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⑨

 

9.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vs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2)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3쪽.

 
   

   비밀로 인해 전전긍긍하느라 황폐해지는 영혼이 있다면, 비밀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영혼이 있다. 내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했다면, 융은 무의식조차 자신의 ‘응원군’으로 삼았다. 무의식의 선연한 존재를 좀더 일찍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융은 무의식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예감했다. 그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스승에게도 좀처럼 이해받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이미 무의식의 ‘또 다른 자아’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에 이미 ‘나 자신과의 불화’와 ‘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불확실성’을 느꼈다고 하니, 이 아이는 조숙하다 못해 조로했던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융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 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길이 6센티미터 정도의 남자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을 잉크로 까맣게 칠하고 필통을 ‘인형의 집’으로 삼았으며 인형 침대까지 만들었다. 인형 옆에는 라인강에서 주워온 매끄러운 검은 돌을 놓아두었다. 소년 융은 앙큼하게도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준비했는데, 말하자면 ‘제1의 인격’이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2의 인격’이 남몰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든 셈이었다. 그 인형이 ‘출입 금지’되어 있는 다락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고독하고 침울해질 때마다 그 인형과 매끄러운 돌을 생각했다.
    ‘현실 속의 나’는 상처받고 아파해도 그의 분신이었던 까만 인형은 든든하게 늘 그 자리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에게 인형과 만나는 일, 인형이 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 인형의 집을 관리하는 일은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자아를 돌보고 가꾸는 ‘혼자만의 제의적 행위’였다. 엄격한 목사였던 융의 아버지가 만약 이 일을 알았다면 노발대발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아이의 인형 놀이는 다분히 밀교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 필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나의 비밀을 발견하여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 나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만,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종종 몰래 꼭대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 나는 미리 어떤 글을 써놓은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필통 속에 넣었다. 그 글은 내가 고안해낸 비밀 문자로 학교 수업시간에 적어둔 것이었다. 그것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는데, 빽빽하게 글을 써서는 돌돌 말아서 그 남자 인형이 보관하고 있도록 그에게 전달되었다. 새로운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보탠다는 것은 항상 엄숙한 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 칼 융, 조성기 역,<기억, 꿈, 사상>, 김영사, 49쪽.

 
   

  소년 융은 ‘비밀 문자’까지 만들어 자신의 소중한 메시지를 인형이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을 치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까만 인형은 그에게 있어 ‘무의식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충만함으로 소년 융은 행복했다. 융의 자신감의 원천이 바로 그 비밀 도서관, 즉 무의식의 각종 정보들로 가득 찬 데이터베이스에서 비롯된 셈이다. 까만 인형은 무의식의 비밀을 물질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 그 까만 인형은 자기 내부의 분열된 자아를 물질화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의식의 장에서 시각화하는 행위였다. 융은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 재활용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버려진 무의식에 불현듯 역습을 당한 내쉬와 달리,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칸막이를 천천히 닦아내어 조금씩 투명해진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무의식의 무늬를 관찰했다.
   게다가 존 내쉬가 초기에 입원했던 미국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여 ‘정상적인 자아’를 되찾게 하는 모범적인 진료방식을 추구했으므로 무의식에서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내려는 탐험 따위는 가능하지 않았다. 융은 무의식의 요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다. 말하자면 융은 좀더 고상한 무의식, 좀더 천박한 무의식, 좀더 추악한 무의식, 좀더 아리따운 무의식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무의식의 총천연색 별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성좌’를 해독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융은 그리하여 카오스로 가득한, 때로는 부끄럽고 경박하며 대면하기도 싫은 무의식마저 자신의 존재를 응원해주는 ‘원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내쉬에게 무의식의 역습이 그가 억압했던 존재들의 때늦은 복수처럼 공포로 다가왔다면, 융의 무의식은 의식의 보살핌과 비호 아래 매번 더 활성화되는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글이 ‘무의식이 구술하는 메시지를 의식이 그저 조용히 받아 적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자신의 무의식이 아니라, 누구도 들으려하지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 것을 혼자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는 고독이었다.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가치 있는 메시지가 타인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 고독은 말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융은 ‘고독의 창조성’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4~625쪽.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들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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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0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꼬마 융의 비밀 인형 놀이, 완전 귀여운데요^^ 약간 으스스하면서도 침울한 천재 소년의 얼굴이 상상 됩니다.ㅋㅋ

amas 2009-10-0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독은 공동체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멋진 고독이 보장되는 곳이 자유로운 공동체가 태어나는 조건이라는 것~! 어쩌면 천재는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한없이 고독한 상태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 그 고독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 사람인 것 같아요.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⑧

 

8.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vs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1)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칼 융, <기억, 꿈, 사상> 중에서

 
   

   어쩌면 해답은 존 내쉬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가 ‘버린’ 것들에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정신분열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안에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구겨 넣을 순 없겠지만, 이 ‘생략’에는 어떤 의도적 배제와 은폐의 냄새가 난다. 헐리우드식 감동의 영웅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 삭제된 부분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대목들이다.
    영화에서 생략된 존 내쉬의 결정적인 라이프 스토리는 그가 자신의 첫번째 아들을 사생아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동성애가 발각되어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추방되었다는 것(당시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는 심각한 금기사항이었다), 아버지께 사생아의 존재를 숨기다 발각되어 ‘당장 그 여자와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지내다가 아버지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것,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동료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봤다는 것, 한국전쟁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했다는 것 등이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중요한 사실들이었으며, 동시에 존 내쉬가 철저히 ‘외면한’ 삶의 진실들이었다. 

   젊은 시절 내쉬는 자신이 ‘천재’라는 점만으로 스스로의 모든 결점을 보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기이한 행동과 무책임한 태도가 스스로의 천재성을 미학적으로 완성해준다고 믿었다. 천재에게는 지극히 유연한 ‘똘레랑스’를 발휘하던 미국대학의 상아탑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모든 괴상한 행동이 용납되던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해고된 사건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랜드에서 내쉬는 미 공군 비밀취급 인가를 받았고 군사기밀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쉬에게 엄청난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동성애 혐의자(?)의 비밀취급 인가를 금지하고 있었다. ‘각종 범죄행위’와 ‘동성애’는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동성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산타모니카 경찰서는 은밀히 함정 단속을 할 정도였다. ‘유인책 경찰’을 써서 공중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쫓아가 유혹한 후 그 남자가 응낙하면 두번째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는 식이었다. 내쉬는 바로 그 산타모니카 경찰들에게 동성애성향을 발각당한다. 그는 ‘공개적 외설죄’로 기소되었다. 내쉬에게 그 ‘발각’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해고’였다. 그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에게도 ‘배제’되거나 ‘외면’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들과의 친밀한 유대를 중시했고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를 즐긴 적도 많았다. 그러한 개인적 취향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의 ‘작고 완전하고 그리하여 안전하던 세계’가 파열되는 첫번째 징후였다. 그는 부모님께 이 사실을 숨겼고 매카시즘의 광풍에 희생당한 MIT 동료의 핑계를 대며 모두가 그 친구 탓이며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둘러댔다. 내쉬의 체포 소식은 프린스턴과 MIT를 비롯해 수학계 전체의 이슈가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처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매카시즘의 열풍으로 이미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직후이기에 ‘호모 공포증’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정상적인’ 사회의 협박에 불응하는 순간 곧바로 사회적 삶이 끝장난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매카시즘이었던 것이다. 이 체포와 해고의 충격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치명적인 ‘증상’으로 나타나 내쉬의 인생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체포와 해고라는 인생 초유의 사건은 내쉬가 발병하기 4년 전에 일어났다. 

   
 

내쉬가 겉보기에는 상처받지 않은 것 같지만, 체포 건은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내쉬는 흔히 초연하고, 야심만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관용적인 상아탑 속에서 살면서, 그는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도록 길들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가 추구한 정서적 유대 관계는 그가 소중하게 여긴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 그의 자유, 그의 경력, 그의 명성, 사회적 성공 등 모든 것을. (……) 단 한 차례의 트라우마보다,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며 누적된 사건들이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처럼 커다란 긴장을 낳는다. (……) 내쉬가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당했던 괴롭힘과 놀림이 그러했듯, 그 체포의 상처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뚜렷하게 드러났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341쪽. 

 
   

   그의 천재성은 그의 모든 인간적 결점을 은폐하고 사회의 질책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보호해주는 심리적 쿠션이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남성들과의 ‘특별한 친밀감’은 그가 지금까지 일구어온 모든 업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매카시즘과 호모포비아가 결합한 미국 사회의 폐쇄성은 ‘천재를 향한 무한한 관용’조차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배제의 논리를 구성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오랫동안 숨겨오던 내연 관계가 가족들에게 들통나고 그의 연인 엘리너가 낳은 아들 존 데이빗 스티어의 존재가 부모님에게 발각된다. 스캔들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존 내쉬의 아버지는 엘리너와의 결혼을 명령했고 내쉬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겐 이미 또 다른 연인 앨리샤가 생겼고 은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 브리커도 있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사이를 오가던 내쉬는, 아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아들의 양육비는 지급할 수 없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엘리너는 양육비만이라도 지급할 것을 요구했지만, 내쉬는 결혼은 못하겠으니 자기 아들을 ‘입양하자’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여 엘리너를 기함시켰다. 급기야 엘리너가 앨리샤와 함께 있는 내쉬의 모습을 발견하여 ‘엘리너 vs 엘리샤’의 대격돌이 벌어지자 내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그 와중에 내쉬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화가 없는 내쉬는 그 소식을 뒤늦게야 접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한다. 아들이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었을 때 떠나는 아버지는 없다. 모든 아버지들은 그렇게 불현듯 아들을 떠난다. 남겨진 아들에게 가족들을 떠맡긴 채, 아들에게 제2의 아버지가 될 것을 말없이 요구하며. 그의 작고 안전한 세계가 파열되는 순간 ‘아버지’라는 존재의 토대마저 사라지자 그는 급격한 공포와 불안을 경험한다. 영화는 존 내쉬의 인생을 미화하기 위해 그의 고뇌와 분열의 계기를 첨삭하거나 윤색했다. 그러나 영화가 삭제해버린 내쉬의 각종 실패와 실수야말로 내쉬의 분열증을 격화시킨 것이었고 내쉬의 내쉬다움을 만들어간 것이었으며 ‘작고 완벽한 나만의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파도와 해일이 몰아치는 진짜 세상’을 깨닫게 한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랜드에서 해고된 이후 격추된 그의 사회적 위상은 그에게 심각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던 ‘필즈 상(수학계의 노벨상)’을 받지 못하자 그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너무 빨리 성공했기에 가장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그토록 원했던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의 교수직도 얻지 못했고 MIT에서도 평판이 안 좋았기 때문에 종신 교수직을 얻지 못했으며 주식투자에서까지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서른 살이 되면서 내쉬는 심각한 인지적 불협화음을 겪게 된다. 당시 그의 행동들은 마치 ‘내가 하나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이 세계는 거짓 세계다. 나는 당신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미션을 떠맡은 신의 사도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뉴욕타임즈> 1면 왼쪽 상단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하기 시작했다. 외계에서 온 불가사의한 권력자들이 <뉴욕타임즈>를 통해 자기와 교신을 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오로지 자기만 보라는 것이기 때문에 암호화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해독할 수 없다. 오직 자기만이 이 세계의 비밀을 공유하도록 허락되었다.  (……) 내쉬는 MIT 캠퍼스에서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들은 자기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은 모두 일정한 패턴을 지녔으며, 또한 비밀 공산당과도 관련이 있다.
 (……) 수학과 우편함에는 이상한 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것은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발신인은 존 내쉬였다. (……) 편지 가운데 주소가 적히지 않은 것도 있었고, 대부분 우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 내쉬가 세계 정부를 구성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정부 구성위원회는 내쉬를 비롯해 수학과의 동료들과 여러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앨버트는 내쉬에게서 아주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직 제의를 거부한다며, 친절한 제의는 고맙지만, 곧 남극의 황제로 부임할 예정이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448~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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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3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계가 깨어지는 순간이 있죠ㅋ 자신의 세계가 깨어져야 진짜 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내쉬는 한층 성숙해지겠군요

eva 2009-10-0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빨리 성공한 사람이 가장 시간에 쫓긴다, 정말 맞는 말인 듯. 매번 자기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때문에 그렇겠죠...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⑦

 

7.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2)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내과 교수에게 그 결정을 알렸을 때 그의 얼굴에서 실망과 놀라움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옛날의 상처, 즉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소외되는 느낌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한층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아니 나 자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놀라고 의아해하며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내가 내과의사로서 출세할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찮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게도 무척 유혹적이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10~11쪽.

 
   

   그 무렵 의학계에서 정신의학은 철저히 버려진 황무지였다. 병원 원장이 환자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 ‘갇혀(?)’ 있어야만 했으며, 정신병원은 나환자 수용소처럼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격리되어 있었다. 의사들도 일반인들처럼 정신의학을 기피했다. 정신병에 드리워진 절망적이고 치명적인 그림자가 정신의학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융은 내과의사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던 상황에서 ‘암흑의 땅’이었던 정신의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스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결정이 갑자기 내려진 계기는, 한 정신의학 교과서 때문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당시 ‘정신의학의 주관성과 불확실성’이 정신질환 자체가 ‘인격의 질병’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융은 ‘인격의 질병’이라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말에서 자신의 두 가지 거대한 관심이 맹렬하게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지는, 가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는 그동안 사방팔방 헤맸지만 찾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 경험의 장’이 형성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융은 정신의학이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겉으로는 제1의 인격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하던 자신의 일상적 자아, 그리고 제1의 인격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못한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격렬한 탐구열(제2의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학문적 장이 바로 정신의학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까지 융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는 것조차 부끄러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고, 가난한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융은 자신의 제2의 인격이 관심을 갖는 ‘무의식’의 영역이 매우 ‘비실용적’인 분야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제1의 인격의 활동 영역, 즉 내과의사로서의 길에 만족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의학이 ‘인격의 질병’을 다룬다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에서 융이 ‘계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랫동안 홀로 고민해왔던 문제가 아주 작은 계기에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인격’이라는 인문학적 시선과 ‘질병’이라는 자연과학의 시선이 융에게 있어서는 제2의 인격과 제1의 인격을 표상하는 대리물로 체험되었던 것이 아닐까. 즉 그는 자기 인격의 분열을 오랫동안 감지하고 있었고 그 분열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았기 때문에 미세한 자극에도 곧바로 폭발해버릴, 욕망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융의 자서전을 휘감는 분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자아로 분열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 아마 융과 내쉬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 부근에서 발원할 것이다. 내쉬의 분열이 무의식과 의식의 단절로 인해 심화된 것이라면 융의 분열은 자신의 분열을 ‘정상성’의 일부로 인정했다. 융은 무의식의 잠재성을 최대한 의식의 활동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며, 의식의 시선으로 무의식의 활동을 최대한 가까이서 관찰하려 하는 태도가 정신의학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융의 경우는 오히려 자기 내부의 분열을 즐겼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로 규정한 까닭도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을 ‘의식’의 프리즘으로 생생히 복원해내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은 까닭이었다. 내쉬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필요 없는 정보’로 두뇌  활동을 철저히 구별하면서 의식의 ‘체’에 걸러지지 않은 잔여물을 관찰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했다면, 융은 ‘체’를 치는 행위 자체가 의식의 활동임을, 우리는 매 순간 의식의 검열로 무의식의 활동을 철저히 감시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융은 의식의 ‘체’에서 떨어진 고운 밀가루뿐 아니라 체를 빠져나가지 못한, 즉 의식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자신의 버려진 무의식을 ‘꿈’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나만의 비정상성’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으로까지 스스로의 이론을 밀어붙였다. 

   내쉬에게 정신분열이 무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천재의 자기파멸적 결과였다면, 융은 자신의 분열조차 ‘정상성’의 징후로 판독하면서 그 분열의 힘을 오히려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긍정적 성과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즉 융은 무의식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무의식에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까지도, 자신의 일부로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무의식의 각종 공격으로부터 일종의 심리적 항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되었다. 그에게 환자들은 ‘정상인과 뭔가 다른 비정상인’이 아니라 정상인의 비정상성과 비정상인의 정상성을 역설적으로 확인케 해주는 ‘우리 안의 타자’였다.
    정상인이 자신의 비정상성을 최대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방어하는 것에 비해 ‘비정상인’으로 분류되는 정신질환자들은 오히려 비정상 가운데 내재한 정상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융은 환자들의 각종 증상을 인류의 ‘정상성’의 발현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환자들로부터 항상 ‘인류의 무의식’에 관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융은 인류의 역사와 신화 연구를 통해 정신 분열의 징후를 ‘집단적 신화’의 차원에서 해석하여 ‘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내려 했고, 현실 속에서는 임상 경험과 사례를 통해 ‘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 가고 있었다.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융의 핵심적인 개념도 이러한 종횡무진의 사례 분석에서 나온 열매였다.
    융은 정신병에서 미지의 섬뜩한 무엇, 새롭고 특이한 무언가를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을 발견했다. 융은 자기 자신을 질병의 ‘판단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질병을 판단하는 순간 그는 의사의 권위를 덧씌워 환자의 질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융은 환자가 연출하고 있는 무의식의 연극 속에서 그 자신을 한 명의 배우로 참여시키고자 노력했다. 모두가 무의식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무의식의 ‘추악함’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할 때, 융은 환자들의 총천연색 ‘망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융에게 무의식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 


   
 

어떤 환자는 제수이트에게 박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환자는 유대인이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고 믿고 있으며, 제3의 환자는 경관이 자기를 뒤쫓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환상의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낳고 이를테면 그냥 일반적으로 ‘피해망상’이라는 식으로 말해버렸다. (……) 프로이트가 1909년 취리히로 나를 방문했을 때 나는 바베트의 사례를 그에게 제시했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추한 여성과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함께 지내는 일을 참아낼 수가 있었단 말이오?” 나는 좀 멍해져서 프로이트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생각은 결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런 아름다운 망상을 가지고 그토록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주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어떤 의미에서는 친구 같은 노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의 괴기한 헛소리의 혼돈 속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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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RAIN 2009-09-3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의식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니, 죽은 융과 한 번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나의 무의식도 그에게 아름다운 망상의 패턴으로 느껴질까요? ㅋㅋ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⑥

 

6.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1)

   
 

사회적 비교에 의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그들의 성공을 방해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진정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기 방어를 위해 취한 행동은 대부분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 사회적 비교 기준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호작용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앨렌 랭어, 이모영 역, <예술가가 되려면>, 학지사, 2008, 244~5쪽. 

 
   

    존 내쉬의 MIT 재직 시절, 칠판에는 이런 낙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존 내쉬를 미워하는 날!” 존 내쉬는 학생들에게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고 ‘나 몰라라’한다는 소문에 휩싸였고, ‘좋은 스승’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았다. 그의 수업은 바람직한 교육이라기보다는 도박성 짙은 게임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쉬는 스티븐슨과 이이젠하워의 대통령 선거전을 놓고 학생들과 ‘내기’를 했는데 결국 선거에서 누가 승리해도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고안하여 학생들을 골탕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정하고 친절한 교사만이 좋은 스승은 아니었다. 괴짜 스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학생들이 많아 수강생 수는 날로 줄어들었지만 내쉬의 존재 자체가 학생들에게 빛나는 영감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MIT 신입생 시절 존에게 수학을 배웠던 하버드 대학교수 배리 마주르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들려준 수학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을 때면 시간이 영원히 멈춘 듯 느껴졌지요.” 

   
 

해결되지 않은 고전적인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내쉬가 즐겨 사용한 수법이었다. 로버트 오만은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에게 π가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어요. 그건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중에 학과장에서 질책을 당한 내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려운 문제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그 문제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255쪽. 

 
   

    ‘풀 수 있는 것’과 ‘풀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사고의 경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미해결 난제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을 때마다 존이 내세운 변명은 그런 논리였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내쉬 자신을 향한 메시지였다. 그는 ‘난제’가 발견될 때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참고문헌부터 뒤지는 보통 연구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어떤 위대한 참고문헌보다 자신의 두뇌를 믿었다. 그는 모두가 포기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난제와 만날 때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 문제에 매달리는 뚝심으로 유명했다. 그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놀라운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내쉬는 스스로의 업적을 유치하게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고, 주변 사람들을 대놓고 깔보곤 했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눈감아주었다. 그의 동료 도널드 스펜서는 내쉬가 신변 잡담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어떤 순간에도 칭얼거리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스스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쉬는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구 테마는 누가 정해준 주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남이 주제를 정해준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더없이 독창적이었어요.”

   내쉬가 문제를 발견하는 수단은 바로 ‘적들’을 통해서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천재성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적이었으므로 주로 ‘친밀한 적’은 그의 동료들이었다.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MIT에서 재직하던 동안 만났던 수많은 천재 소년들,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일하는 동안 만났던 수많은 동료들은 각각 그들의 고향에서는 유일무이한 천재들이었다. 적의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았던 존 내쉬는 자신을 자극하는 동료를 만날 때마다 더욱 ‘업그레이드’되는 스타일이었다. 수없이 동료들과 불화하고 유치찬란한 말싸움과 도를 넘는 경쟁으로 말썽을 일으킨 내쉬. 그러나 바로 그 떠들썩한 경쟁과 쓸데없는 말다툼이야말로 존 내쉬의 ‘자가 학습 장치’였다.
    “자네가 그토록 우수하다면, 다양체 매장 문제를 직접 풀어보지 그래?”라는 동료 앰브로스의 비난 섞인 야유와 농담은 내쉬의 승부 근성을 자극했다. 내쉬 못지않게 경쟁심이 강했던 동료 앰브로스와의 유치한 ‘내기’ 덕분에, 리만이 제기한 이래 풀리지 않고 있던 악명 높은 문제를, 누구도 20대의 풋내기 수학 강사가 풀 것이라는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내쉬는 풀어버리기도 했다.

   해답의 발견보다 문제의 발견이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제도 교육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를 풀라’고 가르치지 ‘네가 중요하다고 믿는 문제를 내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의 물꼬를 비틀어 역사의 물길 자체를 바꾼 사람들의 공통점, 그것은 바로 ‘문제 자체를 창조하는 능력’이었다. 주어진 문제를 빠른 시간 안에 풀어내는 ‘영재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일견 매우 단순해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사유의 극한까지 스스로를 몰아쳐가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문제의 가치를 뒤바꿔버리거나(중요하지 않았던 문제를 중요하게 만들기), 아니면 문제 자체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또한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은 한 개인의 인생을 쥐락펴락하는 결정적 사안이기도 하다.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바칠 화두를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존 내쉬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던 논문은 그가 겨우 스물두 살 때 작성한 27페이지짜리 짧은 박사논문이었다. 처음에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의 아이디어는 너무 단순해서 학자들의 눈에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너무 협소한 테마라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 이론의 가치는 너무 명백해서 내쉬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내쉬 균형의 엄청난 영향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전략적 게임과 관련된 내쉬 균형 개념은 사회과학뿐 아니라 생물학에서조차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뉴 팔그레이브>는 내쉬 이론의 가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내쉬 균형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주제를 논하는 아주 강력하고 우아한 방법이다. 뉴턴의 천체 역학이 고대인들의 원시적이고 임시적인 방법들을 일거에 대체했던 것에 비견된다.”
    내쉬 이론의 진정한 가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은 그가 30년 이상의 정신분열을 앓고 난 이후, 1990년대가 되어서였다. 내쉬의 노벨상 수상은 한 개인의 ‘인간승리’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기다림’의 승리이기도 했다. 내쉬가 일했던 랜드 코퍼레이션의 경영  관리자였던 존 윌리엄스는 이 ‘기다림의 미학’을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한한 자유’임을 알고 있었고 그 무한한 자유를 위해 필요한 24시간 건물 개방권과 칠판과 커피를 수학자들에게 ‘무한 리필’로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물질화’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윌리엄스는 당시 미국 최고의 수학자였던 폰 노이만에게 거액의 수임료를 제시하면서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우리가 조직 차원에서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귀하의 많은 생각 가운데 그저 면도를 하시며 흘려보내는 것들만 건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시다가 혹시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윌리엄스는 수학자들에게 시간의 자유를 주었고, 다음에는 커피와 칠판을 제공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 있는 것도 생산해내지 못할 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오전 여덟시에서 오후 다섯 시까지만이 아니라 24시간 랜드 건물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수학자들에게 개인 사무실 건물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수학자들에게 개인사무실을 제공했다. 복도에는 여러 곳에 커피대를 마련해 24시간 관리인을 붙여 놓았다. 왜 수학자들에게 그토록 자유를 주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엔지니어와 미 공군 장성을 이해시킨 것도 그였다.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204~205쪽. 

 
   

   인생 전체를 배팅할 만한 문제를 발견하는 천재 자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의 문제풀이를 채근하지 않고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으며 다만 무조건 ‘기다리는’ 주변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 빨리빨리 연구 결과를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결코 ‘향기 나는 아이디어의 전쟁’이 탄생할 수 없다.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문제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연구결과가 ‘실용화’될 수 있다는 보장도 전혀 없다. 영원히 정답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혹시 도중에 그 문제를 풀던 사람이 죽더라도, 그 문제에 도전하는 일 자체가 소중한 일이라는 것. 그것을 깨달은 ‘친구들’이 있을 때 천재의 ‘면벽 수행’도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존 내쉬는 그런 희귀한 행운을 거머쥔 몇 안 되는 천재였다. 인류의 미래를 바꾼 획기적인 발명들은 대부분 ‘위대한 사람들의 비관적인 예측’을 벗어나는, 아이디어 제출시한도 마감시한도 없는 ‘기다림’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달에 가지 못할 것이다.
 - 리 디 포레스트 박사, 진공관 발명자(1957)
  

인간이 원자력을 이용하게 될 가능성은 없다.
 - 로버트 밀리컨,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1923)
 

 컴퓨터는 전 세계를 통틀어 다섯 대 정도 팔릴 것이다.
 - 토머스 왓슨, IBM 설립자(1943)
 

 개인이 가정에 컴퓨터를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 케네스 올센, 디지털 이큅먼트사 설립자 겸 회장(1977)
 

 비행기는 재미있는 장난감이지만 군사적 가치는 전혀 없다.
 - 페르디낭 포쉬 장군, 프랑스 군사 전문가, 제 1차 세계대전 사령관(1911)
 

 6개월 후 텔레비전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곧 매일 밤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에 싫증날 것이다.                   - 대릴 F. 자눅, 20세기 폭스사 회장(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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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 2009-09-2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대한 사람들의 빗나간 예언들 시리즈, 정말 의외의 발언들로 가득하네요 ㅋㅋ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불가능한 것들 투성이였는지.

맨손체조 2009-09-2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제는 한물 간 록큰롤 스타일이군!!!" 비틀즈가 오디션에서 탈락한 후 음반기획자들에게 들었던 말들 중 하나^^*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⑤

 

5. 아곤 :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2)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대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 그러나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위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 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10쪽.

 
   

    융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처음 만났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당시에는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저 멀리 제쳐두었다고. 스물다섯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검증하기에는 자신의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그는 단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1903년 그는 다시 한 번 <꿈의 해석>에 도전한다. 그제야 그 책이 자신의 생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발견한다. 

   3년 동안 이미 그는 프로이트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차원까지 비상하고 있었다. 그는 환자가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되는 단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 시간이 무척 길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한 연상 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때마다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의 원인’에 있어 20대의 융과 50대 후반의 프로이트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치료 과정에서는 신경증의 많은 사례에서 성욕의 문제는 다만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요인들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응, 비극적인 삶의 정황으로 인한 억압, 체면 차리기 등의 문제들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러한 사례들을 프로이트에게 제시했으나, 그는 성욕 외의 다른 요인들은 원인으로 여기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나로서는 자못 불만스러웠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76~7쪽.

 
   

     ‘성(性)’에 대한 시각 차이 이전에 프로이트와 융의 우정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었다. 융이 프로이트 이론에 한창 매력을 느낄 무렵 융은 대학에서 승진하기 위한 논문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프로이트는 학자들의 세계에서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프로이트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학문적 명성을 얻는 데 확실히 불리한 일이었다. 학술회의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복도’에서만 낮은 목소리로 거론될 뿐 전체 회의에서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융의 실험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분명히 일치하고 있었다. 융은 자신에게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내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꼭 프로이트의 언급을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튼’ 나는 프로이트를 알기 훨씬 전부터 나만의 실험을 해왔는걸. 그런데 그 순간, 융은 ‘제2의 인격’의 목소리를 듣는다. 네가 그렇게 프로이트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행세한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거짓 지반 위에 세울 수는 없다. 그때부터 융은 공공연히 프로이트 편에 서서 그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진정한 갈등은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서 일어났다. 프로이트와 융은 열띤 토론을 나누며 열정적으로 ‘아곤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성욕’이라는 문제 앞에만 서면 융은 프로이트의 허둥대는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성에 관해 말할 때 프로이트의 어조는 갑자기 빨라지고 초조해지며 평상시의 신중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다. 융과 프로이트의 우정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한 충격적인 발언은 프로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친애하는 융, 성 이론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는 성 이론을 가지고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보루(堡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열정에 넘쳐서 말했는데,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81쪽.

 
   

   융은 ‘보루’나 ‘교리’ 같은 단어에서 프로이트의 격렬한 불안을 읽어낸다. 교리란 ‘토론’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 인간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갖가지 의심을 단번에 짓밟아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격렬한 토론과 의심과 비판과 질문으로 우정을 쌓아올리고 있었던 두 사람의 ‘아곤(agon)’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었다. ‘성 이론’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고자 한 권력의 충동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교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융에게 있어 충격적인 일탈이었다. 프로이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에 ‘성적 리비도(libido)’가 또 하나의 ‘숨은 신’으로 대체된 느낌이었다. 그 후 프로이트는 자신의 후계자를 융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걸출한 제자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위대한 아버지로 등극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한편, 융은 자신이 그 위대한 후계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지적 독립성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융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거역해야 한다는 고통과 싸우면서 아직 자신이 프로이트에 대항할 만한 이론적 근거를 갖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융은 친구이자 선배이자 아버지였던 프로이트와 갈등하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나가기 시작한다.

   
 

프로이트와 요제프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증상들-히스테리, 통증의 어떤 유형들, 비정상적 행동-이 사실상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런 증상들은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정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어떤 환자는 침을 삼키려고 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킬 수도 있다. 환자는 “그 상황을 삼킬 수 없는” 것이다. 비슷한 심리적 스트레스의 상태에서 두번째 환자는 천식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는 “공기를 편하게 숨 쉴 수 없는” 것이다. 세번째 환자는 특이한 다리 마비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는 걸을 수 없다, 즉 “그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이다. 네번째 환자는 먹을 때 토한다. 어떤 불쾌한 사실을 “소화할 수 없는” 것이다.  


 - 칼 융, 정영목 역, <사람과 상징>, 까치, 1997, 23쪽.

 
   


   우리가 친밀하고 소중했던 누군가와 헤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사실 여기서 비롯된다. 상대방의 어떤 결정적인 부분을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상대방이 건드렸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이 거대한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우리는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를 삼키지 못하고, 그 차이를 천천히 소화시켜 관계의 새로운 차원으로까지 비약하지 못하고, 힘겹게 그 관계를 끝내버리고 만다. 프로이트는 융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마 융과 프로이트가 이런 부분에서 서로를 ‘삼킬 수’ 있었다면, 인류는 정신분석의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리는 역사의 진풍경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잘난 척’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 때문에 아무와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 어려웠던 융. 그는 아무런 임상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온 힘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친구 아닌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융은 그들의 상처와 환각과 고통을 통해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무의식을 천천히 발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환자들과 함께 20세기의 새로운 아곤을, 칼 구스타프 융이 주최하는 아름다운 ‘아테네 학당’을 만들 수 있게 된다.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0.
   젊은 시절 존 내쉬는 자신이 늘 친구들에게 배우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견디고 있는 외로움보다 훨씬 더 격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융은 자신이 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좀더 일찍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존재로부터 가르침을 얻었다. 그에게 프로이트 못지않게 소중한 스승은 바로 그의 ‘기이한’ 환자들이었다.

   
 

한번은 (……) 고용인들의 뺨을 때리는 습관이 있는 명문 귀족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강박신경증에 걸려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습관대로 수석 의사의 뺨을 갈겼다. 그녀의 눈에는 수석 의사도 단지 조금 나은 하인 정도로 보였다. (……) 의사가 좀 당황한 가운데 그녀를 나에게 보냈다. 그녀는 키가 약 180센티미터나 되는 아주 위풍당당한 인물로, 정말이지 누구를 때릴 만도 했다! 그녀가 드디어 나타났고 우리는 무척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그녀에게 좀 불쾌한 내용을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녀가 격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때리려고 위협했다.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은 귀부인입니다. 당신이 먼저 때리십시오. 레이디 퍼스트 아닙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당신을 때릴 겁니다.” 나는 정말 그대로 할 참이었다. 그녀는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여태껏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순간부터 치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환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남성적인 반응이었다. (……) 그녀는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제약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박신경증에 걸린 것이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6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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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09-09-25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흠, 스스로도 좋은 전쟁을 만들 수 있는 거군요. 전 편 읽으면서 좋은 전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는 것이 부러웠는데...

sotkfkd 2009-09-25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곤!

신오리 2009-09-2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마음 속의 아테네 학당을 세우는 것이 저마다의 향기로운 전쟁을 위한 포석이 되겠네요. 에효...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