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애머런스 보서크 지음, 노승영 옮김 / 마티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 서재에 읽지 않은 책이 쌓여 있는 것은 책을 사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읽는 속도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단 사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더 이상의 용도가 없어져서 그냥 아무렇게나 내 팽겨 둔 이유가 더 크다.

좋은 책은 사두면 언젠가는 읽게 되겠다는 기대는 별로 없다. 유혹하는 책을 발견하고, 주문하고, 택배를 기다리고, 도착한 택배를 열어서 새 책을 만지작거리는 몇 분 정도까지가 책과 관련된 나의 즐거움은 거의 끝난다. 철이 없는 것은 알겠는데 호사스러운 취미는 아니다. 한 달에40만 원 정도의 투자로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취미 생활이 책 구매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책을 사는 것은 왜 그토록 재미날까?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애머런스 보스크가 쓴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에 나온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은 처음 만나는 장난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독자들(아이이건 어른이건)의 눈에 들려고 노력한다. 알록달록한 무늬와 색깔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것이 책이라는 말랑말랑한 장난감이다. 나처럼 어른이 되고 늙어가면서도 책 사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좀 더 오랫동안 책과 함께 놀았기 때문일 테고 많은 시간에 걸쳐서 책이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자책이라는 라이벌이 처음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종이 책이 종말이 다가 왔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반면 책이라는 장난감을 좋아하는 나와 같은 독자들은 코웃음을 치었다. 전자책은 쓰다듬고 냄새를 맡으며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의 원래 용도는 장난감이 아니고 ‘사람의 지식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의 형태로 배포하기 위한 저장고이기도 하면서 기호를 배치함으로서 정보를 전하는 매개체’ 이었다. 수메르 인들은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이동 가능한 저장 장치로 유크라테스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을 선택했다. 


진흙을 사용하기 편하게끔 납작하게 만들다가 결국 점토판이라는 ‘수첩’까지 진화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석처럼 크지 않았다. 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필경사의 손바닥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성냥갑에서 큰 휴대폰 크기까지 다양하였으며 앞 뒤 면만 쓸 수 있는 오늘날의 종이와는 달리 좌우면도 쓸 수 있었다. 제작도 간단해서 대부분 햇볕에 말리는 것이 제작 과정의 전부였다. 


점토 책은 또 다른 장점도 있었다. 문서를 보관해 두는 보관소(도서관)에 대화재가 났을 때 두루마리는 유실되었지만 불에 타지 않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점토 책은 끄떡없었다. 다만 점토판 도서관의 주인인 왕들은 인내심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점토판 책에는 빌려갔다가 당일 반납하지 않으면 혼찌검을 내주겠다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식을 저장하고 전달하는 휴대용 장치’를 발전시킨 수메르 인처럼 이집트인들도 나일 강 유역에서 흔히 자라는 파피루스를 책으로 개발하였다. 파피루스 책의 빈번한 용도중의 하나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함께 매장한 ‘이집트 사자의 서’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에게 내세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200개의 주문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이게 빈부에 따라서 차별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화려하고 정교한 그림이 그려진 고객 맞춤형을 그렇지 않은 보통사람들은 기성제품을 사용해야했다. 맞춤형은 고객이 디자인을 직접 선택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사전에 제작된 저가용 두루마리 빈칸에 죽은 사람의 이름만 기입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파피루스가 원시적인 형태의 저장장치였지만 오늘날의 최첨단 정보 취득 장치인 인터넷과 책의 현대적인 형태의 기원을 제공했다. 두루마리가 영어로 스크롤 (scroll)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두루마리는 길이가 9~12미터였으니 한눈에 모든 내용을 다 볼 수 없었고 위아래로 펼치면서 쓰고 읽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모니터의 한 면에 모든 내용을 다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위아래로 커서를 움직이면서 읽거나 보는 행위를 스크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두루마리의 겉면에 내지의 내용이나 첫 구절 또는 저자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책 표지의 기원이 되었다. 


파피루스에 이어 등장한 신기술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였다. 양피지가 비록 파피루스보다 더 질기고 매끄러운 고급소재였지만 수세기 동안 파피루스를 밀어내지 못하고 공존했다. 양피지가 좋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제작하는데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들고 짐승을 도살해야 하는 만큼 비용도 많이 드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자책을 비롯한 혁신적인 형태의 책이 나타나더라도 최소한 몇 세기는 종이 책과 공존할 확률이 높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나타났다고 해서 분명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옛 매체를 단번에 밀어내지는 못한다.


메소포타미아인,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중국인도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책을 만들었다. 중국인은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나무를 끈으로 엮어서 이른바 간책을 만들었다. 간책은 중국 최초의 휴대용 정보 저장 및 전달 장치였다. 한자 책(冊)은 글자를 새긴 대나무를 엮은 모습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다. 


드디어 채륜이 종이라는 최첨단 제품을 발명했는데 놀랍게도 5세기 내내 종이와 대나무 책 즉 간책은 불편한 동거를 했다. 결국 종이가 정보 저장 및 전달 매체의 지배자로 등극하게 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편리한 종이가 불편한 간책을 서서히 밀어낸 것이 아니라 황제 환현이 더 이상 낡아빠진 간책을 사용하지 말고 신제품인 종이를 사용하라고 칙령을 내림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종이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큰 책은 지식을 취득하는 매개체라는 본연의 목적보다는 자랑질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큰 책을 ‘커피 탁자 책’(coffee-table book)부르는데 한 손에 들고 읽기 힘들기 때문에 탁자위에 올려두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세시대에 이런 책들은 수도원이나 부잣집에서 다리가 긴 탁자위에 과시용으로 올려두기만 하고 읽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경외심과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금테를 두르고 보석을 박는다면 그 효과는 더 컸으리라. 


중세 말기 때는 발달된 인쇄술 덕분에 소맷부리나 호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크기의 기도서가 출간되었다. 생각 날 때 마다 꺼내서 기도를 올림으로서 자신의 부와 신앙심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건 마치 현대인이 시간을 보는 척 하면서 명품 시계를 남에게 쓱 보여주는 경우와 비슷했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책을 상품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 속속 등장했다. 다른 인쇄업자가 만든 책과 자신이 만든 책을 구별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출판사 로고 비슷한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책 내용을 독자들에게 맛보여주고 홍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가능한 긴 제목을 정했다. 우리가 <돈키호테>라고 알고 있는 소설의 원래 제목은 <기상천외한, 기지가 넘치는, 재능이 넘치는 라만차 출신의 돈키호테>이다. 18세기에 들어서 이 마케팅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원제목을 알려줄 테니 놀라지 마시라.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가까운 무인도 해변에서 28년 동안 홀로 살다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가 그려낸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 이 정도면 제목이 곧 줄거리이자 요즘 말로 스포일러다. 


책의 ‘서문’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출판업자와 저자들은 독자들과 친밀감을 높이는 사적인 공간으로 ‘서문’을 만들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기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갈 것이지를 이야기함으로서 친밀감을 높이려고 애썼다. 이른바 메인 공연을 하기 전에 바람잡이 공연으로 관중들의 시선을 끌어오려는 마케팅이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귀족과 왕족 그리고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책은 모두의 문화가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책이 대중화 되면서 인쇄업자간의 경쟁도 치열해졌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저작권’이다. 16세기에 이미 책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가 인정이 되었고 매매도 이루어졌다. 인쇄업자들은 새 책을 내면 왕이나 교황에게 저작권을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해야 했다. 승인 권을 가진 권력자들은 정부에 고분고분한 인쇄업자와 그렇지 않은 인쇄업자를 차별함으로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삼이나 담배 사업자를 지정해서 관리하듯이 성서나 교과서 같은 꾸준히 잘 팔리는 책에 대한 소유권은 선별된 소수에게만 부여했다. 


책에 대한 권리가 물건으로서의 책이 아니고 책 속에 담긴 내용(텍스트)로 넘어가는 법률적 변화도 일어났다. 오늘날 출간계약서에 저자가 갑, 출판사가 을로 표기되는 기원이 이때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평범한 책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눈길을 끄는 표지 디자인, 저자와 책 제목이 한눈에 보이도록 인쇄된 책등, 뒤표지에 인쇄된 ISBN 바코드는 1980년대 대형 오프라인 서점이 호황을 누릴 때 형성되었다. 가능한 많은 책을 보기 좋게 전시하고, 독자들이 그 책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도록 상품에 가능한 많은 정보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책이라고 부르는 상품 중에서 가장 찬란한 영광을 누리고 가장 비참하게 쇠태를 한 것은 백과사전이다. 최초의 백과사전인 드니 디드로의 17권짜리 <백과전서>가 1751년에 출간되었는데 무려 수천 명의 인력이 투입된 대공사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백과사전의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저가용 보급판을 따로 판매했다고 한다. 1990년대 시디롬 형태의 디지털 백과사전이 등장할 때 까지 200년 이상의 영광을 누리고 장렬히 사라졌다. 한 때는 교양 있고 돈 꽤나 버는 가정이라면 위풍당당하게 서재에 꼭 꽂혀 있었는데 요즘은 가구 전시장의 소품으로 전락했다. 마치 수많은 관중 앞에서 우승을 밥 먹듯이 한 경주마가 동네 놀이공원에서 효도관광을 하러 온 노인을 태우고 다니는 늙은 말 신세라고 해야 될까. 


최근의 출판시장에 관한 잘못된 선입견 하나를 바로 잡는다.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2016년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전자책의 판매량이 감소했고, 2015년 미국에서의 종이책 판매량이 3.3 % 증가했다. 세부 수치에서 주목할 만 한 것은 아동용 보드북 판매량이 무려 7.4% 늘었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시대를 역행하는 이 기이한 현상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운동능력을 연습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만지고, 놀 수 있는 촉각적 사물이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전자 기기로 정보를 얻고 학습하는 것보다 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동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부모들이 알아차리고 있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를 읽으면서 알게 된 간단하지만 재미있는 지식 하나는 book이 예약하다는 동사의 뜻으로 쓰이는 이유가 예약 내역을 장부에 기록한 옛날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들과 내가 쓴 책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내 아내와 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내와 딸은 내가 책을 몇 권을 냈는지 모를 수가 있고 나는 그들이 내 책의 출간 현황을 어느 정도 아는지 모른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부끄럽다.

작년인가 집으로 우송된 소득세 청구서를 보고서야 아내는 내가 직장에서 원천 징수되는 것 말고도 별도로 ‘소득세를 내는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오래된 새 책>을 출간했을 때 방송국에서 촬영을 오겠다는 날이 되어서야 아내는 내가 책을 냈고 집에서 인터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숨기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이젠 책을 7권이나 냈으니 ‘대놓고’ 글을 쓰는 편이다. 여전히 책에 대해서 대화는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우리 가족의 불문율이 친척들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여지없이 깨진다. 작은할아버지가 수필가이셔서 책을 내기도 하셨고, 매년 수필 동인지를 세대별로 나눠주셔서 책을 내는 것이 별다른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친지 분들이 내가 쓴 책 이야기를 하시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는지 숙모님이 ‘조카, 혹시 자네 술 마셨나’고 하문할 정도였다. 특히 참기 어려웠던 순간은 날 더러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부를 때였다. 민망함과 ‘진짜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는 죄책감으로 그냥 땅으로 꺼졌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내 전매특허인 ‘버럭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내였다. 아내가 나섰다. 아내는 나처럼 숨는 것이 아니고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렷또렷하게 이렇게 말하더라.

“이 사람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에요.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입니다.”(명쾌하다)

“네이버에서 박균호를 입력해보세요”(아내는 내 이름을 네이버에서 입력해봤구나)“

<독서 만담>이라는 책을 썼어요” (아내는 숭고하다. 자신을 못된 아내로 생각할 수도 있게 만드는 책을 나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그 책에 관해서 쓴 내용이에요” (심지어 아내는 내가 쓴 책을 읽어 봤구나)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가 내가 쓴 책에 대해서 가장 긴 발언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몇 마디로 친지들은 더 내가 쓴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다.

며칠 뒤 아침에 <고전적이지 않은 고전 읽기>가 세종 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아내에게 그 소식을 자백했다. 3쇄를 찍게 되었다는 소식도 알려주었다. 숨기기에는 ‘제법’ 큰 뉴스이니까. 아내는 이례적으로 ‘축하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이게 유시민이 우리 집에 와서 놀다 간 것이구나”라는 말을 했다. 당연히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을 수 있는 밖 에. 아내가 전날 밤에 유시민 선생이 내 서재에 와서 나와 같이 놀다가 간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여러 명의 친척에게 ‘칭찬 조리 돌림’을 당했을 때도 참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로또를 사지 뭘 했냐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샀단다. 5천 원에 당첨되었다고.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아내에게 미안해졌다. 아내가 꾼 대박 꿈을 내가 빼앗은 것 아닌가. 세종 도서에 선정되고 3쇄를 찍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설명하려던 나는 기운이 빠졌다. 잘 자라는 이모티콘을 조용히 누르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19-12-02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내분이 참 현명하고도 사랑스러우십니다 호호^^

박균호 2019-12-02 20:54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당.

잔느 2019-12-0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내분이 참 자랑스러우시겠어요. ㅎㅎ

박균호 2019-12-10 06:30   좋아요 0 | URL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ㅎㅎ
 
아름다운 단단함 - 세상.영화.책
오길영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운 단단함>은 영문학을 전공한 대학교수가 쓴 문화 에세이다. 오길영 선생이 쓴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하는 데는 약간의 주저함이 필요했다. 제목도 표지도 묵직하다. 결국 이 책을 읽기로 한 것은 오길영 선생이 SNS에 올리는 일상적인 글을 읽고 있자니 현학적이고 어려운 글을 추구하는 학자가 아니라는 알겠고, 문학 이론서를 주로 내는 <소명출판>이 출간을 결정했다면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단단함>을 읽자마자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가령 이런 '단언'이 그랬다.

첫째, 지금도 작가의 "불결'한 삶과 작품을 분리하는 케케묵은 독법을 내세우는 시각이 있다는 것, 자신의 무지를 그런 식으로 눙쳐서는 곤란하다. 그건 현대문학 이론의 동향에 눈 감은 채 수십 년 전 작품 물신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다. 둘째, 여전히 미당의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 이 평론가는 일제 강점기를 "지금의 이북"과 동일시하면서 그때는 "비판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일률적으로 친일파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아량을 베푼다.


대학교수가 쓴 말랑말랑하고 여유를 찬양하는 에세이거나, 그들만의 리그에서 사용하는 암호문의 나열인 것으로 오해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바란다. 나도 그런 선입견이 없지는 않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는 '문화예술에 관한 실질적인 가치관의 정립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실용적인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당의 문학과 친일행위를 분리할 것인가? 라는 고민은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평생에 걸친 고민이 될 수 있다. 나만 해도 '친일만 안 했어도'라는 말로 은근히 양다리를 걸치는 편이다. 이 문제를 두고 깊은 사유나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언을 할 수 없었다. 

거창하게 예술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티브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가령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하는 자유당 부역자 임화수를 생각해보자. 그의 악행을 보면서 분노를 하지만 막상 사형을 앞두고 어머니와 면회를 하면서 임화수가 눈물을 쏟는데 내레이터가 "그는 보기 드문 효자였다고 한다"라는 멘트를 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집에서 효자인 임화수와 밖에서 독재 정부에 부역하는 임화수를 어떻게 정리를 할 것인지 잠시나마 고민을 하게 된다.<아름다운 단단함>을 읽은 독자라면 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맥락과 시각의 크기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집에서 따뜻한 효자는 좁은 시각이고 민주주의라는 큰 시각에서 보면 독재정권의 부역자다. 

큰 시각으로 평가하자는 기준을 생각하면 한 사람을 어떤 카테고리에 포함해야 할지 고민이 되지 않는다. 세월호 비극을 두고 '아이는 또 있지 않은가'라든가 '또 낳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을 하는 악마를 만나면 오길영 선생의 이 단언을 생각해보자.

윤리는 그 어떤 아이로 대체할 수 없는 "이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에 기반한다.


~다로 끝나는 단언의 글은 우연히 나오지 않는다. 수년간의 각고의 노력과 사색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단단함>에는 ~다로 끝나는 오길영 선생의 단언과 정의가 가득하다.

사생활을 들먹이기 시작하면, 아마도 세계문학사나 영화사에서 살아남을 작가나 감독, 배우, 예술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덕군자이면서 뛰어난 작가, 감독, 배우, 예술가를 나는 거의 알지 못한다.


다행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버리지 않아도 되고, 아내는 이 모 배우를 내치지 않아도 되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9-12-0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도스토옙스키는 왜...? 도박꾼이라서요?
전 고은 시인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해외 언론이나 작가들은 고은 사태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기대가 있었는데
올핸 후보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생각하면 그렇긴한데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또 그렇지가 않거든요.
따로 보아야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이 책 읽을 뻔했는데 기회를 놓친 게 좀 아쉽군요.

박균호 2019-12-02 15:44   좋아요 0 | URL
아...도끼는 그냥 농담삼아 한 이야기죠.
고은은 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고질적인 성범죄자입니다. 근데 웃기는 것은 그가 쓴 일기를 묶어서 낸 책을 읽어보니 더 가관이더라구요. 차마 입에 올리기 싫은 음탕한 짓꺼리를 하고도 버젓이 책에 실어 났더라구요.
 
나쓰메 소세키 - 인생의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7년 일본의 한 문예가가 한 결정을 두고 전 일본이 들썩거렸다. 그 문예가는 도쿄제국대학 강사 자리를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사에 입사를 한 것이다. 지금도 최고 명문대학이지만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위엄은 더욱 대단해서 이 대학 출신만이 ‘학사’로 불릴 자격이 주어졌다. 도쿄제국대학 강사 자리를 박차고 선택한 아사히신문사의 입사 과정도 독특했다. 신문사가 먼저 이 문예가에게 조건을 제시하며 입사를 제의했다. 이 문예가가 제의받은 조건은 이랬다.


우선 월급을 도쿄제국대학의 2배를 지급하며, 1년에 100회 문예작품을 아사히신문에 연재하며 출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말하자면 아사히신문사 전속 문예가 자리 인 셈이다. 이 제안에 따라 일본의 최고대학 선생자리를 그만두고 신문사 직원이 된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다. 누가 봐도 이상한 결정이었으나 당시 일본 대학의 상황이나 나쓰메 소세키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납득이 된다.


우선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지금의 서생은 학교를 여관처럼 생각한다. 돈을 지불하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라 여길 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숙박지를 옮긴다. 학생들을 대하는 교장은 여관 주인 같고, 교사는 심부름꾼이다. 주인인 교장조차도 때로는 손님들 기분에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될 판에 하물며 심부름꾼은 오죽하랴. 훈육은커녕 해고되지 않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정도다. 당연히 학생은 거만해지고 교사의 가치는 땅에 떨어진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10쪽 시와서 출판사


나쓰메 소세키가 교사로 근무한 마쓰야마 중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에 실은 글이다. 한마디로 당시 학교의 처지를 비판하고 손님인 학생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교사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나는 교육자로 적합하지 않고, 교육가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부적합한 사람이 입에 풀칠할 방법을 찾다 보니 가장 얻기 쉬운 것이 교사의 지위였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10쪽 시와서 출판사


본인 스스로 교직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적성도 맞지 않는다고 토로한 것이다.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교직에 몸담은 것뿐이다. 애초부터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아는 사람’이 권해서 교사가 되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생을 대표하는 주요한 결정들 즉 건축가의 꿈을 포기하고 문과대학에 입학 한 것, 교사가 된 것, 소설을 쓴 것 또한 ‘남들이 그렇게 말을 해주어서’ 결정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조차도 ‘써 달라고 부탁을 해서’ 썼고, 한 회로 마칠 생각이었는데 ‘계속 써달라고’ 하는 바람에 더 써 나가다 보니 어쩌다가 장편소설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스스로 본인 인생은 ‘남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토로했겠는가. 


소세키가 대학 선생 자리를 그만 둔 것은 그가 교직에 대한 흥미와 적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일본의 대학 교수에 대한 열악한 처우도 무시할 수 없다. 아마노 이쿠오가 짓고 박광현. 정종현이 번역한 <제국대학>에는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열악한 재정상황과 교수에 대한 처우가 설명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대학 교수의 봉급은 2,370엔인데 직급이 낮은 관리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조교수는 1천 엔에 불과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교수들은 열악한 교수에 대한 처우 때문에 마음 놓고 연구에 매진할 수도 없고 우수한 인재를 교수로 초빙하기도 어렵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려는 교수를 막을 방법도 없다고 개탄했다. 국가가 학자를 우대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것인데 그들의 우려는 틀리지 않아서 나쓰메 소세키는 도쿄제국대학을 그만두고 신문사 직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제국대학이 교수 월급을 ‘붓으로 살짝 스친 듯하게’ 줘야하고 설립이나 운영과정에서 민간이나 각 지방에게 자금을 의지할 수 밖 에 없었던 것은 당시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끊임없이 군사비를 증액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리들이 한정된 교육관련 예산으로 제국대학에 특혜를 부여했는데도 제국대학은 제정이 열악했다.


어쨌든 아사히신문사로 이직할 당시 나스메 소세키는 ‘강사’에 불과했고 자식은 무려 6명이었다. 대학 강사로 일하게 된 것 또한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영국에서 2년 동안 유학을 한 것에 대한 의무복무였다.  비록 신문사로 이직하고 나서 월급은 2배로 올랐지만 나스메 소세키는 부유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다.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에는 그의 궁색한 살림살이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다.


집주인은 다른 임차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집세를 40엔이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너무나도 솔직한 나쓰메 소세키는 이를 무시하고 월세 35엔짜리라고 말하고 다녔던 그의 집은 300평 대지에 7칸의 방이 있었다. 저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선 7개의 방중에 가장인 소세키가 2칸을 차지했고 아내와 6명의 아이가 있었으니 그의 집은 늘 북적거렸을 것이다.


천정은 빗물이 새서 얼룩이 졌고 바닥은 다다미가 깔리지 않은 마루였는데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겨울에는 추위로 고통받아야했다. 햇살이 비쳐드는 곳에서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그의 집에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어서 툇마루로 책상을 들고 나가 햇볕을 머리 위로 받아가면서 글을 쓰기도 했다. 햇살이 따뜻한 것을 넘어서 뜨거운 지경이 되면 밀짚모자를 쓰고 글을 썼다고 한다.


1909년 아사히신문사로 이직한지 2년이 되던 해에 나쓰메 소세키는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당시 유력 잡지였던 <태양>이 문예계의 각 분야별로 명가를 정하는 독자투표를 진행했는데 나쓰메 소세키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금으로 만든 상패를 주는  1위에 올랐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광은 고맙지만’ 상패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쓰메 소세키가 말한  ‘상패 거절 이유’는 이랬다. 우선 자신의 가치를 아무런 배려 없이 투표하는 사람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졸지에 투표를 당하는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자신을 1등으로 뽑은 투표는 다수의 폭군이 동맹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워싱턴이나 나폴레옹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질문으로 어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예가들의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위로 뽑힌 자신의 명예는 동료 문예가들의 명예를 깎아서 갖다 붙인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스메 소세키 자신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한 독자들의 선물은 받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깎아내리거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꺼이 받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석 달 동안 사심 없이 투표를 진행하고 집계했을 뿐만 아니라 10명의 문인에게 상패를 수여할 계획을 세운 <태양>의 의도에서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며 그 의도를 오해했다면 언제든지 사과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그의 ‘상패 거절 이유’는 끝난다. 그걸로 끝났을 것 같은 나쓰메 소세키와 <태양>와의 묘한 인연은 2년 뒤에 발생한 또 다른 사건 때문에 이어진다. 


1911년 2월 문부성이 나쓰메 소세키에게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말하자면 박사학위를 받을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 일이란 말이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 또한 의아했다. 


우리가 박사를 취득하는 과정이랑 너무 다르지 않는가 말이다. 오늘날 박사학위를 받자면 5년 이상 동안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고 논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피땀을 흘려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관련 제도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학사, 생도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등학생 이하를 생도라고 부르고 대학생을 학생이라고 불렀다. 대학을 졸업하면 수여하는 ‘학위’라는 용어도 일본이 만든 용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일본의 그것은 닮은 구석이 많은데 아무리 100년 전 일본의 일이라지만 당사자도 모르는 박사학위수여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국대학>에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나와 있었다.


1887년 발표된 도쿄대학의 ‘학위령’에 따르면 그 당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 번째 길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학위취득방식이다. 즉 대학원에 입학을 해서 시험을 거친 사람에게 박사학위를 주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첫 번 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과 동등하거나 더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에게 대학의 평의회를 거쳐 문무대신이 박사학위를 주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법은 또 두 가지 경우로 나눠지는데 본인이 쓴 논문 한편을 제출해서 대학의 심의를 거쳐서 박사학위를 받는 ‘논문박사’와 문부대신이 대학원 시험을 통과한 사람과 실력이 동등하다고 판단한 사람의 경우다. 대학 평의회에 추천하고 3분의 2이상이 찬성하면 그 사람에게 수여하는 ‘추천박사’다. 


1898년에는 추천 박사제도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박사회에서 학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자와 제국대학의 총장이 문부대신에게 추천한 문과대학 교수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1년 문부대신이 나쓰메 소세키에게 수여하겠다고 한 박사 학위가 바로 박사회에서 추천해서 수여하는 것이었다. 


1898년 발표된 학위령은 1920년까지 존속하는데 그때가지의 학위 수여에 관한 통계를 보면 흥미롭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정식시험에 합격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3%에 불과했다. 대학원에 다니지 않고 논문 한편을 제출하고 통과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초창기(1887년~1894년 사이의 14%) 보다 많이  증가해서 63%를 차지한다. 문제는 나쓰메 소세키가 해당하는 박사회 추천과 제국대학 총장의 추천에 의한 박사학위 수여 비율이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속한 문학 계열은 그나마 추천 박사의 비율이 23%에 지나지 않았지만 법학계열은 84%, 공학계열은 76%에 육박했다. 이 세태를 두고 <태양>이 우후죽순처럼 실력이 없는 박사학위가 나온다는 의미로 ‘죽순박사’라고 비꼬며 비판했다. 변변한 한 권의 저서도 없는 사람이 박사가 된다면 그 실력을 누가 인정하겠느냐는 지적이었다. <태양>이 ‘죽순박사’를 비판한 것은 소세키가 박사학위를 거절한 1911년 이후의 일 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리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는 1909년 <태양>이 수여한 ‘금으로 만든 상패’를 거절하고 1911년에는 문부성이 주는 박사학위를 거절했다. 석 달 동안 공을 들여서 일을 한 끝에 수여하기로 한 ‘상패’를 거절당한 <태양>은 그 이후에 나쓰메 소세키의 ‘박사학위 거부’를 옹호한 것이다.


이쯤에서 <나쓰메 소세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박사 학위 거절 사유’가 궁금해진다. 추천박사는 본인이 신청한 것도 아니고 학위 수여는 문부대신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소세키는 박사학위를 거절한 것이 아니고 거부한 것에 가까운 당시로서는 돌출행동이었다. 당연히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박사학위가 흔해지면 학문의 목적이 학위취득이라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는 학자는 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부작용을 우려했다. 또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운이 아니라 오직 실력과 업적에 의해서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쓰메 소세키는 괴짜가 아니다. 영국 유학 시절 가족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 많이 전시된 거리를 일부러 피해 산책을 한 가족을 사랑한 가장이자 노력과 업적이 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이 없는 지식인 이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사랑한 공간들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는 18년째 출간 소식이 뜨면 예약 주문을 하는 작가가 있다. 서재가 터져 나갈 만큼 책으로 싸여있는데도 ‘재미없는 책만 있다’고 혹평을 하는 아내가 유일하게 찾아서 읽는 작가가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데도 내가 글쓰기를 배우고 싶은 작가가 있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다 읽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글 쓰는 사진작가 윤광준이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물건을 주로 다룬 그간의 글과는 주제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가장 맛깔나게 쓰는 그가 ‘공간’을 선택한 이유를 상상해봤다. 답은 간단한 것 같다. 공간은 물건들의 집이니까. 한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이나 생활한 공간은 더 내밀하게 그 주인을 추억하게 한다. 나로 말하자면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 딸아이가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거나,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의 휠체어를 끌고 산책하던 요양원 산책길을 재회하면 그리움이 치솟는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말 그대로 윤광준 선생이 반해서 즐겨 찾는 공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서울 6호선 녹사평역, 씨마크 호텔, 스타필드,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롯데 콘서트홀, 뮤지엄 산, 베어트리파크, 죽설헌, 보안 1942등.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반 가게로’ 찬사를 받는 ‘풍월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장소도 있지만 이름도 낯선 곳도 있다. 



‘서울 6호선 녹사평역’편은 유럽의 지하철 이야기라는 맛있는 반찬이 섞여서 윤광준 표 명품 요리가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편은 이 건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가 담겨 있어서 또 다른 현대사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겠다. ‘풍월당’ 편은 예술을 사랑하는 설립자의 맑은 영혼이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너무 반갑고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휙’책을 넘겨보지도 않고 바로 내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글 잘 쓰는 윤광준 선생의 글은 따뜻하고 재미가 있는데 텍스트만 이어지더라. 아무리 글쓰기 실력이 수려하더라도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건축물을 설명하는데 사진이 없으면 답답하지 않은가.


 설명이 수려하면 더욱더 그렇다. 궁금하면 ‘휙’ 뒷장을 넘겨보면 되지 라고 충고하지 마시라. 텍스트에서 잠시라도 눈을 떼기 싫었으니까. 왜 등산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끊임없이 산길만 이어질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눈앞에 산 아래 장관이 펼쳐지는 순간 말이다. 이 책이 그랬다. 어느 순간 ‘공간’ 사진이 나타난다. 


글쓰기 실력에 어지간한 자신이 없으면 사진 자료를 먼저 제시하거나 텍스트와 함께 싣는다. 독자의 시선을 사진으로 장악하면 글쓰기 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상쇄가 되니까.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그 반대다. 텍스트가 이어지고 사진이 나중에 등장한다. 이게 묘한 재미가 있더라. 오롯이 텍스트로만 건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작가의 정감 있는 글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사진작가 윤광준의 사진이 눈 앞에 펼쳐진다. 마치 베토벤 9번 교향곡에서 ‘환희의 송가’가 등장하는 장면과 같은 ‘탁 트임’을 맛보게 된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은 가족과 함께 갈 만한 아름답고 재미난 공간이 많지만 내가 감탄했고 가장 윤광준답다고 생각한 부분은 ‘나의 화장실 순례기’ 편이다. 타일과 목재로 내부를 마감하고 둥근 세면대 거울이 걸린 ‘사운즈 한남’ 화장실, 묵직하고 차분한 ‘포시즌스 호텔 서울’ 화장실, 우아한 분위기의 조명과 차분한 색채의 조합이 세련된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호텔’ 화장실, 탄탄하게 짜 놓은 나무틀 사이로 볼일을 보는 ‘김제 망해사’ 해우소 등.



윤광준 선생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극찬한 호텔 화장실은 장차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한 선물로 남겨둔다. 아직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모르는 듯한 아내가 가능한 한 늦게 이 책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을 서재 구석에 숨겨두기로 했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에 나오는 멋진 공간으로 아내를 데려가서 가장의 위엄을 뽐내고 싶으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9-11-3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래서 일전에 저의 서재에 그런 댓글을 남기셨군요. 아닌가...
전 반대로 화장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요즘도 가끔 안 좋은 꿈을 꾸곤 합니다.
윤광준 씨 글 잘 쓴다는 말은 들어 보긴했는데
읽어 볼 기회도 없을뿐만 아니라 잘 쓰면 얼마나 잘 쓰겠어 했는데
그러면 안 되겠네요.ㅠ
기억하겠습니다.^^

박균호 2019-11-30 17:5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고요. ^^ 윤광준 선생 사진 에세이 참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