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8 아빠 어디가

주말마다 아침 저녁으로 보여주는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또는 연예인들이 옆집에 놀러가듯이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고급진 음식을 먹으며 마치 그런 삶이 모든 사람들의 당연하고도 평범한 일상인 것처럼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어떤 부모들에게는 재밌고 좋은 정보를 주는 유용한 프로그램일 것이다. 부모들은 우리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줘야지 다짐하며 주말마다 좋은 곳으로 아이를 데려갈 것이다. 마음껏 보고 마음껏 좋은 것들을 누리렴, 나는 네게 뭐든지 다 해 줄께

그런데 실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는 부모들이 더 많을 것이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친구들을 보며, 난 왜 침대가 없지?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작아, 아빠? 왜 우리 엄마 아빤 맨날 짜증만 내지? 쟤네 엄마 아빠들은 안 그렇잖아, 왜 우리는 저런 데 안 가? 나도 저런 거 해보고 싶어요. 우리도 저런 데서 살아요, 네? 엄마. 아마 속으로 이런 마음 드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철 없는 아이 때문에 시달리다가 부지중에 짜증을 내버리고 금방 미안해지는 부모도 더러 있을 것이다 .

#9.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대다수의 관객들이 벤이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시종 종수의 시선을 따라 종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기 때문이다.

관객이 종수의 자위, 무력감, 열패감, 알 수 없는 분노, 집착을 보면서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동질감이나 연민을 느끼는 것은, 종수가 처한 삶의 조건들, 그의 내면,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정보들이 관객의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뉴스에 매일 등장하는 나쁜 사람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나. 우리가 아는 것은 뉴스 공급자가 보여주고 싶은 것, 남들에게 전해들은 소문뿐이다.)

[ 하루키는 소설가에 대해서 말하길, 소설가란 "어떤 물건이나 일에 대해 판단"을 '유보'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반면 해미나 벤의 내면상태는 관객에게 보여지지 않는다. 표정이나 발화된 말 외에는 관객이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때문에 해미나 벤에 대해서는 그저 종수의 눈에 보이는 대로, 혹은 관객 자신들이 각자 보고 싶은 대로(고정관념으로) 그 사람을 보게 된다.

사실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자신이 본 '선악'이 (망상이 아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 모든 것은 여러 해석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처음 해미의 방에서 종수가 보는 햇빛을 로맨틱한 코드로 읽던데 사실 그건 빛일 수도 아닐 수도 있죠. 거기서부터 수수께끼는 시작된 겁니다.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거죠. (이창동)]


#10 아무도 알지 못한다

종수의 상황에서는 ㅡ> 벤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악으로 보여지고) ㅡ> 일련의 상황들은 꼭 그가 범인인 것처럼, 일어난다.

여기서 만약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본다면
세 주인공은 모두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봤을 법한, 그저 평범하고 매우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예컨대 (마녀사냥, 미우새에 나왔던)허지웅과 벤의 삶이 많이 다른가. 자신만의 독특한 취미, 결백증, 깨끗한 집에서 혼자 사는 것도, 많이 배운 듯하고 책을 좋아하는 것도, 직장이 아닌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것도, 외제차를 타는 것도 비슷하다.

TV만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의 사생활, 또는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반인들, 또는 우리가 매일 보는 드라마의 주인공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 홍대 같은 곳에 지나가는 행인들 대부분은 벤(또는 해미) 같은 사람들 아닌가.

겨우 스무살 남짓 아이돌 출신 연예인들이 얼마나 넓고 멋진 뷰가 있는 집에서 여유롭고 우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전 국민이 속속들이 매주 보고 있고 다들 알고 있지 않나?

그들은 모두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게 어때서, 이상해? 뭐가 문제지?) 이상하리만치 경계심이 없고 남의 눈치를 보지도, 볼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마치 벤의 세계만이 정상인듯 보이는 세상에서 ㅡ 다들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면 여겼지, 누가 자기가 누리는 것들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여기겠나,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다수의 시청자들은) 실제로는 종수처럼 불안하고 삶에 무력감을 느끼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알 수 없는 분노만 쌓여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것은 벤의 잘못도 아니고, 종수나 해미의 잘못도 아니다. 분명히 뭔가 잘못됐는데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게 돼버린 상황, 아무도 답을 모르고 그 누구도 악인은 아니지만, 속으로는 각자 모멸감과 알 수 없는 분노를 간직한 채 서로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조용히 우연한 계기로 비극이 일어난다. 비극은 누구의 잘못으로 일어난 게 아니다.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수수께끼인 채 우리들은 늘 무심하기만 한 세상 앞에 각자 직면해 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은 작가의 의도대로 연극 속에 등장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죽은 사람이든, 사라진 사람이든, 살아남은 사람이든 그들 모두 나름대로 행복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들처럼 미래가 어떨지 도무지 모르는 채 주어진 배역을 온 힘을 다해 연기하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이렇게 저렇게 계획하고 늘 어딘가를 향해 분노하고 있지만 그렇게 하면 미래가 좋아지는지 나빠질지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요즘 세상의 모습이랄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요즘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생각한다. 세계가 크게 변했다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랄까. 예를 들면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했다. 뭔가 잘못됐으니 그것만 바로 잡히면 바로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게 문제다'라는 것 자체가 모호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게 일종의 세상에 대한 태도나 인식이라고 여겼다. (이창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6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그러나 이 영화의 문제는 그 이상이 없다는 겁니다. 거기엔 새로운 통찰도 없고 기발한 재치도 없습니다. (...) 이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종수의 모습은 해미에 대한 연대 행위라고 하기엔 너무나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그저 자꾸 자기 안으로 틀어박힌 끝에 저지른 자기 만족적인 행위에 가까워 보이죠. 여기서는 어떠한 연대 의식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남겨진 희망 한 조각을 보여 주곤 했던 감독의 장점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요.




ㅡ이창동 감독 장점 사라진 '버닝', 가장 실망스러웠던 건, 오마이뉴스

[권오윤의 더 리뷰] 자존감 떨어진 청춘의 이야기 <버닝>, 이게 최선이었을까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190415]




ㅡ> 


[ 김훈 : 저는 제가 보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을 추구해나가는 것이지요. 사실의 바탕 위에다가 현실을 세워야 하는 거지요. ]


영화감독이 무슨 지구을 구해야 하나. 


그들(김훈, 이창동)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있고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 뿐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이 아는 것만 얘기하면 된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로, 수수께끼인 채로,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7 영화 <버닝>에 대한 오해


["우리 영화에 대한 오해랄까 그런게 있다"고 운을 띄웠다.

"많은 사람이 저를 메시지를 전하는 감독이라고 하는데 전 그런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영화 만드는 걸 좋아하지 않죠. 그저 질문할 뿐입니다.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몫이고요."

"사실 메시지 전하는 영화는 할리우드 오락 영화가 가장 강하죠. '정의는 승리한다' 그런 강렬한 메시지가 우리 삶에 얼만큼 영향을 줄까 의문이에요. '인피니티워'나 '데드풀' 같은 경우는 세상을 슈퍼히어로가 구원해준다는 이야기에요. 정말 슈퍼히어로가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하필이면 세상의 미스터리에 대해 어떤 분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는 '버닝'같은 영화가 그런 영화와 맞붙어서 처절하게 깨지는데 그것 또한 운명이면 운명일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 같은 서사는 지금 대중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할 수 있는데, 그럼 환영받는 서사는 뭔지, 그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건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질문하는 영화가 더 어렵고 불편할 순 있지만, 전 질문은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다고 생각해요. (...)오늘은 낯설게 봐도 다음번에는 받아들일 수 있죠." 

ㅡ (이창동)]


말하자면 <버닝>은 그런 영화다. 

사람들은 서로 아는 것이 다르다. ㅡ> 그렇기 때문에 각자에게 보이는 것이 다르다. 

어린아이가 보는 세상과 부모가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어릴 때와 지금 우리는 얼마나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나.


그런데 점점 모든 사람이 자신이 모르면 그게 바로 '악'이라고 믿는다.


["<버닝>도 역시 질문하는 영화에요. 우리 세상의 미스터리에 대한 질문도 있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까? 서사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인식하고, 있고 없고에 대한 미스터리도 함께 녹아있죠. 

그렇다면 영화 매체가 그래서 뭔가? 등등 답이 아니라 질문이기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이창동)]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난 것을 인정하지 않기, 서로를 존중하기 어렵고 서로가 지독히도 불신하는 사회. 그러니 감독이 권오윤 기자를 설득할 수도 없다. 아무도 타인을 설득할 수 없는 사회,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사회. 이창동이 보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쩌면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주의 : 스포 가득.


#4. 벤은 왜 죽었어야 됐나

["영화 속에서 벤은 윤택하고 관대하며 여유가 있다면, 종수는 가난하고 경계심으로 긴장돼 있다. 그런 상반된 두 가지 삶의 방식과 태도를 통해 세상의 미스터리를 이야기하고 관객들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이창동)]

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경계심도 없고 잘난 척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의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누가 오거나 가거나 그는 어디에서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종수는 그런 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에 있다.("우리 나라엔 개츠비가 참 많아")

벤의 <경계심 없음, 눈치보지 않음>이 죽을 만큼 죄일까? 이효리처럼 방송에서 자신의 사는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연예인들도 살해당해 마땅한 것일까.

마음속으로 내 여자라고 생각했던 여인이 어느 날 다른 남자와 나타났다. 그런데도 종수는 내내 솔직하게 반응하거나 당당하게 자기의 마음을 주장하지 못한다. 이후로 세 사람의 불편한 만남은 계속 이어지지만, 종수는 늘 웃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화하고 그 불편한 자리에서 박차고 떠나질 못한다.

종수가 겉표정과는 달리 줄곧 불편해 했다는 것은 "너는 왜 그렇게 아무데서나 옷을 잘 벗어? 창녀나 그렇게 하는 거야" 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다. 그 이후로 종수는 해미를 보지 못한다.

#5. 노예의 도덕, 주인의 도덕

르상티망은 원한, 유한(遺恨), 복수심을 의미한다. 니체는 주인(귀족)의 도덕을 행하는 강자에 대한 약자(노예)의 감정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과 주인의 도덕을 나눈다. 주인의 도덕이 '좋음'에서 '나쁨'을 끌어내는 자발적이고 자기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노예의 도덕은 상대를 '악'이라 규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스스로를 '선'이라 정의하는 전도적인 성격을 가진다. 즉 약자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함으로써 강자에 대한 반감을 마음속에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있어 '좋음'과 '나쁨'의 구분이 약자의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의미로 전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르상티망 [Ressentiment]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자신의 무능력, 질적이고 유형적인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자극적 대상에게로 전가시킨다. (...) 자신의 무능력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원한의 인간이 행하는 복수는 그것이 실현될 때조차 그 원리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원한의 인간은 존중해야 할 모든 대상을 비난하고 비하할 뿐이다.

원한의 인간은 정면 대결할 힘도 의지도 없다. 무반응한 채 속으로만 상대를 비난하고 비하한다. 정신과 신체의 느슨한 마비상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사랑받기만을 원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제공되고 쓰다듬어지고 잠재워지기를 원한다. 그는 앓아누운 병자다. 기획할 능력, 맞서 싸우고 대결할 능력, 적극적으로 반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핌 받기만을 원한다. 그는 누워서 그저 이득을 취하려고만 한다. 만인에게 민주적으로 골고루 이득이 분배되기를. 그런 점에서 원한의 인간들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 실리의 도덕. 원한의 인간의 관점에서는 모두에게 고루 이득이 되는 것이 바로 도덕이 된다.
(...)
강자와 달리 노예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필수적으로 전제해야만 겨우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 노예는 긍정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부정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쁘다(첫 번째 부정). 나는 너처럼 나쁘지 않다(두 번째 부정). 고로 나는 착하다. 이것이 노예의 기이한 삼단논법임. 노예의 기이한 가치 창조.(...)이 과정 속에서 좋음과 나쁨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판단으로 대체된다. (...) 좋음과 나쁨, 우월함과 저열함이라는 힘들의 성질의 차이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립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ㅡ 니체와 철학 (4), 알라딘 수양 님의 리뷰에서 인용

http://blog.aladin.co.kr/m/be_resolute/9585248#saveBasket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주의 : 스포 가득.



#2 우리는 자기도 자기의 마음을 모른다

종수는 해미를 정말 사랑했을까.
그렇다면 경찰에게 해미를 찾아달라고 했을 것이다. 살해된 것 같다고, 저 사람이 수상하다고 신고했을 것이다.

종수가 벤에게 "해미를 사랑한다구요"라고 말했던 것은 ㅡ어쩌면 자신의 적의가 정당한 분노라고 믿고 싶어서ㅡ 사실인듯 조작된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종수(유아인)와 벤(스티븐 연)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벤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유하게 살고 있고, 제러너스하고 젠틀하기까지 하다. 종수 같은 청년이 꿈꾸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종수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다.(이창동)]

ㅡ> 오히려 벤에게 느낀 위화감, 부러움, 시기, 질투심, 열등감, 알 수 없는 분노, 그러니까 원한- 과도 같은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그를 조종했던 것은 아닐까.

[종수의 눈에 관객이 좀 더 이입이 된다면 조금은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종수는 무슨 글을 쓸까?'라는 질문이 나올 텐데 (이창동)]

ㅡ> 종수의 눈에 벤이 <좋은 사람으로> 보였을까

말하자면 벤이 해미를 죽인 범인이다, 그는 사이코패스다, 연쇄살인마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 각자의 주관적인 <신념>이다. 종수가 확신하며 집착한 의심들은 실은 자신의 망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영화 <버닝>에는 각기 상이한 수 많은 스토리가 존재한다. 만약 현실적인 영화보다 선악의 이분법적인 스토리를 더 선호하는 관객이라면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그것이 현실이든, 종수의 소설에서 구현된 상상이든)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아픔이나 슬픔, 연민, 그런 감각이 없다).

'살인'을 보면서도 오히려 <대리만족>을 느끼며 영화관을 나서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이미 대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3 그것에는 그것이 없다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과 우리가 세상을 이미지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다.
현대인은 미디어로 세상을 이해한다.
손바닥에 스마트폰을 놓고 틈만 나면 뉴스를 검색하고 자신이 사는 모습을 과시하거나 한편으로는 남들의 가십에 탐닉한다. 그런데 방송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남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언론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전해들은 <소문>이다.

선하다고, 또는 악하다고 믿는 것에는 믿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 내가 늘 이 세계에서 느끼는 실감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다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ㅡ> 어디서든 예외없이 자기는 선하다고, 상대는 악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것에는 그것이 없다.

해미는 일곱살 때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종수가 구해줬다고. 종수는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어렸을 때 일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나보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해미의 가족들에게도 물어보고 오래된 마을의 어르신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런 우물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6년 만에 만난 종수의 엄마는 우물이 분명 있었다고 말한다.

누구 말이 사실일까. 누구의 기억이 진실일까.

[난 '버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서 일탈하기도 하지 않나. 그럼에도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는 텅 비어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크린에 빛을 쏘면 형상이 나오지만, 그건 빛이 만드는 환상일 수도 있다. 실제 영화 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닐하우스'처럼 뭔가 형상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아무것도 없다. 농사를 짓고 있을 때는 뭔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비어있지 않나.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이런 속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관객은 이런 것(내 의도)까지는 몰라도 상관없다. 느끼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창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주의 : 스포 가득.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봤다.
(늘 그렇듯 영화평(판단)이 아니라 평소 관심사에 대해서 적어 보겠다.)
#1. 어떻게 타인을 악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관람평들을 보면서 이번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대마초를 피우는 행위가 죽을 만큼 나쁜 짓인가.
물론 종수가 주차장에서 고양이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라든지, 종수가 벤의 집 화장실에서 자신이 해미에게 준 시계를 발견한 것이라든지, 해미가 우는 모습을 보면서 벤은 마치 자신은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장면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은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필요한 정보만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벤이 사이코패스- 살인자- 악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반대의 증거들은 미처 정보로 인식되기도 전에 무시되기 때문이다.
벤에게서 오히려 편견 없음, 관대함, 친절, 나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벤이 종수보다 6살 많다- 상대를 존중해주는 선의, 솔직하고 경계심이 없는 순수한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나.
방금 보름달을 보고 온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달의 전체 모습을 본 것은 아니다. 달의 이면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들은 겉모습만 보고서도 마치 그 사람을, 그 일을 다 안다고 착각하곤 한다.
어떤 때는 반달로, 초승달로 보일 때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달이 정말로 사과 반쪽처럼 샐쭉하게 생긴 것도 아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사람들은 번번히, 쉽게 남에 대해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판단을 하곤 하지 않나.
살인을 하는 모습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장면도, 아니 해미가 왜 사라졌는지, 어떤 사실도 우리는 확인한 적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고양이가 종수에게 왔을 때, 고양이 마음이 어땠는지, 고양이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정말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