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④

  

4.  크로노스의 시간과 아이온의 시간 (1)

   
 

 시간은 스승이 없는 자의 스승이 될 것이다.
  - 아라비아 속담

 
   

   고스케와 치아키와 마코토. 세 사람은 방과 후 매일 캐치볼을 하고 함께 집에 돌아가는, 그들만의 우정이 창조하는 시간의 리듬을 즐긴다. 마코토의 일과는 크게 세 가지 시간의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의 시간표로 분절되는 기계적 반복의 시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자유로운 유희적 시간,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휴식과 몽상의 일상적 시간. 이 시간의 삼각형은 마코토의 삶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축이었다. ‘타임 리프’의 능력을 이용해 시간의 퍼즐 놀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지금, 마코토는 하루하루가 날아갈 듯 행복하다. 그런데 아무리 기상천외한 타임 리프를 구사한다 할지라도, 아직 마코토의 시간 개념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기계적 시간, 유희적 시간, 일상적 시간으로 구성된 ‘마코토식’ 시간의 모자이크는 여전히 동일한 분류 체계 위에서 작동한다. 

   게다가 마코토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현재’를 바꿔치기할 수 있는 법을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과거’에서 찾는다. 과거를 수정하고 윤색할 수 있다면 현재도 마음에 드는 방향을 향해 자유자재로 ‘리모델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전제로 한 타임 리프라는 점에서, 마코토는 여전히 직선적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유하는 셈이다. 이러한 시간관을 들뢰즈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철저히 ‘현재’를 중심으로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로서 과거는 ‘현재’를 기준으로 앞선 시간일 뿐이며 미래 또한 ‘현재’를 기준으로 나중에 오는 시간에 불과하다. 현재에 종속된 시간의 리듬 속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의 상태’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시간의 변화는 오직 ‘현재’라는 말뚝에 고정된 한계 내에서 진행된다. 

   
 

크로노스의 관점에서 보면, 오로지 현재만이 시간 속에 실존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시간의 세 차원들인 것이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을 채우며, 과거와 미래는 시간 안에서 현재에 상대적인 두 차원이다. (……) 과거와 미래를 흡수하는 보다 큰 현재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279쪽.

 
   


   현재라는 이름의 말뚝으로 고정된 시간 위에서 마코토는 스스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믿는다. 타임 리프는 그녀에게 이 평화로운 시간을 더욱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매력 만점의 놀이기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안의 내밀한 평화는 언제든 외부의 사건으로 인해 깨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불안한 평화다. 고스케가 어떤 수줍은 소녀로부터 사랑 고백을 들은 날, 마코토는 처음으로 지금까지 누려온 평화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스케가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고 치아키가 마코토를 자신의 자전거 뒤에 태운 날, 마코토는 처음으로 ‘현재의 삶’을 향해 자신이 가진 애착을 깨닫는다. 그 애착은 아직은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너무 오래, 너무 강하게 지속된다면 집착이나 소유욕이 될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에 대한 애착의 강화는 ‘아직 오지 않은, 미결정 상태의’ 미래를 현재의 관점에서 현재와 동일한 모습으로 고착시키는 행위이기에.
    고스케가 소녀의 고백을 거절하자, 치아키는 그 좋은 기회를 왜 놓쳤냐고 핀잔을 주고, 마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은 안심이 된다’라고 말한다.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매일매일 ‘셋이서’ 캐치볼을 하는 현재의 일상이 깨질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스케는 여자친구와 지내느라 ‘우정의 삼각형’에서 튕겨 나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평화로운 현재’의 안정성이 깨지게 될 것이니까.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뻔한’ 사건이 생기자, 마코토는 그제야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것들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상실의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상실에 직면했을 때야 존재의 절실함을 깨닫게 되는 우리들. 그런데 고스케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동시에 지금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치아키가 불현듯 마코토를 자전거에 태운 그 순간부터 이 사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을까.  


     마코토: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잘 챙겨주겠지? 
     치아키: 그럴 녀석이지.
    마코토: 그럼 같이 야구 못하잖아.
    치아키: 캐치볼을 야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마코토: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각해서 고스케한테 잔소리 듣고, 공 못 잡는다고 치아키한테 놀림 받고…….
    치아키: 마코토…….
    마코토: 응? 
    치아키: 나랑……. 사귈래?

   마코토는 생각지도 못한 치아키의 고백에 당황한다.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느낌, 고스케의 잔소리와 치아키의 핀잔 속에서 은근히 보호받는 듯한 그 행복한 느낌. 그것은 ‘커플’이라는 성숙한 관계,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와는 거리가 먼,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관계의 기쁨이었다. 마코토는 이 미묘한 우정의 감정을 언제까지나 즐기고 싶었는데, 치아키의 고백은 이 내밀한 평화를 깨뜨리는 직격탄이 되어버린다. 마코토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 앞에 어쩔 줄 모르다가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하여 타임 리프를 요긴하게 써먹기로 한다. 마코토는 치아키가 마음을 고백하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 어떻게든 치아키의 고백을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타임 리프를 한 번 시도해서 우여곡절 끝에 치아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보려 했는데도, 몇 분이 지나자 치아키는 또 다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마코토, 나랑 사귈래?”

   마코토는 어떻게든 치아키의 고백을 ‘무화’시키기 위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천진한 잔머리를 굴려보지만 몇 번이나 그 힘겨운 타임 리프를 반복해도 치아키의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웃음이 멈추지 않는 즐거운 나날들이었는데, 고스케를 좋아한다는 소녀가 생기고 설상가상으로 치아키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마코토는 아직 완전한 ‘여성’도 완전한 ‘어른’도 아닌 아이와 어른의 사이에 있는 존재다. 친구들과 캐치볼을 할 때는 영락없는 선머슴 같고 혼자 샤워를 하며 비누거품놀이를 할 때는 영락없는 어린애 같다. 이미 ‘여성’의 몸으로 다 자란 그녀의 육체와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천진한 표정은 매혹적인 언밸런스 효과를 발휘한다.
    그녀는 무언가 ‘결정된’ 삶을 아직 고민해보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한없이 유유자적하게, 언제까지나 캐치볼을 하면서 셋이서 소풍 나온 기분으로 살고 싶은데. 아, 이렇게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다니, 갑자기 치아키가 미워지는 마코토. 세상에, ‘타임 리프’라는 마법의 지팡이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단 말인가. 마코토는 깨닫는다. 시계 속의 시간이 같다 해도, 똑같은 7월 13일 오후 해질 무렵으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치아키의 고백을 듣기 이전의 마음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치아키는 자신의 고백을 잊을 수 있어도 이미 미래에서 치아키의 고백을 들은 마코토는 그 고백의 이상한 설렘을, 알 수 없는 혼돈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내 영혼에 새겨진 그 고백의 흔적을 깔끔히 도려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타임 리프는 불가능한 걸까.

 

   
 

물리학자 볼츠만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화살은 개별적인 세계들/계(系)들 내에서만, 그리고 이 계들 내에서 규정되는 현재에 관련해서만 유효하다고 말한다. “우주 전체에 있어, 시간의 두 방향은 공간에서처럼 구분할 수 없다. 위도 아래도 없다” (즉, 높이도 깊이도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크로노스와 아이온의 대립을 다시 발견한다. 크로노스는 유일하게 실존하는 현재이며, 현재들이 부분적인 세계들/계들 내에서 이어지는 한에서,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흐름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자신의 두 인도된 차원들로 간주하는 시간이다. 아이온은 추상적인 순간의 무한한 분할 내에서의 과거-미래이며, 언제까지나 현재를 피해가면서 끊임없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분해한다.   


 -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158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ime 2009-10-1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소한 일에 마구 타임 리프를 사용하다 결국 결정적인 일에서는 타임 리프를 사용할 수 없는 마코토의 슬픈 얼굴이 어른거립니다. 갓난아이처럼 엉엉 울던 귀여운 눈물방울.^^

맨손체조 2009-10-12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영혼의 타임 리프는 불가능한 걸까?" 네, 불가능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가능했으면 하는 오후^^*

sotkfkd 2009-10-13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적을 꿈꾸어 보는...... .

도란도란 2009-10-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똑같은 7월13일 오후 해질무렵으로 돌아갈 수 있어도, 고백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뭔가 의미심장합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③

  

3.  ‘내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타임 리프 능력을 갖게 된 마코토처럼 시간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똑같은 시간을 매일 반복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사랑의 블랙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국가대표 에고이스트인 TV 기상 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래이)다. 그는 매년 2월 2일에 개최되는 성촉절(Groundhog Day) 취재를 위해 펜실베니아의 펑추니아 마을을 방문한다. 성촉절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2월 2일에 마못(북미산 다람쥐)이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나 길어진단다. 함께 일하는 PD인 리타(앤디 맥도웰)의 눈에 비친 필은 출세와 성공에만 눈이 먼데다가 공격적인 시니컬함으로 무장하여 타인에게 상습적인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한마디로 ‘비호감’이다. 필은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은 모두 야멸치게 끊어낸다. 늘 그렇듯 형식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떠나려 했던 필은 폭설로 길이 막혀 펑추니아로 되돌아온다.

   성촉절 촬영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낡은 호텔에서 눈을 뜬  필은 어제와 똑같은 라디오 멘트를 듣게 되고, 분명히 성촉절 취재를 마쳤건만 마치 오늘이 축제인 양 부산하게 술렁이는 마을의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그날부터 2월 2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몽이 시작된다. 자신에게만 시간이 반복되는 마법에 걸린 필. 전설처럼, 마못이 자기 그림자를 본 탓일까. 필은 건강진단을 받아보기도 하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보지만 자신의 ‘증상’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어떻게 해도 반복되는 오늘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된 필은 결심한다. “내일이 없다면 어떨까? 내일이 없다면 인과응보가 없어지겠지. 그럼 책임을 안 져도 되니까 아무 짓이나 해도 되겠군! 그렇군, 원하는 건 무엇이나 해도 되는 거야.” 

   성격대로 가장 나쁜 상상만 골라 하는 필. 그는 ‘못된 투명 인간’처럼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어떤 책임도지지 않아도 좋다는 편의주의적 사고에 몸을 맡긴다. 자신에게만 왜 시간이 반복되는지에 대해 어떤 성찰도 시도하지 않는 필. 그는 닥치는 대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말갛게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체중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껏 폭식을 하는가 하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청혼을 하기도 하고, 다음 날을 걱정하지 않으며 초등학교 여자 동창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악한 투명인간 놀이’에도 금방 지쳐버린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리며 왜 그런 날이 반복되지 않고 하필이면 자신이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이 반복되는가를 자문한다.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 시간을 건너뛰는 기상천외한 노하우를 습득하게 된 마코토도 처음에는 변화된 시간 개념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시간 여행의 이점’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마코토는 ‘야호, 타임 리프 짱이야.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승리감에 도취된다. 그녀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시간 여행의 행운은 동생에게 빼앗긴 푸딩을 되찾는 것이었다. 아니, 동생이 냉장고 안의 푸딩을 꺼내먹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운 나빴던 하루를 삭제하고 편집하고 윤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며 좋아한다. 

   다시 시작된 7월 13일. 마코토는 그토록 좋아라 하던 늦잠도 팽개치고 일찍 일어나 부리나케 학교에 나가며 가족과 친구들을 놀래게 만들고, 가정 시간에 했던 실수도 ‘다른 남학생’에게 떠넘기고, 쪽지 시험도 무진장 잘 보며, 평소처럼 야구를 하지 않고 노래방에 가서 절친 치아키와 고스케에게 10시간도 넘는 ‘노래방 런닝타임’을 선사해준다.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하거나 온몸을 던져 곳곳에 충돌하는 행위를 통해 그녀는 타임 리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다. 타임 리프 능력으로 그녀가 고안해낸 가장 ‘즐거운 일’들은 이렇게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바꿔치기하는, 거창한 시 간여행이 아닌 자잘한 시간의 소꿉놀이다. 

   이모를 만나 타임 리프의 이점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마코토의 표정은 도저히 어제, 아니 오늘 죽을 뻔한 사람이 겪었을 법한 천신만고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우에노박물관에서 일하는 이모에게 케이크를 선물하자 이모는 너무 무리한 거 아니냐며 미소 짓는다. “용돈을 다 써도 다시 용돈 받는 날로 돌아가면 되는걸! 그럼 용돈이 다시 원래대로란 말씀! 이젠 시간을 왔다 갔다 내 맘대로! 마음 놓고 늦잠 잘 수 있고 물건을 잃어버려도 찾으러 갈 필요 없고 뷔페도 90분 이상 먹을 수 있어! 맞아, 드라마 놓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내가 녹화해 둘게.” 이모는 귀여운 조카에 대한 애정과 철없는 조카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서린 복잡한 얼굴로 말한다. “다행이네. 별 거 아닌 일에만 타임 리프 능력을 쓰는 듯해서.” 타임 리프 놀이 때문에 매일매일 너무 즐거워서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는 마코토를 보며 이모는 질문한다. “네가 이득을 본 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천방지축 마코토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짓는다. “어? 그럴까? 글쎄? 에이, 설마 없겠지. 있어도 상관없어.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얼마든 되돌릴 수 있으니!”
 
   마코토는 아, 혹시 ‘내 시간이니까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정말 ‘내 시간’이란 있는 걸까.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시간을 연출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지만 조작하면 조작할수록 그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내가 ‘내 시간’이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타인의 시간’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 1분 1초도 완전히 ‘나에게만 귀속된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마코토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짱 신나는’ 타임 리프를 통해 깨닫게 된다. 타자의 시간이 없다면 자아의 시간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시간을 감각하는 것은 ‘시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들과의 얽힘,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사건’을 통해서라는 것을. 그리하여 시간의 단위는 시, 분, 초가 아니라 너와 나의 우정이 탄생하는 사건, 그와 그녀의 사랑이 발효되고 숙성되는 사건, 당신들과 우리들의 인연이 얽혀드는 그 모든 ‘사건’을 통해 정의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그녀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한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계’로는 똑같이 측정되는 시간을 반복하면서 ‘감각’으로는 전혀 다른 시간을 감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녀가 시간을 위한 불굴의 뜀박질을 계속할수록 시간은 그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의에서 멀어지고, 그녀는 매번 달라지는 시간의 변덕스런 얼굴을 낱낱이 관찰하게 된다. 그녀는 시간을 ‘놀이터’ 혹은 ‘장난감’으로만 생각했던 자신의 발상이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닐까 고민한다. 시간은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호’가 아닐까. 알 수 없는 상형문자처럼 우리 앞에 주어진 시간은 어떤 해석의 현미경을, 어떤 창조의 손길을, 어떤 실천의 몸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그러나 마주친 것, 즉 사유의 재료의 필연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사유활동은 단지 자연스러운 가능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유활동은 단 하나의 진정한 창조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생이다. 그런데 이 발생은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 처음의 혼미한 상태, 즉 단지 추상적일 뿐인 가능성들로부터 사유를 벗어나게 하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 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하고 해독하고 전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창조의 형식이다. (……) 우리는 강요당해서, 시간 안에서만 진실을 찾는다. 진실을 찾는 자는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의 기호를 알아채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 한 천재가 다른 천재를 부르듯 예술 작품이 그에게 창조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들을 방출하는 한, 그는 독자이며 청자이다. (……) 언제나 창조는 사유활동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기호에서 출발한다. 예술작품이 기호들을 탄생시키는 만큼 도한 예술 작품은 기호에서 태어난다. 질투에 빠진 남자와 마찬가지로 창조자는 기호를 감시하는 신성한 해석자이며 진실은 그 기호에서 누설된다.  


 - 들뢰즈, 서동욱·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145~146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맨손체조 2009-10-09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간이란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의 인연이 얽혀드는 그 모든 '사건'을 통해 정의 된다!!! 오늘의 숙제네요^^*

to be with you 2009-10-0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 사랑의 블랙홀, 완전 멋진 영화죠. 앤디 맥도웰과 빌 머레이의 뽀송뽀송하던 시절ㅋㅋ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정말 궁합이 잘 맞는 영화 ^^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②

  

2. 어제의 나는 과연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일까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7쪽. 

 
   

    고층빌딩이 조각조각 찢어버려 토막 난 하늘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의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없이 낯설다. 우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가. 하늘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정으로 보이는 공간 구석구석이 문득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칠판에 적힌 글씨에 드리운 석양의 그림자조차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느닷없는 애수를 자아낸다. 인물의 액션과 대사가 그려내는 눈부신 역동성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은 ‘학원물’ 특유의 명랑함이 아니라 애잔한 정적으로 가득하다. 이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은 ‘분명한 현재’를 마치 오래전부터 그리워해오던 머나먼 옛날처럼 ‘노스탤지어의 시간’으로 역전시킨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순간이 0.1초만 지나도 아득한 과거로 사라질 듯한 조바심. 관객은 마코토와 치아키와 고스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는 단 몇 개의 장면만으로 이미 ‘교복을 입고 건들거리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관객이 마코토와 동년배라면 그녀와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이 생생한 현재가 왠지 문득 그리울 것이다. 관객이 마코토보다 더 어리다면 그는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분명 아득한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현재를 그려내지만, 그 선명한 현재를 아련한 과거처럼 못 견디게 그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덜렁이 소녀 마코토가 ‘머피의 법칙’에 제대로 걸려든 어느 날, 7월 13일. 특별한 걱정이나 엄청난 고민 없이 그럭저럭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마코토에게 정말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날이 찾아온다. 아침부터 그토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도 지각을 했으며, 아무런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쪽지 시험을 보질 않나, 가정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해서 불을 낼 뻔하질 않나, 모르는 남자아이와 호되게 부딪쳐 우당탕탕 넘어지질 않나……. 그런데 바로 이날 마코토는 과학실에서 갑자기 넘어져 호두처럼 생긴 신기한 물체를 만나게 된다. 이 호두껍데기가 마코토의 뒤통수 아래서 깨지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같은 날 마코토는 칠판 위에 마치 계시처럼 박혀 있는 문장을 보게 된다. Time waits for no one. 이 문장을 바라보는 말괄량이 소녀 마코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마코토는 친구 유리와 대화를 하며 문과에 갈지 이과에 갈지 고민한다. 아직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문과와 이과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 그토록 어린 나이에 운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그 당혹스런 시간 속으로 우리는 함께 빨려 들어간다. 우리의 뒤꽁무니를 맹렬히 추적하는 시간을 뒤로한 채, 우리는 어느새 이곳까지 흘러 왔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망설이고 주저하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까.

   하루 종일 좌충우돌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이제 집으로 가려는 마코토에게 또 한 번의 끔찍한 ‘머피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기찻길까지 내려오는 급경사 길에서 신나게 질주하던 중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이 순간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 마코토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올라 정지된다. 죽기 직전의 마코토는 생각한다. “오늘이 만약, 오늘이 만약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잊고 있었어. 오늘은 최악의 날이란 걸. 설마 했는데 죽는구나.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일어날걸. 늦잠을 안 잤으면 지각도 안 했을 테고 튀김도 더 잘 튀겼을 거고 어리바리한 남자애한테 부딪히지도 않았을 테지…….”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상하다. 난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벌써 유체이탈에 성공한 것일까.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 아줌마와 꼬마는 아까 사고 나기 직전에 봤던 그 사람들인데. 왜 나는 몇 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일까. 꿈일까. 현실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고민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아줌마의 엄청난 핀잔이 날아온다. “야! 눈을 어디다 달고 다녀! 사과해. 사과하란 말이야!” 마코토는 이모에게 달려가 이 모든 괴상한 정황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며 흥분한다.

   이모는 태연히 웃으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설명한다. “마코토, 그건 타임  리프야.”  “타임 리프?”  “전철에 치일 뻔했다며? 자전거 채 날아가서? 그런데 정신이 들고 보니 사고 나기 직전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게 타임 리프야. 시간이란 건 불가역이거든. 시간은 돌아오지 않잖아. 그러니까 돌아온 건 마코토 너 자신이야. 네가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되돌아온 거야.” 마코토는 마치 이미 겪어본 일을 이야기하듯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이모의 반응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모는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인다. “그렇게 특이한 건 아냐.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니까.”
    마코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이모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한다. “타임 리프는 나한테도 있었는걸?”(알고 보면 마코토의 이모는 원작소설에서 타임 리프를 경험했던 바로 그 소녀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잖아. 그냥 누워만 있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들면 날이 이미 저물었어. 화들짝 놀라지. 내 소중한 일요일은 어디로 간 거지?” 이모는 타임 리프를 마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세련되게 얼버무린다.

   소녀는 이모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며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어제의 나는 정말 오늘의 나인가. 아까 죽을 뻔했던, 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 자신과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 나는 과연 같은 존재인가. 과거가 지나면 현재가 되고 현재가 지나면 미래가 되는 것이 시간의 규칙이 아니었던가. 천만다행으로 죽기 전의 나로 돌아왔지만 아까와 다른 또 다른 시간에 도착한 나는 과연 과거에 있는 걸까, 미래에 있는 걸까. 내가 한 것이 정말 타임 리프가 맞는다면 태어나서 가장 운 나쁜 날이 될 뻔했던 날이 불과 몇 초 사이에 태어나서 가장 신기하고 흥미로운 날로 변한 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과거→현재→미래를 향해 순차적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비논리적으로 공존하는 알 수 없는 시간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그저 쏜살같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고체에서 액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로 승화해버린 듯한 느낌. 그것이 우리가 초능력 없이도 겪는 타임 리프 아닐까. 내 소중한 10대는 어디 간 걸까. 왜 나에겐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이 없는 것일까. 아, 왜 나는 연애의 추억도 없이 이별만 해댄 걸까. 이 모든 지나간 시간에 대한 덧없는 상실의 감정,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박하지만 때늦은 그리움.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초능력 없이도 가능한 영혼의 타임 리프 아닐까.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 ‘어떤 날’의 노래, <오후만 있던 일요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맨손체조 2009-10-0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산한 사무실 창문을 뚫고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 울려퍼지는 듯. 일손을 놓고 갑자기 평온해진 느낌.

meanwhile 2009-10-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는 그 나이로 한 번 돌아가보고 싶어지는 오후입니다. 오후마저 없는 목요일, 꾸벅꾸벅 졸다가 번쩍 깸.^^

냠냠 2009-10-09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드라이아이스처럼 휘리릭 사라져버린 내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가져보지도 못한 걸 상실한 느낌은 왜 이리도 매번 아린지. 쿠울럭~^^

sotkfkd 2009-10-10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떤날, 이병우님 어제 텔레비젼에서 뵜는데요.

어떤 날이 그리운 2009-10-11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병우의 기타와 함께 듣는 오후만 있던 일요일, 소름이 쫙 끼쳤슴다. 넘 좋아서, 흑흑....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①

 

1. 시간의 단위는 무엇일까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336쪽.

 
   

   쏜살같이 달리는 시간의 뒷덜미를 슬쩍 낚아채어, ‘헤이, 그만 좀 달리고 웬만하면 쉬어 가지 그래?’라고 속삭일 것 같은 소녀. 등교시간의 압박과 알람시계의 난리법석만 없다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눈길을 끄는 모든 장소마다 기꺼이 멈춰 요리조리 두리번거릴 것만 같은,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오지랖을 펄럭이는 명랑 소녀 마코토.

 

   ‘차라리 지각을 하는 게 낫겠다!’라는 친구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달콤한 늦잠을 자고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빛의 속도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대는 소녀.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시간을 달린다’라는 표현보다는 ‘시간을 깜빡 잊고 띄엄띄엄 건너뛰는 소녀’, 걸핏하면 시간을 망각하기에 그 어떤 시간의 광풍에도 휘둘리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는 즈음 마코토가 시간의 흐름에 짓눌리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시간의 ‘교환가치’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소녀 마코토는 ‘타임 리프’라는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고 나서도 그 능력을 좀처럼 ‘유용한’ 곳에 쓰지 않는다. 약삭빠른 어른들이라면 주식투자나 로또 당첨이나 경매나 도박 같은 ‘환금성 높은’ 일에 타임 리프 능력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런 엄청난 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마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타임 리프 능력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는 ‘당신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와 비슷한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육체’야 말로 인간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명백한 한계이니까. 천하의 보들레르도 ‘시간의 인식’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황홀한 망상에 빠짐으로써 시, 분, 초로 환원되는 기계적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났던 보들레르. 그는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몽상에 물들어 향기와 빛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방이 ‘악몽의 방’으로 바뀌어버리는 환상을 체험한다. 기계적 시간, 진보적 시간, 직선적 시간이야말로 시인의 소중한 뮤즈를 앗아가는 ‘폭군의 무기’였던 것이다.

   
 

오! 그렇군!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폭군으로 등장했다. 이 무서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모든 시간의 악마적 행렬이 돌아온 것이다.
 (…) 한 초 한 초가 시계추에서 솟아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삶이다. 견디기 힘든, 요지부동의 삶!
 (…) 그렇다! 시간이 지배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채찍질하며 ‘자, 바보야 소리를 질러! 노예놈아, 땀을 흘려! 저주받은 자야, 살아라!’하고 나를 재촉한다.  


 - 보들레르, 윤영애 역, <파리의 우울>, 민음사, 1995, 38쪽.  

 
   

   타임 리퍼(time leaper)와 투명인간은 ‘주체의 책임’을 삭제함으로써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떠올리게 한다. 타임 리프나 투명인간 되기는 신의 권능을 훔치는 일처럼 짜릿하면서도 은밀한 쾌감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엄청난 모범생도 아닌,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소녀인 마코토는 이 눈부신 초능력을 다소 엉뚱한 곳에 사용한다. 노래방 시간을 연장하거나 동생이 푸딩을 꿀꺽 집어삼키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같은, ‘정말 시답잖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능력을 이토록 하찮은 일에 써먹는 소녀의 천진함이야말로 이 소녀에게 ‘타임 리프’라는 위대한 능력이 주어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요소가 아닐까. 그녀는 이토록 사소한 일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낄 줄 아는 무구한 영혼을 지닌 소녀다. 그녀는 시간을 쥐락펴락하여 시간을 지배하고, 시간에 쫓기는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상천외한 능력을 엉뚱한 일에 사용함으로써 ‘심각한 미션’을 ‘우스꽝스러운 놀이’로 역전시킨다. 

   그녀에게 타임 리프는 시간을 권력으로 사용하는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찰흙처럼 주무르고 구부려 저글링을 하는 듯한 ‘놀이의 기술’이다. 이 모든 좌충우돌 속에서 그녀는 디지털시계처럼 순서대로 어김없이 정확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권태의 시간’을 ‘사랑의 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기적의 연출자가 된다.
   이제 치명적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틀어막아버린 소심남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지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언제나 좌충우돌 사고를 치는, 너무도 불안하지만 지극히 사랑스러운 한 소녀의 신개념 오디세이가 시작된다. 그녀는 바뀌어버린 시간의 의미 때문에 수동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면 시간도 변할 수 있다’는 기적을 요리하는, 경이로운 ‘시간의 탈주자’가 된다. 이 멋진 시간 여행의 동반자는 바로 질 들뢰즈이다. 

   
 

음악의 최종 목적으로서, 탈영토화 된 리토르넬로를 생산하고 그것을 우주 안에 풀어놓는 것, 그것은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우주적 힘을 향해 배치를 개방하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소리의 배치에서 음향화 하는 기계로. 음악가의 어린이-되기에서 어린이의 우주적으로-되기. 


 ―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 권혜원 외 역, <천의 고원> 2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자료실, 2000, 131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ove hurts 2009-10-0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시간을 달리는 소녀, 정말 사랑스러운 애니메이션이죠. 두근두근!!

맨손체조 2009-10-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시간을 달리는 소녀>다! 영화가 너무 짧다고 느껴져서, 한참동안 극장에서 나오지 못했던 그 영화를 이 곳에서는 아주 '길게' 읽을 수 있는 건가요. 여울님. 그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그 소녀의 매력과 여울님의 장기인 '작두 탄 구라'가 만나면..... 앗싸, 봉봉!!!

sotkfkd 2009-10-1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들뢰즈, 반갑습니다. 석사논문 때문에 한 때 그와 함께 살았지요.
잘 읽었습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⑩

 

10.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536쪽.  

 
   

   내가 차마 가지 않은 길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인 길이 매끄럽고 탄탄한 도로이며 모두가 걷고 싶어 하는 대로(大路)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길이 생각처럼 평탄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어느 날 문득 그 길 위에 나 혼자 서 있음을 깨달을 때도 있다.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임을.
   내 앞에 분명히 믿음직한 길잡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 접어든 경우, 우리의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분명 그 사람을 믿고 따르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으리라 믿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는 ‘다른 길’을 ‘같은 길’이라 생각하며 걸었던, 서로를 향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했을 때도 그랬다. 융은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가장 깊은 실망을 느껴야 했고, 자신이 ‘아버지를 따르는 아들’이 아니라 아직 아들조차 낳아본 적이 없는‘새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프로이트와 인연을 끊은 후 융은 절망적인 방향상실 상태에 빠진다.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텅 빈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 생의 나침반을 영원히 상실한 듯한 아찔함, 환자들을 돌보다가 스스로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융은 차라리‘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보의 욕망을 떨쳐버린다. 그는 그동안 공부했던 모든 것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때 그는 내면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토록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두자. 융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무의식에 충동에 맡겨버린다.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90쪽.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둔 채 무의식에게 길을 묻자 무의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놀이를 떠올려보라고. 학문과 출세의 길을 거의 동시에 달리고 있었던 30대 후반의 융에게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는 진흙과 벽돌을 오밀조밀하게 쌓아올려 ‘나만의 집’을 만들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부르며 ‘함께 놀자’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융은 깨닫는다. 열한 살 소년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기 위해서는,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그때 그 소년의 놀이를 다시 재연해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벽돌로 집을 지으며 까르르 웃고 있는데, 성인이 된 자신은 인생의 방향타를 잃어 완전히 좌절하고 있음을, 융은 직시한다. 그 소년은 내가 완전히 잃어버린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데, 나만 여기남아 권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융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자 어쩔 수 없는 굴욕감이 덮쳐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호숫가와 물속에서 돌을 찾고 흙을 퍼 나르는 동안 그는 놀이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의식’을 깡그리 잊고 다만 즐겁게 놀이에 몰두한다. 그는 날마다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환자가 찾아오는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열한 살 아이가 되는 시간을 기쁘게 누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느새 ‘길 잃은 나’조차 잊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차마 가지 못한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늦었지만 생생하게 다시 체험하는 ‘혼자만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과 길잡이를 잃어버린 고독과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는 고통을 선뜻 넘어서버린다. 그는 그때부터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아내가 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전쟁이 일어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아이의 놀이’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억압했던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난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이자 학자가 갑자기 모든 연구 활동을 접고 집짓기 놀이에 몰두하는 것은 자칫 어리석은 퇴행이나 부질없는 망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처절한 전투와 망아의 희열을 동시에 경험하는 정신의 리모델링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기념비적인 저작이 탄생했고, 잊을 수 없는 발견이 잇따랐다. 그에게 어린이 되기는 무의식의 내밀한 무늬와 숨결을 올올이 체험하는 내면의 통과의례였다.   

   한편 내쉬는 서른 살 이후 거의 30여 년간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속삭임과 씨름했다.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직 메피스토펠레스만이 창조력의 고갈에 신음하는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빼앗아 가려는 정신병원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자신의 좌절된 무의식과의 힘겨운 조우를 계속했다.
    ‘신의 왼발’을 자처하는 내쉬의 사명감은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교수직도 버리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으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생의 전부였던 수학도 버린 채 정치에 뛰어들어 ‘세계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훌훌 벗어던지면 자신의 무의식이 인도하는 우주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의식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중함과 조심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의식의 광휘에 사로잡히거나 무의식의 난폭 운전에 의식이 희생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은 ‘선악을 넘어서’ 존재하는 거대한 영혼의 마그마다. 무엇으로 부활할지 모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덩어리. 이 무의식을 예술로, 학문으로,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의식의 힘이었다. 그 의식이 ‘통제’로만 기능하면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거꾸로 의식이 무의식에 사로잡히면 광기로 치닫기 쉬웠다.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출렁이면서 의식에 고삐를 놓지 않는 것, 의식의 고삐를 잡은 것조차 잊고 무의식의 창조적 상상력에 몸을 맡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과제는 같았다. 인간 무의식의 극한을 실험하면서 그 무의식의 광휘에 눈멀거나 그 불길에 타버리지 않는 것.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 줌이라도 더 의식의 차원으로 불러내어 창조적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 

   내쉬는 오랫동안 무의식의 광휘에 압도되어 자신의 의식과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극도의 모험을 감행했다. 이혼과 실직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둘째 아들마저 자신처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때로 ‘강제 입원’과 ‘강제 치료’로 인해 증상이 ‘호전’되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내쉬는 안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했다. 그에게 ‘치료’는 우주와 교통하는 듯한 신성한 체험의 행운을 빼앗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무의식의 통찰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의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 그것이 그가 ‘치유’될 때마다 느끼는 고통이었다. 동료들이 그의 ‘명석한 판단력’이 돌아왔다고 안도할 때마다 내쉬는 스스로 ‘타락했다’고 느꼈다. 아직 완전히 정신분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그의 고백은 ‘부분적으로’ 무의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합리적 사고를 할 때, 우주와 개인과의 소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증세가 완화되는 것은 ‘강제된 합리성의 막간극’이라고도 했다.
   정신질환 자체는 고통스러웠지만 내쉬는 일상생활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향유’의 유혹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 향락이 끝나는 것이 곧 ‘치유’였기에, 그는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신비한 기운,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이 박탈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정신의학이 아직 고도로 발달되기 전의 미국 주립정신병원은 거의 ‘모든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의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내쉬 또한 스스로를 끔찍한 실험대상 중의 하나라고 느낄 만했다. 위험천만한 인슐린 요법과 전기 치료는 그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남겼다. 증세가 잠시 호전될 때마다 내쉬는 ‘아름다운 망상’ 대신 ‘참담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투약을 거부했으며 ‘왜 약을 먹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약을 먹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내쉬의 고통을 바라보는 또 다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떠나간 아내 앨리샤. 그녀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내쉬에게로 돌아온 것이 결정적인,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었다. 발병 이후 거의 20년 만에 내쉬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안전과 우정을 되찾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또다시 입원시키려 하자 겁에 질린 내쉬는 이혼한 전처 앨리샤에게 구원요청을 했던 것이다. 앨리샤는 내쉬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며 ‘공격적인 치료’가 진정한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샤는 지난 날 여러 차례 그를 강제 입원시켰던 것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앨리샤는 오갈 데 없는 전남편을, 한때 천재로 명성을 날렸으나 이제 변변한 직업도 없이 옛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다. 고통을 배제하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한사코 도망치다 고통의 올가미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고통과 더불어 살기로 마음먹는다. 태연하게 고통과 동거하기 시작하자 고통은 더 이상 예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다. 30년 이상의 고통스런 견딤의 시간이 지난 후 앨리샤는 내쉬가 치료된 원인을 이렇게 멋지게 해석했다. 그래요. 내 남편은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치유되었지요. 회복의 원인은 구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고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물론 그 고요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많은 동료 수학자들의 우정과 아내의 사랑, 그리고 빛나는 지적 성찰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쉬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이례적으로 수학자에게 노벨경제학상이 돌아갔을 때, ‘정신병자에게 노벨상을 줄 수는 없다’는 편견을 관철한 반대파도 존재했으며, 설사 그에게 노벨상을 준다할지라도 ‘그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과연 내쉬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도 있었다. 내쉬의 평전인 <뷰티풀 마인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로 각색될 때 명장면으로 꼽힌 ‘만년필 세러모니’. 이 장면은 내쉬를 둘러싼 동료들의 우정을 형상화한 멋진 알레고리다. 존경하는 학자에게 자신이 늘 쓰는 만년필을 헌정하는 아름다운 세러모니. 그것은 실제 존 내쉬의 재능을 아끼고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고 몸부림쳐도 끊임없이 미국 대학에 일자리를 주선하고 병원비를 모금해주었던 수많은 동료들의 우정과 기대를 압축한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실제로 노벨상 수상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내쉬가 그 화려한 월계관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전집조차 출간을 거부한 채, 과거의 성공을 뛰어넘는 ‘미래의 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집을 발간한다는 것은 곧 ‘평생의 연구가 완료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기에, 자신의 마지막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였던 것이다. 내쉬는 자신의 최고의 작업이 20대에 이미 완성한 게임이론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나날 동안’ 만들어질 미지의 작업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의 병이 언제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고, 그가 평생 게임이론을 뛰어넘는 연구를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의 드라마틱한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조용히 지속되는 학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정신분열증 환자와 의사들에게 ‘희망의 상징’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희망에 부응하는 달콤한 대답을 준비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노벨상이 ‘발병 이전의 성과’가 아니라 ‘발병 이후, 병을 극복한 후 낸 성과’였다면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과의사들을 향한 강연에서 내쉬는 이렇게 말한다.

   
 

비합리적이었다가 합리성을 회복한다는 것, 정상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그리 멋진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환자 중에 화가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칩시다. 그는 정상적으로 활동합니다. 그것이 진정 치료가 된 것입니까? 그게 정말 구원입니까? 나 또한 모범적인 회복 사례일 수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앞으로 훌륭한 연구를 해내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아쉬워하는 듯,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내가 좀 늙었기는 하지만.  


 -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707쪽.

 
   
   융은 무의식의 속삭임에 한껏 귀 기울이면서도 현실에 발 딛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승의 발판’은 가족과 직업이었다. 의사 면허를 가지고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와 한 여자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가 내면세계의 목소리에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의 무게중심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중심’과 ‘세속적 열망’은 구분되어야 했다. 그는 무의식의 탐험을 좀더 적극적으로 감행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융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숙명에 분노하기도 했고, 상식적인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걸친 ‘마음 만지기’ 끝에 무의식에 대한 어떤 믿음에 다다른다. 우리 안의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고. 그는 열정과 분노에 몸이 달아오르다가도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면 자기 안의 ‘우주적인 고요’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세속적 열망을 되는 대로 다 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만다라 그림을 연구하고 연금술과 신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아프리카 탐험까지 감행하여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탐구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가뿐하게 ‘어린이 되기’ 하는 내면의 통과의례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간이 곧 어린이임을, 어린이처럼 놀며 주사위를 던지고 체스를 두는 것이 바로 시간임을 깨닫는다. 그는 어린이의 놀이에 몸을 맡겨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던 자신의 무한한 잠재성’을 발견한다.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도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 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08쪽. 

 
   
   융은 프로이트라는 거대한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동료를 잃음으로써 세상 전체가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린 듯한 뼈아픈 고독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과의 날카로운 조우를 통해, 말하자면 45년 이상의 학위도 수업도 스승도 교과서도 없는 처절한 독학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무의식을 ‘스승’으로 삼았다. 내쉬 또한 고통스러운 증상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영혼의 불수의근, 즉 무의식을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려도, 끝내 살아남는 내 안의 스승, 내 안의 친구, 내 안의 연인이 있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은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이성은 러닝머신처럼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의식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살아가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랑에 빠질 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될 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때, 영혼의 마지막 기름까지 쥐어짜내어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 사람의 신변에 생길 위협을 미리 감지할 때, 왠지 이곳에서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이사를 할 때, 우리는 무한리필되는 무의식의 연료를 자신도 모르게 마음껏 활용한다. 우리의 영혼은 저마다 아직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노래 가사이며, 아직 지어지지 않은 아름다운 시이며, 아직 그려지지 않은 멋진 그림이며, 아직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미지의 우주 공간이며, 아직 시작되지 않은 세기의 로맨스인 것이다.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오류와 불확실의 길, 그리고 오해의 길이라고 간주된다.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파우스트> 제2부는 문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의 한 고리다. 
 

 -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45~6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맨손체조 2009-10-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 바이 뷰티풀 마인드??? 무한리필되는 여울님의 수다가 기대됩니다^^*

amant 2009-10-0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직 떠나지 못한 여행, 아직 펼쳐보지 못한 꿈, 아직 사랑받지 못한 연인, 아직 먹어보지 못한 최고의 음식....아, 마구 떠오릅니다. ㅋㅎㅎ

love hurts 2009-10-0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히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멋진 문장입니다. 아마도 그 문은 못견디게 궁금하면서도 겁이 나서 열어볼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판도라 상자겠지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