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를 읽었다면.. 

 
  

 

이 시문집도 보자.. <한객건연집 >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 4인의 시선집이다. 4권 1책의 필사본 ..<사가시집>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1776년 유득공의 숙부 유금이 사신일행을 따라 청나라 에 가면서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의 시 399편을 추려서 엮어 가지고 가서 청나라 문인 이조원,반정균등의 서문과 비평을 받아왔다. 이로 인해 청나라 문인들사이에서  '사가'라는 호칭을 얻으며 널리 알려졌다.  연장자 순으로 1권 이덕무, 2권 유득공, 3권에 박제가, 4권에 이서구의 시를 수록했으며 시인별로 각권 끝에는 이조원의 총평(總評)과 반정균의 발미(跋尾)가 붙어 있다. 그들의 젊은날의 감성을 느낄수 있다고 한다.  

목차를 보니 대충 감은 잡히지만.....

미리보기가 없어 어떻게 구성(짜임)되어져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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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5-2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보기도 없다니..목차를 보니 내용이 참 관심갑니다......만, 누가 옆에서 차근차근 해석해주고 읽어줬으면 좋겠습니다^^;
 

 

 <환구음초>는 한어어역관으로 한국인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면서 보고 느낀 김득련의 새로운 세계를 담은 한시집이다.

 한시 136수(오언절구 4수, 오언율시5수, 칠언절구111수, 칠언율시 13수, 철언장시3수)

 1896년 친노파 조정에서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갔던 김득련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일주에 대한 한시집이었던 『환구음초』는 외국의 풍물과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던 전통을 따른 작품이다. 이전의 한시에서 볼 수 없었던 생경한 표현이 많은데, 새로운 문물을 전통적인 한시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고심했을는지 실감할 수 있다.

 

김득련을 이야기하려면 민영환의 이야기 부터 간단히 꺼내야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후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미,친러내각이 들어서자 1896년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는데..참석목적은 고종의 특명으로 청나라와 일본을 견재하기 위한 러시아와 밀약을 맺기위한 목적이었다.

이때 민영환은 중국,일본,캐나다,미국,영국,네덜란드,독일,폴란드,러시아,몽고등 9개국을 거치면서 처음으로 서구 문명을 접했다. 민영환과 이때 함께 간 사절단은  김득련(중국어), 김도일(러시아어), 윤치호(영어) , 손희영(시종), 스테인(러시아공사관서기관)등 6명이다.   

이들의 세계일주 경로는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타고 상해, 나카사키, 동경을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 기차편으로 북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으로 갔다. 미국 뉴욕에 3일간 머물고 다시 상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하였고, 유럽 대륙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다. 그리고5월 26일 크레믈린궁에서 거행된 러시아황제의 대관식을 참관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에 머물면서 선진 문물과 제도 등을 견문하였다


9개국을 일주하고 돌아온 민영환은 '해천추범'이라는 기행문을 완성했는데 실제로는 역관 김득련이 기록한 환구일록의 인칭을 바꿔 민영환의 이름으로 정리된것으로 알려져있다.

김득련은 역관을 93명이나 배출한 우봉김씨 집안 출신으로 21세때 역과에 합격했다.근데 중국어 역관인 김득련을 민영환이 동행한 이유는 공식기록(고종에게 보고서를 올릴 목적),일기를 한문으로 남기고, 한시를 함께 주고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김득련은 이때 세계일주를 하며  기행문말고, 새로운세상에서 얻은 견문을 읊은 한시 136수(오언절구 4수, 오언율시5수, 칠언절구111수, 칠언율시 13수, 철언장시3수)를 지어
'환구음초(지구를 한바귀돌며 읊은시집)'라는 한시집을 만들었다.
새로운 문물을 느끼고 그것을 한시로 표현했다는 자체가 참으로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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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한국근대시사에서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중 한사람,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천재로 대표되던 사람, 
3.1만세 운동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공약3장의 글귀를 지은 민족대표 48인중 한사람.....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사람,,  육당 최남선(1890~1957)  

 이런 사람이 왜 친일활동을 하게되었을까? 

3.1운동으로 투옥되고 3년수감생활후 석방된 이후 계속된 일본의 감시,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알려져있다.



1928년 조선총동부의 조선사편수회(역사왜곡기관) 편수위원직으로 본격적인 친일행위를 하며 친일파 꼬리표를 달며 지탄받기 시작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다. 

 친일 논란을 불러온 육당의 행적은 크게 두 가지다.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식민지정책에서 생긴 한국사 연구기구) 참여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것.....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만주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이렇듯.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언론활동을 한 최남선.......

광복 후 서울 우이동 자택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의 죄목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반민족행위처벌법)로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전체적으로 그의 일생을 보면 그는 계몽운동자? 문화운동가? 문학, 문화, 언론등 다방면의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이라고
그는 정말 친일파가 아닐까?

왜 난 최남선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얼까??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의 혼을 불어일으킬 봄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민족의 아픔과 슬픔,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아주 짙게 담아내고 있는 이 시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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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직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  
   

안중근<安重根> 1879~1910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고, 가슴과배에 있는 7개의 점때문에 아명은 '응칠'이다.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면서 도마(Thomas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후 이듬해 전재산을 들여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며 
인재양성에 힘썼다.
이후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일제로 부터 강제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을 강제체결하여 군대해산, 식민지화에
본격적인 박찰을 가하자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그동안의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참모중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는다.  
그러던중 1909년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만주 하얼빈으로 오자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뤼순감옥에 수감되고 그 이듬해인 1910년 3월 사형, 순국하였다.  
재판과정에서 판사,검사,변호사,통역관,방청인이모두 일본인이었던 형식적인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서 안중근은 자서전<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 거사이유를 밝힌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동양평화론>의 저술이 끝날때까지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한 일본....  

안중근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는 누군가?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 일본 전 총리, 초대 조선 통감 , 한국 식민지화의 원흉’ vs ‘일본 근대화의 원훈의 두얼굴, 
 공갈 대마왕, 협박의 국가대표급선수, 늙은 염소,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간,  
한국통감 재직 중 순종으로부터 ‘친왕(親王)’의 예우를 받은 인간, 
1963년부터 1984년까지 21년간,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천엔권 지폐인물  .......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이토 히로부미... 

 책 소개글을 보자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써내려간 기록 덕분에 우리는 그의 영웅적 행위뿐만 아니라 더욱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그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다. 또한 그간의 많은 연구 성과들은 엄밀하게 사실을 파헤치며 실제를 규명하는 실증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안중근 평전>은 이러한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안중근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 과정, 이토 저격 사건의 전말 및 재판 과정, 그리고 그의 사후에 벌어진 일들까지를 오롯이 그려내며 안중근을 이해하는 정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이번 <안중근 평전>에서는 그간 이견이 있거나 사실 확인이 덜 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비교, 분석해가며 안중근의 행적을 찬찬히 짚어보았다. 이는 안중근의 영웅성을 부인하는 작업이 아니라 엄밀한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실제의 안중근에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기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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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총 100권의 평전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첫걸음으로 ‘근대를 바라보는 3인의 스펙트럼’이라는 기치 아래 세 권의 평전을 선보입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던 독립운동가 안중근, 민족을 대표할 만한 지성으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변절의 길을 걸었던 육당 최남선, 그간 ‘매국노’로 낙인찍혀 거의 실체를 조명받지 못했던 이완용이 이번에 선보이는 세 인물입니다  
   

 먼저 이완용을 살펴보면.... 

을사오적(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 정미칠적(한일신협약), 경술국적(한일병합조약) 중 한사람,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한 장본인,   한일병합의 일등공신.....  이완용...!! 

아무리 합리적 근대인 면모를 지녔다고 책에서 증명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매국노, 친일파..... 

매국노, 친일파였기때문에 한일병합이후 부귀영화, 권세를 두리며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지 않았는가....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던 진실앞에 이완용의 평가가 내맘속에서 재평가되기는 아무래도 무리일듯싶다.  

이건 순전 내 뜻이니 오해말기를 바람... 

불쾌하고 불편해도 진실은 진실로 인정하고, 외면하거나 그 내용에대해서 두려워하지는 말아야겠지....어디 한번 보자!!  

합리적 근대인의 면모를 지녔다던  매국노 이완용을......

 

 

오늘날 친일 매국노의 수괴,  친일매국노의 대명사, 친일매국노의 국가대표급주자인 이완용(1857~1926)   

이완용 뿐 아니라 이완용家는 매국 명문가였다.  

일본의  조선의 식민지화에 적극가담한......이완용!! 

어자피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고 러시아나 일본의 식민지가 될 운명이었기때문에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해서 병탄 조약에 가담했다는 논리...독립불능, 망국필연의 논리를 가진 이놈의 매국노..친일파... 

이책에서 이완용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떤것일까?
이완용을 통해 그 당시  대한제국의 구조와 관계의 어떤 문제들을 볼수 있을까?  
우리가 몰랐던 이완용의 모습은 어떤것이 있을까? 있기는 한걸까?

매국노의 대표인사 이완용은 처음부터 일본과 가까웠던 인간은 아니었다는데........ 

미국과 러시아에 가까운 인물(친미,친러파)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이완용이 적어도 이때까지는 친일파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친일파로 더럽게 변신한건 1904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정계에 복귀하면서 부터 아주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펼쳤다고......!! 

을사조약, 한일신협약,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약문에 도장 빵빵 찍어댄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개도 더러워서 안물어간다는 매국노라는 치욕적인 칭호를 가진 이완용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자기 재산을 늘리고, 매국의 대가로 명예와 권력을  꼭 쥐게 된......매국을 출세의 기회로 삼은...이완용과 그 외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60여명..... 


을사조약은 1905년 대한제국 박제순, 일본제국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체결당시 정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고, 을사년에 이루어 졌기때문에 을사조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9명의 대신가운데 5명의 대신이 찬성, 서명하였다.서명한 망할놈의 인사들을 나라팔아먹은 매국노, 즉 을사오적이다..이 조약의 체결로 외교권포기, 또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대외적으로 주권행사를 할수없고, 대내적으로는 주권국가의 본질을 훼손하였다. 일본제국의 검은 속내가 너무도 잘보이는 강압적인 조약... 실질적으로 국가의 주권상실의 의미를 지닌 조약이다...

한일신협약은 일본의 야욕이 점점더 불이 붙어 법령권제정등의 7개조목으로 1907년에 체결된 불평등조약이다.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우리를 병탄하기 위한 조치로 7개항의 조약을 정미칠적를 상대로 체결했다. 

한일병합조약( 국권피탈, 경술국치)은 1910년 8월22일에 일본과 맺은 합병조약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을 체결하고 29일에 공포함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된다..
이미 1905년 을사조약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친미파, 친러파,친일파,친청파들이 서로 머리뜯고 싸우던 조선왕조는 이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대신들이 서로 합방의 주역이 되고자 미친듯 날뛰었을것은 안봐도 비디오인 일.........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8명의 친일파대신들은 이 조약체결의 찬성, 협조후 공을 인정받아 작위까지 수여받았었지....!!   일제가 과연 저놈들같은 친일세력들이 없었다면 강제병합을 이렇게 밀어붙일수 있었을까??  나라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돈으로 잘먹고,잘입으니 좋더냐?

병합조약 전문을 보면

두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합병을 해야한다. 그래서 합병조약을 체결한다............................................................??? 

   
 

1.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 준다.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이외에 한국의 황족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을 준다.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지적된 병합의 결과 전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의 관리에 등용한다. 

8.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을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8번의 두 전권 위원이 바로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이다...  

이후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모든조약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병합조약이 불법이 아닌  합법이다. 그 후 해방을 기점으로 무효가 되었다는 일본입장과   

한일병합조약 자체가 불법으로 원천무효임을 주장하는 한국의 입장을 조정한 것으로 지금까지 양국의 입장과 해석이 다르다.  

너희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거라...

한일병합은 원천무효......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무효........조약의 전문도 거짓, 본문도 거짓........ 

너희들의 제대로 된 역사인식은 언제쯤 바로 서는 것이냐?  

강제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걸 합리화하려는 일본,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게 하기는 커녕 

왜곡된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독도를 자기네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묻는다......역사바로세우기..우린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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