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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2disc) : 디지팩
박찬욱 감독, 이영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불편함의 미덕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술은 영화의 고전적인 미덕 중 하나였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대한 타자화의 과정을 겪게 만들기도 하고 영화의 상업적 충격요법으로도 쓰이며 가장 단순한 경우로는 영화 자체가 엉망이었을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의도된 불편함이란 수단들을 통해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영상에서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줬고 데이빗 린치와 크로넨버그의 영화들, 그리고 퍽 유 시네마들은 관객의 일상과 도덕, 윤리에 대한 관념을 꾸준하게 뒤흔든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 시리즈는 우리 안에 내재된 타자에의 불안을 끄집어냄으로써 실용적으론 드라이브인 씨어터 데이트족들을 열광시켰고 작품 내적으로는 냉전시대의 불안이라는 정치적 테마로 평론가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우리는 수많은 공포영화들에서 비슷한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이 보자면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이라는 불편스러운 문제를 영화적 카타르시스로 써먹었다. 이렇듯 영화에서의 불편함이란 상당히 친숙한 개념이다.
불편함에 대한 관객의 직접적인 반응은 찬반논란으로 드러난다. 극단적이거나 분명한 방법론, 혹은 주제를 선택한 결과물에 대해서 관객이 보일 수 있는 입장은 대부분의 경우는 지지하거나, 거부하거나의 양자택일이다. 우리는 앞서 언급한 데이빗 린치와 크로넨버그의 영화에 대한 열성팬들과 야유팬들의 대립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조지 로메로의 영화들이 만든 공포영화의 전통은 영화 평론가 로빈 우드에 의해 복권되기 전까진 공포라는 수단을 자기 방어기제로 악용하는 보수 세력의 첨병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퍽 유 시네마는 아예 대놓고 관객으로 하여금 혐오스러운 감정이 들게 만드는 것을 스스로의 존재의지로 삼는다.
<친절한 금자씨>가 개봉한 후 각 포털의 영화 게시판은 영화에 대한 찬반논란에 휩싸였다. 그 온갖 논쟁들에도 불구하고(혹은 그 덕에) <친절한 금자씨>는 가장 성공한 18세 등급 영화의 전당에 올랐다. 제작사인 CGV측에 따르면 <친절한 금자씨>는 2005년 8월 31일자로 353만 6000명의 관객동원으로 <친구>의 뒤를 이른 역대 2위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이런 수치적 결과들에 걸맞는 숫자의 비판과 그보다는 적은 수의 열광적인 찬사를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다수의 관객들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모종의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비판자들의 리뷰 대부분에서 영화의 평이함과 긴장감 부재를 불만으로 얘기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정확한 지적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박찬욱 감독에 대한 이해에 의한 지지와 상업영화로서의 <친절한 금자씨>가 받을 비판이 갈리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불편한 영화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감독이 자기 길을 확실하게 잡고 나아간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독의 의지가 가진 확고함을 의식하면서 이 영화를 바라봐야 한다.
친절한 박찬욱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주 스스로의 상업적 역할에 대한 자각을 얘기한다는 걸 기억하자. 아직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감독들의 작가적 지향과 합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한국 영화계에서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그런 태도는 당연한 것이며 도덕적으론 훌륭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자세다. 그리고 그런 기준점은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박찬욱 영화에서 꾸준하게 영화의 연출준거점으로도 작용해왔음이 틀림없다. 그의 기존 복수극들이 보여주는 그리스 비극적 내러티브들에 대한 소수든 다수든 간에 대중이 보여줬던 열광적인 호응은 <오이디푸스 왕>이 고대 그리스의 인기 있는 연극대본이었으며 아직도 읽히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그가 가진 무기였다. 비극은 박찬욱 감독의 작가적 음울함과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영화광 특유의 잡식성이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의 방법론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상업적 가능성에 대한 강박을 해결하는 박찬욱 감독은 전작들에서 꾸준하게 작가적 역할과 대중영화로서의 상업적 책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복수극들은 이야기의 잔혹한 취향과 스테레오타입화된 인물들로 인해 컨셉적인 느낌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동시에 박찬욱이라는 인장이 박힐 수밖에 없는 영화들이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복수는 나의 것>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줄 알았다는 감독의 고백을 듣고 <올드보이>에선 반전이라는 흥행 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켄 러셀과 샘 페킨파를 동시에 아우르려 하는 박찬욱 감독은 모두에게 친절하려 한다.
<친절한 금자씨>, 배반의 미학
막대한 마케팅과 칸느영화제 수상으로 인한 박찬욱 감독의 높아진 네임밸류, 그리고 톱스타들의 대거 출연과 같은 외적 배경들은 박찬욱의 어느 작품보다도 <친절한 금자씨>의 흥행가능성과 대중친화성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해줬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성공을 거둔 전작들,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올드보이>에 대한 배반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감독 자신이 전작들에서 여성의 존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에 반대급부적인 결과물을 만들고 싶다고 한 <친절한 금자씨>의 기획의도에서부터 예상되던 바였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공동 시나리오 작가로 여성을 끌어들이고 영화의 전체적 이미지를 ‘예쁜 것’으로 포장한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가 반전이 없는 영화라는 걸 개봉 전 인터뷰에서 꾸준하게 강조했다. 이것은 영화의 흥행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입소문이 악화될 경우를 사전에 막는 당연한 역할이랄 수도 있겠지만, 반전의 없음이라고 하는 구조적 특징은 영화의 특질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감독의 전작이 <올드보이>였음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식스 센스>와 같은 일련의 ‘반전’영화들의 연이은 성공으로 인해 반전이라는 스토리적 기술이 전형적인 영화의 코드, 관객의 전반적 기호로 자리잡은 시점에서 <올드보이>로 그와 같은 경향에 탑승했었던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반전 구조에 대한 배신을 감행한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친절한 금자씨>는 자신의 복수극들이 가졌던 남성성에 대한 배신이다.
젠더의 구분에 대한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잠시 옆으로 치워두자면, 음악평론가 신현준은 록은 남성성, 일렉트로니카는 여성성의 현현이라고 설명한다.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코러스 파트를 향해 모든 과정이 억제되고 준비되어 있는 록음악은 남성적 오르가슴의 인상을 준다. 그에 반해서 일렉트로니카는 처음부터 꾸준하게 반복되는 표제음과 그의 지속적인 변주를 통해 천천히 이어지는 상승과 하강으로 여성적 오르가슴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이런 록과 일렉트로니카에서 드러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친절한 금자씨>에 대입해 볼 수 있다.
<친절한 금자씨>의 전개가 평형적이고 장식적으론 여성적이라는 건 이 영화의 구조를 설명할 때 뺄 수 없는 부분이다. 영화는 금자씨의 동료들을 하나씩 만나게 되는 감옥생활과 백선생을 죽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들을 교차해가면서 보여준다. 그 과정은 이야기의 집중이라기보다는 이야기들의 편린이다. 즉, 여기서 뒤엉켜있는 시간과 사건들은 영화의 이야기가 한곳으로 달려가게끔, 고조되게끔 만드는 역할을 지양한다. 우리는 지난 두 편의 복수극들에서 모든 것이 파국으로 향하게 조직된 그리스 비극적 구조와 카타르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프러덕션 디자인과 미술에서의 비현실적인 색감과 몽환적 이미지들, 감독 자신이 2050년 즈음의 미래시점이라고 밝힌 나레이션, 속죄의 교훈극 등등의 요소들을 통해서도 이미지적으로 이 이야기가 그리스비극이 아니라 우울하고 잔혹한 동화의 세계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전작들이 보여줬던 마초적 클라이막스로의 전력질주식 시나리오를 포기한 이 마지막 복수의 이야기에는 점점 고조되어가는 폭발에의 기운이 없다. 그 대신 점점이 산발적으로 마련된 금자씨에 대한 파편적인 풍경들이 모자이크처럼 묘사되고 긴장감 없는(남성적 법칙으로 보자면 가장 긴박했어야 할) 백선생의 포획과정이 있은 다음, 후반부엔 복수의 의미에 대한 긴 심리극을 장치해놓는다. 이것은 감독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혹은 아예 감독 인터뷰를 보지 않은 관객들이 끝까지 기대했을 영화의 장쾌한 카타르시스에 대한 열망을 배신하는 동시에 지난 복수극들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대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코를 얼얼하게 만드는 스트레이트 펀치가 아니라 금자씨가 가만가만히 정적의 위 속으로 스며들게 만들었던 락스처럼, 타이틀에서 보여줬던 붉은 물감의 침전처럼 그 독을 서서히 펼쳐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실패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다.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걸 알았음에도 가차 없었던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동진이나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이 붕괴의 순간으로 준비되어있던 <올드보이>와는 달리 <금자씨>는 긴 시간동안 마련된 극도의 죄의식과 고뇌 속에서도 제대로 된 구원에 이르는데 실패한다. 그에 맞춰 고도로 세밀하게 구조된 디자인과 색감과 같은 외적인 화려함들은 금자의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복수의 의미가 완성됐어야 할 긴 심리극의 시작에서부터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변해가며(디지털 상영 버전) 동시에 영화 내내 예쁜 것만 찾는 금자씨의 태도 또한 의미를 잃게 된다. 백선생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다고 읊조리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복수에 미친 아이들의 가족이 아니라 인간말종 백선생이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표정과 태도는 역전되고 이후 오랫동안 백선생의 몸뚱이에 가해지는 폭력을 통해 관객은 혼란스럽게 된다. 관객이 가져야 할 쾌감을 박탈하는 이 시간은 말하자면 성찰의 시간이다. 이 시간동안 우리는 복수와 고통이 역전되어 제대로 새겨지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어쩌면 진짜 독은, 금자씨가 백선생을 죽이는 복수의 과정이 아니라 복수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자씨의 고통이 지워지지 않는 것을 목도해야 하는 관객에게 침투되는 것이리라.
‘너무’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이영애
이 모든 분명한 특징들에 비추어, <친절한 금자씨>는 충실하게 영화적 완성을 성취해냈는가. 그 시도 자체에 대해선 달리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완성이란 측면에선 확답을 내리기가 힘들다. 일단, 앞서 말했듯이 우린 다시 한 번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감독이라는 걸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에 맞춰 <친절한 금자씨>가 얼마나 친절한지 한 번 살펴보자. 지난 두 편의 복수극들이 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들을 담고 있었다면 금자씨에선 도전적 페미니즘에 대한 도식적 장치들을 수능 언어영역 시험문제를 풀 때처럼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금자는 여성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복수를 실행하며 마초적 캐릭터의 표상이자 손짓만으로 섹스를 벌이는 백선생은 기록상 대다수인 '남자' 연쇄살인마다. 더군다나 그는 모성의 목적인 아이만을 골라 죽이는 인간이며 금자는 오로지 사생아로 낳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13년을 감옥에서 썩게 될 누명을 뒤집어쓴다. 어쩌면 페미니즘 진영에서조차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도식성을 도마에 올릴지 모를 일이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들을 연상케 하는 일련의 메타포들과 뻔한 스노비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이런 노골적 구도가 가지는 정당성의 문제는 이영애가 금자씨를 맡고 있는 덕에 후자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진다. 그녀는 지금껏 어머니를 맡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일 뻔한 적에도 그녀는 어머니였던 적이 없었다. <봄날은 간다>에선 자신보다 열 살 연하인 남자를 요동치게 만들 정도로 충분히 매혹적이고 자유로운 이혼녀였고 <선물>에선 예정된 죽음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잠긴 소녀적 아내였으며 <대장금>에서 왕은 그녀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궁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살짝 언급되는 레즈비어니즘과 예쁜 것만 찾는 그녀의 태도에는 쉬이 공감하지만 딸에 대한 그녀의 집착에는 의아해 한다. 어쩌면 <친절한 금자씨>는 그녀가 문소리와 같은 영역에 들 수도 있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사생아로 낳게 된 딸 때문에 스스로 누명을 쓴 그녀를 보여주면서도 정작 딸에 대한 얘기는 털끝만치도 보여주지 않는 감옥에서의 세월과 아이만 골라서 죽이지만 유아에겐 관심이 없었는지 입양까지 되도록 놔둔 백선생의 위협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딸, 그런데다 말까지 안 통하는 딸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인 긴장감을 증발시키고 그런 요소들이 종종 유머의 도구로 쓰이게끔 만들었다. 이것이 금자라는 '여성'이 어쩌다보니 끌고 다니게 된 딸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도적인 연출이었다면 그 흐름의 당위성은 일정 부분 수긍이 가능하다. 그러나 금자씨를 다루는 이런 영화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딸을 그렇게 만든 금자의 사정, 그리고 딸이 금자에게 가지는 상징적 역할들과 충돌하며 영화를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백선생이 보낸 두 해결사에 의해 딸이 협박당하는 와중에도 그것은 딸이 아니라 그저 물건처럼 느껴질 정도다. 예를 들면, 구원을 뚝딱 해결해주는 드래곤볼.
퇴행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왜 그렇게 변했냐’ 면서 금자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그녀의 감옥 안 동료들과 비슷하게 될 것이다. 복수의 이유가 명확히 제시되고 그에 따른 행동이 공식처럼 맞아 들어갔던 전작의 남성들에 비해 금자라는 여성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영화 본편을 통해서도 금자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쁜 것에 집착하고 화장에 대해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허영심이 속죄를 위한다는 공명심, 딸에 대한 자기희생적 애착과 겹쳐지는 금자의 행동은 그녀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곤란하게 만든다. 금자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패턴은 그녀를 미성숙한 어른으로 설정했다는 감독의 설명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믈론 박찬욱 감독의 복수극들에서 나왔던 여성들, 죽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류의 누나, 극단적 무정부주의자였던 영미,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영원히 묻어두어야 하는 딸 미도처럼 그녀들이 일관되게 보여줬던 미성숙함과 그런 미성숙한 여성이 <친절한 금자씨>에선 주체가 되서 사건을 끌어간다는 상황은 이 시리즈가 보여줬던 마초적 요소의 거세와 대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납득하기가 어렵진 않다. 이것은 동시에 복수극의 결론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복수극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보다 설득력 있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올드보이>에서부터 해당되는 얘기다. 분명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15년 동안 퇴행한 어른이었고 그를 따르는 미도는 고착된 어린아이의 표상이었다. 그래서 오대수의 어설픈 복수는 모든 것을 통제하던 이우진 앞에서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장난질 정도로 격하되어버린다. 그러나 복수의 좌절이 인물들의 미성숙에서부터 내재된 것이라면, 확신범이었던 <복수는 나의 것>의 박동진과 류는 어찌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복수는 나의 것>은 개인적 원한이 사회적 구조로 치환되어 극한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은유적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동진과 류는 그 구조 속에 끼어 멈추지 못하고 기어이 죽이고 또 죽어간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의 과정과 실패에 있어서 그만한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금자씨는 나름대로 행복해질 수도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감옥에서 제빵기술을 배웠고 딸아이는 멀쩡하게 살아있으며 완성된 공동체의 욕망만 보여주는 바깥세상에 비하면 감독이 의도했다고 밝힌 것처럼 감옥생활이 차라리 더 나은 시간이었다. 물론 복수 3부작이 박찬욱 감독이 인터뷰 중에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기획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복수 3부작은 <반지의 제왕>이나 <매트릭스 트릴로지>처럼 이어지는 게 아니라 개개의 결론과 주제를 가지며 그자체로 하나하나가 완결된 영화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 3부작 전체의 결론이 아닌 <올드보이>의 반대급부일 뿐이라는 점이 더욱 강조되고 여기서 박찬욱의 복수극은 되려 퇴행해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능케 만든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을 근심하다
우리는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한 진행을 보이는 영화들을 알고 있다. 개인적 복수가 뒤틀린 공명심으로 이어지고 결국 무너져 내리는 금자씨의 모습은 가장 가깝게는 뤽 베쏭의 <잔다르크>를 떠올리게 만든다. 칼 드레이어와 로베르 브레송이 잔다르크를 다뤘던 것과 마찬가지로 뤽 베쏭의 <잔다르크>에서도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은 죄의식과 구원의 문제제기이다. 보다 영화적 전통에 입각한 오래 전 성과들을 들춰보자면,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고민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실존주의적 문제들과 일맥상통한다. 즉, <친절한 금자씨>가 우리에게 던져준 화두는 영화사적으로 고전적인 차원의 영역을 향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그 익숙한 이야기에 특유의 영화적 테크닉과 외적인 화려함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여성성이라는 영화적 구분점과 독자성을 확보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걱정대로 이 과도한 치장은 박찬욱 감독이 가진 연출자로서의 위기가 우회해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뛰어난 테크니션들이 이미지에 의해 함몰되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MTV 출신 감독들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는 그들이 시도해 보이는 온갖 다양한 종류의 카메라 테크닉만큼을 따라가지 못하는 연출력의 부재이고 오시마 나기사,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 감독 같은 거장들조차도 자신들의 필모그래피의 막바지에서 과잉스러운 이미지에의 매혹에 빠져 영화적 탁월함을 놓쳐버리곤 했다. 그런 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그의 필모그래피의 터닝 포인트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HD영화라는, 이미지의 실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포맷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근심을 놓아버리긴 힘든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