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생문]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인간'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스치듯 보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굳이 들여다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서 목격자의 진술을 중시한다.
그것은 본다는 행위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내가 봤어, 내가 들었어"라는 문장을 동원해 자신의 이야기에 신뢰성을 부여한다.
나아가 여기엔 목격자보다 더 신뢰성을 확보했다 인정받을 수 있는 직접 체험자들의 진술이 있다.
신뢰성의 우위를 가르기 힘든 각기 다른 진술에서 그 진위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며,
이들은 왜 같은 사건을 다르게 말하고 있는가,
그 의도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보는 이들은 인간의 본성을 마주하게 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동명의 영화 [라쇼몽/나생문]이 워낙에 유명해서 영화는 물론 그 원작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나생문]과 [덤불 속/숲속]을 예전에 봤던 터라 내용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단 이 서사를 무대에 어떻게 올렸을까가 더 큰 관심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코드로 작용하는 줄기차게 내리는 비와 그들만의 비밀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장소인 숲, 그리고 능욕과 살인이라는 조금은 버거운 표현들을 무대라는 제약된 공간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표현할지가 무척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족과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소설과 영화와 연극으로 재탄생에 재탄생을 거듭한 이 작품은 장르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개의 사건과 서로 다른 시선이라는 중요한 모티프는 일관될지 모르나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주제는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큰 작품이다.
물론 이 부분을 개인적으론 높이 평가한다.
보는 이, 그것이 독자이든 관객이든 그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야말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러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사건과 각자의 서로 다른 진술을 담백하게 서술하는 기법을 썼다면
영화는 이야기의 중심, 즉 사건 중심의 서사엔 [덤불 속]을 배치하고 앞 뒤로 이 모호한 이야기에 부가적 설명의 역할을 담당하는 [나생문]을 배치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조금은 쉽게 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반면 무대에 올려진 [나생문]은 큰 틀은 영화와 같지만 자칫 무거운 주제가 객석을 괴롭힐 거라는 조바심이 났는지 이곳저곳에 코믹적 요소들을 끌어온 흔적이 역력했다.
어쩌면 이것은 연극만의 장점일 수도 있고 아쉬움일 수도 있겠다.
장르마다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장르가 달라짐과 동시에 주제도 다르게 다가오는, 더 많은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이왕이면 소설과 영화 연극 모두를 경험해보길 권한다.
우리가 나무꾼과 무사, 무사의 아내, 그리고 산적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듯이 말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장르의 [나생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작품이 갖는 진가는 훨씬 높아진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주제와 일맥상통하게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들 역시 하나의 공연을 목격하고도 수많은 다른 형태의 감상을 갖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느끼며 극장을 나섰다는 점이다.
이번 관람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나생문]을 경험할 수 있었고 오랜만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보다 깊고 또 많은 '생각'이라는 행위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람기회를 준 문화초대석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