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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새로운 중동전략에 따라 미 해병대 4000명과 아프가니스탄 군 650명이 지난 2일부터 탈레반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미-아프간군은 공격 초반 별다른 피해없이 남부 헬만드주(州)의 가름시르와 나와 지역을 점령했고 탈레반의 근거지인 칸 네쉰 지구도 차지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정면 대응을 피하면서도 폭탄을 매설하는 등 게릴라전으로 강력히 반격하고 있다.

그에 따라 미군과 나토군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헬만드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5명이 지난 10일 폭탄 테러로 숨졌고, 11일에는 미군 4명도 목숨을 잃었다.

공습이 시작된 후 15일까지 이렇게 사망한 미-나토군의 수는 43명으로 2008년 6월 한 달간 사망한 46명에 육박하며 '피의 7월'을 맞고 있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침략자의 무덤'이라는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이 서서히 묻히기 시작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8월로 예정된 아프간 대선 전에 탈레반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미국과 이에 저항하는 탈레반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면서 이번 대공세의 향방은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14일 아프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인 헬만드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미-아프간군과 탈레반의 생생한 움직임을 전하는 르포를 내보냈다.

미-아프간군은 파키스탄 쪽 국경을 봉쇄해 탈레반의 보급을 차단하고 탈레반의 주된 수입원인 마약 생산까지 막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점령지 주민에게 장기적인 안전을 보장하면서 대선 투표 실시 등 정치적인 안정까지 도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알자지라>의 리포트에 따르면 그게 실현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전투 지역의 주민들 중에는 미군의 공격으로 민간인 희생자만 늘어난다며 반발하는 이들이 많다. 미군은 주민들이 외지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탈레반 편으로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 원로들과 관계를 가지려 노력중이다.

미국과 아프간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지만 게릴라전으로 응수하는 탈레반을 완전히 몰아내기엔 병력이 부족하다고 투덜대고 있다. 그러나 아프간군을 새로 충원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든다. 이번 공세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탈레반은 '강철 그물' 작전으로 '검의 공격'을 가하는 미군을 막아 내겠다고 경고한다. 대공세 초기의 현지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알자지라>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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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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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터전 우루무치, 한족 75% 차지
시장·가게도 위구르족은 종업원 전락
소수족 성지 ‘톈산’ 중국 상징물 가득
 

 

» 중국 군인들이 8일 신장위구르자치구 성도 우루무치에 있는 이슬람식 시장인 ‘얼다오차오’ 바자르 앞에서 경계를 하고 있다. 우루무치에서 민족간 충돌 우려가 커지자 중국군 병력이 증강 배치되고 있다. 우루무치/AFP 연합 

9일 오전 7시 우루무치 인민광장. 지난 5일 발생한 대규모 유혈시위의 진앙지인 이곳은 경찰의 삼엄한 포위망에 갇혀 있다. 소수민족 차별 철폐를 외치던 위구르인들의 목소리는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 광장 주변을 산책하는 몇몇 노인들의 무심한 표정만 스칠 뿐이다.

광장 한복판엔 10여m 높이의 웅장한 조형물이 서 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이 조형물엔 ‘중국인민해방군진군신장기념’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위구르족을 비롯해 회족, 타타르족, 카자흐족, 몽골족 등 20여 소수민족이 사는 도시에 한족의 지배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서 있는 셈이다. 조형물 뒷면엔 ‘중국 인민해방군의 신장 진군이 인민해방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9일 우루무치 인민광장의 인민해방군진주기념탑 앞에 무장경찰 차량이 서 있다. 이곳은 지난 5일 발생한 대규모 유혈시위의 진앙지다. 우루무치/유강문 특파원

위구르족 자치구인 신장의 중심도시인 우루무치는 이미 ‘한족의 도시’로 변했다. 200만명에 이르는 한족은 우루무치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위구르족의 비율은 24%에 불과하다. 지난해 3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티베트 라싸의 경우 한족의 비율이 10% 미만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은 다른 소수민족과 함께 사라져가는 ‘유물’이다.
인민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위구르인들의 전통시장 ‘바자르’가 있는 ‘얼다오차오’가 나온다. 위구르어로 ‘동 쾨뤼크’인 이곳은 원래 미로처럼 얽힌 중앙아시아식 전통시장이었지만, 이제는 중국식으로 재개발된 현대식 건물로 변했다. 60만명으로 추산되는 우루무치 소수민족의 45%가 이곳 주변에 몰려 살지만, 이곳의 주인 역시 이들이 아니다. 얼다오차오의 상권은 대부분 한족들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다. 시장 앞에 거대한 중앙아시아식 탑과 광장이 장식처럼 서 있긴 하지만, 시장 안 가게들의 주인은 한족, 종업원은 소수민족인 곳이 많다.

수천년 동안 대대로 살아온 자신들의 땅에서 ‘이등국민’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소수민족들의 상실감은 ‘톈산’(천산)에서도 드러난다. 우루무치에서 동쪽으로 150㎞ 떨어진 톈산은 예로부터 이 지역에 살던 유목민족들의 성지였고, 특히 주봉인 ‘보거다봉’은 ‘신령스런 산’으로 불렸다. 말을 타고 가던 유목민족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 산을 향해 경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어느덧 중국 신화에 나오는 ‘서왕모’의 그림자로 뒤덮이고 있다. 톈산 꼭대기의 성스러운 호수인 천지 바로 옆에는 거대한 서왕모의 사당이 들어섰다. 여행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들은 톈산 곳곳의 골짜기와 바위마다 서왕모의 전설이 어떻게 어려있는지를 설명하느라 바쁘다. 중국의 서쪽 쿤룬산에 산다는 서왕모는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의 이빨을 가진 여신이다.

우루무치는 몽고말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이곳은 고층빌딩대형 상가, 호텔이 들어선 현대적인 도시로 변했다. 중국 정부의 서부대개발 정책과 대규모 자원 개발로 인해, 우루무치의 1인당 국민소득은 6222달러(2008년)로 3천달러 수준인 중국 평균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발전의 과실’이 몰려든 한족들의 손에 집중되고 있다는 소수민족들의 상실감은 이런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다.

우루무치/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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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결국 기록된 자들의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의 껍데기를 쓰고 있더라도 그 집요한 중화민족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중국에서의 사회주의란 비극일 뿐이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민족 패권주의는 결국 탄압이나 전쟁뿐이다. 동북아시아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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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구르 최악 유혈사태]
위구르인 2명 한족과 패싸움에서 숨진뒤 시위 촉발
중 정부 “망명지도자 레비야가 사주”…사실상 계엄 

 

5일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는 중국 내 민족갈등이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더욱이 이번 사태가 10월1일 건국 60돌을 앞두고 벌어졌다는 점에서, 공산정권 수립 이후 중국 정부가 펴온 소수민족 정책이 도마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시위는 5일 오후 5시께 우루무치 시내 인민광장에서 300여명의 위구르인들이 소수민족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누얼 바이커리 신장위구르자치구 주석은 “경찰이 70여명을 체포했지만, 해방남로와 얼다오차오 등 위구르족 밀집지역에서 사람들이 무더기로 몰려나오며 구호를 외쳤다”고 6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30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시내 곳곳을 점거한 채 “용기를 내라”는 구호를 외치자, 공안 당국은 1000여명의 경찰을 급파해 강제해산에 나었다. 시위대는 밤 11시30분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위구르인 수백명이 체포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는 사망자가 156명, 부상자가 828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사상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관영 <신화통신> 등은 6일 구타당한 채 숨진 여성 주검 등을 공개하면서, 시위대가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흉기를 들고 행인들을 공격했다고 강조했다. 중국 당국은 이번 시위가 위구르족 망명지도자이자 세계위구르협회 회장인 레비야 카디르가 사주한 ‘분리주의 폭동’이라고 주장했다. 신장에선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기관에 대한 무장공격이 잇따르는 등 분리독립 세력의 힘이 커지고 있다.

반면 위구르 망명단체들은 자신들이 이번 사태를 조종했다는 중국 정부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던 위구르인들이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강조했다. 위구르아메리카연맹의 알림 셰이토프 부회장은 “우리는 중국 보안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에 큰 슬픔에 빠졌다. 오늘은 위구르인의 역사에 처참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함 마흐무트 재일위구르연합 회장은 <에이피>(AP) 통신에 “경찰이 전기봉을 휘두르고,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고 말했다.

위구르인들은 지난달 25일 광둥성 사오관의 한 장난감 공장에서 벌어진 위구르족과 한족의 패싸움에서 위구르인 2명이 숨진 데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족 노동자들은 위구르인들이 한족 여성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하며, 위구르인 노동자들을 습격했다. 이 주장은 일부 한족들이 꾸며낸 헛소문으로 밝혀졌다
우루무치 곳곳엔 군과 경찰이 배치돼 있고 야간 통행금지와 교통통제가 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에이피>는 신장 제2의 도시인 카슈가르에서 6일 300여명이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해 사태가 확산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야구푸라는 이름의 남성은 이날 오후 카슈가르 중심 이드 카르 모스크 밖에서 300여명이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이들을 애워쌌으나 충돌은 없었다고 말했다. 며칠 안에 신장 내 주요 도시들로 시위가 확대될지 여부가 이번 사태의 분수령이 될 듯하다.


» 5일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인들이 민족 차별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일 당시 중국 경찰들이 시위대를 막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사진이 6일 네트워크 사이트 트위터에 올라왔다. 중국 당국은 이번 시위사태로 140명이 죽고 8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발표했다. 우루무치/로이터 연합

민족·종교 이중차별 ‘중 제2의 화약고’ 

투르크계 이슬람교…“한족이 자원수탈” 반감 커 

올해는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중국에 귀속된 지 60돌이 되는 해다. 5일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는 지난 60년 동안 위구르인들을 ‘국민’으로 포섭하려 한 중국의 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미국과 유럽의 인권단체들은 위구르인들이 민족과 종교라는 ‘이중의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투르크계 민족인 위구르족은 혈통·문화·언어에서 한족과 뚜렷이 구별되며,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를 믿는다. 신장 전체 인구 약 2000만명 가운데 약 940만명이 위구르족으로 추산된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티베트에 이어 ‘중국 제2의 화약고’로 불린다. 위구르인들은 1949년 신중국 통치 아래 들어간 뒤에도 끊임없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나 봉기를 일으켜 왔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전체 영토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영역,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 막대한 천연자원을 가진 신장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한족을 끊임없이 이주시키며 동화정책을 펴 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장 통치가 시작된 1949년 당시 신장 인구의 6%에 불과했던 한족은 이제 41%로 급증했다. 이는 다시 한족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경제적 권리를 빼앗고 있다고 느끼는 위구르인들의 원망을 키우며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위구르족은 1960~70년대 중국 전역을 휩쓴 문화대혁명 때 가혹한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이들은 당시 이들의 모스크를 파괴하고, 알라에 대한 신앙을 모욕했다. 티베트(시짱자치구)에서 티베트인들의 사원을 훼손하고 승려들을 탄압했던 양상과 비슷하다.

위구르족은 1864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동투르키스탄이란 독립국가를 세웠고, 현재도 동투르키스탄공화국 수립 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중국 당국은 이들 분리주의자를 ‘테러집단’으로 비난한다.

위구르족은 특히 중국 정부가 석유와 가스 등 이 지역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수탈해 간다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신장에는 중국 석유 매장량의 30%, 천연가스 매장량의 34%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이 지역을 여행한 한 한국인은 “신장의 서부와 남부 도시에선 한족 지역과 위구르 지역이 완전히 분리돼 있다”며 “위구르족 사이에 한족들이 자신들의 부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우루무치/유강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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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7-0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어떻게 될지 걱정이에요. 너무 거대한 중국이라니.. ㅠㅠ

머큐리 2009-07-07 20:25   좋아요 0 | URL
사회주의 중국의 또다른 야만...그 민족적 폐쇄성은 정말 정나미 떨어져요....그냥 사이좋게 서로 돕고 산다는건 힘든일인가요? ㅠㅠ
 

제10대 이란 대통령선거에서 강경 보수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이 압도적 표차로 당선, 재선 고지를 밟았다.

13일 이란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85%의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대선에서 아마디네자드가 62.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고 AFP통신 등 주요 외신이 전했다.

아마디네자드의 강력한 경쟁자로 꼽히던 개혁파 미르 호세인 무사비 후보는 33.8%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고 모흐센 레자이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 메흐디 카루비 전 의회의장이 뒤를 이었다.

아마디네자드는 고실업률, 인플레이션 등 집권기의 경제난으로 당선 여부가 불투명했으나 보수 성향의 표가 결집되고 강세지역인 시골, 소도시에서 투표율이 높아 재선의 기쁨을 안게 됐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 지도자는 아마디네자의 승리가 진정한 축제와 다름없다며 그의 당선을 축하했다.

반면 무사비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불복 의사를 밝혀 향후 상당한 선거 후유증이 예상된다.

개표 전까지만 해도 아마디네자드와 박빙의 승부를 벌일 것으로 예상됐던 무사비는 "(상대후보의) 명백한 선거법 위반 행위에 강하게 항의한다"며 "난 뻔히 보이는 이런 수법에 굴복치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선거운동에 상징색인 녹색을 사용, 테헤란에 '그린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던 무사비는 투표 종료 직후 "자체조사 결과 65%의 지지로 내가 당선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강세지역인 타브리즈, 시라즈 등 주요 도시의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없어 많은 이들이 투표를 못하고 일부 개표소에는 참관인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아 공정 개표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무사비 지지자 수천여명은 무사비의 낙선 소식에 분개해 테헤란 곳곳에 모여 "독재자를 타도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강경파인 아마디네자드의 당선으로 이란의 대미, 대서방 관계 개선은 다시 상당기간 답보상태를 면키 어려울 전망이다.

아마디네자드는 선거운동 기간 서방과 핵 협상 거부 방침을 밝히고 이스라엘을 사거리에 두는 중거리미사일 시험발사를 강행한 바 있다.

아울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 이슬람 화해 정책도 시련을 겪게 될 전망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대 이슬람 화해를 기조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구축, 아프가니스탄 안정화 방안을 추진해 나간다는 방침이었지만 역내 패권국으로 꼽히는 이란에서 강경보수파가 다시 득세함에 따라 대 중동정책에 험난한 여정이 예고되고 있다.

이번 대선은 투표소에 밀려든 유권자들로 투표 마감시간이 4시간이나 연장되는 등 이란 국민의 뜨거운 열기를 반영했다.

강종구 특파원 inyon@yna.co.kr (두바이)  

이란 선거와 관련하여 딸기님 페이퍼를 첨부한다. (페이퍼 제목은 제2혁명을 꿈꾸는 이란 여성들이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는 9일 밤늦도록 ‘축제’가 이어졌습니다. 
오는 12일 대선을 앞두고, 개혁파 후보 미르 호세인 무사비(아래 쪽에 사진 있어요. 잘 생겼어요 ^^)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제2의 이란 혁명’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와 다음날 새벽까지 축제를 방불케 하는 캠페인을 벌인 겁니다.


이슬람식 스카프에 하이힐 차림으로 무사비를 연호하는 여대생들, 손 붙잡고 거리로 나와 무사비의 상징색인 녹색 깃발을 휘두르는 엄마와 딸들, 페르시안 힙합을 틀어놓고 행진하는 자동차들…. 
테헤란 아자디 광장과 헤이다르니아 스타디움 등은 음악과 행진과 정치 구호들로 뒤덮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여성들의 옷차림을 단속한다며 횡포를 부렸을 경찰도 질서유지에만 신경쓸 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고 이란 프레스TV와 뉴욕타임스 등이 전했습니다.











무사비 지지자들이 9일 집회에서 무사비의 그림, 피켓 등을 들고 나와 지지 구호를 외치고 있네요. /로이터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거리의 주역인 젊은 여성들입니다. 
외신 사진들도 녹색 스카프나 깃발을 든 여성 시위대 일색입니다. 
이번 선거의 최대 ‘스타’로 떠오른 것은 무사비의 부인 자흐라 라흐나바드이고, 최대 화두인 경제문제에 대해 가장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여성 유권자들이랍니다. 정치적 자유가 없고 여성들을 억누르는 중동, 특히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근본주의 종주국 이란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는 장면들입니다. 

그렇다보니, 억압 속에서도 꾸준히 ‘민주주의 연습’을 해온 이란 여성들의 힘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습니다. AP통신 등은 이란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이슬람 혁명에 이은 제2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사실 이란 여성들의 활발한 정치활동에는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 이란에서는 파흘라비(팔레비) 왕조의 서구식 개혁조치에 따라 여성들의 투표권이 인정됐고(63년)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68년에는 첫 여성 각료인 파로크루 파르사가 교육장관이 돼 여학생들의 머리쓰개를 벗기고 여성들을 해외로 유학보내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현대 이란의 첫 여성 각료였던 파로크루 파르사의 모습입니다.
제국 시대의 관료처럼 생겼지요? (사진은 역시 위키에서~)



이슬람혁명 뒤 왕조 시절의 엘리트 여성들이 대부분 망명하거나 관직에서 쫓겨났지만, 여성들의 투표권은 그대로 보장됐습니다. 여성들의 투표권은커녕 외출과 운전조차 금지시킨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과는 전혀 달랐던 거죠다.
여기에는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독특한 ‘근본주의 여성관’도 한몫 했다고 합니다. 근본주의자인 호메이니는 모든 여성들에 코란을 따를 것을 강요한 대신, 코란이 금하지 않은 것들은 허용했다는 겁니다. 이슬람 성법(샤리아)을 해석하는 법관 직에서 여성들을 몰아내고 법적 권리도 대폭 줄였지만,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교육은 인정했습니다.






18세기 페르샤 여성들을 그린 궁정화







1968년 테헤란대학교의 원자로 앞에 선 핵공학자들입니다.
과학자들 중 절반은 여성이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사진은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왔습니다.)



호메이니는 또 이슬람혁명 정신을 부추기려 여성들도 거리로 나와 정치 구호를 외치도록 선동했습니다. 호메이니의 딸 자흐라는 여성단체를 이끌면서 이슬람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자흐라는 여성들을 외교관으로 내보내도록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혁명 이후 미국의 제재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더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밖으로 나갔고, 여성들의 대학진학률은 남성보다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이 사람이, 이란 여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 무사비입니다. /AP
이란 정치인들 중에는 유독(!) 잘 생긴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권자들 중에는 유독 미녀가 많은 모양입니다만... )

요새 국가지도자들은 잘 생긴게 대세래요(오바마 참고...) 한국은 빼고...




이 사람이, 이번 선거에서 무사비 돌풍을 일으키는 데에 한몫을 한 부인 자흐라 자흐라 라흐나바드입니다. /AP




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한 뒤 20년 동안 이란 여성들은 보수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정치적 발언을 늘려갔습니다. 
97년 정부가 여성들의 축구경기 관람을 금지시키자 5000명의 여성들이 국가대표팀 월드컵 예선전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쳐들어간 ‘풋볼 레볼루션(축구혁명)’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89~97년 대통령을 지낸 중도파 하셰미 라프산자니의 딸 후아에자 하셰미는 96년 스스로 정치에 뛰어들어 마즐리스(의회)에 진출했고, 이란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 금기를 깨는데 앞장섰습니다.


이란 여성들이 ‘표의 힘’으로 정치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97년 대선에서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를 대통령에 당선킨 것이었지요. 하타미 대통령은 마수메 에브테카르라는 여성 과학자를 부통령에 임명, 지지에 보답했습니다.  
 



2003년 여성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차별에 맞서 싸운 이란 여성들의 투쟁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습니다.

이번 선거는 12년전 하타미를 당선시켰던 때보다 더 열기가 뜨겁습니다. 9일 녹색 머리띠를 두르고 테헤란 시내로 나온 21세 여성 파티마 타헤리안은 AP통신 인터뷰에서 “젊은층은 이번 선거가 이란의 대외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다”며 “선거 캠페인은 재미와 정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축제”라고 말했습니다.

멀리서나마 이란 여성들의 건투를 빌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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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6-14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란여성들 참 이쁘다...기자들이 이쁜 여자들만 찍은건지..정말 평균(?)적으로 이쁜건지??

노이에자이트 2009-06-15 16:27   좋아요 0 | URL
여기 광주 광역시에 이란 사람들 살아요.3년전엔가 시내버스에서 이란의 새댁과 이야기를 나누었어요.되게 미인! 이란사람은 아랍족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지요.그 여성은 고학력자였어요.그런데 옆에 시어머니가 있어서 그다지 친근하게는 못굴었어요.옆에 계신 분은 누구...하고 물었더니 시어머니라고 하길래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더니 그 분도 고개숙여 답례.그런데 그 이후 그 이란 미인을 본 적이 없어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분쟁 원인이 돼온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내 유대인 정착촌 동결 문제를 놓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사실상 묵인해 온 미국의 외교정책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그러나 지난 2월 출범한 이스라엘의 강경 보수파 정부는 국내 지지 기반을 의식,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가 공존을 요체로 하는 ‘두 국가 해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입장이 미묘하게 엇갈리면서 정착촌 동결을 둘러싼 힘겨루기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일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두 나라 사이의 갈라진 틈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월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이스라엘은 서안지역 내 모든 정착촌 활동을 동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4일 이집트 카이로대 연설에서도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같은 입장을 확인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강경 무장정파 하마스는 미국의 태도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새로운 토지를 점유하고 정착촌을 건설하지는 않겠지만, 기존 정착촌의 ‘자연적 성장’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 등으로 새로운 가구를 구성한 이들이 살아갈 집도 마련하지 못하게 하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다. 2003년 합의된 중동평화 로드맵에 담긴 ‘모든 정착촌 활동 동결’ 이행 의무를 어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조지 W 부시 전 행정부와 “자연적 성장은 허용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했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에 따르면 오바마 행정부 고위관계자는 “전임 행정부로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가 없다”며 “이스라엘은 문서화된 오슬로 협정과 중동평화로드맵 등은 무시하면서 미 행정부가 들어본 적도 없는 구두 합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제3차 중동전에서 비롯된 정착촌

서안 지역에 처음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선 것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의 일이다. 시온주의(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열기를 타고 전 세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자 인근 아랍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제1차 중동전을 일으킨다. 이듬해 정전협정을 거쳐 이스라엘은 독립을 얻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골란고원은 각각 아랍 국가인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은 3차 중동전에서 승리하면서다. 요르단 치하에 있던 동 예루살렘도 무력으로 병합한다.

48년 이전까지 이들 지역에 살다 떠난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자신들의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정착촌 건설에 나선다. 해외로부터 계속 이주해온 유대인들은 정착촌 확대를 더욱 앞당겼다. 정착촌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폭력에 노출됐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유대인 정착촌 건설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유린이 저질러지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정착촌은 팽창을 거듭했다. 이런 가운데 1993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서안과 가자지구를 관할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출범했다.

유대인 정착촌 확장을 주도하던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2005년 “정착촌을 없애겠다”고 선언한 것은 정착촌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정착촌을 철거하는 대신 서안에 분리장벽을 지어 이스라엘에 유리한 국경선을 이끌어내겠다는 샤론의 정책은 우파 리쿠드당의 반발을 샀다. 결국 그는 리쿠드당을 떠나 카디마당을 창당하고 가자지구 정착촌 20여곳을 철거했다. 하지만 샤론이 2006년 1월 갑자기 뇌졸중으로 식물인간 상태가 되면서 상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부시 미 행정부는 정착촌 확장을 눈감았고 올초 가자지구 공습 때도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줬다.

정착촌 건설은 국제법 위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46호, 452호, 465호 등이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행위를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전쟁 피해자 보호를 위해 체결된 제네바 협약 49조도 “점령국 정부는 자국 주민을 피점령지로 이주시킬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측은 팔레스타인이 1967년 이전에 독립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네바 협약 적용 대상이 아니며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정착한 것이기 때문에 49조 위반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차갑다.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단체들은 유대인 정착촌 건설 및 유지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가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부족한 물은 유대인 정착민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일부 도로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의 접근도 통제하고 있다. 돌을 던지고 올리브나무를 꺾는 등의 물리적, 경제적 폭력도 자주 발생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 군과 경찰이 일방적으로 유대인 편을 들기 때문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하소연한다. 이스라엘은 소유자가 없거나 팔레스타인 주민들로부터 정당하게 사들인 땅에 정착촌을 건설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펴왔지만 이스라엘 정부 내부 문건을 통해 상당한 지역의 토지를 강탈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관건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 여부

오바마 행정부와 네타냐후 내각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나라가 오랜 동맹국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만큼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정착민들의 땅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에 이끌려 네타냐후를 선택했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레츠가 전했다. 네타냐후가 유대인 극단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부 허가 없이 건설된 일부 정착촌의 철거에 나선 것은 이스라엘이 오바마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확대하고 분리장벽을 건설하려 하는 것은 ‘두 국가 해법’을 사실상 거부하는 것으로 비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지역을 조금씩 점령해가면서 동시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립을 지지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 의사를 수차례 표명한 오바마는 유대인 정착촌의 완전 동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방침이다.

이스라엘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면 ‘오슬로 정신’의 복구가 필요하다.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꾀함으로써 역내 평화를 보장하고 경제적으로도 호혜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오슬로 협정의 정신이 이스라엘의 궁극적 입장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줄곧 비난해온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공격이 중단될 것이라는 신뢰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타와 하마스 등으로 분열돼 혼란스러운 팔레스타인 내부 역학구도가 정리돼야 한다. 
 

■ 제발, 올리브 나무만은… 

‘슬픈 올리브나무 이야기를 아시나요?’

‘우골탑’이라는 말처럼 지난날 가진 것 없는 농민에게 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이었다. 단순한 가축을 넘어 유일한 자금원이었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올리브나무가 그런 존재다. 이스라엘에서 일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돼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올리브유를 팔아 생활을 꾸린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1987년 인티파다 이후 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12만그루의 올리브나무를 잘라냈다.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철망이나 정착촌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망을 건설해야 한다는 이유로 올리브나무를 베어내지만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 때문에 삶의 기반을 잃고 있다.

지난 1일 팔레스타인의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민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유대인 극단주의자 수십명은 나블루스에서 도로를 봉쇄한 후 장애물을 치우려고 차에서 내린 팔레스타인 운전자들에게 돌을 던지고 들판에 불을 질렀다. 일부 정착민은 숨어있다 총을 쏴대는 바람에 최소 4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부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힌 6명의 유대인 중에는 의회 의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또 인근 주택에 난입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재배하는 올리브나무를 베어냈다.

밀밭이 불타고 올리브나무가 잘려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팔레스타인 주민 샤헤르 타위는 “내 삶의 전부를 잃었다”고 울부짖었다. 당시 이스라엘 군 순찰차량 3대가 주위에 있었지만 폭력행위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팔레스타인 소방차의 접근을 막았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유대 극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난동을 부릴 때 빼놓지 않는 일이 올리브나무를 베는 것이다. 심지어 이스라엘 군이나 경찰이 직접 올리브나무를 베는 작업에 나서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위협으로부터 유대인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 철망을 건설해야 한다는 게 명분이다.

잘 자란 로마종 올리브나무에서는 1년에 20~30ℓ의 기름을 얻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올리브유를 요리할 때 넣고, 남은 것은 내다 판다. 올리브나무는 최소 6~7년 이상 성장해야 제대로 소출이 나온다. 때문에 한 집에서 기르는 올리브나무 10여 그루를 한 번에 베어내면 이들의 생계는 무너지고 만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인들도 우리에게 올리브나무가 자식과 같다는 것을 잘 안다”고 이야기한다. 나블루스에서의 난동 이후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자 이스라엘 당국은 올리브나무를 잃은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대인 정착민들이 나블루스에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이스라엘 정부가 불법적인 전초 정착촌을 철거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기존 정착촌의 ‘자연적 확대’는 용인하되 정부 허가 없이 건설된 불법 정착촌은 사라져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올리브나무를 벤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항변했다.   

유대인 정착촌의 역사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제1차 중동전쟁 발발, 정전협정으로 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동 예루살렘 등 아랍 국가 통치권에 편입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발발, 이스라엘 승리로 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동 예루살렘 등 점령, 유대인 정착촌 건설 시작

1987년 제1차 인티파다(봉기) 발생

1993년 두 국가 해법에 기초한 오슬로 협정 타결

2000년 이스라엘 강경파 아리엘 샤론 이슬람 알 아크사 모스크 방문 제2차 인티파다 촉발

2003년 중동평화 로드맵(유대인 정착촌 동결 조항 포함) 발표

2005년 아리엘 샤론 총리 정착촌 철거 선언, 가자지구 정착촌 전면 철거, 극우파 리쿠드당 반발

2006년 아리엘 샤론 뇌졸중으로 총리 임무 수행 중단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 정착촌의 완전한 동결 요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취임, 정착촌의 ‘자연적 성장’ 용인 의사 표명

<이청솔기자 taiy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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