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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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원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꼭 이르케 삯을 받아야 일을 허지, 넘이냐, 넘?"

내게 오천 원을 쥐여주며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눈을 흘기면서도 표정이 환했다.

2%

'이름 석 자도 모르는 빙신.'

요새 할머니의 푸념은 늘 이 말로 시작되었다. 할머니에게 이름 석 자를 먼저 읽고 쓰게 하는 것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아무리 서운하다고, 이름을 그렇게 서운하게 지을 일이냐."

할머니는 자기 이름을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할머니 황서운이 아니라 황서은이에요, 은."

"참말?"

"서운허다는 것이 아니믄, 뭔 뜻인디야?"

"상서로울 서, 은혜 은."

"아주 특별한 복을 받는 아이."

"오메, 시상에....."

23~24%

아가씨가 말한 간판이 딱 보이는 일은 어떤 약속이 지켜지는 기분이었을까. 아무튼 할머니는 틀림없이 지켜지는 어떤 약속의 세계에 새로 데뷔한 시민 같았다. 할머니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할머니가 상쾌한 표정으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부런 사람이 없다."

36%

학습지의 친절한 질문에, 할머니도 다소곳이 대답해놓았다.

ㅡ 오늘은 기분이 어떤가요.

조치요.

ㅡ그런 기분을 느낀 이유를 써 보아요.

봄빠라미 부니깨요.

53%

'알어야 면장이라도 혀' 할머니가 습관처럼 뱉던 이 말을 떠올렸다. 알아야 면장이 담장을 면하는 거였구나. 알면 눈앞의 벽이 없어지는 것. 나도 처음 알게 되었다. 우르르 무너져버린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가 담을 넘으려는 순간, 눈앞의 벽이 허물어지는 상상을 했다.

95%

간당간당. 엄마의 입에서 최근에 많이 나온 단어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 단어는 마치 종소리 같았다. 간당간당...... 간당간당.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

97%

권여름, <작은 빛을 따라서> 中

+) 이 책은 '필성 슈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날이 발전하는 동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와 아빠, 그 옆에서 어떤 도움이든 되고 싶어서 애를 쓰는 할머니, 그리고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연기 학원에 다니고 싶어서 용돈을 모으는 오은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사는 크게 두 줄기로 나뉘는데, 은동이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은동이는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에게 글자를 가르쳐주면서 용돈을 모은다. 그 과정에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친구와의 비교 등을 통해 은동이가 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인 필성 슈퍼가 대형 마트를 상대로 어떻게 끈질기게 버텨내는지의 모습도 싣고 있다. 작가는 소시민들이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생애를 꿋꿋하게 꾸려가는 모습을 안타깝지만 흥미롭게, 씁쓸하지만 재미있게 풀어냈다.

무엇보다 은동이와 할머니의 케미를 보며 순간순간 웃을 수 있다. 글자를 깨치면서 기뻐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오히려 성장 소설의 느낌을 받는다랄까. 글자를 알수록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할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 같아 같이 행복했고 감동적이었다.

이들 가족이 각자의 고민과 어려움 틈에서도 견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응원하며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원미동 사람들'이라는 소설집이 자꾸 떠올랐다.

소재가 비슷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소시민과 현대의 소시민이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씁쓸하지만 그게 반복되는 현실이기에, 그 속에서 견디며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생생하게 담아낸 이 소설이 의미 있다고 느낀다.

진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며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고 흐뭇하게 만드는 좋은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은동이의 앞날과 할머니의 용기와 필성 슈퍼 가족의 끈기를 함께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에 살짝 부제를 달고 싶다. '봄빠라미 부니깨요'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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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는 집들의 비밀 - 부와 운을 부르는 공간과 삶에 관한 이야기
정희숙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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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줄이고 나니 삶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인식이 들었어요. 집을 정리했는데 자존감이 높아지더라고요. 그깟 정리가 뭐 그렇게까지 대단하나 싶지만, 제게는 그랬어요. 하나둘 정리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6%

  • 정리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작은 팁 세 가지

- '원 씽 one thing'. 매일 한 개의 물건이나 아이템을 정리하는 것이다.

- '3분 정리'를 실천하는 것. 매일 아침이나 저녁, 시간을 정해서 3분 동안 주변을 정리하고 정돈하는 습관을 만들어보자.

- 'DIY 프로젝트와 연결'하는 것. 정리하고자 하는 공간을 예쁘게 꾸미거나 변형을 시도해 보자.

18%

  • 성공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공간을 대하는 태도

- 정돈과 조직을 중요하게 여긴다. / 집 안의 물건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함으로써 필요한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집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 의외로 단순함을 존중하고 추구한다. / 물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으며 깨끗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집에 대한 가치관으로 삼고 있었다.

- 물건이 적은 대신 가치 있는 물건을 중요하게 여기고 소중히 다룬다.

-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 일을 할 때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정리가 일상생활에서의 편의성과 효율성을 높여주며, 자유로운 움직임과 집에서의 생활 만족도를 높여준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 이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장소이다.

31~32%

부자들은 자기 계발과 지식 습득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서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모든 부자들이 같은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대게는 '분류와 정리 / 보관 시스템 구축 / 적절한 수납공간 활용 / 정기적인 업데이트 / 개인적인 취향' 등에 따라 서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고 공부하고 집중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한 번에 정리해 둔 공간이 서재라는 것이다.

서재는 부자들에게 학습과 지식 확장의 공간을 제공한다.

37%

  • 공간의 흐름과 분위기를 조성하라.

물건이나 가구 배치에 신경을 써서 내부의 흐름이 원활하게 이어지도록 한다. / 집안의 분위기를 만든다. (이때 음악과 조명은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에너지를 높이는 데 영향을 준다.) / 색상의 선택이다. (배경은 되도록 활기차고 밝은 색상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47~48%

집 정리는 짐 정리라기보다 공간 정리, 즉 공간의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정리를 하기 전에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먼저 생각하고 어떤 공간으로 만들 것인지, 정리 후에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54%

  • 좁은 공간도 두 배로 넓게 쓰는 정리의 기술

- 제거하기 : 불필요한 물건 버리기 / 지속 가능한 소비 습관 형성하기

- 수직과 수평 공간 활용하기

- 묶어두기 : 비슷한 종류의 물건들을 카테고리로 범주화시켜 같은 공간에 두기

57~59%

  • 효과적으로 공간을 분리할 때 기준이 되는 몇 가지

기능적 공간 분리 / 심리적 경계 설정 / 소음 및 간섭 제어 / 개인 공간 조성 / 창문과 조명 활용 / 개인화된 인테리어 / 정리와 수납 체계

81~82%

정희숙, <잘되는 집들의 비밀> 中

+) 이 책의 부제는 '부와 운을 부르는 공간과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에 맞게 정리 컨설턴트인 저자가 소위 말하는 '잘되는 집들'의 공간 정리 방식을 근거로, 부와 운을 부르는 공간 활용 방법을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정리를 잘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공간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조건 버리거나 줄이라는 말이 아니라, 각각의 공간에 어울리는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 공간의 흐름과 분위기를 조성하여 효율적인 동선과 만족도를 높이는 활용 공간을 창출할 것도 이야기한다. 즉, 공간의 목적을 분명히 할수록 정리를 더 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공간을 분리하여 각 공간의 목적에 맞게 물건들을 정리하고, 물건들을 카테고리화하여 같은 목적의 품목들을 묶으라고 이야기한다. 불필요한 물건은 버리거나 기부하고, 수납공간은 수직과 수평 공간들을 활용해 확장할 것도 권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이런 정리 방법들이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심리적인 정리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자기의 심리와 생각도 정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미니멀라이프, 정리된 삶의 기본은 바로 공간 미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적이 확실한 공간의 분리가 정리의 기본적인 틀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또 부자들, 잘되는 사람들의 집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정리를 하고 공간을 만드는지 접할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그들은 공간 중 하나로 서재를 마련하여 '생각하고 집중할 시공간'을 가지며, 자기 발전의 시간과 자기반성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그런 시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확신을 준 책이었다. 하루에 하나씩, 하루에 3분씩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준 책이었다. 하나 둘 사소한 것이라도 집안을 정리하는 행위가 자기 주도성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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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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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게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삶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될 것이고, 느끼게 될 것이고, 마음먹게 될 것이며 결국 나가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1%

소설이 이미 길의 지도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이들이 숨어서 읽고 쓰는 것이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에 틀어박혀 있는 나란 인간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책을 어쨌든 읽고 있고, 읽은 뒤에는 쓸 것이며, 그렇게 쓰고 나면 어떤 성장이 가능할 테니까.

6%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리 놀라운 상상과 설정과 허구 뒤에 숨는다 해도 결국 자기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내면을 스스로 인화하는 과정이고 타인과 기꺼이 공유하는 것이다.

45%

용서해주는 것, 서툴렀던 어제의 나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 우리는 그런 어제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누군가는 여기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건 우리의 체온이 어쩔 수 없이 조금 내려간, 하지만 완전히 얼지는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는 다시 돌아왔고 여전한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힘들다면 잠시 시선을 비껴서 서로를 견뎌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되돌릴 수가 있다.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퍼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가 괜히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다가 여전한 호의를 숨기지 못해 돌아가는 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라고.

49%

어제는 눈이 온다고 하더니 비가 내렸다. 사실 오후에 일기예보를 들었을 때는 눈이 오지 않기를, 무언가가 낙하 - 하여야 한다면 차라리 비이기를 바랐다. 눈은 비보다 더 부피를 가져서 도시를 채울 때면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흩날린다. 눈이 도시를 채우고 채우는데 왜 마음은 흩날릴까. 그것이 강하게 도시를 덮어 전혀 다른 풍경으로 만드는 동안 도리어 내 마음이 풀풀 흩어진다는 건, 그렇게 어떤 부피를 상실해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54%

어떤 불행은 나를 비켜 가리라는 기대보다는 내게도 예외란 없으리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위로받는다.

98%

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 中

+) 이 책은 소설가인 저자가 작가가 된 뒤 약 10년간 써온 산문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한 편 한 편 정성스럽게 풀어낸 글이니만큼 녹아있는 내용들이 마음을 울린다. 공감하기도 하면서 저자의 용기 있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하면서 정성스럽게 한 권을 읽었다.

이 책에는 작가의 유년 시절 이야기, 엄마와 할머니에 관한 추억, 그리고 글을 쓰려고 애쓰던 순간들, 소설가로서 강단에 섰을 때의 심정,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간접적인 고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부당한 일들에 대한 용기 있는 의견과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와 응원 등을 실려 있다.

언젠가 이 소설가의 책 댓글에 '김금희 씨의 소설은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라는 문장을 보았다. 그 문장에 깊이 공감하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댓글을 써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김금희 씨의 소설도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댓글을 다시 써보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김금희 씨의 소설이나 산문도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어요.'

이 작가는 문장이 알차고 깔끔한 사람이다. 이런 표현이 옳을까 잘 모르겠지만 짤막한 산문에도 서사가 잘 구성되어 있고, 시적인 감수성이 풍부하며 군더더기 없는 서술이 프로답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 직언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수성의 문체를 접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저자의 탄탄한 작품만큼 그녀의 올곧은 주관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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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Memory of Sentences Series 1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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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해질지도 모르지만 행복해질지도 몰라요. 수다쟁이 감상주의자가 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책 속의 글자 하나하나를 활활 타오르게 할 그런 작가가 될지도 몰라요."

p.16

- 소설은 거미줄과 같아서 아주 가볍게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삶의 네 귀퉁이에 붙어 있습니다.

-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별을 의식한다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의식적인 편향을 두고 쓰는 글은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p.32

- 당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한, 그것이 전부입니다.

p.36 [자기만의 방]

- 당신은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 가장 희미하게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p.55 [출항]

- 날 믿어요, 캐서린, 당신은 이 시절을 돌아보게 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이 했던 모든 바보 같은 말들을 기억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삶이 그 말들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위에 세워집니다.

p.92 [밤과 낮]

- 하지만 마음이 얇아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배제되지 않는 순간이며, 우리가 아주 큰 거품을 불어낼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때, 해가 그 안에서 지고 떠오르고, 우리는 정오의 푸른색과 자정의 검은색을 삼켜버릴 수 있으며, 이곳과 지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에 대한 무한한 열망을 의미)

p.164 [파도]

- 어떤 조각이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배열하세요.

- 그래요, 난 봄을 맞을 자격이 있어요. 아무에게도 빚진 게 없거든요.

p.191 [버지니아의 일기]

박예진 편역,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中

+) 이 책은 소설가인 버지니아 울프의 13작품 중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모아 엮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어떤 작가의 문장에 매료되면 인상 깊은 구절들을 따로 기록해두듯, 이 책을 엮은 이도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에 매혹되어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경향 별로 묶어서 담백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영어 원문과 엮은 이의 번역본을 함께 수록하고 있기에 영어 문장과 번역문을 같이 읽으며 독자에게 다시 한번 그 문장들을 음미할 기회를 준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비롯하여 에세이, 그리고 타인과 주고받은 편지글까지 골고루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책에서 만난 인상적인 구절들을 살펴보며 우선순위의 작품을 정할 수 있었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들에 대한 간단한 해설이 들어 있어서 버지니아 울프의 가치관과 작품 경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작가라 기존에 풍문으로만 들었던 내용을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올곧은 성 평등의 관점도 의미 있게 다가왔지만,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확고한 마음가짐과 자세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어떤 잣대를 가져야 하는지 명확히 정한 작가 같았고, 솔직하고 담대한 표현을 막힘없이 써내는 용기 있는 작가라고 느꼈다.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작품들을 완성본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었다.

* 이 서평은 해당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읽고 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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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만큼만 욕심내는 삶 - 적당히 탐하고 오늘에 만족하는
요로 다케시 지음, 이지수 옮김 / 허밍버드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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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생은 세상과의 교류.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쌓이고 마음도 상하죠.

그럴 때 마루의 눈으로 보면 "뭐가 트럼프람. 저 녀석,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구나. 흥" 하고는 끝입니다.

"관계있다고 생각하면 뭐든 관계있고, 관계없다고 생각하면 뭐든 관계없지. 그보다 내 아침밥 어쩔 거야." 마루라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나는 여든셋, 무슨 말을 하든 유언이 되고 사진을 찍으면 영정이 되는 나이입니다. 마루도 열여덟 살 넘게 살았고요. 둘 다 그야말로 노후로군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마음이 내키면 산책을 합니다. 졸리면 자버리면 됩니다. 그걸로 좋지 않나요.

6%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게 당연합니다. 사람은 존재 자체로 폐를 끼치니까요. 그걸 서로서로 허용하는 게 어른이고 사회겠지요. 그래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인간관계도 깊어지지 않아요.

아이에게 "남에게 폐 끼치면 안 돼"라고 가르치는 건, 아이가 아직 제멋대로 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13%

어떤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고 있으면 됩니다.

28%

의식은 머릿속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바꾸는 건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바깥 세계'밖에 없어요. 공부도 일도, 하다 지치면 집 밖을 한 바퀴 돌고 오잖아요. 그거예요. 밖에서 들어오는 감각이 머리를 새롭게 환기시켜주거든요.

68%

고양이를 기르는 분은 잘 아시겠지요. "그만둬"라고 말해도 반드시 합니다. 여행을 가려고 가방을 열어두면 꼭 그 안에 들어가 있죠. 꺼내도 다시 들어가요.

이런 식으로 먹고 자고 놀고, 가끔 일을 방해합니다. 그게 마루의 하루예요. 요컨대 필요한 행동이나 하고 싶은 행동만 자기가 좋을 때에 좋을 대로 하고 있지요. 부럽네요.

93%

요로 다케시, <고양이만큼만 욕심내는 삶> 中

+) 이 책의 저자는 80대 노년의 뇌과학자이자 해부학자이다. 그에게는 '마루'라는 노년의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마루, 즉 묘생의 이치와 인간과 사회, 자연, 언어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제목만 보고 고양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거라 예상했으나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저자가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사람의 건강과 자연의 생물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부분도 있고, 의사가 권하는 건강검진이나 조언 등을 따르지 않는 고집스러운 부분도 있다.

또 언어의 가치와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기 생각을 펼치곤 한다.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어른으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고양이 마루처럼 자기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등에 대해 언급한다.

단상 형식의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읽힌다. 저자의 주관이 뚜렷하게 드러내는 글이 많아서 공감하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다만 고양이 마루의 시선에서 우리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을 보는 장면이나, 고양이 마루가 자기 삶에 만족하며 편안하게 사는 장면에서는, 복잡하고 무겁게 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볼 기회가 된 듯하여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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