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vs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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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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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로 인해 전전긍긍하느라 황폐해지는 영혼이 있다면, 비밀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영혼이 있다. 내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했다면, 융은 무의식조차 자신의 ‘응원군’으로 삼았다. 무의식의 선연한 존재를 좀더 일찍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융은 무의식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예감했다. 그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스승에게도 좀처럼 이해받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이미 무의식의 ‘또 다른 자아’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에 이미 ‘나 자신과의 불화’와 ‘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불확실성’을 느꼈다고 하니, 이 아이는 조숙하다 못해 조로했던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융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 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길이 6센티미터 정도의 남자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을 잉크로 까맣게 칠하고 필통을 ‘인형의 집’으로 삼았으며 인형 침대까지 만들었다. 인형 옆에는 라인강에서 주워온 매끄러운 검은 돌을 놓아두었다. 소년 융은 앙큼하게도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준비했는데, 말하자면 ‘제1의 인격’이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2의 인격’이 남몰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든 셈이었다. 그 인형이 ‘출입 금지’되어 있는 다락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고독하고 침울해질 때마다 그 인형과 매끄러운 돌을 생각했다.
‘현실 속의 나’는 상처받고 아파해도 그의 분신이었던 까만 인형은 든든하게 늘 그 자리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에게 인형과 만나는 일, 인형이 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 인형의 집을 관리하는 일은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자아를 돌보고 가꾸는 ‘혼자만의 제의적 행위’였다. 엄격한 목사였던 융의 아버지가 만약 이 일을 알았다면 노발대발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아이의 인형 놀이는 다분히 밀교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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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도 그 필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나의 비밀을 발견하여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 나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만,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종종 몰래 꼭대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 나는 미리 어떤 글을 써놓은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필통 속에 넣었다. 그 글은 내가 고안해낸 비밀 문자로 학교 수업시간에 적어둔 것이었다. 그것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는데, 빽빽하게 글을 써서는 돌돌 말아서 그 남자 인형이 보관하고 있도록 그에게 전달되었다. 새로운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보탠다는 것은 항상 엄숙한 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 칼 융, 조성기 역,<기억, 꿈, 사상>, 김영사,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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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융은 ‘비밀 문자’까지 만들어 자신의 소중한 메시지를 인형이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을 치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까만 인형은 그에게 있어 ‘무의식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충만함으로 소년 융은 행복했다. 융의 자신감의 원천이 바로 그 비밀 도서관, 즉 무의식의 각종 정보들로 가득 찬 데이터베이스에서 비롯된 셈이다. 까만 인형은 무의식의 비밀을 물질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 그 까만 인형은 자기 내부의 분열된 자아를 물질화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의식의 장에서 시각화하는 행위였다. 융은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 재활용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버려진 무의식에 불현듯 역습을 당한 내쉬와 달리,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칸막이를 천천히 닦아내어 조금씩 투명해진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무의식의 무늬를 관찰했다.
게다가 존 내쉬가 초기에 입원했던 미국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여 ‘정상적인 자아’를 되찾게 하는 모범적인 진료방식을 추구했으므로 무의식에서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내려는 탐험 따위는 가능하지 않았다. 융은 무의식의 요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다. 말하자면 융은 좀더 고상한 무의식, 좀더 천박한 무의식, 좀더 추악한 무의식, 좀더 아리따운 무의식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무의식의 총천연색 별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성좌’를 해독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융은 그리하여 카오스로 가득한, 때로는 부끄럽고 경박하며 대면하기도 싫은 무의식마저 자신의 존재를 응원해주는 ‘원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내쉬에게 무의식의 역습이 그가 억압했던 존재들의 때늦은 복수처럼 공포로 다가왔다면, 융의 무의식은 의식의 보살핌과 비호 아래 매번 더 활성화되는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글이 ‘무의식이 구술하는 메시지를 의식이 그저 조용히 받아 적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자신의 무의식이 아니라, 누구도 들으려하지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 것을 혼자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는 고독이었다.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가치 있는 메시지가 타인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 고독은 말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융은 ‘고독의 창조성’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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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4~6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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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들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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