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아버님댁에 보일러 놔드려겠어요~"  자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우리 고유정서와 딱 맞는 광고카피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초등학생들의 시험문제중 <다음중 가구가 아닌것을 고르시오?> 답을 마구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그 광고 카피 

"우~린 아~무것도 필요없다, 연속극은 옆집가서 본다~하하하하 아들아~" 라고 고난 TV치며 말하는 이동통신광고, 고향부모방문편에서는 실제부부의 자연스러운 코믹연기에 울고 웃고~  

"대통령되면 아빠뭐 시켜줄래?  음....탕수육?  아저씨는, 아저씨는?  같이드세요~ " 라는 광고를 보고 나도 저런아들로 키워야지 라고 ㅋㅋ 했었는데...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정우성의 외침에~그래 그래 사랑해!! 누가 뭐래? 흥? 

"샐러리맨은 쉬고 싶다, 왜? 피곤하니까!~" 라는 광고카피때문에  샐러리맨인  아빠또는 신랑의 피곤함에 당연한듯 자양강장제 한병을 내밀었었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카드 광고에 난 지금도 차창밖으로 손내밀며 꼭 따라한다..  

"부자되세요~" 라는 **카드광고를 보며 무슨 주문외는것처럼 중얼중얼도 했었다.   

그밖에도 크랩버거 광고 "니들이 게 맛을 알어?  " 사랑해요 밀키* " "국물이 끝내줘요"  "집나가면 개고생한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땡땡이 두건을 쓴 달달한 목소리의 "감기조심하세요" 등등...수없이 많은 광고카피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상품정보, 상품이미지등을 각인시키는 목적이 확실한 광고는.. 

그시대를 반영하는 것 같다.   15초 미학 광고~

짧은 문구가 소비자의 가슴을 자극해서 마음을 흔든다면 오래도록 그 제품 그이상의 기업의 이미지를 좋게 기억할수있기 때문이다.. 주목적인 판매소비도 많이 된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광고는 너무 앞서가도, 또 느려도, 또 너무 튀거나,식상해도 ...곤란한일!!  

너무 뛰어난 너무앞서가는 너무튀는 광고로 인해 상품이미지가 오히려 묻혀 버리는 일도 다반사이지않은가...광고는 기억나는데 그 광고가 어떤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였지?라면 실패한 것일테니까.....ㅋㅋ   

 

아~참 공익광고를 빼먹었네.  가끔 전날 술먹고 숙취에 몸 괴로울때 이 공익광고보면 삐딱하게 드는 시선 '왜 모든탓을 우리 국민들한테 하는거야'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떽~!하고.....

공공예절, 음주운전금지, 아동폭력, 에너지절약, 헌혈,인터넷언어폭력,환경(일회용품), 부모교육, 인종차별에 관한 등등의 공익광고도 있다... 기억력5초의 달인  내가  기억나는 것만 적는다면....

"밟지 말고 밟으세요! 올리지 말고 올리세요! 잡지 말고 잡으세요"  우리 아이들이 너무좋아하는 공익광고..막 따라한다.ㅋ

 "버려야할것은 우리의 음식문화" 요즘하는 공익광고..차가 막 바다에 빠지는 걸 보고 우리 둘째가 식겁했다는...  

그리고 내모습을 많이 반성하며 내 자신을 많이돌아보게 만들었던 광고는? 바로이것..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합니다.  부모는 함께가라하고 학부모는 앞서가라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참된 교육의 시작입니다."    

 와우~ 서론이 너무 길었다...난 왜 이렇게 말이 많은거야?후~훗! 끙@  

오늘 신간을 보니 명광고, 명카피를 모아 소개한 책이 출간되었다..그래서 이렇게 나 혼자 또 떠드는 중...  

 

 

 출판사 책소개를 보자~~~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광고를 마주한다. 아침 출근길 라디오 방송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서, TV를 틀어놓고 드라마를 기다리며…. 그중에 우리 마음에 와 닿는 광고는 과연 얼마나 될까? 10년차 카피라이터인 저자가 일본에서 TV, 라디오, 인쇄매체 등을 통해 공개된 광고와 카피 중에서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명광고, 명카피를 모아 소개한다.

이 책을 '10년차 카피라이터인 저자가 평소 관심 있었던 일본 광고를 모아놓은 책'이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프롤로그에 실린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단순히 일본의 유명한 광고를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물론 책에는 산토리, 조지아 커피 등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인기 광고가 등장하지만, 책에 실린 대부분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책에 실린 광고와 카피는 마케팅적으로 훌륭하다거나, 크게 히트했다거나 하는 기준보다 내 삶과 닮았거나, 내 삶이 가고자 하는 방향 언저리에 있거나, 내 삶이 흘러가면서 부딪혀온 것으로 저자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단 몇 초, 몇 줄밖에 안 되는 영상과 카피로도 짜릿하고 따뜻하게 우리 마음을 울리는 일본 명광고.명카피를 통해 인생, 가족,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저자의 약력을 보자  

이시은

일본 드라마가 좋아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좋아하는 걸 공유하는 게 좋아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설득의 힘이 좋아서 광고를 시작했고, 따뜻한 게 좋아서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했다. 어설픈 자신이 좋아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고, 인간의 잔인함이 미우면서도 좋아서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 광고와 카피에 관심이 많아서 마음에 드는 것을 모으다가,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 싶어 하나 둘 블로그에 올리다보니, 어느새 66만 명이나 다녀간 인기 블로그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좋아하면서, 좋은 생각만 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곧 10년차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을 눈앞에 둔 카피라이터. 인생의 네 번째 회사, 외국계 광고대행사에 근무 중이다. 지은 책으로 <짜릿하고 따뜻하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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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새 한국사' 시리즈 3권.  재물과 권력을 향한 욕망의 인물사 ' 우리 역사 속 부정부패 스캔들'

책에 등장하는 아홉 명(송유인, 충혜왕, <이인임,염흥방,지윤>, 조말생, 박원종, 장현, 박종신, 민영휘, 이지용)의 공통점은?  

재물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다른 누구보다 강했던 인물들이다.   

부정부패에는 홍길동의 몽둥이 찜질이 제일인데...ㅋㅋ

이들 중에는 권력을 위해 아내를 바꾼 자(송유인)도 있으며, 어떤 이는 자신의 주군을 몰아낸 이(박원종)도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료에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시대상을 투영한다.  

빨리 읽고 싶다..맘껏 썩을것들이라고 ....떠들어 볼 예정~

 

 책 소개를 보자~

망국에 이르는 병, 부정과 부패
권력의 획득과 부의 축적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국가가 국가다운 체제를 유지하지 못할 때 자연히 각종 비리와 불법이 판을 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려의 송유인은 무신정권기의 혼란함을 설명하는 수단이 되며, 권세가 이인임과 염흥방, 환관 지윤은 원나라에 의해 국왕의 거취까지 결정되던 고려 말 암흑기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전형이 된다. 또한 조선의 시골 수령 박종신은 세도정권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던 구한말 모습의 여러 단면들 중 하나다. 저자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부정한 재물과 권력의 추구는 시대와 사회의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사회현상이자 그 시대의 자화상이며 또한 현대를 사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하나의 지표로 이야기한다.

돈과 권력의 결합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책은 숙종 대 역관가문으로 조선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인동 장씨가 자신들의 재물을 이용해 남인 세력의 권력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동 장씨의 재물을 통한 '로비'의 결과 그들 가문의 여식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왕비가 되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획득한 권력은 그 뿌리가 단단하지 않은 법이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던 시기, 인동 장씨 가문은 "역관 활동으로 모은 재물로 대저택과 호화로운 의복 등 사치가 극에 달했으며 정계의 정승, 판서들과 서로 결탁해 음흉한 모의를 기도"한 죄목으로 정계에서 축출을 당한다.

나라를 팔아 얻은 재물과 권세
저자는 이 책에서 민영휘와 이지용을 통해, 구한말 일제 초 재물 축적을 위한 경제 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전현직 고위 관료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한일병합 이전 이미 백성들의 토지와 금전 등을 수탈하고 매관매직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이들이 그렇게 모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일제에 봉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지킨 재산이 온전히 보존되지는 않았다. 왕실 종친이기도 한 이지용은 한일병합 후 한동안 도박에 빠져 일제에 의해 받은 귀족 작위가 몰수되기도 한 사실이나, 민영휘에게 토지와 재산을 수탈당한 이들이 제기한 소송의 사례를 확인하는 것은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재미다. 
  

여기에 나온 재물과 권력의 똥개들을.. 대략 알려진 걸로만 한번보자...가관일세~~   

송유인(宋有仁  언제태어났는지도 모름 ~ 1179)  

고려시대의 무신 수없이 많은 권력 중심의 자리에 있었음.얘기하기도 입아퍼~  정중부(고려시대의 무신. 왕이 무신을 차별하는 데 불만을 품고 왕의 보현원 거둥 때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의 사위,
송나라의 거상 서덕언의 처와 결혼했으나 무신의 난으로 정중부가 권력을 쥐자 아내를 내쫓고, 정중부의 딸과 결혼..정중부를 등에 없고 인사권을 장악하고, 왕 못지않은 호화생활을 하며 그 위세를 더럽게 떨쳤음.. 경대승(1154~1183)고려의 무신으로 1179년 정중부(鄭仲夫) 등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도방(都房)을 설치하고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고루 등용하여 무신정변으로 와해된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183년 30살의 나이로 병사)에 의해 정중부의 일족과 송유인도 살해되었다.  

 

충혜왕 [忠惠王, 1315 ~ 1344]  

고려 제 28대 왕. 충숙왕의 아들, 1330년 왕위에 올랐으나 방탕하고 주색을 일삼아 왕위를 다시 부왕 충숙왕에게 넘긴 뒤, 원나라로 돌아가야 했다.돌아가서도 황음광포한 짓을 계속하였다. 1339년 복위하였으나 방탕한 짓을 일삼았다. 1343년에는 총애하는 은천옹주를 위해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이인임(李仁任, ?~1388)  그의 졸개들 지윤,염흥방..

고려시대의 문신, 공민왕의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으 동녕부를 정벌로 광평부원군에 책봉.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자 우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고, 친원외교정책을 행하며 친명파를 제거했다.그후 충복인 지윤, 염흥방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매관매직,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을 일삼았다. 이들은 흉악한 종들을 전국으로 보내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물푸레나무로 곤장을 쳐서 강탈하였는데, 그 임자가 국가에서 발행한 토지 문서를 가지고 있어도 감히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이것을 '물푸레나무 공문'이라했다. 그후  최영,이성계에 의해 안치되었다가 죽었다.

 
조말생(趙末生, 1370년 ~ 1447년)  

조선의 문신이다.태종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무수히 많은 벼슬을 했다. 태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세종때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그러나  세종 8년(1426년)에 우의정 조연, 곡산부원군 연사종과 함께 병조판서 조말생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죄목은 장오죄(贓汚罪). 관리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부정하게 이익을 취하는 범죄, 오늘날의 뇌물수수죄에 해당한다. 민간의 노비소송을 몰래 거들어주고 노비를 뇌물로 받은 혐의였다. 결국 이들은 귀양을 떠나야 했다.  병조판서로서 파저강을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조말생.. 세종은 그를 사사시키라는 언관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충청도에 유배를 보냈다가 곧 복귀시킵니다. 그리고 조말생으로 하여금 여연군 침략에 대비하게 합니다. 이후 조말생은 파저강 토벌과 여진족 재침략 대비와 변방수비, 사민정책 등을 추진하며 세종의 신임에 부응하게 됩니다. 

 

박원종(朴元宗, 1467년 ~ 1510년) 

조선전기 무신, 무술이 뛰어나 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다. 중종을 옹립하는 반정의 주도적 역할을 하여 정국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진다.중종초 박원종의 의정진출로 의정부의권한이 강화되기도 했다.중종반정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 1등 8명에게는 토지 150결과 노비30명을 주었는데 여기서 결이란 조선시대 토지면적을 말하는 단위로 1결이 2,700여평으로 150결은 41만평이다. 와~ 대지주다.중종반정의 일등공신 박원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호사스런 주택을 소유한 사람으로 꼽힌다. 박원종의 집을 찾은 사람이 그의 처소에 이르려면 안대문만 다섯을 지나야 할정도였다니 그 규모와 사치가 가히 짐작이 간다..후 와~~ ,1613년~?)  

 

장현( 張炫

조선 인조~숙종때의 역관으로 희빈 장씨의 아버지 장형의 사촌형제이다. 인조17년에 역과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고, 역관의 수장이며 당대의 갑부로  역관장현 국중거부라는 별칭도 있었다니 ....돈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거야?  당시 청나라는 일본과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교역대신 조선의 왜관을 통해 중국문물을 구해서 이 중계무역으로 당시 역관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현역시 중계무역을 통해 재산을 모았을 것이다. 그는 병자호란후 왕자들을 수행하여 중국에가서 6년을 머무는 동안 왕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덕분에 특권무역을 하며 부를쌓지 않았을까?  숙종 대 역관가문으로 조선에서 이름난 부자였던 인동 장씨가 자신들의 재물을 이용해 남인 세력의 권력과 결합 인동 장씨의 재물을 통한 '로비'의 결과 그들 가문의 여식인 희빈 장씨가 숙종의 왕비가되었지..훗`  아~ 책 읽어보자!! 

 

박종신(臣 )  

 순조11년 황해도 곡산부의 농민이 환곡운영의 폐단과 수령의 수탈에 반발하여 관에 저항한 사건을 곡산민란이라고 하는데..그 때 곡산부사가 박종신이다. 박종신은 읍폐를 고친다는 명분으로 아전과 향임의 환곡운영권을 탈취하였고, 부민의 곡식을 침탈했다. 이에 곡산농민들은 관에 저항했고 부정한 관리를 내쫓은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 이 난으로 박종신은 유배되었다. 19세기 초 농민항쟁으로 농민의 패배로 끝났지만, 몇개월뒤 홍경래의 난이라는평안도 농민항쟁으로 비화되었다. 아~ 이것도 책 읽어보자! 

   

민영휘 (閔泳徽, 1852 ~ 1935) 

명성황후의 척족의 세력을 배경으로 정계에 진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동학농민운동때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임오군란때 탐관오리로 유배되었다. 일본의 강제병합후 화려한 친일행각의  공로로 일본정부의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거액을 투자해서 천일은행과 휘문학교를 설립하였다. 민영휘는 관직에 있을때 수탈한 재물을 이후에 잘불려, 일제강점기동안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사람이다.

 이지용(李址鎔, 1870~1928 ) 

친일파 , 민족반역자. 19014년 외부대신서리로 한일의정서를 협정 조인하고,내부대신으로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의 한 사람..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다. 일본이 주는 백작의 칭호도 받고 일본천황의 생일에 초대도 받고.....1912년 도박죄로 태형을 선고받으며 작위도 몰수되었다. 썩을것들...
 

* 함께 읽으면 더 재밌고 도움되는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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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나르는 서적중개상... 조선 후기 책쾌(冊쾌)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낸 규장각교양총서 시리즈중  4권 '조선 전문가의 일생'에서

 11장 조선시대엔 왜 서점이 없었을까
- 책 파는 사람, 책 읽어주는 사람·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글이다. 

 

 틈새 한국사 시리즈 2권 -   평생을 책과 함께한 마지막 서적 중개상    책쾌 송신용 

책소개를 보자~ 

마지막 서적 중개상, 송신용의 삶 복원

서적 중개상을 일컫는 '책쾌'는 도서의 제작과 출간, 유통이 제한된 환경으로 인해 대부분의 것이 일부 계층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향유된 근대 이전 지식문화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문화의 혼란기 모습을 조선의 마지막 서적 중개상으로 불러도 좋을 '송신용'의 일생을 통해 살핀다. 그런 의미에서 책쾌 송신용은 시대를 볼 수 있는 창이며, 문화를 읽는 코드로 이야기할 수 있다. 송신용의 삶을 통해 그가 활동한 시대의 지식문화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지금은 어디쯤 와 있는지 저울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적중개상은 책을 짊어지고 돌아다니며 개인적으로 흥정을 해 서책을 팔던 전문 상인이다. 개인적인 이윤 추구가 목적이었지만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하는 전령사 역할을 했으나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1960년대에 사라졌다. 저자이민희교수는 서적중개상 송신용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가 역사 속에서 담당했던 역할에 주목하며 독립운동가이자 전문 필사가였던 그의 삶을 조명한다.   

  

이책의 내용을 보자면  

책쾌 송신용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고, 구한말 이후 서적 중개상의 모습 복원하며 서적 중개상의 활동을  재조명한다.

 마지막 서적 중개상이라 할 수 있는 송신용의 삶과 함께 구한말 이후 서적 유통 현장의 모습을 함께 이야기한다. 구한말 이후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민간서점 등의 영향으로 과거와 같은 서적 중개상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도 한국전쟁 이후까지 소수의 특정 고객을 직접 찾아다니며 흥정하고 매매하던 서적 중개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복원을 시도하고 있는 송신용의 활동 모습은 구한말 이후 조선에서의 서적 유통의 한 단면과 사라져 가던 서적 중개상들의 활동상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된다. 송신용이 활동했던 시대의 서적 중개상을 단순히 재리를 좇는 경제 활동가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한다. 구한말과 일제 식민시대,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사회 혼란기 속에서 이루어진 도서의 유통과 출판, 보급과 소비는 이익 창출을 위한 경제활동이나 개인의 욕구 충족이라는 목적만이 아닌 문화적 혹은 어떤 일정한 가치 내지 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투쟁적 활동의 결과였다.

따라서 책쾌, 즉 서적 중개상은 그저 책을 파는 것으로 그들의 활동이 종결되는 것이 아닌 책의 보급과 유통으로 사회와 문화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던 '문화 활동가'였다. 이 책은 더불어 그들의 모습 속에서 당대의 열악한 서적 유통을 극복하고자 자생적으로 생겨나 활동한 사회적·문화적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책을 보면 알겠지만 읽기전에 그럼 필관 송신용이 우선 누구신지 짤막하게 보자면!    

필관 송신용( ·1884∼1962).  

1930년대 중반∼1950년대 말 서울을 중심으로 왕실()과 관가()를 드나들며 내방 가사 등 국문학 자료와 고문서를 수집해온 서적중개상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2권 2책의 ‘한경지략()’ 등 그가 아니었다면 사라졌을 고전이 한두 권이 아니다.

필관은 양명학 연구의 대가인 정인보, 국어학자인 이희승 이병기 최현배, 소설가 이광수 박종화 등과 교류했다. 서화 감식의 대가였던 오세창, 한남서림 주인이었던 전형필과도 가깝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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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틈새 한국사> 시리즈가 출간되는 의미는?
역사가 외면한 과거, 새로운 의미 찾기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의 즐거움!
지금의 우리가 읽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임과 동시에 누군가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흔적이다. 그렇게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사실은 단지 ‘기록’으로만 남아 후세에 전한다.  

이에 <틈새 한국사>는 그 동안 ‘의미 부여’에서 소외된 과거의 기록들을 찾고자 한다. 그 기록들은 ‘인물’일 수 있으며, ‘문화’나 ‘사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간과한 과거의 기록들이 이 시리즈에서 의미를 가진 또 하나의 역사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역사는 의식적으로 외면했거나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있었나? 

 

역사의아침 '나는 불온한 선비다' 에서는 조선을 지배한 사상적, 정치적 경향과 다소 거리가 있는 그래서 그들과는 다른 꿈을 꾸며, 다른 삶을 살고자하는 9명의 사상가를 이야기 한다.    

이들을 통해서 그들의 남다른 일생, 그들의 사상과 사회인식을 엿보고,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조선을 살펴본다. 더불어 그들에게 배울점, 그들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어떤 의미를 줄지도 한번쯤 생각해 봄도 바람직할것같다.

광인 김시습, 비범한 보통인 서경덕, 반주자학자 박세당, 양명학자 정제두, 시골 서생 이익, 과학사상가 홍대용, 천주교인 이벽, 역사에서 사라진 유수원, 경험주의자 최한기가 바로 그들이다.     

그때의 역사속에서 그들을 보면  사상이나 태도가 체제와 통치권력에 맞서는 불온한 사람들로 보이지만 세상과 다른 꿈을 꾼 조선의 사상가들 ...그들의 사상에서 난 희망을 느낀다.

 자세한 그들의 모습은 책으로 보고 그분들을 한번 가벼이 살펴보자..

  

  
1장 공명과 지조 사이에서 고뇌한 ‘광인’ _ 김시습

당대의 권력자의 글에 사정없이 비판과 조롱을 서슴지 않았던 매월당 김시습 . 조선 최고의 지식인, 문학가, 사상가였으면서도 평생을  떠돌아다녔던 매월당. 당대의 천재였지만 그는 추악한 세태를 증오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소설들을 썼다. 그가 남긴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으로 남았고, 그의 독특한 이미지는 전설이 됐다.
세살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라는 시를 읊었다는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1493(성종 24))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 신동·신재()로 이름이 높았다.  5세에 이미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러나모친의 사망, 부친의 무능, 계모의 등장, 결혼생활의 불행등 가정사도 불행했고,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고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굳게 지키며 불교와 유교의 사상을 아울러 포용한 사상과 탁월히 뛰어난 문장으로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존경하며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려 하였다.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493년 (성종 24년) 59세에 부여 무량사에서 운명했다.  

 

2장 자연에 자신의 삶을 맡긴 ‘비범한 보통인’ _ 서경덕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년(성종 20)∼1546년(명종 1)은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였다.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낙으로 평생을 살았다.  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격물(格物)을 통해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독창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을 제창하였다.주요저서로는 화담집이있다. 

  

3장 반주자학의 길을 간 ‘타고난 반항아’ _ 박세당

 서계 박세당(1629(인조 7)∼1703(숙종 29))은 조선 후기의 학자.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계의 반대입장에 선 반주자학자였다.소론(少論) 계열로서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과 개인적·정치적 대립관계에 있었던 그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친청(親淸)정책으로 실리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에게 '오사(五邪)'의 하나로 지탄받았다. 학풍과 사상 연구에서 벗어난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를 강조하였다.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 처숙부 남이성(), 처남 남구만(), 최석정()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 함경 감사 이탄(), 좌의정 조태억()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사서(四書)와 서경·시경을 주해한 책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함으로써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그 직후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다.
 
 서계 박세당은 만년에 자손들에게 남긴 '계자손문(戒子孫文)'에서 "늘 근신하고 천사람의 뒤에 종적을 감추라"며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자신이 죽은 후에는 상례를 간소화해 무늬가 있는 비단을 쓰지 말고,3년 상식(上食)은 예가 아니므로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의 제사) 후에는 그칠 것 등을 강조했다. 또한 독서와 학문,교제를 충(忠)과 신(信)에 근본할 것을 강조하고 혹시 재물이나 아내가 꾸민 말로 형제 간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경계했다
 
 
    

4장 용기와 확신으로 가득 찬 ‘행복한 이단자’ _ 정제두

하곡 정제두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는 조선 후기 유학자,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을 연구,발전시킨 양명학자이다.20여 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하였고,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가학으로 강화학파를 형성했다.정제두가 후학에게 남긴 말 중의 하나가 의연후취(義然後取)다. ‘욕을 버리고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을 안 후에 취하라’는 것이다. 

   

5장 시대의 모순을 이야기한 ‘시골 서생’ _ 이익

  이익 (李瀷, 1681~1763)  조선 후기 실학자로 사회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과 양반도 생업에 종사하라느 사농합일() 이론을 주장하였다 .농사를 짓던 경험에서 토지와 농경생산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익은 이를 중심으로 한 경제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 근간이 토지제도의 개혁이었다. 그는 한전론을 통해 개인의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한정하여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빈부의 양극화를 막는 길이라고 하였고, 농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여론과 평판에의해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공거제()를 함께 실시할 것과 병역문제는 향병제()를 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기의 개발과 군마() 양성, 성지수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려 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주장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을 꿈 꾼 이익은 많은 제자를 두고 자신의 호를 딴 성호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주요저서로는 자신의 개혁사상을 풀어 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과 그 외 다수가 있다. 

   

6장 세계로 향한 창을 연 ‘과학사상가’ _ 홍대용

홍대용 (洪大容, 1731 ~ 1783)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조선최고의 과학사상가이다.서장관으로 북경 사행에 참여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군관, 즉 자제군관(子弟軍官)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그의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중국을 다녀 온 뒤 을병연행록도 남겼다. 그가 지은 과학사상에 관한 저술[의산문답]은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다. <의산문답>은 가상 인물인 실옹(實翁)과 허자(虛子)가 펼치는 대담 형식으로 되어있고,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가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다가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그 동안 배운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한 놀라운 작품이다.   

 

  7장 시대와 가족이 외면한 ‘조선 천주교의 선구자’ _ 이벽

이벽 李檗, 1754~1786  한국천주교 창립의 주역이었던 광암 이벽(李檗),이벽이 추구한 것은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변혁. 때문에 이벽은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외에 다양한 학문을 공부한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학문을 공부하던 그는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깨우친다. 그리고 천주교를 종교로서 받아들이고 정약용, 정약전, 권철신 등 당대 선비들에게 천주교라는 사상을 전한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교유하였다. 이벽은, 그를 형제들처럼 무관으로서 출세시키려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결국은 서른둘의 나이로 병사했다고 전해지는 이벽. 그간 천주교에서는 이벽을 배교자로 보는 시각이 팽배했다. 그가 배교자로 지목된 이유는 단하나, 아버지의 자결앞에서 신앙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는 의견이 부각되고 있다. 이벽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또한 그의집안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계속된느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박해로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라는 것이다.  

 

8장 역사에서 사라진 ‘비운의 사상가’ _ 유수원

유수원 1694년(숙종20)~ 1755(영조3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이다.  소론이었던 유수원은 같은 소론계 영의정 조태구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받아 파직되었다.숙종-경종-영조로 이어지는 이 시대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시대’였고 또한 정치적, 사회적인 격동기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한 것은 경종 때였다 숙종 말 경종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소론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한 노론 사이에 나타난 정쟁.. 경종때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고 다시 노론의 시대가 왔다. 그의 삶은 당쟁의 여파로 힘들었지만 학문과 경륜이 뛰어나며, 유형원, 이익,정약용과 함께 실학자의 한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저서로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책, 중상주의 경제학의 고전인  우서(迂書)가 있다.그는 18~19세기 수많은 실학자들을 매료시킨 중상주의 경제학 이론을 개척하다시피 한 선구자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조선의 부국과 백성의 안민을 위한 정책개혁을 .즉, 사농공사의 신분질서 및 차별철폐, 상업적 농업,상공업의 발전 그러니까 사회개혁+경제개혁에서 찾고 있다. 영조때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소론의 숙청작업에 희생양?  

 

 9장 인간 본성의 선천성을 부인한 ‘경험주의자’ _ 최한기

혜강  최한기   1803(순조3)~1877(고종16),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수많은 연구 저서를 내고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평생 학문에 정진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교분이 두터웠다. 최한기는문(文)·사(史)·철(哲)의 종합적 동양학의 틀에서 머물지 않고 물리·천문·지리에서 의학 등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기학(氣學)’ 즉 개인과 사회와 자연이 질서있고 조화롭게 순환과 변화를 통해 발전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 각국인을 가르치고 잘 인도하여 전인류가 화합하는 이른바 “兆民有和”의 세계를 목표로 하는 사상을 가졌다. 수많은 저작을 통해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고, 사물을 수학적,실증적으로 파악할것을 주장해 한국 사상사에 근대적 합리주의를 싹트게 했다.그의 학문적 관심은 세계 인문·지리·천문·의학 등 실로 다양하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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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쾌함이라 함은..아주 즐겁고 너무 시원하여 화끈한 그런 유쾌함을 말하는 것인데.... 

글항아리에서 나온 책 제목이 ' 통쾌한 동양학' 이라.....흠~~~  

동양의 언어 ·문학 ·역사 ·종교 ·철학 ·학문 ·기예() ·풍속 ·관습 ·미술 ·음악 등 좁은 의미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동양학. 그의 기본개념은 충忠, 효孝,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성誠, 도道  잘 정리된 학문으로서의 동양학에 대한 이미지가 오히려 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살아 있는 동양학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해소하자고 말한다. 틀지어진 이론으로서의 동양학이 실제와 따로 가거나 이해가 불가능할 때 대중으로부터 멀어진다.

 책 『통쾌한 동양학』에는 동양학을 알아나가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통’했으면 하는 것과, 또 그 과정이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한다.    

즐거운 동양학, 통쾌한 앎을 위하여
이 책에서 저자는 연구답사 등으로 동아시아 각국을 활보하며 깊이 흡입한 견문을 동양 고전과 연결시켜가며 논의를 전개시키고, 동아시아 문화의 본질과 그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 등에 대한 고민과 나름대로의 해법도 담았다.이 책은 이것을 크게 네 가지 다른 각도에서 정리했다. 첫째,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전통문화의 긍부정적인 측면을 살피고, 혹 주변에서 갖고 있던 선입견을 해소하려 했다. 둘째, 한국 문화의 저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전통 가치 속에서 확인하고 재조명했다. 특히 가족주의와 효사상이 갖는 강한 한국적인 힘을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증명해보았다. 셋째, 우리 주변의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밝혀보았다. 마지막으로 세계 패권국을 꿈꾸는 우리와 이웃한 중국의 야망을 되짚어보고, 동아시아 시대에 우리가 어떤 채비를 갖춰야 할지 문화적으로 점검해보았다.  

동양 고전의 눈으로 오늘의 현실을 읽어내다의 의미답게 책의 내용이 알찼으면 싶다..기대한다. 

 


난 그가 그냥 좋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있자면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하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 못해도, 그래도 TV에서 보는 모습이 그 사람 자체의 진짜 모습일것같다는 신뢰를 주는 내 마음속 1순위이다.. 

그냥 끊임없이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은이의 책이 나왔다..그럼 당장봐야지.. 

따뜻한 웃음과 건전한 세계관으로 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온 소통과 소신의 국민 MC 김제동의 첫 책.  

2010년 2월부터 그가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제동의 똑똑똑」 인터뷰를 엮어냈다. 책에는 소설가 이외수, KBS 전 사장 정연주, 시인 김용택, 제주 해녀 고미자 등, 김제동이 만나온 각계각층 명사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늘 '여러분이 옳습니다.'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맺는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여리게 다가감으로써 만날 수 있었던 그들의 진짜 모습을 전해준다.

김제동은 스스로를 '좌파도 우파도 아닌 기분파'라 칭하며 웃음을 주는 연예인으로서의 본분을 강조한다. 이는 정치적 편향성이 아니라 진실을 올바로 비추는 데 자신의 웃음을 사용하고 싶다는 그의 가치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날카로운 눈으로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대담은 불필요한 껍데기 없이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면서도, 그 저변에 깔린 따뜻함으로 절망과 아픔보다는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만난 25인의 인물은 이 시대 대한민국의 뜨거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각 분야에서 소통과 상생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물들과의 솔직 담백한 대화는 김제동 특유의 풍자, 본질을 향한 촌철살인의 멘트가 더해져 흥미와 각성을 일깨운다. 독자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당당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교감하며, 공생하는 사회와 개인의 삶에 대해 각자의 화두를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를 보니 아니다 싶은 사람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그건 니 생각이고~~

1. 이외수(소설가) - 연예인이건 작가건 시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
2. 정연주(KBS 전사장) - 지금의 힘든 경험은 미래를 위한 축복일 겁니다
3. 김용택(시인) - 내 아이 귀하면, 다른 아이 귀한 줄도 알아야죠
4. 고미자(제주 해녀) - 어머니 제주를 그대로 살려두세요
5. 엄홍길(산악인) - 산이 놓아주질 않네요. 산에 보답하며 살래요
6. 박원순(변호사) - 역사의 바른 편에 서 있는 지금 제 자리가 좋아요
7. 정재승(과학자) - 공동체 이익을 대변하라고 지식인에게 권력을 준 거 아닌가요?
8. 홍명보(올림픽축구대표감독) - 수비수처럼 제일 뒤에서 경기장을 지켜주고 싶어요
9. 고현정(배우) - 연예인은 광대, 대중은 귀족이지
10. 강우석(영화감독) - 조롱, 풍자, 공감이 어우러져야 인간적인 영화죠
11. 이정희(민노당 대표) - 진보가 분열됐다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래요
12. 김C(가수) - 아티스트로서의 자뻑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
13. 남경필(한나라당 의원) - 군대 가고, 세금 내고, 법치를 해야 진짜 보수죠
14. 안희정(충남도지사) - 이제 국민들은 다 알아요. 어떤 대통령이 좋은 건지
15. 양준혁(야구선수) - 땅볼이라고 뛰다 말고 돌아오는 거, 난 인정 못해!
16. 설경구(배우) - 작품 속 인물이 찌꺼기처럼 남아서 늘 괴롭혀
17. 조정래(소설가) - 대기업이 잘돼야 잘산다는 건 잘못된 교리입니다
18. 황정민(배우) - 예술은 밑바닥 비주류의 힘으로 진보하는 거라구
19. 정호승(시인) -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안 돼요
20. 소녀시대 수영(가수) - 스물두 살 철부지이고 싶은데,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요
21. 최일구(MBC 앵커) - 문턱을 낮춰 사람들을 끌어안는 뉴스를 전하고 싶어요
22. 문용식(나우콤 대표) - 상식적으로 얘기하는 게 좌빨이라면, 좌빨하고 말죠
23. 유인촌(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예술은 거리로 나오기 전에 어두운 곳부터 밝혀야죠
24. 나영석(KBS ‘1박2일’ PD) - 거칠고 투박한 감성 포장하지 않을래요
25.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 길은 누가 여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야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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