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⑧

   


9.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3)

   
 

 팽팽한 활의 떨리는 활시위여
 달빛에 수런거리는 그대의 마음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의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
 슬픔과 분노에 숨어있는 진실한 마음을 아는 자는  
 숲의 정령 모노노케(원령)들뿐 모노노케들뿐…… 
 

 - <원령공주>의 주제곡 중에서

 
   

   재앙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저주의 촉수에 갇혀 함께 재앙신이 되어버릴 위기에 처한 원령공주. 에보시를 설득하고 원령공주를 구해내려는 아시타카. 아시타카의 충언에 아랑곳 않고 시시신을 기어코 살해하려는 에보시. 그리고 에보시의 군사들과 옷코토누시의 멧돼지들과 들개들. 이 모두가 벌이는 전쟁의 아수라로 숲은 짓밟히고 불탄다. “숲과 마을이 함께 살 수는 없나요?” 아시타카는 만나는 사람마다, 들개마다, 멧돼지마다 붙들고 이렇게 질문하지만 모두들 단호히 ‘No!’를 선언한다.
   아시타카는 계속 ‘넌 도대체 어느 편이냐’라는 질문을 들으며,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의 해법은 이것이다. 너를 구원할 순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것.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운명 앞에 섰을 때, 운명 앞에 거만 떨지 않는 인간의 우직한 정공법이다. 나에겐 너를 구할 엄청난 능력은 없지만, 너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책임을 묵묵히 짊어지겠다는.

   인간들의 총탄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죽어가는 모로는 마지막으로 에보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힘을, ‘들개의 딸’이었던 원령공주를 재앙신으로부터 구하는 데 쓰고 조용히 죽어간다. 모로가 참혹하게 죽어간 자리에서 아시타카가 원령공주를 구하는 동안, 에보시는 시시신을 찾아내 화승총을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다들 잘 봐! 신을 죽이는 건, 바로 이런 거야!” “쏘지 마요! 제발!”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필사적으로 에보시를 말리지만 에보시는 기어이 총을 쏘고 만다.
   시시신의 목을 정조준하여 날려버리는 에보시. 그 순간 아름답고 풍성한 뿔로 무성하던, 시시신의 가녀린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순간, 투명한 비췻빛을 뿜어내는 ‘시시신의 체액’이 숲 전체를 적시기 시작한다. 시간이 멈춘 듯,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의 스토리가 멈춘 듯, 모두가 망연자실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때, 현상금을 타내기 위해 시시신의 목을 노리던 사냥꾼은 재빨리 시시신의 목을 ‘전리품’으로 챙겨 미리 준비한 나무 상자에 담아버린다. 
 


   시시신의 체액이 거대한 숲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와 땅 위를 적시는 듯한, 고통스러운 환각을 느낀다. 대지를 뒤덮은 시시신의 체액에 닿으면 모두 죽는다며 혼비백산하는 사람들.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홍수에 숲의 모든 생물들은 살길을 찾아 숲을 버리고 도망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전쟁’을 멈추고 시시신의 체액을 피해갈 궁리에 바쁘다. 시시신의 체액은 천천히 촉수를 뻗어 자신의 ‘잃어버린 머리’를 찾으려 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를 찾지 못하는 한, 그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액체는 단지 시시신의 체액이나 혈액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참혹한 풍경은, 바로 시시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몸 안에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결코 세상 밖으로 빠져나와서는 안 될 무언가가 빠져나와 속절없이 흘러넘치는 듯한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머리가 잘린 것은 시시신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인간의 딸 원령공주를 키우고 시시신의 신변을 보호했던 들개들의 수장 모로. 이미 몸은 죽어 머리만 남은 들개 모로는 죽어서도 에보시를 향한 원한을 잊지 못해 그녀의 팔을 잘라 버린다. 그의 잘린 머리에 맞아 팔이 잘려버린 에보시는 그제야 광기에서 벗어나 ‘수치심’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엄청난 만행인지를 깨닫게 된다. 숲을 접수하려는 그녀의 야망은 곧 자기 자신뿐 아니라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던 모든 존재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한 에보시를 타타라 마을로 되돌려 보내려는 아시타카를 향해, 그녀 때문에 엄마 모로를 잃은 원령공주는 절규한다.  

    원령공주 : 그 여자 내게 넘겨! 죽여버릴 거야!
    아시타카 : 모로가 복수했어. 이젠 잊어…….
    원령공주 : 싫어! 너도 인간들과 한패야! 그 여자 데리고 썩 꺼져! (아시타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안으려 하자) 오지 마! 인간 따위 질색이야!
    아시타카 : 나도 인간이고 너도 인간이야…….
    원령공주 : 닥쳐! 난 들개야! 저리가!  
    아시타카 : (원령공주를 포옹하며) 미안해……. 막으려고 최선은 다했어.
    원령공주 : (흐느끼는) 이젠 끝이야. 숲은 죽었어.
    아시타카 : 아직 안 끝났어. 우리가 살아 있잖아.   


   이때 시시신의 머리가 움직이며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없어진 머리를 찾는 몸과 없어진 몸을 찾는 머리의 꿈틀거림이 시작된다. “머리가 움직인다! 머리가 몸을 부른다!” “시시신이 머리를 찾으러 왔어요! 이 액체에 닿으면 죽어요! 물에 들어가면 피할 수 있어요!” 아시타카는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시시신의 머리를 찾아 그에게 돌려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사냥꾼은 숲이 파괴되는 광경을 버젓이 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현상금에만 눈이 멀어 시시신의 머리를 내놓지 않는다. 
   “햇빛에 닿으면 저놈은 끝이야! 보라고! 이제 시시신은 죽기 직전에 발광하는 저주의 신일 뿐이야! 해만 뜨면 놈은 끝장이지!” 그러나 시시신의 체액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 원령공주와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잘린 머리를 소중히 감싸 안아 하늘높이 들어올리며, 시시신에게 기도한다. “시시신이시여! 이제 머리를 가져가시오! 부디 진정하시오!” 그 순간 시시신의 목은 몸과 합체되고, 제 머리를 찾은 몸은 거대한 육신을 대지에 뉘이며, 이제야 안식을 찾은 듯 천천히 스러져간다.  
 

   이윽고 시시신이 스러져간 대지 위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숲, 모든 것이 불타버린, 이제는 ‘숲’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대한 폐허 위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식물들이 피어오른다. 시시신을 해묵은 전설의 귀신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수군거린다. “시시신은 싹을 틔우는 신이었나 봐…….” “시시신은 꽃을 피어나게 하는 신이었나 봐…….” 모두가 이 숲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마법처럼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한다. 자신을 겨냥하는 에보시의 화승총 위에까지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렸던 시시신의 넋은 그렇게 아름답게 부활했다. 그는 자신의 온몸을 대지에 공양하여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사력을 다하여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운 숲을 다시 되찾아준 시시신, 총탄에 맞아 머리를 잃고도 잔인한 인간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숲을 되돌려준 시시신의 가없는 사랑 앞에 사람들은 떳떳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원령공주 : 아무리 숲이 살아나도, 이젠 더 이상 시시신의 숲이 아니야……. 시시신은 죽었어.
    아시타카 : 시시신은 죽지 않아……. 시시신은 생명 그 자체거든. 그는 삶과 죽음을 모두 갖고 있지. 내겐 삶을 돌려주셨어. (어느덧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저주의 흉터가 사라지고 분홍빛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원령공주 : 난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 못해.
    아시타카 :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나는 타타라 마을에서. 우리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더 좋은 마을을 세우자.
 


   자신의 종족인 에미시 부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아시타카는 결국 부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이 낯선 공간에서 ‘타인의 꿈’을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자신에게 삶을 돌려준 시시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단지 자기 부족의 안위를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숲을 함께 일으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시타카. 그는 굳이 원령공주를 ‘문명화’시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녀 곁에서, ‘들개의 딸’이라는 그녀의 정체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그녀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 그는 그렇게 그녀를 사랑하기로 한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자신의 미션을 스스로 선택하는, 들개와 인간 사이, 자연과 문명 사이의 그 위험천만한 길을 선택하는 아시타카. 나의 목숨, 나의 가족, 나의 땅, 나의 부족, 나의 삶……. 이 모든 ‘나의’ 소유격에 들러붙은 욕망의 가면을 벗어던졌을 때 아시타카에게는 진정한 ‘몽상의 시간’이 시작될 수 있었다. 

   시시신의 육체가 파열되는 순간. 우리는 시시신의 육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본질을 처음으로 ‘대상’으로서 마주하는 충격을 느낀다. 이 순간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수직적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시계적 시간, 자연과학적 의미의 양적 시간과는 달리 인간이 존재를 시적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몽상의 시간. 바슐라르의 수직적-우주적 시간은 이토록 둔감하고 무신경한 인간에게 우주의 비밀을 잠깐 엿볼 틈을 주는 기적적인 찰나의 순간이다. 이 수직적 시간은 한 인간이 우주로 향할 수 있는 비밀 통로이다. 
   인간들은 숲을 파괴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며, 숲을 파괴함으로써 우주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 순간의 ‘시적 이미지’가 바로 이해되는 그 순간. 아무런 해설자도 필요 없이, 어떤 주석도 어떤 언어도 필요 없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모든 생의 비밀이 곧바로 온몸으로 이해되는 그 순간. 바슐라르는 그 순간을 시적 순간이자 형이상학적 순간이자 우주적 순간이라고 했다. 이토록 작은 인간이 저토록 커다란 우주와 직통으로 통화하는 시간, 운명이 우리의 ‘머리’가 아닌 ‘몸’을 관통하는 순간. 위대한 시인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시적 대상에 가장 어울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형용사’를 마침내 찾았을 때의, 그 섬광 같은 환희의 순간. 

   
 

몽상가는 슬프다는 것이 행복스러우며, 홀로 있고 기다린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구석 속에서 그는, 열정의 정상에서는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한다. (……) 그는 곧 세계는 명사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형용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259~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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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1-05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리하게 연마한 칼날, 그 아름다운 칼끝을 닮은 그대의 옆얼굴....원령공주 주제곡 가사 정말 아름답네요...바슐라르의 '순간의 시학'과 딱 어울리는^^

doingnow 2009-11-0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끔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거나 아니면 아무생각하지 않고 어떤일들을 잊고 싶을 때 미야자키하야오의 이야기들을 보고싶어지는 것은 바로 이것때문인듯 싶습니당..
그가 그려낸 이야기들이 너무나 몽상적이고 또 아름다워서 이야기의 모든 순간들을 느낌으로 기억하게 하거든요..^^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⑧

   


8.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2)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ego)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117쪽.

 
   

   아시타카에게 ‘관통할 수 없는 벽’은 바로 인간도 들개도 아닌 원령공주였다. 그러나 아시타카도 원령공주의 강철 방어벽 못지않은 힘으로 돌진하는, ‘멈출 수 없는 총알’이었다. 아시타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맞섬으로써 통과의례의 마지막 장벽을, 이제껏 그를 가로막고 있던 영혼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족의 멸망’이었고 ‘자신의 죽음’이었지만, 이제 아시타카는 원령공주가 맞닥뜨린 더 커다란 두려움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조차 잊어버렸다. 이제 아시타카에게는 최후의 선택이 남았다. 

   높다란 절벽 위에서 장엄한 숲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고뇌에 잠겨 있는 아시타카에게, 모로는 말한다. “고통스럽나? 거기서 뛰어내리면 간단히 끝날 게야. 몸이 회복되면 네 몸의 상처도 함께 날뛸 테니까.” 아시타카는 이미 자신의 ‘작은 상처’ 따윈 잊은 말투로 말한다. “아름다운 숲이군요.” 이제야 몽상의 여유가 생긴 아시타카는 이 숲이 잃어버리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전쟁터로 초토화해버리기엔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숨을 건 통과의례를 겪고 있는 아시타카는 자기 부족의 삶만 걱정해도 충분히 바쁜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타자의 삶, 다른 동물과 다른 숲과 다른 세계의 삶을 사유하게 된다. 
 


   자신의 몸에 총탄을 박은 에보시를, 숲을 초토화시킨 원흉인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모로에게 아시타카는 애원하듯이 말한다. “모로, ‘산’(원령공주)을 놓아줘요. 그 애는 인간이잖아요.” 모로는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인간 소녀를 키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 애는 우리 일족의 딸이다. 숲이 살면 ‘산’도 살고 숲이 죽으면 ‘산’도 같이 죽는 거다. ‘산’은 숲을 침범한 인간들이 내 이빨을 피하려고 내던진 갓난애였어. ‘산’은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가엾고 사랑스런 내 딸이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소녀를 들개의 딸로 키워낸 모로의 모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원령공주에 대한 아시타카의 마음을 눈치 챈 모로는 시험하듯 아시타카에게 질문한다. “네가 ‘산’을 구원해줄 테냐?” 아시타카는 말한다. “그건 모르겠지만 그녀와 함께 살아갈 순 있어요.” 그러나 모로는 아시타카의 팔뚝에서 점점 번져가는 선연한 상처를 보고도 원령을 맡길 순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넌 곧 상처로 죽게 될 테니. 날이 밝으면 바로 여길 떠나거라.”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는 아시타카는 숲을 떠나려 하지만, 거대한 멧돼지 군대와 에보시 일족의 혈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제 ‘나의 목숨’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지키려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운명을 ‘함께’ 견뎌내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다. “네가 ‘산’을 구원해줄 테냐?”라는 모로의 질문은 아시타카의 새로운 미션으로 자리 잡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처리하러 떠난 여행에서 오히려 또 다른, 더 거대한 미션을 떠안게 된 아시타카. 



   한편 에보시의 군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피워 올려 멧돼지를 숲 밖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세운다. 모로는 멧돼지 부족의 최후를 예견한다. “옷코토누시는 다 알면서도 정면공격할 거야. 그게 멧돼지의 긍지라고. 마지막 한 마리까지 덤비고 쓰러지겠지.” 원령공주는 모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 난 떠나야겠어. 옷코토누시의 눈이 되어줄래. 그는 연기 때문에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 테니.”
   모로는 사랑하는 딸 ‘산’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을 뒤로 하고 딸을 위로해준다. “난 괜찮다. 넌 저 젊은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도 있을 텐데…….” 원령공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인간은 싫어.” 이때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에게 보낸 목걸이가 다른 들개를 통해 전해지고, 그토록 아름다운 ‘액세서리’를 처음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찬사를 뿜어낸다. “아시타카가 내게 이걸? 정말 예쁘다!” 목걸이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원령공주의 표정에서 들개가 아닌 인간 소녀의 달뜬 표정이 스쳐간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인간들은 총포와 화약 뒤에서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숨긴 채 멧돼지와 들개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모로와 원령공주를 비롯한 들개들과 멧돼지 군대는 목숨을 걸고 총력전을 각오한 채 적진으로 달려간다. 에보시는 그녀의 재산과 땅을 노리는 사무라이들에게, 그리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국왕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짐승보다 숲보다 더 큰 적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와 ‘비슷한’ 재화를 노리는 경쟁자들이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목표는 ‘자연의 자원화’이기에. 


   아시타카는 ‘숲의 군대’와 ‘인간의 군대’ 사이를 목숨을 걸고 오가면서 최대한 전투와 피해를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양측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다. “역시 짐승과 한패로군!” “역시 인간들과 한패였어!” “저 녀석 도대체 어느 편이야?” 그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 존재로서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라 ‘전치사’와 ‘접속사’처럼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고 관계를 맺게 해주는 존재다. 


   더 이상 ‘사이의 존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버린 아시타카는 원령공주와 들개를 도와 죽음을 불사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 최선의 균형감각임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양편은 대등한 관계로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방적인 공격과 숲의 예정된 파멸로 치닫고 있기에. 한편 멧돼지들은 인간이 쏜 화약과 총탄으로 줄줄이 ‘바베큐’가 되어버리고, 크게 다친 옷코토누시와 원령공주는 시시신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동한다. 사냥꾼의 무리들은 시시신을 죽이기 위해 죽은 멧돼지 가죽을 덮어 쓰고 멧돼지 떼로 위장한 채 원령공주를 미행한다. 죽은 멧돼지의 가죽을 덮어 쓴 인간 사냥꾼들을 알아보지 못한 옷코토누시는 죽어버린 멧돼지들이 돌아온 줄로 착각하고 기뻐한다.
 


   “전사들! 돌아왔다! 황천 갔던 전사들이 돌아왔어! 나를 따르라! 시시신께 가자!” 분노에 치를 떨며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닌 옷코토누시를 말리는 원령공주. “진정하세요! 죽은 게 살아날리 없어요. 멧돼지들의 가죽을 덮어쓰고 피를 바른 인간사냥꾼들이예요. 제발 멈춰요! 우릴 미끼로 시시신에게 접근하려는 거예요.” 함께 동행하던 들개는 원령공주를 말린다. “옷코토누시는 곧 죽어! 버리고 가자!” 원령공주는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내가 그를 버리면 그는 재앙신이 될 거야.” 그러나 그녀가 옷코토누시를 버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재앙신이 되어 그녀의 몸까지 함께 재앙신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자신의 멧돼지 부족을 잃고 절망에 빠진 옷코토누시는 본래의 용맹스런 영혼을 잃고 ‘나고신’처럼 끔찍한 재앙신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이제 원령공주조차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숲이 지켜야 할 소중한 아니마 그 자체인 원령공주, 그녀의 죽음은 곧 숲의 죽음일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린 이 숲에는 과연 어떤 파국의 스펙터클이 기다리고 있을까. 

 

   
 

현대의 모든 정신분석학 중에서, 칼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학은 가장 명확하게 인간의 심리상태는 그 원초적인 상태에서 쌍성(雙性)이라는 것을 입증해낸 바 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억압된 의식이 아니며, 잊힌 추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1의 본성이다. 무의식은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남녀양성(男女兩性)의 힘을 유지한다. 남녀양성에 대해 말하는 자는, 이중의 안테나를 가지고,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건드리고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0~71쪽.

 
   
   
 

자연은 하나의 신전,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때때로 뭔지 모를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인간이 상징의 숲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상징의 숲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 보들레르, <조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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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11-0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아란,,,,, 그럼 두들겨 맞아야'만' 성장하나요^^*

sotkfkd 2009-11-03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심슨 2009-11-04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라 전치사나 접속사 같은 존재!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⑦

   

7. 아니무스의 눈물, 아니마의 미소 (1)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
 Make thy love larger to enlarge my worth!
 - 엘리자벳 브라우닝
 
   
   
 

 몽상가의 몽상은 전 우주를 꿈꾸게 할 수 있다. 몽상가의 휴식은 물, 구름, 미풍을 쉬게 할 수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6~77쪽.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그 자체로 충족되는 우리 속의 본성이다. 그것은 조용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깊은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물’의 존재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82~83쪽.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간.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서 서성이던 그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모든 일이 일어난 듯한, 치유와 몽상의 시간이었다. 아시타카를 치유한 세 가지 힘은 원령공주의 보살핌과 물의 치유력, 그리고 시시신의 치료(아시타카의 상처를 직접 핥아주던)였다. 아시타카는 자신을 이끌어오던 모든 존재의 중력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지는 휴식, 즉 여성적 휴식 속에서 부족을 잊고 운명을 잊고 저주를 잊는다. 걱정, 야심, 계획 등의 모든 ‘아니무스’적 고통을 떠나서 고요, 휴식, 치유, 돌봄의 세계에서 안식을 얻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연대기적 시간에서 도피함으로써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는 부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고민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우주적 몽상으로 한껏 비약한다. 그는 시계적 시간에서 벗어남으로써 통과의례의 가장 고통스러운 문턱을 통과하게 되고, 비로소 ‘나 아닌 나’와의 우주론적 만남을 시도한다. 원령공주의 세계는 아시타카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아니마, 억압된 아니마의 존재가 아닐까.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서 우주적 몽상이란 인간이 자기 안에 잠자는 아니마와 만나는 극적 체험이라고 했다. 이 순간 가스통 바슐라르는 칼 구스타프 융과 만나 철학의 연금술을 시도한다. 

   
 

몽상가에게 지독한 혜택을 주는 몽상 속의 상상세계는 자기 아니마를 위해 이루어진다. 아니마는 언제나 단순하고 조용하고 계속적인 삶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융은 “나는 아니마를 단순히 삶의 원형라고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식을 찾지 아니하고 삶, 단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여성성으로 기운다. 아니마 주위로 집중하면서, 몽상은 몽상가가 휴식을 발견하는 것을 도와준다. 가장 좋은 우리의 몽상은, 남자건 여자건, 우리 저마다의 속에 있는 우리의 여성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게 여성성의 흔적을 갖고 있다. 우리 속에 여성적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쉴 수 있을까?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08쪽. 

 
   

   파괴하고 정복하고 소유하여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에보시가 ‘아니무스’의 힘을 상징한다면, 고요한 치유와 조건 없는 보살핌, 휴식과 안정을 꿈꾸게 하는 시시신은 ‘아니마’의 힘을 상징한다. 아시타카를 간호하는 동안만은 전사의 가면을 벗고 타인의 고통에 몰두하는 원령공주의 모습 또한 아니마의 저력을 보여준다. 아니마는 결코 나약한 여성성이나 남성에게 결핍된 여성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자발적 연마와 성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본원적인 여성성이다. 시시신의 존재 방식은 아니마의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를 치료하기 위해 시시신이 나타나는 순간. 그곳에는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구획도 사라지는 듯 신비로운 아우라가 감돈다. 시시신의 발자국이 머무는 곳마다 이름 모를 꽃들과 싱그러운 풀들이 솟아오르고 한없이 평화로운 정적의 기운이 감돈다.
   인류가 주인의 위치에 머무는 한, 인류의 1인칭 시점으로 우주가 관찰되는 한, 우리는 ‘보호’라는 미명하에 자연을 재단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 못하는 동물과 식물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원령공주는 동물들이나 식물들과 대화를 하는 데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언어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원령공주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간극을 매개하는 몽상의 귀재, 샤먼의 모델인 셈이다.


   한편 아시타카가 깨어나는 순간 거대한 멧돼지들의 무리가 원령공주와 모로를 방문한다. 에보시의 손아귀에 곧 파괴당할 위기에 놓인 시시신의 숲을 지키려고 왔다는 멧돼지들, 그 커다란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옷코토누시’다. 원령공주의 ‘엄마’인 들개 모로. 모로는 낯선 인간 아시타카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옷코토누시에게 말한다. “시시신이 이 청년의 상처를 치료해줬어 그래서 안 죽이고 돌려보낸다.” 옷코토누시는 대경실색한다. “시시신이 인간을 구했다고? 인간은 살리면서 왜 ‘나고신’은 구해주지 않았나? 시시신은 숲의 수호신이지 않은가?”
   재앙신이 되어 아시타카의 마을을 공격한 거대한 멧돼지가 바로 ‘나고신’이었던 것이다. 모로는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른다. “시시신은 생명을 구하기도 하지만 빼앗기도 하지. 나고신은 죽는 걸 두려워한 거다. 지금의 나처럼……. 내 몸에도 인간의 총알이 박혀있다. 나고신은 달아났지만,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난 살만큼 살았다. 시시신은 내 목숨을 앗아갈 거다.” 삶뿐 아니라 죽음을 관장하는 일도 역시 ‘생명’의 신 시시신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삶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영역이기에. 모로는 인간이 쏜 총탄을 몸에 지닌 채 죽음을 껴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견뎌내면서, 시시신의 존재를 더욱 가슴 깊이 느끼는 법을 터득한 셈이다.

   나고신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옷코토누시는 모로에게 분노하며 멧돼지부족의 몰락을 시시신과 모로의 탓으로 돌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순간, 아시타카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며 고통스럽게 고백한다. “나고신을 죽인 건 나야. 나고신이 마을을 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지. 그는 커다란 멧돼지 신이었어. 이것이 증거야(그는 점점 무섭게 번져가는 팔뚝의 흉터를 보여준다). 시시신을 만나 저주를 풀려고 여기 왔어. 시시신은 에보시 부족이 입힌 총상은 치료해줬지만 나고신이 남긴 저주의 멍은 없애지 않았지. 나는 이제 이 저주의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죽어갈 거야.” 옷코토누시는 아시타카의 진솔한 고백에 분노를 잠재우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인간들에게 멧돼지 부족의 마지막 힘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인간의 사냥감밖에 안 돼. 모두 함께 덤비면 인간들한테 전멸당할 거야. 우리 일족이 멸망한다 해도 인간에게 힘을 보여주고 말 테다.”

   한편 에보시 부족이 제조해낸 엄청난 분량의 철을 탐내는 아사노 막부는 에보시로 하여금 ‘철의 절반’을 넘기라고 협박하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사냥꾼 무리들이 국왕의 명령이라는 명목으로 숲을 침범한다. 에보시는 숲을 파괴하며 제철소를 운영하여 ‘시시신의 숲’과도 적대하게 되고,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부를 축재함으로써 막부 세력과도 반목하게 된다. 에보시의 해법은 간단명료하다. 숲을 더욱 전면적으로 파괴하여 제철소의 자원을 확보하고 더 ‘강한 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철을 만들면 숲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 그럼 인명피해도 줄일 수 있어.” 에보시는 타타라 마을을 정복했듯이 시시신의 숲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숲을 적대적 자원으로 본다는 점에서, 땅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우주적 몽상의 여백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게다가 사냥꾼들은 시시신의 목을 잘라 오면 불로불사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국왕의 왕명을 받아, 시시신의 목을 베기 위해 숲 속에서 잠복 중이다. 그들 또한 시시신의 목을 소유함으로써 숲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흡수시키려 하는 셈이다. 이렇듯 소유의 집념, 스톡(stock)의 욕망은 인간의 창조적 몽상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 아닐까. 이제 숲을 소유하려는 에보시와 시시신의 목을 요구하는 국왕에 맞서, 죽음을 불사하고 숲을 지키려는 멧돼지들과 모로 일족의 결사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에 따라 펼쳐진다. 그것은 덜 깊은 곳에서, 언제나 덜 깊은 곳(남성)에서, 언제나 깊은 곳, 언제나 더 깊은 곳(여성)으로 간다. 우리가 아주 풍요롭게 펼쳐진, 단순한 고요함 속에서 휴식하는 여성을 발견하는 것은 몽상, 앙리 보스꼬가 말하는, ‘숨어 있는 삶의 한없는 저장소 속’에서이다. 날이 새면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내적 존재의 시계는 남성으로-남자건 여자건 모든 사람에게 남성으로 종을 친다. 그러면 사회적 활동의 시간,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활동의 시간이 되돌아온다. 감정적인 삶에서까지도, 남자나 여자는 저마다 자신의 이중의 힘을 이용할 줄 알고 있다. (……) 몽상가에게 조용한 고독을 되돌려주는 몽상 속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인간은 ‘몽상의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언제나 내려가면서, 심층의 아니마 속에서 휴식을 발견한다. 추락이 없는 하강이다. 이 불확실한 심층에서는 여성적인 휴식이 지배한다. 이 여성적 휴식 속에서, 염려, 야심, 계획에서 떨어져, 우리는 구체적인 휴식, 우리의 전 존재를 쉬게 하는 휴식을 알아본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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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finder 2009-11-02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의 가치를 키우려면 그대의 사랑을 더 키우라~ 멋진데요^^

맨손체조 2009-11-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이 새면 다시 직장으로 가서 자리보전에 대한 집념과 월급에 대한 집착으로 창조적 몽상을 할 시간도 없다ㅠㅠ

sotkfkd 2009-11-03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상. 영원으로 가는 길!
잘 읽었습니다.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⑥

   

5.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2)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 위에서 일어나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다.  


 - 폴 비릴리오, <미지수Unknown Quantity>, 2003, 24쪽.

 
   

   진보의 핵심은 시간의 불가역성이다. 기차가 발명되어 교통 시스템이 일단 바뀌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나룻배의 낭만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기차로 정상적인 통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분의 쾌락’을 찾아나서는 감정의 사치에 속한다. 기차의 속도에 일단 길들어지면, 처음에는 공포와 경탄의 대상이었던 기차도 어느새 당연한 습관이 된다. 기차보다 조금이라도 느린 운송수단은 어느새 퇴행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 움직이는 기술만이 끊임없이 발명된다. 아시타카는 문명 내부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명의 무한 속도전에 제동을 거는 존재다. 아시타카의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진보(문명)’와 ‘야생(야만)’을 분류할 수만은 없는 모순적 상황을 암시한다.


   아시타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원령공주 측은 물론 에보시 측도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에보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선물한 것이다. 문제는 에보시(문명)의 힘이 너무 일방적이고 막강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대칭적 대립의 상황을 깨뜨리려면 그 상황에 균열을 내는 메신저가 필요하다. 아시타카가 그런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위험천만한 메신저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양측 모두에게 첨예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보시 일족이 ‘문명의 의식’(합리주의)를 상징한다면 원령공주와 모로 일족은 ‘문명의 무의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의식은 곧 ‘자연’ 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단지 문명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단지 문명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모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 아시타카는 ‘몽상’의 존재로서 문명의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메신저가 아닐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에보시와 원령공주와 아시타카가 모두 공존한다. 문제는 에보시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원령공주와 아시타카, 즉 몽상과 환상의 세계를 가차 없이 배제해버려 이제는 그 ‘흔적’을 찾는 일조차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슐라르는 밤의 무의식적인 환상과 낮의 의식적인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분석 전문가들조차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몽상’을 사유의 중심에 올려놓는다. 상상력의 매트릭스는 바로 이 ‘몽상’의 에너지에서 탄생한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는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몽상의 세계는 심리학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틱함이 부족하고, 철학자나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논리성이 부족하다. 몽상은 길 잃은 의식이거나 결핍된 환상처럼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이야말로 인간의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새로운 진경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몽상은 깨어 있는 무의식이며 검열에서 자유로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산업시대에서 문명인으로 살면서, 우리는 물건들에 사로잡혀 있다. 물건 하나하나는 한 떼의 물건들의 대표자이다. 그런데 물건에 개체성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물건들의 머나먼 과거로 좀 가보자. 친숙한 물건 앞에서 우리의 몽상을 회복시켜 보자. 그리고는 조금 더 멀리,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물건이 제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나 알아보려 할 때 우리의 몽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멀리 꿈꾸어보자. (……) 몽상은 대상을 성화(聖化)한다. 사랑받는 친숙한 대상에서 성스러운 개인적 대상에 이르는 사이는 백지 한 장이다. 곧 물건은 부적이 된다. 그것은 삶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준다. (……)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절제 없이 검열 없는 몽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은 ‘지식’에서부터가 아닌 것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46~47쪽. 

 
   

 


   <원령공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숲의 수호신 시시신은 아마도 바슐라르적 몽상의 힘이 다다를 수 있는 상상력의 극단일 것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하던 원령공주의 숲에 밤이 깃드는 시간. 시시신이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르고 투명한 데다라신의 모습으로 변해 아름다운 숲을 거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몽상의 세포가 깨어나는 시간.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시타카는 시시신의 물속에서 치유의 밤을 맞이하고 있다. 사경을 헤매는 아시타카 가까이로, 시시신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그의 발자국 위에 아름다운 꽃과 식물이 피어난다. 시시신이 아시타카의 상처를 천천히 핥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아시타카는 거짓말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난다.
   어느새 마술처럼 돋아난 새살에 아시타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재앙신의 저주’를 다시금 발견하고 절망한다. 시시신은 아시타카가 목숨을 걸고 원령공주를 구한 것은 ‘인정’하지만 부족을 지키기 위해 재앙신을 살해한 것은 ‘긍정’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직 끝나지 않는 저주의 늪을, 깨어나자마자 인식해버린 아시타카. 그는 간신히 힘겨운 꿈에서 깨어나자 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듯 고통을 감추지 못한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아시타카에게 이번에는 원령공주가 먼저 다가온다. 원령공주는 자신의 입속에서 풀을 오물오물 씹어 아시타카의 입속에 넣어준다. 눈을 감은 아시타카는 할 수 없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도 밀려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다시 살아갈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살아남기 위해 작은 소녀의 입속을 빌어 음식을 삼켜야 한다는 사실이, 죽어도 삼키기 싫지만 삼켜야 하는 가혹한 운명처럼 곤혹스럽다. 아시타카를 살리기 위해 음식을 대신 씹어 입에 넣어주는 소녀의 모습에는 적대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따스한 치유의 모성이 살아 숨 쉰다. 아시타카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지겨워서, 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의 짐짝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풀까지 씹어 먹이는 원령공주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원령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아시타카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기에 미처 그 고통을 감지하지도 못했던, 무의식 속에서 등을 돌린 채 흐느끼는 또 다른 자아의 그림자와 만난 것이다.

 

   
 

자아는 원래 자기 방어를 하고 자기의 야망을 좇기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뭐든지 억압해야 한다. 이 억압된 요소가 그림자가 된다. (……) 그림자는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 먼저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다. 평상시 이 부분은 깊숙이 잘 감춰져 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하기 전까지 자아는 이 존재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아 본위의 삶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내면 깊숙이 억압된 부분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악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이 부분은 근원적으로 자기(the Self)와 연결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혹은 자기 the Self)은 자아보다 그림자를 선호하신다. 그림자는 아주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중심, 즉 진정한 우리 자신과 훨씬 가깝다.  


 -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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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r hurts 2009-10-2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삼키기 싫지만 삼켜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라.... 그래서 그 장면이 그토록 찡했나 봅니다.

sotkfkd 2009-10-3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steal heart 2009-10-3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죠. 속도의 발명은 곧 재난의 발명인 것을....문명이 낳은 각종 재앙은 어쩌면 문명의 등뒤에서 울고 있는 그림자일지도.

doingnow 2009-11-0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림자...ㅠㅠ
 


 


영화 <원령공주>와 가스통 바슐라르 ⑤

   

5. 문명의 진보 vs 몽상의 몰락 (1)

   
 

 몽상이 우리의 휴식을 강조하러 올 때는 온 우주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러 오는 것이다. 잘 꿈꾸려는 자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선 행복하세요. 그러면 몽상이 자기의 진정한 운명을 답파(踏破)한다. 그것은 시적 몽상이 된다. 그 시적 몽상을 통해, 그것 속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된다. 몽상가가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몽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작품은 웅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꿈속의 세계란 자동적으로 웅장하기 때문이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22쪽.

 
   

   에보시의 총탄에 맞은 들개 모로의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한밤중에 타타라 마을에 잠입한 원령공주. 에보시 일족은 모두 모여 원령공주와 들개들의 침입에 맞서고, 아시타카는 혼란에 빠진다. 적(敵)의 적(敵)은 아군이란 말인가. 그는 에보시 일족에게는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원령공주에게는 에보시의 부상자들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간악한 인간의 무리’로 취급받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의 가슴에 칼이나 총을 겨누지 않는 것이다. 아시타카 또한 자기 부족의 평화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그는 에보시에게도 원령공주에게도 아직은 마음의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다. 이 거리감이 그에게 상황을 ‘이익의 관점 바깥에서’ 통찰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나 원령공주가 목숨을 걸고 타타라 마을에 침입하여 에보시의 목을 노리는 상황에서 이런 ‘평화의 몽상’은 통하지 않는다. 


   “너도 원한을 갚으러 왔겠지만, 여기에도 들개한테 남편이 물려 죽고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있어.”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설득해보지만, 그녀는 아예 귀를 막아버린다. 총탄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에보시 일족과 들개 몇 마리와 어린 소녀뿐인 모로 일족의 혈투. 언뜻 봐도 이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살리기 위해 계속 그녀를 설득하지만 소용이 없다. “원령공주, 숲으로 가! 헛되이 죽어선 안 돼. 물러서는 것도 용기라고! 돌아가!” 복수심에 불탄 원령공주는 온몸을 던져 에보시에게 돌진하여 결투를 벌이고 부족들은 에보시를 응원하며 언제라도 어린 소녀 한 명에게 무더기로 총탄을 퍼부을 기세다.
   그러나 진화된 화승총으로 무장한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단검 하나 손에 쥐었을 뿐인 원령공주는 무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에보시에게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령공주에게는 문명화된 인간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신비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완전한 들개도 완전한 인간도 아닌, 인간의 지혜와 들개의 속도를 겸비한 원령공주는 미묘한 반인반수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에보시와 원령공주의 싸움을 말리려는 아시타카의 팔뚝을 원령공주가 덥석 물어버리자, 헝겊으로 친친 동여맨 그의 팔뚝에서 재앙신의 저주가 그 끔찍한 위용을 드러낸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치명상을 가리키며 모두에게 말한다. “이것이 내 속의 원한과 증오의 모습입니다. 육신을 썩게 하고 죽음을 부르는 저주라고요. 더 이상 증오에 휩쓸리지 마세요.” 에보시는 들은 척도 안 하며 원령공주를 기어이 죽여버릴 태세다. 용맹과 무예와 인격을 두루 갖춘 아시타카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에보시는 아시타카의 팔을 싹둑 잘라내려 한다. 저 흉측한 상처로 뒤덮인 ‘저주받은 팔’만 잘라내 버리면 아시타카의 ‘건강한 육체’는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근대적인 사고방식인 것이다.  


   원령공주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아시타카는 에보시와 원령공주 모두를 잠시 기절시킨 후 원령공주를 데리고 숲으로 달아나려 한다. 이때 에보시 부족의 여성이 자신들을 배신한(?) 아시타카에게 화승총을 쏴버린다. 적을 도와줬으니 아시타카도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아시타카의 평화의 몽상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총에 맞은 아시타카는 선혈을 뚝뚝 흘리면서도 죽을 힘을 다해 원령공주를 들쳐 매고 타타라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원령공주를 간신히 숲으로 옮겼을 땐 이미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원령공주는 죽어가는 아시타카에게 심문하듯 다그친다.
    

   원령공주 : 왜 날 방해한 거야? 죽기 전에 대답해!
    아시타카 : 널, 죽게 내버려두긴 싫었어…….
    원령공주 : (잔뜩 날선 표정으로 아시타카를 경계하며)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인간 만 쫓아낸다면 죽어도 상관없어!
    아시타카 :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목소리로) 넌…… 살아야해…….
    원령공주 : 닥쳐! 인간 말은 안 들어!
    아시타카 :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의식을 점차 잃어가며) 넌…… 아름다      워…….
    원령공주 :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아름답다’는 표현에 화들짝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선다.)

   ‘목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원령공주에게 아시타카는 말한다. “넌 아름다워.” 원령공주는 너무 놀라 멈칫하며 물러선다. 그녀는 자신이 소년 앞에 얼굴 붉힐 줄 아는 소녀라는 것, 가면과 피 냄새에 가린 그녀의 얼굴이 누가 봐도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녀는 ‘문명의 시선’으로 봤을 때 ‘들개에게 혼을 빼앗긴 불쌍한(혹은 무서운) 소녀’였을 뿐 누군가에게 관심과 애정의 눈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인간에 대한 증오가 그녀의 삶 전체를 장악하고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생각할 몽상의 여유가 없는 셈이다.
   그녀 또한 ‘몽상의 시간’이 없기로는 철두철미한 여전사 에보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시타카는 ‘너는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그녀에게 이전에는 꿈꾸지도 못했던 사유의 여백을 선물한다. 자기를 위해서 목숨까지 건 소년이 있다는 것, 그런 그가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원령공주는 아직 감동을 느낄 여유도 없다. 늘 인간을 향한 심리적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원령공주에게는 휴식과 몽상을 위한 마음의 여백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아주 특징적인 것에 매달리는 법이므로, 그들은 먼저 꿈, 놀라운 밤의 꿈을 연구하고, 몽상, 그들이 보기에는 구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수수께끼도 없는, 모호한 꿈에 지나지 않는 몽상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몽상은 그때 대낮에는 기억되지 않는 약간의 밤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 무의식은 진짜 수면의 꿈속에서야 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은 명확한 사고와 밤의 꿈이라는 두 극점을 향해 일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인간 심리의 전 영역을 검토하게 된다.
 그러나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이어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몽상이 있다. (......) 몽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정신적 현상이어서, 그것을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다짜고짜 꿈의 현상 속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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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2009-10-29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꿈꾸려면, 우선 행복하라! 밤에 발뻗고 잘 잠들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의 철학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아, 오늘밤에도 잠들기는 글렀다~~~

sotkfkd 2009-10-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