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기쁨 - 산책과 커피와 책 한 권의 행복
최현미 지음 / 현암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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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 지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비대면 강연은 나에게 넘기 어려운 험난한 산이다. (ZOOM)으로 하는 강연이 시작되기 30분이 되면서부터 딸아이의 대학합격발표를 기다리는 만큼의 긴장을 하게 된다. 화장실을 연신 들락거리고 물을 금붕어처럼 들이킨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최현미 기자가 쓴 독서 에세이 <사소한 기쁨>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초긴장 상태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지내기보다는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300분처럼 느끼지는 30분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포의 30분이 마치 3초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다. <사소한 기쁨>은 독자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독서에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흡입장치가 들어 있다. 기자 특유의 간결하고 울림이 있는 문체, 사소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일상의 즐거움, 지성미가 넘치는 세상사에 관한 통찰, 책과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시선, 책과 영화의 등장인물이 마치 내 친구나 식구처럼 느껴지는 친밀감, 그리고 과학적인 지식까지.

 

<사소한 기쁨>은 기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책을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모범적인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일상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사안에 따라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때로는 밝게 볼 수 있는 통찰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벽달>이라는 꼭지를 살펴보자. 기자로서 새벽에 출근하는 일상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주인공 덴고가 하늘에 뜬 달을 보면서 한 생각으로 넘어간다. “일류가 불이며 도구며 언어를 손에 넣기 전부터 달은 변함없이 사람들 편이었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 자신의 달에 대한 소고로 이어진다.

 

1Q84의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을 지켜낸 달이 나의 출근길을 밝힌다. 달은 내가 태어났던 날 저녁부터 변함없이 나를 지켜 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달은 저 먼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달은 나도 기억 못 하는 나를 알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상상대로라면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테다.

 

언젠가 시골에 사는 내 친구가 웬 큰 나무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았다. 유명하지도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동네 나무를 왜 올렸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멋있잖아나무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의아해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사소한 기쁨>을 읽고 나서야 그 친구가 어떤 느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내가 이 벚나무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간 숱한 시간을 꼽아본다. 수십 년 동안 수천 번 이 나무 옆을 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고, 동료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걸었다. 가벼운 산책에, 글이 막힐 땐 머릿속으로 글 앞뒤를 정리하며 걸었다. -중략-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시간 속에 걸었다.

 

그 친구도 자신의 집 앞에 있는 그 나무와 수많은 추억을 남겼고 그 나무는 마치 달처럼 그 친구의 모든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나무와 추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무에 대한 애정을 이토록 진솔하고 공감을 주는 글이라니.

 

또 이런 글은 어떤가?

 

그렇다면 이 쓸데없는 수다야말로 인간을 지구상의 다른 생명과 따로 구분 짓는 가장 인간다운 일일지 모른다. 실제로 수다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일단 맘이 맞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관심과 취향이 비슷하고 주고받는 말의 리듬이 맞아야 한다. 주거니 받거니 쿵하면 짝하는 파트너십을 발휘해야 한다. 유머 코드가 같아서 별것 아닌 농담에도 같이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수다에 관한 이토록 재미나고 놀라운 통찰이라니.

 

최현미 기자는 동화는 어린이가 독자라는 이유로 그 시대가 믿는 윤리와 도덕 가치를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성인 소설보다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어린이를 위한다는 동화가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사소한 기쁨>이라는 동화를 쓰면 어쩌냔 말이다. 그것도 그저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한 동화를.

 

<사소한 기쁨>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이 귀족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과 어울려 낫질을 하면서 느낀 행복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감에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낫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기라도 하듯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 갔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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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2022-04-1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는 다다익선입니다. 감사합니다^^

박균호 2022-04-20 16:26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림의 방 - 나를 기다리는 미술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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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해 벽 따위로 막아 만든 칸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방은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니다. 노래방, 피시방, 스크린골프방을 넘어서 이젠 사이버 공간에도 진출했다. 여러 명이 모여 SNS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버 공간도 단톡방이라고 부르는 지경이다. 한국인에게 방은 서양처럼 침실, 거실로 구분된 것이 아니고 먹고, 자고, 놀고, 일하는 복합공간이었다. 그래서 유독 방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이다.

 

<그림의 방(아트북스)>을 낸 이은화 선생은 한국 최초의 뮤지엄 스토리텔러라는 기념비적인 영역을 개척했지만 그림을 갤러리가 아닌 방으로 들여온 최초의 미술 저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미술 이야기는 마치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처럼 따뜻하고 정감이 넘친다.

 

행복한 아트홀릭을 자처하는 지은이가 미술 애호가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그림의 방을 마련했다. ‘발상의 방’ ‘행복의 방’ ‘관계의 방’ ‘욕망의 방’ ‘성찰의 방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방에는 각각 열두 점의 미술작품이 걸려 있다. 이 다섯 개의 방에서 독자들은 최초의 추상화, 최초의 자화상, 여성이 그린 최초의 남성 누드화, 유명 초상화가의 마지막 여성 초상화 등 미술사의 굵직한 명화들을 만날 수 있으며, 세기의 명작을 탄생시킨 우연, 행복을 그린 그림으로 알려진 화가들의 남모를 고통, 예술을 위해 안정을 멀리했던 미술가의 고독과 절망 등 그림 뒤에 가려진 복잡한 인생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그림의 방(아트북스)>에 등장하는 총 60점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는 각각 3쪽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난해한 미술이론, 관념적인 설명이 일체 배제되어 미술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일반인이 읽기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넘친다. 그림 속에 숨겨진 에피소드와 배경 설명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60점의 그림을 하나의 잘 짜인 추리소설을 읽어나가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다.

 

누군가 너무 예쁜 그림만 그리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왜 예술이 예쁘면 안 되지?” 세상에 불쾌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되받아쳤던 르누아르였다. (95)

 

특히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서 큰 가르침을 준다. 르누아르는 예쁘고 행복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인생은 불행으로 가득하였다. 돈이 없어서 열세 살에 학교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림에 매진해서 화가로서 성공했지만, 말년에는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을 붓으로 묶어 작업해야만 했다.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긍정적으로 살았으며 행복을 그림에 담았다. 예술이 꼭 어둡고 진지하며 어려워야 다른 사람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면서 즐거운 기운을 만끽한다. 마찬가지로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쳤고 지병으로 고통받았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강아지똥>으로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감동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선물한다.

물질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만이 세상을 행복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꽃이 더러운 물에서 자라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서 보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물하는 것처럼.

 

내가 <그림의 방(아트북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면서 가장 이은화 작가다운 이야기는 <커다란 호의에 위트 한 방울>. 프랑스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는 부유한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 샤를 에프뤼시에게 정물화 한점을 주문받았다. 인상파 그림에 각별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에프뤼시에게 마네는 특별히 하얀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이 채소 위에 놓인 심플한 정물화를 그렸다. 협의가 끝난 그림 값은 800프랑이었지만 그림에 너무 만족한 아프뤼시는 호의로 200프랑을 더 얹어 1,000프랑을 그림값으로 지급했다.

 

호의에 감동한 마네는 금방 붓과 팔레트를 집어 들고 작은 캔버스 위에 하얀 아스파라거스 하나를 큼직하게 그렸다. 그리고 ”(보내드린) 아스파라거스 다발에서 하나가 빠졌네요.”라는 메모와 함께 또 하나의 그림을 에프뤼시에게 보냈다.

 

<그림의 방>에 수록된 60편의 이야기는 짧지만, 감동적이고 재미나기 때문에 자꾸만 되새겨 읽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본 그림은 진짜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인의 작은 방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배여 있는 것처럼 이은화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그림과 화가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재미난 부분을 따로 접어 두었는데 이 책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구겨진 셔츠를 펴기 위해서 다림질을 하는 것처럼 일삼아 하나씩 곱게 다시 폈다. 다시 곱게 펴야 할 구김들이 너무나 많아서 고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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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5 0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작은 일에 연연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평생을 그까짓 거라는 신조로 대충 살아왔는데 요즘 내가 아니었던 나를 자주 구경한다. 일 년 전만 해도 재활용 봉투가 얼마나 찼는지와는 상관없이 본가로 내려가는 금요일 아침에는 꼭 집 앞에 내놓았다


내가 서식하는 원룸에 혹여 쓰레기 냄새라도 베일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청소를 여간해서 하지 않는데 냄새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재활용 봉투가 터진 김밥이 되어서야 내놓는다. 요일과 상관없이.

 

어디 그뿐인가. 나는 치킨을 시켜서 한 번에 먹지 못하는데 전에는 남은 조각을 아낌없이 버렸지만, 요새는 일주일에 걸쳐서 꾸역꾸역 다 먹는다. 어제는 더욱 황당한 일을 겪었다. 모처럼 가성비가 출중한 샤부샤부 집을 발견했고 아내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거의 40분 동안 숨도 쉬지 않고 입이 욕할 만큼 먹어 치웠는데 아뿔사! 음식을 남기지 않으면 다음 방문 때 고기 1인분을 무료로 증정하는 쿠폰을 준다는 안내문을 보고야 말았다.

 

샤부샤부 육수에는 마침 라면 사리와 기타 먹거리가 수북이 남아 있었다. 고기 1인분이라는 동기 부여가 생겼으므로 배가 터질 것 같은데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아내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설사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어찌해서 다 먹어 치웠는데 제기랄 밑반찬이 남아 있었다. 초인적인 투지를 발휘해서 그것까지 먹어 치웠다. 숨을 간신히 내쉬면서 한숨 돌릴려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또  아뿔사. 지나치게 친절한 직원이 서비스라면서 과일 한 접시를 대령해놨다.

 

아무리 투지를 발휘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과일 한 접시를 두고 아내와 토론을 벌였다. 과연 서비스로 주는 과일까지 다 먹어 치워야 고기 1인분 쿠폰을 주는지 아닌지에 관한 토론이었다. 우리에겐 생사가 달린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점잖은 사람이 10대 아르바이트생에게 서비스로 주는 과일까지 다 먹어야 쿠폰을 주나요?”라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급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서비스로 준 과일은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아니므로 예외 조항에 속한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지만, 혹시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면 내가 배가 터지도록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은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애증의 과일을 차마 뱃속까진 넣진 못하고 목구멍의 중간쯤에 쑤셔 넣은 다음 배를 부여잡고 간신히 계산대로 갔다. 직원분에게 조심스럽게 우리 다 먹었어요라고 선언했는데 꼼꼼한 직원은 우리 자리로 가서 매의 눈초리로 우리가 남긴 접시를 꼼꼼히 확인한다. 그 몇 초가 몇 시간은 되는 줄 알았다.

 

합격 통보를 받고 기뻐할 여유도 없이 배를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번에 올 때는 딸내미와 함께 와서 고기를 맛나게 먹는 상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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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8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ㅎㅎㅎ 저희도 둘이서 치킨 하나를 다 못 먹어요. 그래서 다음날 치킨덮밥 해먹어요 ㅎㅎ 그래서 아이오면 시켜먹어요 ㅠㅠ

박균호 2022-03-28 21:36   좋아요 2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전 치킨 5조각이 한계입니다. ㅎㅎㅎㅎ

서니데이 2022-03-28 22: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코로나19가 조금 더 좋아지면 부모님과 함께 샤부샤부 먹으러 가고 싶어요. 자주 가던 곳인데 코로나19 이후로는 못 갔어요. 가게에서 1인분 쿠폰 주는 건 좋지만 그날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박균호님 좋은하루되세요.^^

박균호 2022-03-29 00:08   좋아요 1 | URL
네 샤부샤뷰 맛나요 ㅎㅎ 감사합니다

기억의집 2022-03-28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웃으면 안 되는데… 한참을 웃었네요!!! 다음엔 가족 모두 맛있게 드세요~

박균호 2022-03-29 00:08   좋아요 1 | URL
맘껏 웃으셔도 됩니다 ㅎㅎㅎ
 

사는 곳이 워낙 정치적으로 편향된 곳이라 어이없고 황당한 장면을 자주 보는데 오래전에 희한한 문자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다. 지역 국회의원이 대통령한테 감사 문자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정치를 모르지만 적어도 학교 때 배우기로는 대한민국은 삼권이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도록 설계된 국가다. 기껏 행정부를 감시하라고 국회의원 만들어줬더니 행정부의 수장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줬다고 주인을 따르는 개 마냥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양새라니. 감시견을 하라고 뽑아놨더니 애완견이 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하긴 그 국회의원 자신은 자랑스럽기도 하겠다.

 

며칠 전 나도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주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일이 있었다. 주말이 되어 본가에 왔더니 얼마 전 새로 낸 <성공을 부르는 창업 노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집사람과 딸아이가 내 책을 유심히 읽는 경우가 자주는 아니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대뜸 아내가 당신 책을 도윤이가 과제를 할 때 참고를 많이 했어이러잖는가. 내가 책을 내면서 그다지 영광스러운 일은 없었는데 아내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아내의 말을 듣고 있던 딸아이는 급기야 내 책의 글귀를 줄줄 암송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이 창업자들이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창업자들이 만든 상품을 이용하고 ~”

 

내 책의 쓸모가 이토록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며칠 뒤 퇴근하고 쉬고 있는데 딸아이에게 영상통화가 왔다. 첫 마디가 아빠, 고민이 있어였다. 이 또한 설레는 말이다. 다 큰 딸아이의 고민 상담 상대가 된다는 것 만큼 세상의 아빠에게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딸아이의 고민은 지금 인턴으로 다니는 직장의 퇴사문체였다. 원래는 이번 달 복학을 하면서 그만두어야 하는 직장인데 인턴이지만 재택근무를 하며 200만 원이 넘는 급여, 명절 상여금, 통신비 지원, 복지 카드까지 주는 자리를 포기하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나름 고민을 하다가 결국 퇴사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월차였다. 제 딴에는 퇴사를 하면서 몰아서 쓸 생각이었는데 요새 회사가 워낙 바빠서 팀장님이 당연히 월차를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하는 통에 월차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고. 이런 경우에 기성세대가 하는 충고는 정해져 있다. 월차는 너의 권리이니 눈치를 보지 말고 당당히 행사해라. 그게 싫으면 월차 수당을 받는 재미로 참고 다녀라. 그만큼 회사가 너를 좋게 보고 쓸모가 있다는 뜻이니 나쁜 것만은 아니다. 등등.

 

물론 딸아이는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의 짜증분노에 대해서 공감이 필요해서 전화한 것이다. 남성 호르몬이 줄어든 나는 공감함으로써 딸아이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을 했지만 남성 호르몬이 부쩍 늘어난 아내는 왜 과감하게 월차를 사용하겠다고 말을 하지 않았냐는 쓸모없는 질타를 함으로써 딸아이의 짜증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딸아이는 언제나 제 엄마의 팬이다. 딸아이에게 나는 훈육해야 할 철없는 아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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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3-27 1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 딸 사랑은 아빠의 몫.
저는 예전 애들이 어릴 때만 해도 남편에게 1등이었는데 이젠 3등으로 밀려 났어요.
남편이 두 딸을 어찌나 예뻐하는지... 하긴 저도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컸으니 할 말 없음, 이에요.
그건 그렇고...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많이 출간하셔서 이런 인사를 받는 것도 그리 기쁘실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한 권의 책을 뽑아 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 인사를 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창업과 관련한 책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추천해 드리겠습니당~~~

박균호 2022-03-27 16:37   좋아요 1 | URL
뒤로 밀려 난 것은 저도 마찬가지에요.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언제나 제가 1순위였는데 ㅠㅠㅠㅠㅠ 제 책을 추천해주신다니 영광이고 고맙습니다 !!!

mini74 2022-03-2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 있는 집과는 마니 다르군요. 부부가 갈수록 서로 의지하며 도원결의를 맺지요 ㅋㅋㅋ

박균호 2022-03-27 16:38   좋아요 1 | URL
아...그래요??? 우리 집은 모든 것이 딸 중심으로 뭉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 ㅎㅎㅎㅎ

stella.K 2022-03-27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딸바라기 아빠시로군요. 그것도 모르고 따님은 엄마만 좋아하고. 호르몬이 문제입니다.ㅋㅋ

박균호 2022-03-27 19: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런데 자주 투닥거리면서 싸웁니다..ㅠ

거리의화가 2022-03-27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님에게 참 살가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셔서 넘넘 부럽습니다.
저는 아버지하고 이리 살가운 대화를 한 적이 없어서인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박균호 2022-03-27 19:00   좋아요 0 | URL
너무 친구처럼 지내서 뭔가 아빠다운 듬직함이 없어요 ㅠ
 

우리 학교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봉사직이라 온종일 등하교 지도와 학교 주변 순찰을 하는 수고를 하면서도 교육청이 정한 사례비가 70만 원인 것으로 안다. 전직 경찰관답게 단단한 체구에 활달한 성품을 갖춘 분이다. 어찌나 촘촘하게 순찰하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머무는 상담실 바로 옆에 그분의 쉼터가 있는데 우리는 자주 커피도 함께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눈다. 말하자면 이웃사촌인 셈이다.

 

사례비가 너무 적어서 지난 수년 동안 우리 학교는 배움터 지킴이 구인난에 시달렸는데 이분이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없다.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자전거로 순찰을 하는데 마치 적토마를 탄 여포와 같은 모습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오래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웬 대나무를 회초리처럼 반듯하게 한 단을 베어왔다. 하도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대나무를 신줏단지처럼 사무실 앞에 두었길래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다. 내 질문이 채 마치기도 전에 한숨을 푹 내쉰다. “아니, 우리 집사람이 꽃나무를 그렇게 좋아한다니까요. , 힘들어 죽겠습니다. 제가 물도 주고 이렇게 지주대도 만들어야 하니까요

 

마치 딸아이를 뒷바라지하는 아빠와 같은 모습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꽃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 대나무를 정성껏 다듬어서 지주대까지 만드는 남편이라니. 내 마음마저 저절로 따뜻해졌다. 내 딸아이가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이만큼만 아내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났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리고 딱 이분만큼만 자기 일을 사랑하고 성실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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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5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때는 엄마들이 돌아가며 했었는데 지킴이 선생님이 계시군요. 금액이 ㅠㅠ 반듯하고 좋은 분이 계셔서 든든하시겠어요 ~ 그나저나 박균호님 글 읽음 항상 딸사랑이 대단하십니다. 보기좋아요 *^^*

박균호 2022-03-25 19:47   좋아요 1 | URL
네 요샌 학교마다 지킴이 선생님이 따로 계셔요. 무남독녀 딸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ㅎㅎ

서니데이 2022-03-26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 오신 지킴이 선생님이 다정하고 좋은 분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박균호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박균호 2022-03-27 05:22   좋아요 1 | URL
네 실제로 다정하고 따뜻한 분 이에요. 감사합니다. 데이님도 즐거운 일요일 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