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 이런 날이 오기도 한다. 약소국으로 강대국의 눈칫밥을 먹은 지가 수삼 년인데 나에게도 드디어 찬란한 서광이 비치는 날 말이다. 콘크리트보다 더 견고해보였던 그들(아내&딸)의 동맹 관계에 드디어 균열이 보였다. 부부 사이도 그렇지만 모녀간의 우정도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큰 싸움으로 번지는 법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느라 귀가가 늦었는데 역시나 딸아이는 나의 돌출된 배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이건 뭐야?’라는 질문으로 나의 소중한 몸을 졸지에 ‘사물화’했고 내 손가락으로 흡연 손핑테스트를 함으로써 내가 그들의 관리하에 있다는 사실 관계는 출근부의 도장처럼 확인되었다. 더구나 흡연자들의 천국인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느라 고기 구운 냄새와 담배 냄새를 가득 담고 온 나의 비매너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개탄스럽다며 한목소리를 냄으로써 그들의 우정과 나에 대한 우위의 위치에 대한 확인이라는 우리 집안의 평화를 떠받드는 두 개의 큰 주춧돌이 어김없이 안녕을 유지한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 샤워를 마치고 그들이 거실을 비운 5분 동안 텔레비전으로 프로 야구를 시청하는 호사를 누린 다음 조용히 나의 서재로 들어왔다. 딸아이는 요새 다이어트 바람이 불었는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운 우리 집에서 헬스용 자전거를 열심히 탄다. 아내는 딸아이가 너무 다이어트에 신경을 쓴 나머지 충분히 먹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눈치다. 결국 딸아이와 아내의 다이어트에 대한 미묘한 관점의 차이는 그들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아주 작은 틈새를 만들어내고 마는데, 그 조짐은 어제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어제 퇴근길에 아내가 마트를 잠시 다녀왔다. 장바구니의 상당 부분의 부피를 차지한 품목이 바로 전날 딸아이가 굉장히 먹고 싶은 빵이 있는데 살이 찔까 봐 못 먹겠다던 바로 그 빵이었다. 차라리 눈에 안 보이면 참을 만한데 다이어트를 위해 간신히 먹고 싶은 것을 참는 그 빵을 주방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둔다는 것은 딸아이의 입장에서는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즉 딸아이의 다이어트 계획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처사였던 것이다. 
오늘도 딸아이가 거실에 둔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안장의 높이를 낮추느라 부산을 떨었는데 아내가 대뜸 “거기에서 더 이상 낮출 수 없는데 뭐 하러 쓸데없는 수고를 하느냐”라고 말해버렸다. 즉 그 헬스용 자전거는 아직 너의 키에 맞지 않는 성인용이며, 다시 말해서 너는 그 자전거를 타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 한마디로 다이어트를 하지 마라는 자신의 궁극적인 속마음을 대놓고 말하는 무리수였다. 요즘 다이어트를 공부 다음으로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딸아이에게는 차마 참을 수 없는 큰 도발인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혈맹으로 뭉친 아내와 딸 사이니까 대충이라도 넘어가지 그들의 잠재적인 적군인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망언에 버금가는 언행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들의 우정이 돈독해서 대충 묻힐 일이긴 하지만 앙금은 남아 있었다. 딸아이가 휴대폰으로 동영상인지 음악인지를 감상하면서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는데 아내가 그 콘텐츠의 정보 제공 업체와 내용의 건전성 여부에 대한 의문을 딸아이에게 표시했고 딸아이는 발끈하면서 단지 유튜브에서 노래를 감상하고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아내는 “그렇게 건전한 내용이면 왜 내가 보려고 하면 감추고 그러느냐?”며 그들의 내전을 확대했다. 이에 대해 딸아이는 “내 폰이 구려서 인터넷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유튜브로 음악을 듣는다”라고 대응했고 아내는 “인터넷이 안 되는데 어떻게 유투브는 볼 수 있느냐?”라고 대물었다. 서재에서 조용히 강대국들의 다툼을 관전하고 있던 나는 아내의 이번 발언은 내가 아는 IT지식과 일치하며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평가했다. 인터넷이 잘 안 되는 휴대전화로 유튜브의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제3자인 나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가설이다.
바로 이때 딸아이는 아내가 반박하기 어려운 회심의 일격을 날렸는데 “엄마도 혼자 휴대전화를 보다가 내가 같이 보자고 옆으로 가면 ‘안 알랴줌’으로 일관하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었다. 즉 국제 관계에 있어서 호혜 평등의 원리를 새삼 요구하고 나섰다.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발언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딸아이의 공격에 아내는 비논리적인 슈퍼 강대국의 힘을 앞세웠다. “나는 어른이잖아!”라고 말함으로써 냉엄한 국제 관계에서는 호혜 평등의 원리 따위보다는 ‘힘’이 더 앞선다는 즉 법보다는 주먹이 앞선다는 다소 비근대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즉, 아내가 당황했다는 증거다. 마치 영어가 모국어인 싱가포르 상인에게 다급히 “아니, 두 개 말고 하나만”이라고 외치던 상황을 연상케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에 온갖 안테나를 곤두세웠어야 할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와중에 컴퓨터로 관전하던 프로 야구 게임에서 삼성의 선수가 홈런을 치는 장면에 잠시 넋을 뺏긴 틈을 타 그들의 다툼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홈런을 날린 삼성의 선수가 느긋하게 홈런 세러모니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게토레이를 시원하게 마시는 장면까지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서로를 향한 진한 애정이 담긴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나눈다.
방금 전까지 거실의 패권을 두고 세력 다툼을 하던 아내와 딸이 어쩐 일인지 아내는 딸아이에게 “왜 넌 엄마를 그렇게 걱정하느냐?”라고 탓하고 딸아이는 “딸로서 엄마를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라며 반박한다. 은근히 강자들의 내분을 통해서 어부지리를 기대했던 나에겐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인데 더 큰 문제는 어떤 계기로 이토록 급작스럽게 상황이 반전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황새의 뜻을 뱁새 따위가 알 수 없다고 했든가? 괴이하게도 서로를 끔찍이도 걱정하고 위하는 훈훈한 내용의 말로 다투던 딸아이는 제 방으로 사라졌고, 아내는 아내대로 욕실로 향하는 이해 못 할 상황이 이어졌다. 우매한 나로서는 저들이 다툼을 했는지 아니면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한 자리였는지조차 헛갈렸다.
이런 상황까지 이어지자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무주공산이 된 거실로 나갔다. 첫째, 저들이 다툼을 한 것이고 우정의 균열이 생긴 것이라면 둘 중에 누구를 포섭해야 나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궁금했고 둘째, 서로를 비난하다가 어떤 말을 계기로 서로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주고받는 상황으로 변질되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여자들의 이런 이해 못 할 행각에 대한 연구와 조사는 앞으로 내가 무탈하게 가장의 권위를 유지시키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자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나의 학구열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딸아이의 방에 조심스럽게 접근한 나는 방문턱을 넘자마자 자기 방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고, 그나마 딸아이보다는 구체적인 대답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아내는 나의 정성스러운 마사지 신공이라는 조공을 받고도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는 슈퍼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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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는 주로 서재에서 서식한다. 책도 읽고, 소파에서 낮잠도 자고, 글도 쓰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야구 중계도 본다. 사실 두 여자(딸아이와 아내)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취향이 달라서 거실에 머무는 시간이 적기도 하다. 
아쉬울 게 없는 서재에서의 칩거지만 단 하나,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다. 식사 시간에는 주로 딸아이가 와서 “지금 식사를 하시겠느냐” 묻거나 “식사를 하시오”라고 통보하는 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주식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사란 것이 어느덧 틀에 박힌 일상의 습관이거나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행위라면, 순수하게 호감으로 선탁해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이 ‘간식’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서재 생활은 간식에 치명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나의 아지트인 서재를 할렘처럼 생각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손을 놓고 있는데, 음식 찌꺼기나 냄새마저 고약하다면 서재 철폐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서재에 먹거리를 들이지 않는다.
서재 생활에 심취하더라도 늘 바깥세상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그래야 후각으로 그들이 어떤 간식을 준비하는지와 요리는 완성되었는지, 청각으로 그 양은 어느 정도 되는지와 간식을 얼마만큼 먹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물론 아내가 야구 중계소리가 신경 쓰이니 문을 꼭 닫으라는 요청을 하면 당연히 꼬~옥 닫아준다.
그들이 언제 간식을 먹는지 어떤 종류의 간식을 먹는지 그 양은 얼마나 되는지 서재에 앉아서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괜히 가장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나의 식탐도 충족할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 즉 카레라든지 치즈를 잔뜩 얹은 옥수수 비빔밥을 먹겠다고 쪼르르 나갔다가 괜히 체면만 구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대체로 식사를 끝내고 30분 정도 뒤에 간식을 먹는다. 그때쯤에는 더욱 레이더를 정교하게 가동해야 하며, 그들이 완성된 간식을 텔레비전 앞의 탁자에 딱 올리자마자 염치없이 달려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의 포만감이 3분의 1정도 충족되어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눔의 미학을 고려할 수 있을 때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진즉부터 준비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 가령 어느 날 딸아이가 순댓국밥이 먹고 싶은데 취객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순댓국밥집에 행차하기가 거시기하다고 하면 냄비를 들고 가서 포장해 와야 하고, 그들이 새우 버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냉큼 운전하고 가서 사 와야 한다.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메이저 리그를 감상하는데 촉이 왔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너희의 간식을 뺏어 먹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라는 표정과 몸짓으로 군웅이 할거하는 거친 광야인 거실로 나갔다. 그들이 먹으려고 하는 것은 골드키위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인들의 간식을 뺏어 먹는 하이에나도 지켜야 할 상도가 있다. 칠거지악에 삼불거라는 예외가 있듯이 나도 삼불식을 지킨다. 우선 딸내미가 직접 장만한 간식이다. 아직 과도를 다루지 못하는 딸내미가 직접 깎은 과일은 그녀가 그걸 극도로 먹고 싶었음을 의미한다. 그 과일을 뺏어 먹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탄을 받을 것이다. 둘째,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뺏어 먹었다가는 그들의 식탐이 충족되지 못해 원망받을 수 있는 경우다. 셋째는 배스킨라빈스31의 체리쥬빌레 속 왕 체리. 그건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불행하게도 오늘은 작은 접시 위에 올라앉은 골드 키위를 보아하니 키위 두 개쯤을 딸내미가 직접 깎아서 마련한 간식이다. 삼불식 중에 무려 두 가지나 해당된다. 아내도 딸아이를 위해서 먹지 않고 있었다. 지킬 것은 지키는 매너남답게 조용히 물러나려 했는데 거실까지 나온 것이 괜히 머쓱해 딱 한 조각만 먹겠다고 했다. 예상대로 딸아이와 아내는 완강히 거부한다. 나는 그들의 거부 탓에 내가 과일 한 조각도 못 얻어먹고 돌아선다면 그들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고,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에게 괜한 죄책감을 주기 싫으므로 한 조각만 먹겠으니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의 합리적인 요구에 딸아이와 아내는 경계를 풀었다. 딸아이는 저게 접시에서 가장 작은 조각이라는 제 어미의 조언에 따라 그놈을 포크로 찍어 내 입에 넣어줬다. 물론 포크에 침을 묻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지엄한 요구를 했다.
사실 그 골드키위는 우리 모친께 드리려고 사둔 것인데 어찌하다 보니 가져가지 않아서 우리 집 냉장고에 있었다. 딸아이도 제 할머니처럼 골드키위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 그뿐이 아니라 유년 때부터 제 할머니처럼 노란 시루떡을 좋아해서 재래시장에 가면 조공용으로 자주 사들고 집에 오곤 했다.
제 할머니와 식성을 닮은 딸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가 느껴진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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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는 주로 서재에서 서식한다. 책도 읽고, 소파에서 낮잠도 자고, 글도 쓰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야구 중계도 본다. 사실 두 여자(딸아이와 아내)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취향이 달라서 거실에 머무는 시간이 적기도 하다. 
아쉬울 게 없는 서재에서의 칩거지만 단 하나,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다. 식사 시간에는 주로 딸아이가 와서 “지금 식사를 하시겠느냐” 묻거나 “식사를 하시오”라고 통보하는 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주식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사란 것이 어느덧 틀에 박힌 일상의 습관이거나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행위라면, 순수하게 호감으로 선탁해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이 ‘간식’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서재 생활은 간식에 치명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나의 아지트인 서재를 할렘처럼 생각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손을 놓고 있는데, 음식 찌꺼기나 냄새마저 고약하다면 서재 철폐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서재에 먹거리를 들이지 않는다.
서재 생활에 심취하더라도 늘 바깥세상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그래야 후각으로 그들이 어떤 간식을 준비하는지와 요리는 완성되었는지, 청각으로 그 양은 어느 정도 되는지와 간식을 얼마만큼 먹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물론 아내가 야구 중계소리가 신경 쓰이니 문을 꼭 닫으라는 요청을 하면 당연히 꼬~옥 닫아준다.
그들이 언제 간식을 먹는지 어떤 종류의 간식을 먹는지 그 양은 얼마나 되는지 서재에 앉아서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괜히 가장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나의 식탐도 충족할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 즉 카레라든지 치즈를 잔뜩 얹은 옥수수 비빔밥을 먹겠다고 쪼르르 나갔다가 괜히 체면만 구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대체로 식사를 끝내고 30분 정도 뒤에 간식을 먹는다. 그때쯤에는 더욱 레이더를 정교하게 가동해야 하며, 그들이 완성된 간식을 텔레비전 앞의 탁자에 딱 올리자마자 염치없이 달려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의 포만감이 3분의 1정도 충족되어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눔의 미학을 고려할 수 있을 때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진즉부터 준비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 가령 어느 날 딸아이가 순댓국밥이 먹고 싶은데 취객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순댓국밥집에 행차하기가 거시기하다고 하면 냄비를 들고 가서 포장해 와야 하고, 그들이 새우 버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냉큼 운전하고 가서 사 와야 한다.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메이저 리그를 감상하는데 촉이 왔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너희의 간식을 뺏어 먹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라는 표정과 몸짓으로 군웅이 할거하는 거친 광야인 거실로 나갔다. 그들이 먹으려고 하는 것은 골드키위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인들의 간식을 뺏어 먹는 하이에나도 지켜야 할 상도가 있다. 칠거지악에 삼불거라는 예외가 있듯이 나도 삼불식을 지킨다. 우선 딸내미가 직접 장만한 간식이다. 아직 과도를 다루지 못하는 딸내미가 직접 깎은 과일은 그녀가 그걸 극도로 먹고 싶었음을 의미한다. 그 과일을 뺏어 먹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탄을 받을 것이다. 둘째,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뺏어 먹었다가는 그들의 식탐이 충족되지 못해 원망받을 수 있는 경우다. 셋째는 배스킨라빈스31의 체리쥬빌레 속 왕 체리. 그건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불행하게도 오늘은 작은 접시 위에 올라앉은 골드 키위를 보아하니 키위 두 개쯤을 딸내미가 직접 깎아서 마련한 간식이다. 삼불식 중에 무려 두 가지나 해당된다. 아내도 딸아이를 위해서 먹지 않고 있었다. 지킬 것은 지키는 매너남답게 조용히 물러나려 했는데 거실까지 나온 것이 괜히 머쓱해 딱 한 조각만 먹겠다고 했다. 예상대로 딸아이와 아내는 완강히 거부한다. 나는 그들의 거부 탓에 내가 과일 한 조각도 못 얻어먹고 돌아선다면 그들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고,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에게 괜한 죄책감을 주기 싫으므로 한 조각만 먹겠으니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의 합리적인 요구에 딸아이와 아내는 경계를 풀었다. 딸아이는 저게 접시에서 가장 작은 조각이라는 제 어미의 조언에 따라 그놈을 포크로 찍어 내 입에 넣어줬다. 물론 포크에 침을 묻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지엄한 요구를 했다.
사실 그 골드키위는 우리 모친께 드리려고 사둔 것인데 어찌하다 보니 가져가지 않아서 우리 집 냉장고에 있었다. 딸아이도 제 할머니처럼 골드키위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 그뿐이 아니라 유년 때부터 제 할머니처럼 노란 시루떡을 좋아해서 재래시장에 가면 조공용으로 자주 사들고 집에 오곤 했다.
제 할머니와 식성을 닮은 딸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가 느껴진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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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 집의 정권이 교체되는 것 같다. 돌아가는 정세를 보아하니 아내는 상왕으로 물러나는 듯하고, 중학교 2학년 딸내미가 실세로 군림하는 형국이다. 
며칠 전,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 젬병인 나는 딸내미가 아내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에 자식 키우는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 다시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어젯밤에 딸내미는 아내의 생일을 맞아 편지를 쓰라고 내게 강요했다. 나는 나만의 축하하는 방식이 있고 따로 선물을 준비하니 그런 것은 강요하지 말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딸내미는 편지 쓰기를 계속 주장할 뿐만 아니라 ‘몇 줄’로 짧게 쓰지 말고 편지지를 꽉꽉 채워서 빼곡하게 쓰란다. 나는 서간문에 익숙지 않고, 민망해서 도저히 못 쓰겠다고 항의했더니 급기야 앞으로 나와는 대화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한다. 할 수 없이 알겠다면서 편지지를 부탁했는데 달랑 한 장만 가져온다. 나는 실수가 잦으니 여분으로 두어 장 더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딸내미는 일단 컴퓨터로 초고를 작성한 다음 정성을 다해서 편지지에 옮겨 쓰면 되지 않느냐며 거절한다.
페이스북을 뒤져서 남편한테 받은 편지 때문에 감동한 분의 편지와 카드의 사진과, 한 분에게 문의를 한 결과를 모티브삼아 간신히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딸아이라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여자에게 적응하는 일이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지배한 탓인지 꿈자리가 그리 상큼하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현격하게 정권교체의 징조를 몸소 체험한 날이다. 식사를 하는데 딸아이가 평소처럼 매우 큰 소리의 방귀를 시연했고 나는 ‘식사 예절’에 어긋난다고 점잖게 조언을 했는데 아내는 ‘딸아이의 방귀는 당신의 것과 달리 전혀 냄새가 없다’며 일갈을 한 다음 딸아이를 향해서 계속 시원하게 방귀를 보시라고 힘을 실어준다. 
식사를 마치고 욕실로 향했다. 칫솔에 ‘아빠’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나의 뒤통수를 대고 딸아이는 ‘사용 후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두어야 한다’고 하명한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아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말을 잘 듣도록 해라’며 상왕으로서 주상으로 새로이 등극한 딸아이의 뒤를 봐주었다.
옷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려는데 딸아이는 욕실을 친히 확인하여 자신의 지시사항이 잘 이행되었는지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서재로 들어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어제 말한 아내에게 쓴 편지를 달란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고, 새로운 정권의 강도 높은 ‘국민 개조 정책’에 적응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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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외식을 나가려는데 아내의 슬리퍼가 부럽다. 낡아서 꼬질꼬질하고 뒷 굽이 나지막한 나의 것에 비해 아내의 슬리퍼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외관에다 높으면서도 견고한 굽 덕분에 키가 작은 사람의 단점을 보완해준다. 너무 딱딱하지도 푹신푹신하지도 않은 착화감 또한 훌륭해서 아내가 좋아하는 듯하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집에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학교에서 사용하는 슬리퍼가 이상한 방향으로 닳아서 신을 때마다 발등이 아프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니 아내가 신는 같은 브랜드의 제품으로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왜 나랑 같이 산 슬리퍼인데 당신 것만 그렇게 빨리 낡아지느냐?”란다. 
직장에서 실내와 실외를 구분해서 별도의 슬리퍼를 사용하는 경우와 주야장천 한 켤레만 신는 경우가 어떻게 물리학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맞춰서 해지는지 따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공격을 한다면 아내는 대뜸 ‘슬리퍼의 노화는 사용하는 슬리퍼의 개수가 문제가 아니고, 사용자의 보행 스타일 및 관리의 정도가 더 중요한 요인이다’라고 대응할 것이다. 급기야 ‘슬리퍼의 노후에 미치는 요인들에 대한 연구’ 심포지엄이 냉면집에서 개최될 것이다. 
주문한 냉면이 나오기 전에는 어느 정도 선방을 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음식 앞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아내에 비해, 논쟁 따위보다는 냉면의 쫄깃한 면발의 유지가 훨씬 중요한 나는 급격히 무너질 게 뻔하다. 더구나 제3자로서 공정성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겨야 할 딸아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엄마 편을 들 것이다.
앞으로의 뻔한 그림이 머릿속으로 그려지자, 위기에 빛을 발하는 나의 두뇌는 기가 막힌 꼼수를 떠올렸다. 아내에게 평등의 원리를 내세우면서 공세를 하는 것 대신에 딸아이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너는 엄마의 슬리퍼가 탐나지 않느냐?’ ‘너도 저 폼 나는 슬리퍼 갖고 싶지?’라는 메시지를 가득 담은 눈치 말이다.
딸아이는 아내와 혈맹으로 맺어진 우방국이지만 ‘팍스아내리카나’의 속국이라는 공통점은 가지고 있다. 나는 약소국이라는 동료의식에 호소를 했고 우리 가족의 안정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시 잠들고 있던 그녀의 ‘지름신 욕구’를 살짝 일깨워주었다. 나의 바람대로 딸아이의 입에서 “나도 하나 사줘”라는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딸아이라는 잠재적인 적을 내 편으로 만들었고, 아내의 입장에서는 하나가 아닌 둘의 요구이니까 거절하기 힘들 테고 그 와중에 기지를 발휘해서 둘 중에 하나만 사도록 윤허한다면 나는 애초에 슬리퍼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나라는 기득권을 앞세워 간단히 딸아이를 따돌리면 될 일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이들에게는 문방구에서 파는 삼디다스가 가장 적합하다. 
어쨌든 예상치 못한 우리들의 협공에 아내는 “어디 감히 벌 떼처럼 일어나느냐?”라는 호통을 내지른다. 민초들의 절실한 염원을 마치 민란으로 여기는 듯했다. 강력한 독재 정권을 상대로 한 기껏해야 낮과 곡괭이를 든 백성들의 난은 찻잔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고 나와 딸아이와의 동맹은 단 30초 만에 막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대세가 넘어간 것을 간파한 딸아이는 ‘애초에 난 슬리퍼를 살 생각이 없었는데 아빠가 눈치를 주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수동적으로 동참할 뿐이었다고 말하는 비급한 변절자의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설처럼 그들은 잠시의 오해로 인한 불화를 전환 위기로 삼아 더욱 굳건한 동맹 관계를 확립했고 나는 큰 뜻을 품었다가 실패한 후유증으로 냉면집에서 서비스로 준 ‘요구르트’도 마시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재에서 와신상담을 하고 있는 와중에 ‘꼬깔콘이 아니고 꼬깔콘과 비슷하게 생긴 과자와 오징어 비스무리하게 생긴 과자’를 사 오라는 아내의 지시에 그 정체불명의 과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고도 정확히 아내가 원했던 과자를 손에 건네주는 신공을 발휘했다.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했다면 이 정도의 굴욕은 감수해야 하며, 소나기는 피해가야 한다는 게 나의 오랜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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