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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회원들이 로쟈님에게 사전에 댓글로 질문한 내용에 대해 먼저 답변을 주시고 현장에서 참석자들에게 몇 개의 질문을 따로 받아 답변을 하는 걸로 토크를 마무리하셨습니다. 토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서평은 어떻게 쓰나. 

일단 몇 매짜리인지 분량이 중요하다.  그 분량에 맞게 책을 읽는다. 책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10 매짜리 서평을 쓸 수가 없다. 생각할 거리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 경우 슬쩍 읽어야 한다. 20 매짜리는 조금 더 깊게 들어가야 되고 30 매짜리는 더 깊이 들어가고 다른 책도 보고 하는 차이가 있다.

 

2. 그렇게 많은 책을 어떻게 읽나.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좋아하는 책은 자세히 읽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 부득불 이것저것 들춰 본다.   

읽지는 않지만 많은 책의 표지와 목차를 본다. 학교 도서관에서 50권, 동네 도서관에서 3권을 대출할 수 있는데 늘 53권을 다 대출해 놓고 있다. 이렇게 읽지는 않더라도 많은 책을 본다.

거의 매일 검색을 해, 관심 저자나 관심 주제다 싶으면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은 다 구해 쌓아 놓는다. 필요한 부분을 필요할 때 찾아 읽는다. 쏟아져 나오는 책을 다 읽는 건 불가능하다.   

 

3. 인문학이 위기라는데. 

한마디로 생계위기다. 먹고 살기가 힘든 것이다. 즉 인문학자의 위기다.  

하지만 이런 뭉뚱그린 인문학 위기 담론엔 공감하기 힘들다. 인문학 내에서도 위기에 대한 체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학부제 실시 후 군소학과는 위기지만 영문학과나 중문과는 절대 위기가 아니다.  

 

4. 인문학의 범위는. 

인문(人文)은 사람 인(人) 자와 글월 문(文) 자를 쓴다. 즉 인문학은 전부다. 이런 포괄성이 인문학의 특장이기도 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협소한 관심을 갖는 인문학자라는 것은 넌센스다. 문학을 예로 들면 작가마다 전공이 다 있다. 나는 A 작가 전공이라서 B 작가는 잘 몰라요, 혹은 C 시대가 전공이라서 D 시대는 모르겠어요 같은 얘기가 통한다. 이런 전문화 경향 때문에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가 아주 쉽게 정당화되곤 한다. 인문학에 대한 원(原) 이미지와 어긋나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요즘 들어 내가 전체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이념으로서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올바른 개인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성에 대한 고려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인문학적 보편성이란 게 유럽적 보편성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유럽인의 사고는 인문학이 되고 비유럽인의 사고는 인류학으로서 연구가 된다. 비유럽권은 학문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이다. 인문학 자체에 유럽 중심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게아닐까. 어느 일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일본인이 인문학을 하는 것은 원숭이가 그리스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능은 하지만 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5. 인문학 공부가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것 말고 세상에 대해 바른 태도를 가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별로 상관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문학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공부라면 아주 지겨워 하는 것을 많이 봤다. 세상에 대해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는 것 같지도 않다. 인문학과 인격은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6. 요즘 같은 세상에 인문학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난 희망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절망이다. 희망, 행복은 값어치가 없는 말이다. 제대로 절망하는 법만 알게 되어도 다행이 아닌가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는데 책을 읽을수록 고통에 대해 민감해지게 된다. 가령 양차 대전에서 유럽에서만 6천만 명이 죽었는데 그 역사를 맨정신으로 읽기는 어렵다.

어떤 행복이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다만 우리에게 왜 희망이 없는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이 왜 부끄러운 것인가 제대로 아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재미란 말도 싫다. 요즘 세상이 루키즘, 외모지상주의, 외관주의, 온통 그런 것에 지배되는 것 같다. 책도 재미난 책만 찾는다. 재미 없어도 좀 읽는 거다. 재미 없어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재미만 찾는 생활방식은 동물적이다.  

 

질문. 서재에 번역 관련 글이 많다.

단순한 번역비평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확장해 번역과 주체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번역-내(內)-존재이다. 대다수 책들이 번역서이고 사회, 국가, 민족처럼 우리가 쓰는 개념어들이 수입되어 번역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의 기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오역을 다루는 번역비평과 관련해서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다. 고난이도의 오역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부정문을 왜 긍정문으로 옮겼냐를 지적하는 수준이다. 명백한 오역을 교정해서 읽자는 주의다.   

알려진 것과 달리 한국어가 영어보다 의미가 섬세한 경우 번역이 어렵다. people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어론 인민, 민중, 국민, 다중, 어중이떠중이, 사람이 다 people이다. 영어 단어 people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걸 한국어로 번역하는 건 어렵다. 다른 예로 에스키모어엔 눈에 대한 단어가 수십 가지라고 한다. 한국어의 눈을 에스키모어로 옮긴다면 그 중 무슨 단어를 골라야 할지 어려울 것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내년쯤 번역서와 번역비평서를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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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속의 내 책 2009-06-28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식은 숨기고 싶은 건데요~~~ 자꾸 자꾸 무식함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생각의 저변을 확대해야 할 듯하다는 생각과 나의 무지함을 반성하고 돌아왔습니다. 멀리 대전에서 직장 끝나자 마자 달려간 서울에서 저를 나름 채찍질하고 돌아왔다는 저 스스로의 안도감이 드네요. 그런데 이런 안도감은 저에게 좋지는 않겠진요
전 다른 것 보다 많은 생각을 해야겠다. 그리고 세상에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많은 생각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서
그런 의미에서 너무 좋았습니다. 카메라에 찍히는 건 로쟈님도 저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던걸요

바른생활 2009-07-0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알라딘 글에 처음으로 댓글 달아주신 분이 윤님이시네요. 감사합니다^^
 

홍대 상상마당 4층으로 고고싱! 다행히 시간에 늦지 않았습니다...친절히 안내해주시며 스크립트 나눠주시는 사계절 출판사 관계자분들 좋았구요^^ 5분쯤 지나 김명진 선생님 오셔서 강연 시작/// 

20세기 2가지 흐름으로 구분하셨습니다.  

(1) 1,2차 대전 후 1970년대까지  

(2) 1970년대 이후~ 

1. 과학 활동 규모의 양적 팽창 및 제도화  

   20세기 들어, 특히 대전 후 30년 동안 급속도로 과학이 양적 팽창합니다. (비록 우리는 지금 과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과학의 중심이 18세기 프랑스->19세기,20세기 초 독일->1930년대 이후 미국으로 옮겨갑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지표들에서 증가가 나타납니다> 

American Physical Society(미국 물리학회) 사진을 보면 1930년대 과학자가 소수였으나 1970년대 과학자가 대량으로 늘어납니다(물리학도 각 부분이 세분화되어 하나의 세션도 과학자 수가 많습니다).  

American Physical Review(당시 제일 유명한 물리학 학회지)에서 커버할 수 있는 연구논문의 수가 대폭 증대합니다.1970년대 학술지가 쪼개져 해당 전문 논문들만 투고하기 시작합니다. 학술지의 종류, 발간 간격, 한 부의 두께가 늘어납니다. 

연구기관의 수, 즉 과학연구만 해서 밥먹을 수 있는 일자리 수가 증가합니다. 1966년 만평을 보면 미국 인구 증가율이 3%인데 비해 매년 과학 논문 증가율이 9%로 3배 빠른 속도입니다.  Bentley Glaus(생물학자)의 회고에 의하면 1940년대 빈곤한 연구환경이었다면 1960년대에는 지금 같은 연구자금 지원이 있는 연구환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사회,정부,기업이 과학의 `유용성`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이전 과학은 과학자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초 기업이 과학이 쓸모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고 산하에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에서 화학회사가 세워진 이후 미국에서 General Electric(GE), Dupont, AT&T의 Bell lab가 세워집니다. 

GE는 기초연구를 지원하여 기존의 에디슨의 탄소 필라멘트 전구가 특허기간만료가 임박하고 시장점유율 하락한 상태를 텅스텐-아르곤 전구를 개발하여 시장점유율을 90%까지 끌어올립니다.  듀퐁사는 나일론을 개발하였습니다.  벨 연구소는 노벨상을 10여명 배출하였고 트랜지스터를 개발하였습니다(지금은 IC형태의 칩으로 들어 있죠. 지금 트랜지스터의 수는 마치 개미 개체수 만큼이나 되지 않을까요~조크!)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마침내 국가도 과학의 유용성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차 대전은 화학자들의 전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독일은 황제직속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의 프리츠 하버 주도로 화학연구에 몰두합니다. 연합국의 해상봉쇄로 칠레로부터의 화약원료인 초산 수입이 좌절되자 공중질소에 암모니아를 합성하여 화약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합니다. 독가스 개발과 질산염 연구도 시도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미국은 조지 헤일(천체물리학자) 주도로 잠수함 탐지기, 독가스에 대비한 방독면 제조 등을 연구합니다. 1차대전은 독가스가 대규모로 사용된 유일부이한 전쟁입니다. 

2차 대전은 물리학자들이 큰 역할을 합니다. 레이더, 원자폭탄 이 두가지로 대변됩니다.  (1)레이더는 1941년 브리튼 전투에서 독일의 영국 장악을 좌절시킵니다. 야간 상호공습과 공중전에서 영국 공군의 우수한 레이더가  독일 공군을 궤멸시킵니다. 레이더 연구에는 30억불이 투입되었습니다.  (2)원자탄은 20억불을 들여 단기간에 집중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1941년 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과학연구개발국)에서 바네바 부시 주도로 4억 5천만불이 투입되어 MIT, 칼텍 등의 대학에 연구계약용역을 주었습니다.   이외에도 폭탄의 탄도 계산을 위해 컴퓨터 ENIAC이 개발 되었고 페니실린, DDT 가 연구되었습니다. 

<차이점> 

1차대전 이후에는 국가의 지원이 중단되었고 과학자들도 국가로부터 연구주제와 자금을 지원받아 구속되는 것에 불편을 느끼고 연구의 자율성을 추구하여 다시 민간 개인의 연구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에는 지속되었습니다. 1945년 7월 종전 직전에 배포된 바네바 부시의 보고서 *과학, 그 끝없는 프론티어*는 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제공하였습니다. 과학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구이므로 후하게 지원하되 책임을 묻지 말 것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전후 과학정책의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즉 (1)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과학자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2)과학기술의 성과에 대한 낙관이 지배적이었습니다.  

Office Of Naval Research(해군연구국)가 1945~1950(5년 동안) 존속하였고, 국방성, NSF(국립과학재단), NIH(국립보건원)등이 있었습니다. 통계적 수치를 제시하면 1960년대 초반 연방정부재정지출 비중이 R&D 예산의 3분의2를 차지하였는데 그 중에 절반이 국방예산이었습니다. 1995년 연방 연구개발 지출이 704억불(70조)인데 이 중 356억불이 국방부 지출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경향입니다.   

1970년대 이전 국방부 지원의 기밀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기밀취급허가받은 교수,학생들만 이러한 top secret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2.과학활동의 양상 변화 

팽창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연구자금의 증가로 인해 과학연구의 단위(규모)가 커졌습니다. 연구팀의 규모도 커졌습니다. 1930년대까지는 개인.소집단(부부,친구,사제,선후배) 연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20세기 전반을 보면 노벨상 수상도 단독수상이 많습니다. 지금은 연구단위가 극단적으로 위계화되었습니다. 연구규모가 대규모이기 때문입니다. 과학노동의 소외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첨단연구를 위해서 대형기기에 대한 의존성이 증가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거대과학(Big Science)프로젝트입니다. 거대입자가속기, 허블 우주 망원경, 아폴로 계획, 인간게놈프로젝트 등등.  

휴먼지놈프라직트는 1990년 시작되었습니다.2001년 초안이 완성되었는데 NATURE(권위 높은 과학전문잡지)에 70여쪽의 방대한 분량으로 실려 있습니다. 20여개 연구센터의 500여명의 논문 저자가 공동 작성한 것으로 인명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20억불이 들었습니다. 

<입자가속기> 

고에너지 물리학의 목적은 고대 원자론자들로부터 기원했듯이 원자->양성자,중성자->수십 가지 종류의 근본입자로의 규명을 위한 것입니다. 링을 통해 기존 입자를 쪼갭니다. 빛의 속도(0.99997)까지 가속시켜 목표물에 충돌시켜 깨뜨려 다른 입자들로 분해시켜 뭐가 생기는지 바서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를 규명하기 위한 시도를 합니다.  

6백만불 가치의 구름상자를 이용해 입자의 궤적을 따라 뽀글뽀글 선이 생기는 것을 촬영하면 몇십억 개가 나옵니다. 이것을 컴퓨터 분석을 통해 몇백만 개로 줄여놓습니다. 이후에는 연구자가 일일이 봐서 분석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1~2개의 입자를 찾기 위한 단순반복작업입니다. 

1970년대 초에 완공된 국립페르미가속기연구소의 Tevatron은 거대한 링입니다. 둘레가 6.4km이고 2000여명을 수용합니다. 인구15만의 소도시의 사용량과 맞먹는 6만 kw의 전기를 소모합니다.  

초거대입자가속기(Superconducting Supercollider,SSC)는 1984년 제안된 둘레 85km의 초전도자석인데 이미 20억불을 쓰고도 의회에서 비용을 감당 못해 계획을 폐기했습니다. 지금도 텍사스에 텅빈 터널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실험기구에 과학자가 예속되게 되어 연구자의 소외가 옵니다. 기계에 맞춰 연구목적, 주제를 잡게 됩니다. 실헌 준비,계획,실시까지 15년이나 걸립니다. 그 사이에 입자가속의 활용방안,특성 년구 등의 기계를 연구하는 것이 되어 기계에 대한 의존성이 증대됩니다.  

<허블 망원경> 

1990년 디스커버리 호가 지구밖 610km 상공 궤도에 진입했습니다. 이는 대기의 방해를 받지 않고 관찰학 위한 목적입니다. 망원경 건조에만 24억불이 소요되었습니다. 매년 운영비용만 2억 7천만 불이 듭니다. 그러나 흐릿하게 보이는 문제가 생겨 한 차례수리까지 했습니다. 차후 태양 궤도에 망원경을 제조해서 띄울 예정입니다.  

#Epilogue# --- 20세기 후반(1970년대 이후) 과학연구 양상의 변화 

상업화가 특징입니다.기업이 이를 주도합니다. 1960년대 정부 투자가 65%(149억 달러)였고 기업이 30%(104억달러)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 지적재산권 관련 법안이 통과된 이후 1995년은 정부가 30%(627억불)였고 기업 65%(1333억불)로 역전되었습니다. 

벨 연구소가 트랜지스터를 발명했을 때 노벨상 수상 정도가 가시적 보상이었지 특허 출원해서 떼돈 버는 것은 예상 못했습니다. 즉 응용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특히 생명공학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별이 없습니다. 기초와 응용 사이 갭이 3~5년, 1~3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오늘날 지식기반산업은 승자독식이 지배합니다. 특허를 따서 시장,표준(standard>를 선점하려 합니다. 따라서 기업들이 기초연구에 투자(특히 대학에)를 시작합니다. 우리 나라도 산학교육진흥법이 통과되어 교수가 기업ceo를 겸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1999년 UC Berkley 대학 식물--미생물학과와 노바티스(신젠타)의 계약을 들 수 있습니다. 5년동안 매년 500만불씩 총 2500만불을 지원하기로 하고 모든 연구성과의 3분의 1을 노바티스가 마음대로 골라서 가져갈 수 있도록 한 계약입니다.  이에 대해 대학연구의 자율성(대학의 존재의의)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비록 이후에 유사한 계약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상업연구의 단면> 

연구결과에 대한 기업의 통제가 행해지는 현실입니다. 예전에는 노벨상 목표로 우선적 개발을 시도하고 이는 과시 목적이 있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논문발표 전에 특허를 먼저 출언하여 지적재산권화하는 돈벌이 전략을 구사합니다. 논문에 게재되면 공개된 지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허락 없이 발표 못하게 하는 비공개계약을 체결하기도 합니다. 특허 출원을 위해 발표를 지연시킵니다. 기업에 불한 결과의 발표를 장기간(5년, 10년씩)지연시키기도 합니다. 수억불의 손해배상 소송의 위협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미국에 이런 케이스가 보고됩니다.이것이 탐사보도기자의 추적에 의해 밝혀지기도 합니다.  

누가 돈을 댔는지에 따라 다른 결론을 도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약 개발시 부작용 실험시에 정부 발주인지 기업 발주인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연구 부정행위(Reserch Misconduct)의 유혹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기만 즉 자기가 보고 싶은 결과만 보는 연구를 하는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자기가 속한 생명공학 회사의 주가 상승을 예상하는 등 돈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자1-----대안 제시 요청 

<답변>  

선생님께서는 1997년에 발족한 시민과학센터에서 근무하고 계십니다. 1990년대 초 학부시절 학과(전자공학)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모색하는 동아리 활동 경력이 있으십니다.  

냉전기의 과학,조사 연구 드라이브에 반발하여 1970년대 과학자 단체가 생겨납니다. 지금에 와서는 과학기술정책 결정과정에 일반 시민이 참여하여 토론하고 심지에 과학연구 방향에도 시민 목소리를 수용하자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어떤 흐름을 만들어 낼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과학상점 모델이 있습니다. 일반 시민의 관심사(보건,환경 등)에 맞춘 연구들을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의 의견을 수용한 선구적 사례가 국내,외국에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의 논의를 가학기술에 접목시킬 필요도 있습니다. 사회편익, 공익적 연구 모색, 실천 동기를 만들어 가는 단계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질문자2-------탈정상과학의 구체적 예를 들어 주세요 

<답변>  

가로축이 불확실성이고 세로축이 위험부담의 크기입니다. 불확실성의 예는 지구대기, 기상학을 들 수 있습니다. 전지구적 평균기온의 추이를 예상함에 불확실성은 커집니다. 지구온난화 미래를 잘못 예측하면 (해수면 상승높이 예측) 다수에게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위험부담의 크기의 예는 실험실에서의 폭발물 연구가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작다면 건물 설계시 하중 설계에 오류(토목공학)가 있어 다리가 무너지게 되는 큰 위험부담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에측 못하고 결과가 거대한 경우 즉 불확실성이 크고 위험부담도 큰 경우를 탈정상과학이라 하여 과학자들에게 책임을 전적으로 지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의 입론입니다. 라베트, 폰츠의 얘기처럼 노름판 판돈 커질수록 결과의 위험부담 큰 것입니다. 지구온난화 대응 같은 문제는 결정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권한을 이양하여 공개적,개방적,민주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담론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질문자3----대중들이 과학을 고마워하는 단계에서 맹신단계로 나아갔다가 지금은 불신,무관심,냉담,냉소를 보이는 단계라고 생각하는데 관계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답변> 

이 역할은 언론이 맡아줘야 합니다. 즉 언론 통한 정보 전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언론보도의 문제점은 널뛰기식이라는 것입니다(한껏 띄워주다가 가시적 성과 없자 사기다,뻥이다 라는 식으로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가는 극단적 보도 자세). 예를 들어 줄기세포 실용화의 장미빛 미래 얘기하다가 5~10년 동안 결과가 안 나오면 급실망해서 무용론 제기하는 논조는 연구의 가능성 말살(연구비 지원 끊김)하는 역기능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언론이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는 양비론을 전개하는 태도도 문제입니다. 

Informed Citizen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소통될 계기,기회가 있어야 과학과 대중의 관게가 쌍방향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기 작성자의 강연 코멘트&& 

`야누스의 과학`이라는 책 제목에 걸맞는 강의였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門의 신 야누스가 문의 앞뒤를 알 수 없는 양면성을 가진 것처럼 오늘의 과학도 그 발전 과정에서의 20세기 전과 후의 명료한 대조, 과학의 유용성을 가치지향적으로 접근하게 될 때의 과학기술(핵과학,캄퓨터,인터넷,우주개발,생명공학)에 도전하는 새로운 문제(지구온난화,원자폭탄,유전자변이,환경호르몬)에 대한 과학기술의 새로운 지향점의 모색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로도 접근할 수 있으리라 본다. 

시간과 장소 제약상 오늘의 강의는 몇 가지 주제에 한정되었으나 바라보는 관점을 배웠으니 나머지 챕터는 `야누스의 과학`을 읽으면 이해될 것으로 본다. 김명진 선생님과, 좋은 자리를 기획해 주신 사계절 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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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연극. 진지한 생각과 신화, 그리고 인간의 본성, 갈등, 화해가 어울어진 멋진 연극.
적극 추천작. (피터 쉐퍼의 작품, 구태환 연출)

cast: 정동환 (에드워드 담슨), 서이숙 (헬렌 담슨), 박윤희 (필립 담슨)
 

<고곤의 선물>을 보고 나서 너무나 많은 감정과 많은 생각들이 마음 속에 가득차 정리가 안된다. 수많은 말들이 연결되면서도 흩어져 그 희곡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 답이 없는 궁금증을 그저 써 볼 뿐. 연극을 보지 않은 사람은 읽기 힘든 단상들.

하나. 예습없어도 그 자체로 충분한 연극.
어려운 연극이란 말을 들었다. 예습이 필요하다고. 연극이 담은 모든 내용을 다 파악하려고 한다면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런 사전 지식없더라도 담슨 부부의 대화를 통해, 연극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100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서 놀람, 슬픔, 고민이란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마음의 감동. 배우의 열연이 주는 감동과 연극의 치밀한 짜임새에 대한 감탄, 신화의 무대위의 구현이 주는 경이로움.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둘. 무대위로 끌어올린 현실과 신화.
<고곤의 선물>에서 연출은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데나와 함께 등장하는, 온 몸에 하얀 분칠을 한 존재들. 그 흰색이 주는 신비로움과 더불어 여러사람들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신의 목소리. 경건함이 객석에 퍼져나가는데 같은 공간이되 시공을 초월하는 공간이 창조되는 순간은 정말 멋졌다. 커튼콜 때 이들의 절도있는 인사 역시 가장 적절한 방식의 답례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공간의 활용, 조명의 활용도 너무 훌륭했다.

셋. 배우의 열연.
TV에서 보던, 중견배우 중 가장 좋아하는 정동환씨. 무대에는 정동환씨가 아닌 광기어린 천재가 내면의 분노, 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날뛰고 있었다. 아내에게, 아데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거절하는,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느끼며 정의롭지 못한 것은 피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믿는 천재 극작가. 또 한 편에는, 광기어린 천재를 사랑하며 그를 어둠에서 구해주고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똑똑한 아가씨, 서이숙씨가 있었다. 극을 주도하는 화자이자, 에드워드의 아내로, 신화 속의 아데나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그녀는 하나의 공간을 여러 공간으로 나누며 다양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시키고 있었다.

넷. 고곤의 선물은 무엇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진실?
아데나는 메두사를 죽이려는 페르세우스에게 방패 등 (비루한 기억력이여 --;;;) 선물을 준다. (페르세우스는 에드워드이며, 아데나는 헬렌) 그 댓가로 메두사를 죽여 방패위에 올려놓으라고 한다. 방패는 정의를 비추는 거울이요, 그 방패만을 통해서 메두사를 봐야 돌로 변하지 않고 죽일 수 있지만, 다시 들리는 아데나는 그 방패가 아닌 직접 두 눈으로 메두사를 보라 명하지만 페르세우스는 거부한다. 고곤의 선물을 간직한 자는 돌이되리니...라고 울려퍼지는데...ㅠㅠ 일단 고곤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 이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당한 이유없이 사람을 돌로 만드는 고곤, 신의 창조물인 고곤, 파멸과 치유란 두 가지 피를 가진 고곤, 고곤을 내놓지 않고 지닌 자는 돌로 만드는 고곤, 상상력을 메마르게 만드는 고곤.

다섯. 용서받지 못할 죄.
테러리스트에 대한 적개심이 있고 (당연히 메두사는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돌로 만들어 죽게하니, 페르세우스에게 있어서 메두사는 죄없는 사람을 마구 죽이는 테러리스트와 다를 바 없을 듯 하다) 이들을  피. 죽음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믿는 에드워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헬렌.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은 극의 마지막에 헬렌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 발구르기 춤을 추며 기뻐하는 에드워드를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오픈 엔딩 같기도 하다. 용서받지 못할 죄. 신의 창조물을 그 창조물이 심판하여 처형하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일까? 메두사는 사람을 돌로 만들지만 메두사를 뒤덮는 아름다운 비늘, 정결한 모습. 신은 에드워드에게 네가 과연 신의 창조물을 죽일 수 있느냐? 네가 두 눈으로 메두사를 보고서도 죽일 수 있느냐?고 묻는데, 물론 대답은 알 수 없다. 에드워드는 아예 자신의 두 눈으로 뭔가를 보기를 거부했으니.

여섯. 동상이몽.
같은 연극을 봐도 관객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같이 간 친구는 헤어진 남자친구. 며칠 전 미워하는 마음으로 견딜 수 없었다며 자신에게 헬렌의 용서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듣는 순간, 사형제도가 생각났다. 찬반 토론 및 글을 쓸 때면 사형제도에 대해 찬성의사를 표명하곤 했는데..뭔가 나의 마음이 에드워드와 겹쳐졌다. 나도 이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믿고,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내 생각에 헬렌은 뭐라고 했을까?

일곱. 연극은 살아있다. (연극을 보고 감동 받는 이가 이토록 많다)
극작가 에드워드는 말한다. 사람들은 연극이 필요 없다고 하지.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이 그렇게 돌아 선거야. 이 세상에 영원한건 없어. 그들 모두 지금 스크린 속에 홀딱 빠져 있어. 자신의 영혼이 강간당하고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서 말야. 상상력도 없는 일차원적인 어둠의 날개가 온 지상을 뒤 덮고 있어. 

오늘날의 관객은 그저 줄지어 앉아 팔짱인 끼고 보고 있다는 에드워드의 말에, 슬그머니 팔짱끼고 있던 나의 손이 펴지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 

여덟. 영국, 아일랜드, 크롬웰에 대한 지식이 약간 있다면,
테러, 폭력, 복수 등이 에드워드에겐 왜 주요 관심의 대상인지 설명이 됐을 것 같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극 자체에만 집중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 싶다.


보고 온 연극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정리를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뭔가 좋은 연극을 보고 왔다는 느낌이 가득해,
그 자체로 행복하다.
당분간 연극이나 뮤지컬 관람은 쉬어야 겠다. <고곤의 선물>이 주는 여운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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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이자 사업가로 활동중인 홍석천님 (마이타이 대표)가 전하는 성공노하우. 
저서로 "나만의 레스토랑을 디자인하라" 특별강연이 6월22일 서울백병원 인당홀에서 있었다.


보여지는 홍석천과 인간 홍석천.
그가 강연 서두에 얘기한 홍석천 본연의 모습.        

그가 살아온 시간과 경험에비하면 턱없이  짧은시간이었지만, 그의 매력을 느끼긴엔 충분했다 ^^
그리고 사람의 편견은 보는눈을 멀게한다는것도 또한번 느꼈다.
내가 가진 편견속에 얼마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가.


자신의 직업이자 평생 꿈은 액터라고 말하는 그는, 이태원에 3개의 레스토랑과 1개의 바 를 운영.  

책을 낸 후에 두개의 가게를 더 오픈해, 지금은 6개의 가게를 운영중이다.  

최근에 오픈한 디저트카페 "마이 티"는 한국 전통차와, 와플 위 유자청 등을 올려 한국의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고 한다.  

마이차이나,마이타이 등을 운영중이지만 자신이 생겼을 때 한국 음식점을 꼭 오픈하고 싶다고 했다.

타고난자 노력하는자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자 즐기는자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던가.

그는 즐기면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인가? "

" 내가 그 공간안에서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인가? "

끈임없이 묻고 답하며 그는 살아가고 있었다.

항상 배우고 생각하고 관심있는 것에 올인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다.

역지사지를 몸소 실천하고, 명품은 잘 모른다며 항상 절약하는 오너. 

공유하는 즐거움을 아는 열정적인 사람.
  

커밍아웃 이후 우울했던 시간들을 꿈꿔왔던 열정으로 세상에 스스로 다가선.

결국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매우 공감 했다.

 

혼자. 결국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

그래서 서로 공유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아가는것.

행복하기 위해서. 일이든 뭐든. 행복하고 또 행복하자고.

오늘 또 다짐했다.

그의 강연을 통해서.

또 나를 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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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 히트 다섯번 째 이벤트, '로쟈의 인문학'의 로쟈 저자의 강연회
로쟈의 인문학 서재-삶에서의 인문학에 대하여

로쟈라는 필명으로 알라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현우 저자를 지난 2009년 6월 19일,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만나고 왔다. 
 



책에 그려져 있는 로쟈의 얼굴보다는 좀 샤프해 보였다고 하는 게 그날의 인상이었다. 로쟈는 강연 방식을 알라딘 컬쳐에 질문자들이 올려 놓았던 질문을 가지고 답변하는 식으로 강연을 진행해 나갔다.

그는 독서를 할 때 서평의 분량을 고려해서 읽는 다고 하였다. 그래서 깊게 읽으려고 하지 않고 딱 적당히 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블로그에 서평을 할 때는 길게 쓰게 되고 그렇게 길게 쓸 때는 더 많은 책을 읽고 각주도 달고 그런 작업을 한다고 하였다. 이 책,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그의 블로그의 글을 편집한 책이기 때문에 적어도 어느 정도의 긴 흐르믈 담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다.

가령 러시아의 자유에 관한 소재와 지젝에 관한 부분 그리고 철학과 문학의 언어 그 사이에 있는 그의 사유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읽어도 알게 된다. 이런 그가 다른 서평에는 적당히 쓴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책을 많이 읽지는 않는다고 한다. 대신에 많이 본다고 한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읽어도 어디에 쓰일 것인지를 잘 염두해 두고 정독을 한다고 말했다. 정독을 한다는 것은 내가 그의 말을 풀이해 본 것이다. 어디에 쓰일 것인지를 잘 안다는 것은 한 권을 읽더라도 정독을 했다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학교 도서관에서 오십 권을 빌려오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 세 권을 빌려와 한 권의 책도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그는 그 오십삼 권의 책이 각각 어디 어디에 쓰일지를 안다고 말했다. 그게 정독과 관련이 있는 듯 했다.

그는 이 시대의 인문학의 위기가 모든 인문학과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은 한다. 영문학과, 일문학과, 중국학과는 전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얼굴표정을 잘 지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가 러시아 전공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의 책에 태그 속에 국문학 폐지론이 나와 있었기 때문에 국문학의 위기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국문학과를 포함해 모든 인문학과들이 통합 학부제로 하기 때문에 학부서부터 그런 폐지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걸로 답변을 한 듯하다. 물론 내 질문이 자신에게는 무리라고 하였지만 그런 학부제의 문제에서부터 인문학이, 국문학이 위기로 다가온 것이 아니냐는 말로 그는 마무리 한 듯하다. 더 자세한 인터뷰를 듣고 싶으면 다음 링크로 가보시는 것이 좋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와의 대화 3부

나는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가 왜 대중지성인을 자처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했었다. 그것에 대해 그는 이 사회에 많은 지성인이 양극화 되어 중간이 비어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중간의 지성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중간의 지성인이 대중지성인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책머리에 그가 쓴 대목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


" 나는 하녀고 광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중략) 기쁨을 주는 건 나의 몫이 아니라도 말이다.(중략)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당신에게 끼니가 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대단찮은 것이어도 '겸손한 식사' 정도는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것이 그가 말한 대중지성인의 정의라고 생각하며 그날의 강연을 마무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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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의 인문학 서재-대중지성인, 이현우 저자를 만나고 오다
    from # 간이역, 꿈꾸는 식물 2009-06-23 13:34 
    십만 히트 다섯번 째 이벤트, '로쟈의 인문학'의 로쟈 저자의 강연회 로쟈의 인문학 서재-삶에서의 인문학에 대하여 로쟈라는 필명으로 알라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현우 저자를 지난 2009년 6월 19일,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만나고 왔다. 책에 그려져 있는 로쟈의 얼굴보다는 좀 샤프해 보였다고 하는 게 그날의 인상이었다. 로쟈는 강연 방식을 알라딘 컬쳐에 질문자들이 올려 놓았던 질문을 가지고 답변하는 식으로 강연을 진행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