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레시피 Super Recipe 2011.5
슈퍼레시피 편집부 엮음 / 레시피팩토리(잡지)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레시피가 좋아서 밥상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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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의 상황을 보자...한국사람이라면 누가 보더라도 이들이 옳지않다는 걸 안다.  

그럼 이런 역사내용을 배우는 중국사람들, 일본사람들은 이 것이 혹 잘못된 내용이 아닐까하고 한번이라도 생각할까? 


자 그럼, 이제 우리가 써온 우리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왜곡된 내용 하나 없이 모두 다 진실인가? 

멀리 갈것도 없이 가장 가까운 , 현재 우리가 쓰고 있고 있는 근대사, 현대사는 모두 옳게 쓰이고, 옳게 알고 있을까? 

아마도 진실도있고, 아예 거짓도 있을수있고, 왜곡도 되고 ...그러므로 수정해야할것들이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흔하게 쓰여지고, 흔하게 읽혀지는   근현대사에 대한 기록물을 우리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며 읽고 있을까? 

치우치다 못해 편협하고 꽉 막힌...민족주의만을 강조한 책을 보며 내 생각도 편협하고, 꽉 막히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열린 민족주의, 품위있는 민족주의를 바라는 나는............  

좀더 정체성을 회복한, 우리사회와 민족을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을 의식하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원하고 있는데...   

내가 대중을 위해 쓰인  역사서적들을 읽을때 가장 중요시 생각하는 건 ...  

치우치지 않고, 잘 균형이 잡혀있는가...?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기술의 두측면을 어떻게 서술했는가?

과연 작가가 무학자(無學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썼는가?  이다... 

사람들이 거쳐온 시간들의 이야기를  알고자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건 꼭 어떤 선택된 부류에게만 주어진것이 아닐꺼라
생각하니까.....  나같은 사람, 너같은 사람이  모두 함께 읽고, 이해할수 있게 쓰여졌다면,,,,,, 

과거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내 시선이 달라질수 있기때문에  편협한 시선말고,,
열린 시선으로 내용을  서술해주었다면................더 바랄게 없을듯........................       

김기협의 <해방일기> 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1 ~ 10.29) 가 출간되었다. 

저자의 어마어마한 집필 계획에 눈이 가요 눈이 가~ 해방일기에 눈이가요.. 너머북스의 해방일기 1권. 

1945년 8월1일 해방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3년)까지 10권을 집필 목표로 한다고 한다.    

 ‘해방공간’이라고 불리는 3년 동안 이 땅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좌우익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해방된 대한민국엔 좌익,우익만 존재했을까? 

해방이 되고 이젠 자주적으로  민족독립국가가 수립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던 일은 그러지 못하게 된 일로 되버렸다.  
민족 반민족,,좌익 우익의 구도로 이념논쟁이 불이 붙었다,,,일제강점기때 나라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그 이념때문에.......... 

이념이 다르면 싸워서 어느 이념이 꼭 옳다고 못을 박아야 되는게 인간사인가? 그게 옳은일인가? 옳지않은일인가?  

해방공간기 3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프다... 

이럴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읽어보자..그리고나서 묻고, 따지고 생각해도 된다..


 

『해방일기』 제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를 한번 보자.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후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까지는 몇 주일의 간격이 있었고, 전국이 실효적 점령 상태에 들어가는 데는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 ‘권력의 공백’ 기간에 해방 조선의 정치적 요소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민의가 집중된 두 개의 초점이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이었다. 민족혁명을 앞세운 쪽이 우익이고 사회혁명을 중시한 쪽이 좌익이었다. 두 진영이 혁명의 속도와 범위를 타협할 수 있다고 보는 중도파가 민의를 폭넓게 대표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로 나타났다.

9월로 접어들며 극좌와 극우가 나타났다. 일체의 사회혁명을 거부하는 극우파가 한민당을 거점으로 만들었고, 급속하고 철저한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극좌파가 건국준비위원회를 장악하고 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 상대방의 배제를 주장하는 대립관계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존재를 내 주장의 근거로 삼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중도파의 입지를 함께 공략했다.

10월까지 미-소 군대의 실효적 점령이 완성됨에 따라 점령군의 존재가 정치 상황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방어적 입장에 처해 있던 소련 쪽보다 국제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앞두고 있던 미국 쪽 입장이 더 큰 작용을 일으켰다. 이북의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활동 성장을 도와주며 소극적 입장을 지킨 반면 이남의 미군은 일본인의 지배자 위치를 물려받아 자치활동을 적극 억압했다. 극우파가 미군의 옹호 아래 세력을 키우고 그 반동으로 극좌파가 좌익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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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신이 살아있는 한 왜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다" 

 "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 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에 물들인다"   

 

2004년 9월 4일~2005년 8월 28일까지 104부작으로 방송된 "불멸의 이순신"    

2005년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문제 등으로 반일감정에 머리가 지끈거릴때 정말 화끈하게 스트레스 풀어주셨던 드라마!! 

이 드라마 이후로 속시원한 드라마를 본적이 없으니 난 감히 최고의 드라마라 이야기 할란다..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알게된 드라마라 더 귀한듯.... 김명민 짱~

사실 이 드라마에서 영웅 이순신의 휘하의 수많은 인재들의 모습을 보여줘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책사 권준, 과학자 나대용과 그를 보좌했던 거북선과 무기를 주조한 이름모를 민초들.. 임전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정운을 포함한 많은 부하장수들.....그들이 존재했기에 진정한 지도자로서 이순신이 더 빛나는것 아니겠는가.....

정말 울면서 열심히 봤었다. 방송될때마다 가슴을 울리는 장군의 말씀에 전율했다. 
  
" 이들을 모두..내가 죽였다.....그러나 나는 구차한 목숨을 당분간은 더 이으려 한다. 부하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기위해서다.

" 우리에게 아무도 목숨을 바치라 강요하지 않았다. 이곳을 지킬것을 결의 한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는자, 싸울의지가 없는자, 이곳 녹둔도를 떠나라.  

" 전쟁은 병장기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병력만으로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승리의 가장 큰 관건은 이길수 있다는 확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은 결기에 있으니...오직 마음으로 싸우는자, 그 자만이 최후의 승자가 될것이다"

" 명심하라, 살고자 두려움에 곁을 주는자, 죽을 것이요, 승리를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는 자, 살것이다."  

" 전쟁에 임하는 자의 마음이 승리의 시작이요 끝이니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 나는 부하들을 믿는다. 조선수군은 그게 누구든 더럽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야비한 침략자의 의지를 끊어버리고, 조선을 지킨 임진왜란...그 전쟁을 패배한 전쟁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것인가? 

세 번의 파직과 두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지킨 충무공 이순신... 
나라가 그를 위해 무엇을 주었다고..임금과 그의 정적들의 견제를 항상 받으면서도 .. 임금부터가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애국심과 신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학연,지연,혈연등의 잇속관계가 아닌 원리원칙에 따른 일처리, 뛰어난 전략전술, 구습을 버리고 철저한 준비와 의지로 부하들에게 흔들림 없는 절대적 신뢰를 주며,  엄한 원칙으로 부하를 이끌었던 진정한 지도자 이순신... 
위기속에서 희망을 찾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이번주 역사스페셜은 충무공 탄신 기념일 기획 <철저분석 한산대첩>이었다.   

1592년 7월 8일 거제와 통영사이의 좁고,암초가 많은 부적합한 장소 견내량(일본수군이 정박해있었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넓은 바다로 적을 이끌어낸후 왜적을 모두 잡아버린다,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는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판옥선 6척의 유인함선을 출동시켜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하고 이에 왜군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거짓후퇴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조선수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 후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의 날개처럼 포위하는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펼치며 진군하였다.
지자총통, 현자총통,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 .. 왜군은 조선수군의 포격에 순식간에 격파되어 무너졌다. 왜선 59척을 침몰시키고, 이로인해 왜군 9천여명이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거의 전멸이었다. 


한산대첩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1592년(선조25) 7월 8일 임진왜란 초기 수세에 몰렸던 전세를 조선수군이 확~ 뒤집어 버린 전투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ㅎㅎ 임진왜란 발발 후 , 불과 20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면서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조선에게 한산대첩은
대륙침략을 향한 일본의 망할 야욕과 오만을 꺽어버린 화끈한 일대 반격이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이순신의 승리보고서인 <견내량파왜병장>을 중심으로 한산대첩의 전투과정과 승리요인을 분석하고,추적한다.     

도대체 학익진은 어떤 전술인가?    

또 우리 수군의 화포는 재장전하는데 시간이 적지않게 걸렸다. 그런데 어떻게 재빠르게 포를 쏟아 부을수 있었을까?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을 확인할 수 있는 ‘우수영 전진도첩(右水營戰陳圖帖·)’. 학익진은 U자형의 진법으로 적보다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포위해 싸우기에 적합했다. 그런데 해상에서 배가 적선을 향해 이동할 때 측면의 포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화력 집중에 어려움이 있다. 조선 함포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판옥선(板屋船·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투선. 1층에 노꾼을, 2층에 전투원을 배치했다)이었다.

제작진은 "바닥이 평평했던 우리 수군의 '판옥선'이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전선은 왜군의 병선과 달리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탁월한 선회 능력을 가진 판옥선이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 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 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판옥선의 선회를 통해 연속적인 포격을 했던 조선 수군의 공격에 조총이 주무기였던 왜군의 반격이란 쉽지 않았다.   

  
  

 

 

 

 

 

 

  

  

진형을 확인할수 있는 우수영전진도첩

 

 

 

 

 

 

 

 

 

 

 

 

 

  

 

 

  

조선 수군의 승전비결은 ' 연속 포사격'

 

 

 

 

  

판옥선의 탁월한 선회능력으로 화력 공백기인 재장전 시간동안 공격력을 잃지 않았다.

 

 

 

  

동아시아 해군의 저력을 보여준 이순신 ' 한국의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산대첩.

 

   

이순신을 ‘동방의 넬슨’이라 평다람  영국 해군 제독 발라드의 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조 25년(1592) 이곳에 제승당을 짓고, 26년(1593)부터 30년(1597)까지, 해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에 제승당을 포함한 이곳 군영이 모두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영조 15년(1739)에 제승당과 함께 ‘제승당유허비’를 세운 후 여러 차례 공사가 이루어졌고, 일제시대 때 지방 유지들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원래 제승당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이 부하들과 함께 작전계획을 세우고 일을 보던 ‘운주당’이란 건물 자리에 영조 때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경내에는 제승당을 비롯하여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정’, ‘수루’ 등이 있으며, 산봉우리에는 한산대첩비와 함께 거북등대가 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제승당) 

 

좌수영대첩비 

 

명랑대첩비 

 

** 함께 보면 좋을 책 

 

 

 

  

 

 

 

  

 

 

 

 

 

 

 

  

 

 

 

충무공 이순신의 현충사, 충무공이순신 기념관을 보자..



충무공탄신일인 2011년 4월28일 오늘 현충사 경역밖에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충무공 관련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사료를 수집,전시,교육을 위한 역사테마관이다.  전시동 3개실에서는 난중일기 와 충무공의 칼 등 유물 40여점, 교지등 고문서 13점을 전시한다. 문화재청이 기념관에서 충무공을 주제로 특별전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니 기대해 보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 , 서울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충무공은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 백암리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고 무과에 급제할때 까지 살았다..  

충남 아산은 내 고향에서 가까운 곳으로 중,고등학교때 현충사로 소풍을 참으로 많이도 갔다.   

잠시 현충사를 소개하면.................

아산 이충무공 유허(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598년 노량해전에서 순국한지 108년이 지난1706년(슥종32년) 아산지방유생들의 사당건립건의로 세워졌으며, 그 이듬해인 1707년 숙종에게 '顯忠祠'라 사액받았다. 그 뒤 이곳은 200년간 향불이 끊기지 않게 추모하였으나 그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당철폐되고, 국권피탈이후엔 일제탄압을 받았다. 1932년 동아일보사의 주최로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중건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광복후에  매년 4월28일(양력)에는 충무공 탄신제전을 올렸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본전(충무공의 영정을 모신곳) , 유물전시관(거북선모형, 난중일기,서간첩,교지,각종무기보존), 고택,활터,정문등을 중건하며 현충사 경내확장및 종합적 조경공사를 하며 성역화되었고. 1968년에 현충사관리사무소를 설치하고 관리와 제전에 관련된 사항을 관장시켰다.    
    

현충사와 현충사 유물전시관의 유물

 현충사

 

 난중일기,서간첩

무과홍패 

선무공신교서 

 

 장검  

충무공 묘역 

 

광화문네거리의 동상과 현충사에 모셔신 그냥 이순신 말고 , 온몸으로 난세를 극복해간 인간 이순신을 보자. 

충무공의 국난극복의 정신을 충무공의 후예로서 가슴깊이 되새기며 , 불굴의 의지, 사명감의 표상인 충무공의 삶을 기억하며  더이상 북의 도발에 억울한 희생이 없기를 ..  


나라를 위해 희생한 고인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반성합니다. 오늘도 순국장병들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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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녹아내린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 생각도 많아지고, 괜히 먼 곳이 바라봐지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눈물도 나고,  

더구나 그룹일 경우는 해체없이 꾸준히 활동해주면 더 바랄게 없이 감사하고,  정규앨범도 꾸준히 내며 ,  

가끔 콘서트도 하고, 그들만의 색깔이 있으면서도 가끔 변화를 주어 새로운 느낌을 주는 음악을 해서 ,  

그래서 질리지 않는 그런  ,,,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그들의 노래가 오래도록 곁에 있었으면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음악인들이 있다. 

그들의 팬으로 그들을 응원하며 그들 곁에 남고 싶은 사람이 여기 있다.   

그들이 바로 '먼데이 키즈' 이다.  

정규앨범뿐아니라 싱글,미니앨범,OST 프로젝트싱글에도 꾸준히 참여하며 활동하는 그들... 

  

 

 

먼데이 키즈(Monday Kiz)는 2005년 결성되었다. 원래 이진성과 김민수로 구성된 2인조 그룹이었으나  

2008년 4월 김민수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면서 2008년 8월 해체하고 이진성 솔로로 활동하다가 2010년 4월에 이진성,  

한승희,임한별로 구성된 3인조 그룹으로 재결성되었다.  먼데이 키즈의 이름 그대로..... 

 

2005년 먼데이 키즈의 음악을 처음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바로 이거야 했었다..  

올것이 왔다. 난 이런 음악 , 이런 음색을 원 하는 거였다구......  

애절한듯 하며 절대 오버스럽지 않게 감성을 자극하고, 목소리에 힘이 넘치지만 너무 부드럽다.  

이런음악, 이런 목소리로  나를 열심히 들었다 놨다 했다. 2008년  김민수의 안타까운 죽음..그 일로 참 힘들었던 이진성.  

이후 그가 부른 음악에서 슬픔이 묻어나는 건 어쩜 당연한것. 

솔로로 활동할때 너무 안타깝더니 이제 먼데이키즈를 재결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힘내서 다가오는 그를,.. 그들을 난 열렬히 응원하며 격려하고 싶다.  

먼데이 키즈만의 음악을 난 원한다..그렇게 쭈욱~~~오랫동안

 

   

 

  정규 5집 앨범이 나오기 앞서 미니앨범 'Memories Cantare'를 냈다. 

아주 큰 선물을 받은듯... 

앨범 타이틀곡을 듣고 드는 생각은 음악적으로 약간 변화있다. 독특하다. 그래서 세련되어 지고, 더 애절한듯하지만 감성적이다.  종합선물세트같이 다양한 곡들을 포진하고 있다. 물론 기존의 먼데이키즈 스타일곡도 당연히 있고..... 

  

 

  

 먼데이 키즈 재결성 후 4집

한국 최고의 보컬리스트로서 인정을 받은 먼데이키즈 멤버 이진성은 그간 몇작품에서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아 이번 앨범의 전체적인 프로듀서를 맡았고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선보여 보컬리스트로서 뿐아니라 작곡,작사 에서도 그 빛을 더해이번 4집 정규앨범의 완성도를 더하였다.

 

 

  먼데이키즈는 이번 3집 앨범을 통해 짙은 감성을 토대로 새로운 음악적인 요소들과 장르를 과감히 수용해 대중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음악인으로서도 폭넓게 사랑 받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집약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먼데이 키즈의 2집

1집 앨범 ‘Bye Bye Bye'로 최고의 신인으로 각광받으며 음악 챠트를 석권했던 먼데이키즈. 오직 음악이라는 유일한 욕심과 풍부한 감성을 가슴에 품고 1년 4개월 만에 2집으로 돌아왔었다. 

 

   

먼데이 키즈의 1집은  

약 6개월에 걸쳐 국내 최고의 작곡가들로부터 50여 곡을 수집한 후 그 중 13곡을 엄선해 계속 수정 보완 작업을 통한 진행방식으로 주옥 같은 곡들과 가사들을 탄생시켰을 정도로 앨범에 참여한 모든 작사가, 작곡가들 뿐만 아니라 가수 본인도 수많은 사전 가 녹음을 통하며, 심혈을 기울여 앨범을 만들어 냈다.

 

 

 

 이진성 1집 정규앨범, 먼데이키즈 싱글, OST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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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진명'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소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때 기억으로 정말 이 소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 소설을 안 읽고는 이야기가 잘 안될정도로 인기가 많아었던걸로 기억한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과도하고 거친 상상력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는 작가..  김진명

난 흥미롭다. 그의 소설들이 기존 통념을 뒤집는 역사해석과 인물에 대한 평가가 과감하고 밀어부치는 내용의 박진감있는 속도감에 난 만족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소설계에 큰인물임은 확실한듯하다.

사실 <천년의 금서>를 읽고 약간은 아주 약간은 혼란스러워서 한동안 잊고 살았었는데 이번에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의 이야기를 현실과 픽션을 넘다들며 풀어냈다는 <고구려1,2,3권>이 출간되었다.  

그 의 글 답게 고구려를 읽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내용이 속도감있고 ,긴장감넘치며, 치밀하고, 장면들이 역동적이며 주인공이 한 개성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번 그의 역사해석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현재의 정세에 맞추어 '고구려 역사 바로알기'에 제대로 공헌을 하는지 한번 읽어보자.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로 우리 것이지만 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지금의 중국영토이기 때문에 중국의 시건방진 동북공정의 황당한 주장을 웃기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나중에 영토문제로 충돌할수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무려 17년부터 기획했으며 데뷔부터 숙원해오던 필생의 역작이기도 하다는 <고구려>  

그가 이토록 치열하도록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소설은 고구려 700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즉 고구려의 최대위기와 최고의 영광이 함께하던 시대로 알려진 미천왕때부터 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장수왕 등 여섯 왕의 이야기를 말한다. 

2~3년 걸쳐 전체 13권 분량을 완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해보자.. 개천절을 택해 '고구려'를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호흡이 굉장히 짧은 글만 써오다 처음으로 이런 대작을 쓰게 돼 생소하기도 하지만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진지하게 임해 세상에 대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인 고구려..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城을 뜻하는 고구려어의 '구려' 에 高라는 한자어의 미칭을 덧붙인것이라고 책에서 읽었던것같다.  시조는 동명왕(주몽)이고 그후 27대의 왕위를 이었다.

700년 고구려 역사는 크게 고구려성립에서부터 3세기말 미천왕의 큰아버지 봉상왕까지를 첫 시기로, 4세기초 미천왕때부터 6세기초 문자왕대까지를 두번째시기로, 6세기 중엽 안장왕이후 보장왕 27년 멸망때까지를 세번째시기로 본다.. 

첫시기를 국가성립및발전기,  두번째 시기를 고구려발전의 전성기로, 세번째시기를 쇠퇴기로 본다. 

 

이 번 출간된 고구려 1,2,3권은 고구려의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4세기 고구려 15대 왕 미천왕(美川王,재위300~331)의 일대기를 담았다.

왕이 되기 전 소금장수였다는 미천왕 을불...어쩌다 서천왕의 손자가  소금장수가 되었는지..소금장수가 어떻게 왕이 될수있었을까?  고구려 초기는 5부족의 힘에 의해 나라가 움직였다. 그 힘겨루기속에서 살아남기위해서 궁궐을 도망쳤던 을불....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당시 다행히 화를 면했지만 궁을 나와 처음 의탁했던 곳에서 하는 노예생활이 괴로워 그 집을 나와 한 일이 소금장수였다. 그마저도 도둑으로 몰려 못하게 되자 거지처럼 살았다는 을불....그후 큰아버지 봉상왕의 폭정에 지친 대신(국상 창조리)들이 왕을 몰아내고 왕의 조카인 을불을 왕위에 올림으로 을불은 고구려 15대 미천왕이 되었다.  

미천왕은 왕위에 오른 후 가장 열심히 한일이 진나라를 상대로 영토를 넓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낙랑군을 멸망시키고,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는다. 그덕분에 새로운 농경지를 차지하므로써 경제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고구려 더 넗은 영토확장의 계획과정에서 요서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인 선비의 일파, 모용부)의 방해로 요하를 건너 서방으로 나아갈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 후 여러차례 요동지역을 차지한 모용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렇지만 그는 강한 고구려를 만든 사람이며, 농업,상업을 발전시키고, 영토를 넓혀 고구려의 성장기틀을 마련한 고구려의 왕임에는 틀림없다.  

 

미천왕 을불이 아마 소금장수로 살아봤기 때문에 백성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의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 고구려를 알고싶다면 함께보자 

 

 

 

 

 

 

 

 

 

 

 

 

** 고구려 왕위 계보를 보자. 

1. 동명왕 <B.C.37~B.C. 19>

2. 유리왕 <B.C.19~18>

3. 대무신왕 <18~44>

4. 민중왕 

5. 모본왕 

6. 태조왕 

7. 차대왕 

8. 신대왕 

9. 고국천왕 

10 산상왕 

11. 동천왕 

12. 중천왕 

13. 서천왕 

14. 봉상왕 

15. 미천왕 <300~331>

16. 고국원왕 <331~371>

17. 소수림왕 <371~384>

18. 고국양왕  <384~391>

19. 광개토왕 <391~413>

20. 장수왕 <413~491>

21. 문자왕 

22. 안장왕 

23. 안원왕 

24. 양원왕 

25. 평원왕 

26. 영양왕 

27. 영류왕 

28. 보장왕 <642~668> 

  

** 고구려 석비를 보자.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경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지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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