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사들이 SNS에 올린 게시물 때문에 곤욕을 치를 때마다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고 말한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의 감독인 퍼거슨의 선견지명을 되새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SNS에 올렸다가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SNS를 즐기는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책을 읽는 사람과 비교되어 자투리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과연 SNS는 단지 ‘시간 죽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아름다운 모습’과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행위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SNS는 이 시대의 천재가 만들어낸 도구다.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더 혁신적인 발명품이다. 어떤 물건이나 제도라도 사용자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을 한다. SNS를 굳이 잘 사용해야 한다는 지침에 구속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목적을 가지고 사용한다면 천리마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효과를 얻는다.
SNS를 글쓰기의 장으로 애용하는 나의 상황을 설명해보자. 지방 소도시에 사는 나의 주변에 출판이나 글쓰기 또는 책과 관련이 있는 인사는 동네서점 사장, 논술학원 원장이자 시조 시인, 지역 신문사의 편집장이자 사장이 전부다. SNS의 세계로 가면 사정은 다르다. 고등학교 시절 흠모했던 시인, 대학 시절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소설의 저자, 내가 즐겨 있는 책들을 펴내는 출판사의 사장, 편집자, 온라인서점 간부 등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
나는 페이스북 사장만큼이나 페이스북의 ‘안녕’을 기원한다.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저술한 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출판업계의 사정을 경청할 수 있는 상대가 페이스북에 있다. 페이스북이 주는 효용성과 정보의 가치는 너무나 커서 페이스북이 없는 글쓰기를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나라고 무심결에 페이스북에 로그인해서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시간이 왜 안 아깝겠는가. 적어도 글쓰기를 좋아하고 책을 간헐적으로 내는 나로서는 페이스북이 주는 혜택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시간 죽이기는 ‘그따위’에 불과하다.
나는 페이스북을 이렇게 활용한다
끊임없이 인터넷으로 사실을 점검하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글을 쓰는 나로서는 책을 내겠다고 사전 한 권만 들고 산속에 틀어박히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생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나의 저작물을 고려해보면 다른 사람과 일상생활을 하지 않고는 쓸 수도 없다. 한 꼭지를 쓸 때마다 독자들의 피드백이 필요해서 SNS에 매번 포스팅한다. 『독서만담』(북바이북)이나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바이북스)에 사용된 소위 ‘자기 비하 개그’ 문체는 몇 년 전 내 글에 달아준 페이스북 친구의 “지금까지 선생님이 쓴 글 중에서 제일 재미나요”라는 댓글 덕분에 탄생한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쓴 글인데 그 댓글을 읽고 ‘이런 문체를 재미있어 하는 구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이후로는 쭉 ‘시시콜콜 개그 문체’를 고수해왔다. 그 결과물이 위에서 언급한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와 『독서만담』이다. 페이스북에서 읽은 댓글 하나 덕분에 내가 올린 글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도 웃고 갑니다’라는 댓글을 매번 받았고, 어쭙잖지만 책을 두 권이나 냈으니 페이스북에 엎드려 절을 해도 시원찮다.
생각날 때마다 한 꼭지씩 포스팅했고 독자들과 소통을 즐겼으며 칭찬을 많이 받았다. 웃고 즐기는 사이에 책을 낼만큼의 분량이 되었다. 한 가지 문체를 고수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별 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 속에서 재미있는 글감을 발견하고는 한다. 페이스북을 활용한 나의 글쓰기에 창작의 고통이란
없었다.
페이스북은 마감의 압박 또한 없다. 나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게으름뱅이에게는 이보다 더 쾌적한 글쓰기 공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페이스북 친구들은 끊임없이 내가 올린 글의 편집자이자 독자이자 교정자가 되어준다. 하다못해 틀린 맞춤법을 지적해주는 이도 무엇보다 소중하다. 내가 쓴 글을 혼자서 읽고 퇴고를 한다면 나만의 생각에 함몰되어서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견해를 듣지 못한다.
재미나다고 생각한 글에 독자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별 기대 없이 올린 글에 환호하기도 한다. 확실히 작가가 자신의 글에 대해서 자평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작가는 독자들의 호감과 공감을 먹고사는데 실시간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말이다. 인터넷에서 공짜로 읽을 수 있는 글을 굳이 돈을 주고 사람들이 사 볼까 하는 우려는 접어두시라. 당신이 책을 냈을 때 가장 먼저 지갑을 여는 독자는 평소에 당신의 글을 매일 읽었던 페이스북 친구들이다. 당신의 글을 좋아하고 읽었던 독자는 웹으로만 읽었던 글을 종이에 인쇄된 형태로 읽어보고 싶어 한다. 읽지 않더라도 소장하고 싶어 한다. 어느 작가의 책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모아서 출간되었다고 해서 책값을 아끼겠다고 그 작가의 페이스북 계정을 찾은 다음 책 한 권의 분량의 포스팅을 일일이 스크롤을 내려가며 읽을 정도로 알뜰한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나는 페이스북을 이렇게 관리한다
우선은 특별히 부탁하지 않는 이상 내 글쓰기와는 무관한 게시물을 공유하지 않는다. 아니다. 공유 자체를 경계한다. 심지어 내 책이 출간되고 내 책에 대한 찬사가 가득한 서평 기사나 글을 공유할 때도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게시물을 삭제한다. 사람 마음은 다 똑같다. 자신의 글이 없고 공유만 잔뜩 해놓은 이와 친구를 맺고 싶은가. 나의 페이스북 계정은 원고지라고 생각한다. 원고지에는 오로지 자신의 글로만 가득 차야 한다.
내가 꿈꾸는 페이스북 생활이란 이런 거다. 내 책이 나왔다고 해서 ‘내 책 나왔으니 돈 주고 사시요’라는 포스팅을 올리지 않는 것. 내 책에 대한 서평 기사가 나왔다고 해서 ‘제발 공유 좀 하란 말이야’라며 그 기사를 공유하지 않는 것. 평소와 다름없이 독자들의 배꼽을 도둑질하기 위한 만담을 포스팅했는데 ‘선생님 새 책 나왔네요, 축하합니다’라는 독자들의 댓글에 점잖게 ‘아, 어떻게 아셨어요?’라며 무심히 반문하는 것. 내 페이스북 계정에 내가 쓴 책을 구매한 인증사진을 태그하는 독자에게 정중하게 ‘내 계정은 오로지 나의 것이니 수고스럽게 그런 인증사진을 안 올리셔도 됩니다’라며 부탁하는 것. 다시 말하자면 페이스북 나의 계정에서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나의 이야기’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관리를 한다는 말이다. 내가 방송국을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 중간에 광고를 끼워 넣어서 좋을 게 없다.
모 온라인서점에서 별도로 활동비를 받기 때문에 상도덕을 생각해서 내 글을 올릴 때 온라인서점 블로그 주소를 링크하는데, 이마저도 내키지 않는다.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쾌적한 글 읽기 환경을 제공하고 싶다. 굳이 링크해서 새로운 창을 열어야만 내 글을 읽고 싶게 하고 싶지 않다. 내 글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굳이 그런 불편함을 끼치고 싶지 않다. 공유된 기사를 읽고 싶어서 환장할 정도로 소개 글을 남기지 않는 이상 그 기사를 읽어줄 만큼 한가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같은 글이라도 링크 없이 타임라인에 고스란히 포스팅하는 것이 링크 속에 넣어서 포스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좋아요’를 얻는다. 현대인들은 광고라면 치가 떨린다. 당신의 독자는 또 한 번의 클릭은 또 한 번의 광고에 노출되는 일이라거나 다른 누군가의 돈벌이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각박한 세상에 소통하겠다고 당신의 친구가 되어준 고맙고도 불쌍한 독자들을 자본주의의 먹잇감으로 내몰 필요도 없고 그 노릇을 감수해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내가 원문을 페이스북에서 다 읽을 수 있도록 하고 하단에 링크를 걸어두는 이유다. 각자 취향대로 편하게 내 글을 읽으라는 의도다. 링크된 사이트가 가독성이 더 좋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독자 편의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작가다. 댓글이 100개가 달려도 일일이 답글을 남긴다. 독자가 친히 금쪽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내 잡문을 읽어주는 것으로도 부족해 친히 댓글을 하사하셨는데 감히 그 댓글에 ‘좋아요’를 클릭하는 것으로 끝내는 무례한 짓은 하지 않는다. 답글을 달아주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마치 복사하기 기능을 사용한 것처럼 똑같은 내용을 남기지 않는다. 조금씩 다르게, 댓글을 달아준 친구의 상황에 걸맞은 답글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재미있는 글을 쓰더라도,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싶어 하더라도 작가는 독자들의 ‘갑’이 될 수 없다. 나의 글에 ‘좋아요’를 매번 눌러준다는 것이 매번 재미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간 읽었던 재미있는 글에 대한 감사와 신의의 표시로 비록 재미가 없는 글이지만 ‘좋아요’를 적선하는 독자도 있다.
다른 작가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내 책에 대한 서평을 그 어떤 글보다 정독한다. 칭찬하면 쑥스럽고 악평을 하면 서운하지만, 분노는 하지 않는다. 내가 쓴 글은 뼈를 깎는 고통이 동원되지 않았다. 산속에 틀어박혀 수도승 생활을 하면서 쓴 글도 아니다. 그저 매일 독자들과 ‘웃고 즐기면서’ 쉽게 쓰인 글이다. 들인 피와 땀이 없으니 분노할 자격이 없다. 그저 잠시 ‘귀신에게 홀려서’ 지갑을 연 독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기획회의’ 437호(2017. 4. 5) 특집' 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