린 속도로 살고 있는 사람을 나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느린 것은 빠른 것보다는 덜 두려운 일일 것이었다. 어느 한쪽만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간다는 사실에 나는 진저리가 쳐지곤 했다.
- 염승숙, [춤추는 핀업걸]
 
셋이라는 건, 결국 모두가 혼자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 같아. 밤중에 혼자 깨어, 혼자여서 느끼는 외로움은 어린애의 외로움 같은 거야. 둘이 있어도 외롭다면 그건 처참하지만, 완전한 외로움은 아니지. 둘은 어쨌든 가끔이나마 함께 잠들 수 있으니까. 셋이 되어 나머지 둘이 이미 잠들어 있는 걸 보면서 정말로, 정말로 혼자라는 걸 깨달아야 사람은 완전해져.
- 윤이형, [셋을 위한 왈츠]
 
김미월 외, <2007 젊은 소설> 中
 
 
+) 젊은 소설은 '문학평론가가 뽑은 신춘문예, 전통문예지 당선 소설가(3년차) 문제소설'로 엮어져 매년 발행된다. 말그대로 최근 젊은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 글을 쓰는지 살펴보고 싶어서 읽어보았다. 이 책에는 평론가 김종욱, 최성실, 이수형의 선정으로 총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작가는 대부분 2004년~2006년 사이 데뷔한 사람들이다. 내 기대에 부응할 작품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꽤 많다.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신인 답지 않게 자연스럽게 써내려간 필치가 내 의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김미월의 [유통기한]은 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를 그들과 생활하며 천천히 받아들이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통기한을 지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에게 시간이라는 문제, 그러니까 삶에서 유통될 수 있는 기한이 중요한 의미가 된다. 정신대 할머니의 삶을 유통기한을 지우듯 삭제하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아니 우리의 삶에 새긴 유통기한을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김이설의 [환상통]은 암을 겪은 딸이 자신처럼 암을 겪는 엄마를 돌보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자궁 적출로 아이를 낫지 못하자 이혼을 선언하고 그 순간 자궁이 사라진 곳에 환상통을 느끼게 된다. 암에 걸린 엄마가 결국 죽고 그 부재의 공간에 또 한번 환상통은 찾아온다. 부재의 아픔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태용의 [중력은 고마워]를 읽을 때는 마치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는데, 말이 갖고 있는 속성을 농구공에 겹침으로써 펼치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다만 언어(말)의 속성이 농구공에 묻혀 가려지는 부분이 살짝 아쉬웠다.
 
박상의 [치통, 락소년, 꽃나무]는 이상의 '꽃나무'와 락음악, 치통을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꽤 포스트모던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느 부분이 사실인지 진심인지 혹은 상상인지 묘사인지 알 수 없도록 섞고 또 섞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오고가는 작품으로 염승숙의 [춤추는 핀업걸]과, 황정은의 [문]이 있다. 황정은의 작품은 죽은 자와의 교감을 환상적으로 그려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을 때의 현실과 연결된다. 죽은 뒤의 세계가 중점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대화가 전개된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신인 작가들의 소설을 얕잡아 보는 엄청난 실수를 했을까. 고작 한 두번 글을 쓰고 당선한 사람은 없을텐데, 그처럼 어설픈 작품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무엇보다 그들의 탄탄한 글쓰기가 든든했다. 이들이 앞으로 문단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 자기만의 뚝심으로 글을 써간다면 좋은 작품이 많이 탄생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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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줏빛 소파
조경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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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제가 거북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북이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 또한 말입니다. 그래요. 어느새 저는 또 오래 전 내가 사랑했던 그녀를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나의 자줏빛 소파]
 
 혼자가 된 이후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집중할 때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건 내 자아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겪었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다른 의사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보였다.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적마다 내 눈앞에는 팽팽한 빨랫줄에 걸린 누더기 옷들이 적나라하게 보였고 마른 땅에 침을 뱉어놓은 것처럼 그저 한동안만 자국이 남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질병이었다. 질병은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참고 견뎌야만 하는 것이었다.
-[망원경]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충분히 길들여졌다는 일종의 오만이 생겨날 때 별것 아닌 것으로 시작된 연인들의 싸움은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오해이며 착각이었는가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서로 너무 깊은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말이다.
-[식물들]
 
이것 봐, 하다못해 새끼손톱만한 한 알의 진주를 얻기 위해서도 적어도 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내 심장 속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품고 있지 않다.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내버려둬. 이해하도록 그렇게 추궁하지 말란 말이다 .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조경란 소설집, <나의 자줏빛 소파> 中
 
 
+) 개인적으로 하성란이란 소설가를 좋아한다. 그것은 깔끔한 문체와 참신한 소재 때문인데, 조경란의 소설을 읽으면서 왜 자꾸 하성란이 떠올랐을까. 조경란의 소설에는 복잡한 스토리가 있지 않다. 간단한 스토리로 인간 관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단순 구성으로 단편 소설을 끌고가는 힘이 제법이다.
 
무엇보다 단정한 짧은 문장이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한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고 글을 만드는데 이 소설가의 소설 전개에 어색함이 없다. 꾸밈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문장인데 세밀한 묘사를 표현한다.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표현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작가는 소설에서 자신과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 문제를 다룬다. 아니, 오히려 고립된 채 혼자만의 시간을 지켜보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안의 문제일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의 문제일 수 있다. 자,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교감 혹은 공감이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 당위적이나 당위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소설의 전개가 탁월하다.
 
하성란의 소설을 쉽게 읽었다면(이건 어디까지나 과감한 표현이다. 하성란의 소설이 무조건 가볍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조경란의 소설은 뜸을 들이며 읽어줘야 한다. 짧은 문장들의 이어짐이 작가가 표현하는 수화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천천히 수용해야 한다. 현학적인 단어는 없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 단단한 힘이 서려 있다. 나도 이런 차분함과 끈기를 배우고 싶다. 문장에서 그런 것을 드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처럼 마음에 드는 소설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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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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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년 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그러디?" 엄마는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낙천주의자야." "그럼, 엄마한테는 나쁜 소식이네요. 인간들은 그럴 힘만 생기면 그때부터 바로 서로를 파괴할 테니까요." "어째서 아름다운 노래가 널 슬프게 하니?" "진실이 아니니까요." "정말?" "아름다우면서 진실한 것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엄마는 미소를 지었지만 기쁠 때 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넌 꼭 아빠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p.69
 
그녀는 지금 집에서 자서전을 쓰고 있단다, 내가 집을 비우고 없을 동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지, 다음 장에 무슨 내용이 올지도 모르고, 그것은 나의 제안이었어. 그때는 아주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녀가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자기 삶을 돌이켜볼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마음의 짐을 덜 방법을 찾는다면, 분명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녀는 생기를 얻거나, 관심을 갖거나, 주의를 쏟을 만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이, 삶 자체보다는 무를 위해 살았단다,
p.166
 
불과 이틀 전에 그녀는 자서전을 쓰는 속도가 자기 삶이 진행되는 속도를 앞섰다고 말했어, "무슨 말이오?" 내가 손으로 물었어, "그러니까 새로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녀가 말했어, "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기억하면 되지요." "가게에 대해서 쓰면 되잖소?" "상자 속의 다이아몬드를 하나하나 다 묘사했어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써도 좋을 테고." "내 자서전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전부의 이야기에요." "당신의 감정에 대해 쓰구려." 그녀가 물었어, "나의 삶과 나의 감정들은 같은 것이 아닌가요?"
p.181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中
 
 
+)  이 소설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사건의 중심에 오스카가 있다. 오스카는 테러로 아빠를 잃은 아홉 살의 소년이다. 아빠를 잃은 충격은 오스카의 삶에 파장을 일으키는데 소년은 인간의 폭력성과 전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오스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폭력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과 그로 인한 상처들이 오스카에게까지 내려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행적 구성이 아니기에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오스카의 가족들은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남긴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소통의 부재를 드러내는 소재이다. 누가 그랬을까. 역사는 반복된다고. 인간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 비극적인 폭력이 이 소설의 획을 긋는다.
 
오스카의 기발한 상상력은 우습기도 하지만 때로 안타까울 정도로 희망에 끝을 놓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오스카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그의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아이, 오스카만큼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애절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보는 재미를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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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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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섣불리 맞닥뜨려서는 안 된다고 알려진 크고 작은 금기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요리사의 손톱, 작가의 맨얼굴, 옛사랑의 현재 모습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그것은 주방장의 청결 의식이나 작가의 인간성, 옛사랑의 속물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연희는 그것이 환상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토록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손길에 대해, 그토록 재미있고 지당하신 말씀을 늘어놓는 작가의 인격에 대해, 그 대상의 실체나 본질과 무관하게 우리가 일방적으로 품고 있는 환상을 경계하라는 이야기라고 짐작했다.
p.9
 
자신이 전쟁이나 궁핍과 아무 관계 없고, 현실적으로 결핍된 것이 전혀 없다고 느끼는 때에도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환상이 작동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환상인 줄 번연히 아는 동안에도 환상은 활동하고 있었고, 그 대상과 무관하게 환상은 번성했다. 연희가 두려운 것도 그것이었다. 환상의 시원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곳, 인간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pp.29~30
 
나는 자기 향상을 위해 걷다가 여기 막다른 곳까지 와 있지만, 사실 자기 향상이란 어려운 거다. 정신적으로 깊어지는, 그거는 측정할 길이 없는 거다. 그걸 어디다 꺼내놓을 수도 없고, 물처럼 부어놓을 수도 없고, 바람처럼 어디 부딪쳐서 소리를 낼 수도 없고, 자기 향상은 자기만 아는 상대적인 거다. 
p.323 
 
연희가 생각하기에 환상을 대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그것에 끌려가거나 일방적으로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어리석은 환상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고 큰소리쳐서도 안 되며, 재수 없는 환상이라는 놈을 기어이 때려잡아 박멸하고야 말겠다고 기염을 토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조심할 일은 환상을 현실 속에서 성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환상은 손에 넣는 순간 즉시, 필히 환멸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p.392
 
 
김형경, <성에> 中
 
 
+)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고서 가슴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작가도 그런 경험이 있을까. 혹시 작중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바탕에 작가의 자의식적 글쓰기가 깔린 것은 아닐까. <성에>는 도서관에서 무심코 집어든 소설이었다. 오랜만에 김형경의 소설을 읽어야겠다 싶어 말그대로 그냥 집어든 소설이었는데, 새삼스럽게 프로이트가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프로이트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의 논문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야기를 소설에 끌어들이는 작가의 방식은 꽤 지적으로 보인다. 작가만의 기법이겠지만 어려운 철학 용어들을 기를 쓰고 해석해놓은 분석서들보다 이런 소설 한 두권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한다. 감동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성에>를 읽으면서 인물들의 파격적인 설정이 놀라웠는데, 책을 다 읽는 순간까지 '설마'를 외치며 놓지를 못했다. 이 작품은 액자형 소설로 크게 연희와 세중의 사랑(환상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속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치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
 
게다가 인물 중심의 소설 시점에서 벗어나 자연물의 시점을 끌어들인다. 참나무, 박새, 청설모, 바람 등 그 모든 존재들이 두 남자와 한 여자를 관찰하며 자신들의 세계와 비교한다. 이는 인간 이외의 객관적인 관찰자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섬세한 설정이다. 인간 내면 심리와 인간 사이의 주고 받는 행위를 거리를 둔 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시선을 배제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얼키고 설킨 사랑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물론 연희와 세중이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것에서 소설은 시작되나, 그것은 환상 속의 사랑을 강조하는 극적 구조로 보인다. 작가는 죽음으로 설명되는 유토피아를 환상으로 지시한다. 현실에 환상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환상을 현실화시키려는 의도는 삶을 파멸로 이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영화 <거짓말>이 떠올랐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가 스치기도 했다. 같을 수도 없고 같지도 않지만 그 작품들이 떠오른건 평범하지 않은 소설의 내용과 구체적인 묘사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작가 김형경이 아닌 새로운 면모를 발견해서 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는 것들, 그러니까 삶에 있어서의 환상, 죽음, 사랑이란 키워드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느 지점에서 중첩시키느냐에 따라 지향점이 달라지리라 본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바로 그 지향점의 끝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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