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수 -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란 생각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진행자 - 어떻게 봤나.
김연수 -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봤다란 얘기를 하는게 걱정됨. 내가 계속 얘기를 하다가 딴소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란 우려도 있음.(웃음) 다큐를 좋아한다. 감정이입이 잘 되고, 실존해 있는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에 작가들의 상상의 여지가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크린 밖의 일까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상상하게 된다. 이야기와 개인사, 극히 일부분만 다뤄졌는데 영상으로만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다. 화면 밖의 이야기들이 나를 끌어당긴다. 작은 할아버지의 경우, 단편적인 기억이 아닌, 일상, 하루가 백년 같다란 느낌을 상상한다면 영상으로는 온갖 일을 다 담을 수 없다. 말하지 못한 부분들을 생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감독님이 힘들었을 것이다. 글로 쓰기도 어려운게 가족사는 객관적 위치가 확보되지 않아 자꾸 반신반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려되는건 한쪽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하진 않을까란 점이었는데 균형에 대해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열린 결말이었고, 지금 세대(자신과 감독을 쳐다보며, 우리 같은 세대죠란 눈빛을 보내는)가 접근하는 방식이란 점이 인상적이었다.
진행자 - 가족의 이야기라 고민을 계속했을 것이다. 객관화하거나 갈등을 도출시키는 부분, 연출 기준은 어떤거였는가.
문정현 - 만들고나서 든 생각은 만들기 쉬웠단, 다큐멘터리가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전혀 낯선 사람이 아닌, 친하니까 말해달라고 부탁드리면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시작은 쉬웠지만 끝나고나서 생각해보니 좋은걸 만들긴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신 안 만들 것 같다. 객관화하는 문제,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내가 한쪽만 다루고 있고 한풀이지 않을까란 고민을 줄곧 해왔다. 결국은 솔직해지자란 결론을 내렸고, 내 감정에 충실하자란 기준을 정했다. 내 감정에 충실하되 지긋하게 눌러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바라보자란 생각을 했다.
진행자 - 김연수의 작품, 밤은 노래한다 중 작가의 말에 보면 극중 인물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연수 - 소설 마지막에 친구들이 이념 때문에 죽이는걸 다뤘다. 해결 안 되는 문제들인데 나같은 경우는 상식주의 안면주의(웃음)인지라 친분을 중시한다. 내 세계관(웃음) 아니,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는게 내 처세관인데 그 입장을 송두리째 박살내는 일이 현대사에서 많이 일어났다. 상상 안 된다고, 윤리적으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룰 수 없다고, 분노나 배신감 등을 모른척할 수 없고,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모르겠다. 삶에 대한 교훈이기도한데 모든게 적과 우리편으로 명쾌해지지 않는다. 찝찝한 상태를 견디는 것, 화해는 아니고, 어정쩡한 상태로 있는 것, 소설이고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해하려고한 것이지, 직접적인 사람에게 화해를 종용하는것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 소설에선 죽여야할 사람을 안 죽인건 바라본다는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진행자 - VIP 시사 때 어머니 반응은 어땠는가.
문정현 - 그 전에 미리 보셨고, 박수 한번 받아보시라고 올라오라고 말씀을 드렸다. 처음에 어머니는 내가 다큐를 찍는걸 반대했다. 돈이 안 된다거나 불안정해서가 아니라 끼가 없어서 안 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 영화를 준비한다고 하니까 '여봐라, 이 정도 가지고 얘기를 한다.'며 그럴줄 알았단 반응을 보이셨다.(웃음) 그래도 고생했다고 말씀해주셨고, 열광적이진 않았어도 은근히 좋아하셨다.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진행자 - 어머니가 끼가 굉장히 많으신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문정현 - 어머니는 한국무용, 가야금도 배우시고, 득음을 한다고 돌아다니시기도 했다. 어렸을때는 날 끌고 탈춤을 배우기도 했다. 어머니가 당신께서 이 다큐를 연출했다면 워낭소리처럼 대박낼 수 있었겠구나라고 말씀을 하셨다.(웃음)
관객질문
승주나무 - 영화를 보면서 참 부럽다란 생각을 많이 했다. 고향이 제주도인데 제주도 역시 인구의 1/3이 죽임을 당했다. 외가쪽에도 사연이 있는데, 피해를 승화시키고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현기영씨도 제주도에서 도망나와야 쓸 수 있다고 할 정도였는데. 현대사의 다큐가 심부까지 깊게 들어와 놀랐고, 준비하는데 어떤 과정이었는지 궁금했다. 불만이나 해소되지 않은 부분 중에 가족사로 녹여도 승화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건지 궁금하다.
문정현 - 영화는 2003년에 시작했고, 영화에서처럼 일기장을 보면서 가족사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기획이 됐다. 이 작품만 매진할 수 없어서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준비를 했지만 할매꽃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영화가 근현대사 이야기냐는 지점보다는 대화하고 알아가는 시간이라 좋았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나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할머니에게 보여주려고 만들려는 영화였기에 방향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만들어가면서 치유된게 많았다. 해소되지 않은 나만의 문제라면 다큐멘터리의 의미, 존재, 현장감을 드러내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나의 경우는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고민을 던지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철학이라고 봐왔다. 내가 생각했던게 변해가며 영화, 가족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불만스럽지 않았다. 사실성을 기반으로 했다는, 객관적일거란 선입견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드라마타이징이란 방식으로 집착하며 과도한 열등감으로 만들어낸게 아닐까란, 이야기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곡선들 만들어내려고 한건 아닌까란 고민은 했다.
관객 - 다큐를 많이 보는 사람이 아니다. 정확한 내용을 모르고 보기 시작했는데 주제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절충되는 느낌이었다. 이념- 인간성- 경험, 그리고 겸허함에 이르는 것 같았는데 김연수 작가가 책으로 쓴다면, 처단은 어떻게 다뤘을지가 궁금하다.
진행자 - 교묘하게 틀어서 작가에게 질문을 한다.(웃음)
김연수 - 아마 좀 더 기승전결이 뚜렷해지겠으나 정말 다를 것이다. 작은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미스테리적으로 도입부에서 가져가 이야기 끝에 해소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갖고 스토리를 만든 경우라면 소설의 허구에서 시작해 스토리를 갖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작업하는 분들은 사실 그대로 보여줘야된다는 강박들이 드라마타이징 형식을 도입하는 것에 부담을 갖게 하기 마련인데 어쨌든 다큐에는 흐름이 중요하다. 내 작업은 이념적이며 다른 것을 재배치하는 과정이다. 잘 모르겠으나 처단이나 단죄에는 관심이 없다. 큰 얘기를 하더라도 난 개인적인 문제로 돌아간다. 국가와 개인의 대립이란 것 안에서 처단, 단죄는 국가적인 관점일 따름이란 생각이다. 개인적인 관점으로 돌아가면, 영화에서 자살한 사람도 나오듯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어머니, 가지 말라고, 만나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란 생각을 했는데 그냥 끝나서 안심했다. 내 결말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결말 자체가 오묘했고, 내 성향이랑 비슷하나, 다큐멘터리의 경우 그 후를 쫓아간다는 것에 비춰볼 때, 보는 입장에선 그런 결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됐는지가 궁금해진다.
문정현 - 어떻게 됐는지를 많이 궁금해한다. 커다란 의도는 없고, 솔직한 맘이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배경에는 국가란 제도,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란 얘기를 하고 싶었다. 비정규직, MB악법으로 또 다른 곳에 희생자가 있다란. 반성이나 성찰이 없다면 할머니가 겪은 일들은 똑같이 반복되고 있고, 반복될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왜 우리 역사는 이랬을까, 우린 이런 시대가 있었고, 희생자였구나, 이런 질문 안에서 현재를 바라보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끝난 것은 과거를 바라볼 수 있는 바탕과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지려는 의도였고, 한풀이나 값싼 구도가 될까 우려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 - 반성하지 않은 과거는 되풀이 될 것이란건 낙관적인 얘기라고 생각된다. (...)역사청산이 가능하냐란 질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회색인간들이 흔들거리며 그들 각자의 모순에 부딪히며 흘러온게 역사인데 어떻게 청산이 될지도 의문이 든다. 그런 면에서 엄마에게 왜 그렇게 강요를 했는지 궁금했다.
문정현 - 다큐는 재현을 토대로 하지만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철거촌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찍을 수 있을까, 죽어가는 사람을 찍을 수 있을까. 윤리적으로 올바른가란 고민이 있을 수 있고, 단순히 적과 아를 구분하는 선에서 끝날 우려가 있기도 하다. 가해자를 징벌하잔 의도로 보였다면 내 실수이다. 그건 내 한계만은 아닌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한테 그 당시의 가해자의 자식들을 만나길 강요하면서 -물론 아주 잔인했지만- 내 안의 실마리를 찾았다.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란 생각을 안 한건 아니다. 어머니가 가서 만나보시겠다고 했다가 점점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란 생각도 들었고, 당사자들은 어렵겠지만 어머니 세대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란 바람도 있었다. 그래서 잘못된 모습으로 강요한 부분이 있었다. 역사란건, 회색의 사람이 그려온 선이 아닌 민초, 작은 그룹인 역사가 합쳐진 거대한 집합체란 생각을 한다. 역사인식의 차이일 수 있다.
관객 - 바라보는 입장이 아닌, 어떻게보면 조금 잔인한 질문일 수 있겠지만, 너라면, 네가 경찰이라면 어떻게 하겠냐란 질문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문정현 - 그런 질문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당신 같으면 이렇게 찍을 수 있었겠느냐, 되돌아보는 역사적 사건이 성찰의 바탕이 될 수 있겠는가란게 더 유의미하다고 본다.(...)
Arch - 영화, 정말 잘 봤다. 예고편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 상처받은 인물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그런 위로나 치유의 방식이 유효할까란 의문을 갖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내 맘조차 위안을 받을 정도로 괜찮았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너무 숱한 어려움에도 남에게 베풀기 좋아한 할머니와 항상 긍정적인데다 에너지 넘치는 어머니란 캐릭터- 캐릭터라 말하기는 어폐가 있으나-에 대해 정말이지 빠져들고 말았다. 내가 나중에 나이가 든다면 꼭 본받고 싶은 인물상일 정도로 인상 깊었다. 혹시라도 옆에서 지켜봤을 때 그들이 당신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긍정적이고 배려할 수 있는 지점들을 마련한 계기나 에너지가 있다면 뭘지 정말 궁금하다.
문정현 -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가족들이 일부러 숨겼다거나, 혹은 특별히 내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체화된 삶의 이유가 있었고, 발화된 경우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 역사 없는 집이 없을 것이란, 각자의 집마다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적용된 측면이 크다. 그렇다면 그런 아픔을 왜 끄집어냈냐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시사회 후에 그런 질문을 준 사람이 있었는데 인상 깊었다. 재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에 대해선 아직 똑같은 폭력이 난무하며 이것에 대해 말해야할 책임감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현실을 바라보는 거울, 틀이 되길 바란 마음이었고, 가족들이 바라는 것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한나라당이 되면 다들 숨도 못쉬고 살아간다라고한-다큐가 만들어진 당시는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기 전이었음.- 할머니 말씀이 그냥 허투로 뱉어낸 말이 아니란 것도 지금 상황을 보면 짐작가기 마련이니까. 그분들은 그렇게 체화되었단 생각이다.
진행자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김연수 - 연재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다. 창비에서 대단위 프로젝트, 올로케 3권짜리 소설인데 중간에 잘라라, 이래서 중단되는 연재를 하는 중이고(웃음), 연재가 끝나가고 있는 것도 하나 있다. 올해 하반기에 단편소설집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문정현 - 편집중인 영화가 있다. YMCA남성의 기만적인 이야기, 2편을 편집중이다. 남한 사회의 시민운동이 유효한지, 친자본, 기층 운동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고민 중이다. 또 다른건 개인사적인 다큐멘터리를 기획중이다. 91년도 분신 사건이 다큐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내가 광주 출신이라 광주 5.18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개인사와 시대의 모습, 이제는 더 이상 운동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제목은 '내가 문근영을 만나야 하는 이유'이다.
진행자 - 아주 선정적인 대한민국 좌익 감독의 얘기였다. (웃음)
한글 문서로 10포인트인데도 4페이지가 넘어서는 분량을 적어나가면서 애초에 성실한 기록자이며 객관적인 내용을 전해주고자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이건 단순한 사실 전달만이 아닌, 말이 발화되고 내가 적어가는 순간들의 감정과 중요도의 차이에 따라 조사 하나, 단어 하나에도 많은 고려가 있어야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꼭 해야할 일도 아니기에 내가 하던식대로 감상을 남기는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안 한건 아니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고, 처음으로 '무려 김연수' - 웬디양님과 대화하다 내가 인용을 하자 그녀가 동의해준 무려 김연수란, 단순히 소설가나 김연수가 아닌 황송하지만 아주 많이 황송할 정도는 아닌 약간 놀랍고, 만나면 반가운 의미의 '무려'란 말이 나온 것이다. -를 본 소감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던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님과 감독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의 시선에 대해서도 물론, 할 말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난 왜 이 긴 후기의 대부분을 작가, 감독, 관객과의 대화로 채웠을까. 내가 주효하게 바라보는 시선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와 '좋았어요'로 끝내기엔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다란 욕심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욕심은 욕심대로 유효할지 모르겠으나, 메모한 내용을 보면서 그들과 관객들이 나눈 대화의 공백을 메꾸는게 얼마나 힘든건지 절감했다. 다큐멘터리나 뉴스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란게 어떤건지, 내가 녹음기가 있었다면 있는 그대로가 될런지, 의사사건처럼 내가 좀 더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방점이 찍히진 않았을런지, 게다가 아, 난 너무나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이 수면 위에서 투닥거리고 있었다. 새삼 '객관화된 사실'에 대해 쓴다는 것의 위력과 조심스러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부정확한 내용과 언어를 글로 기록하는 것에서 삐져나오는 적절치 못한 뉘앙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록했던 내용을 후기에 올린건 객관화되지 않은 얘기를 쏟아낸데에 대한 비난을 달게 받겠단 각오가 있어서라기보다는 Arch의 생각은 이렇지만 난 이렇게 읽었다란 코멘트나 다른 시각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역시 욕심 때문이다. 좀 더 여지를 두려는 의미에서 적어도 적절한 거리를 두고 전달할려고 노력했단, 나름의 변명을 다시 스크롤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끼적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이런 글을 쓸 때 어느 정도의 준비와 각성이 필요할지 절실하게 느끼기도 했고.
영화를 보고나서 잔상처럼 남은 장면은 할머니가 맨발로 자신의 옛 땅들을 돌아다녔던 모습이었다. 애니메이션으로 잠깐 소개되기도 했지만, 난 좀 더 생생하게 그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끙끙, 자기 안으로 삭이는 고통이 자꾸 발로,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할머니도 알았을텐데, 얼마나 암담했을까. 모두의 죽음 앞에서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만을 택했어야하는, 그게 자신만이 아닌 시대의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일거란 단순한 희망에 온 몸이 바스러지는 것도 모르며 베풀고, 인자하게 웃어주셨던 분. 늙고 노쇠한 몸으로 다가올 죽음에 몸을 맡기며 고생하셨다란 말에 나뭇잎처럼 몸을 바르르 떨던 분.
'나의 외할머니는 당신 장례식에 오시는 분들, 음식 많이 드려 따뜻하고 배부르게 대접하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질문했던 것처럼 에너지나 긍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한, 그 힘. 그렇게 견딜 수 있고 살아가게하는 힘 앞에서 맘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그들, 견디는 민초나 민중이 아니라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경지를 지닌 누군가, 닮아가고 싶고, 조금 덜 아프셨더라면 좋았을 할머니의 힘이었고,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공포탄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남편을 바라보며 백가지 맘을 먹었다가도 내 인생 하나만 희생하면 된다란 생각에 백년같은 하루를 지키고 견디어내었던 작은 외할머니. 할머니는 그런 남편이 죽기 전에 '자넨 어쩔랑가 소리 한마디 안 하니 서운했다'고 하셨다. 난 그 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모르겠다. 바보 같고, 순하신 이분들이 어떻게 그 삶을 견디고 어떻게 지내왔는지 정말 모르겠다. 체화된 삶이라고, 모두가 다 그러니까 자기가 겪는건 별거 아니란게 어떻게 가능한지, 무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지점을 정말 잘 모르겠다.
쉽게 복기 이모의 아버지를 총살한 사람의 자식을 만나겠다라고 허락했던 어머니가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되면서 한 말, '옳고 그름을 어떻게 알겠니, 인간 자체가 모순이지'란 말에서 어쩌면 나 역시 실마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적인 고통의 반복을 알아야하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하기 위해, 사람들이 좀 더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 의미에서 감독은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난 비록 외할머니는 이 영화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남은 사람들에게 난 이 영화가 작은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란 것을 느꼈다.
모두가 겪는 일일지라도, 당신들,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들은 녹록치만은 않을거란걸. 감독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할머니 얘기를 들려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진정성의 힘이란 구태의연한 감상으로서가 아니라 맘으로 영화를 받아들일 것 자체일거란 것을 느꼈으리라.
외할머니를 위해 만든 영화였지만, 우리 모두가 배우고 위로를 받게 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