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할 때면, 친구들과 나는 늘 온갖 꼼수를 써서 끝내 맨 뒷자리를 차지했다. 분단마다 뒷자리를 점거한 우리들은 만만하다고 여겨지는 선생님의 수업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책상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책상을 화장실에 숨겨놓고 학교 뒷산으로 도망가는 무리 중에 하나가 나였다. 잎사귀 사이로 아득하게 들려오는 수업 종소리란 늘 묘한 긴장과 흥분을 자아내는 것이어서 도주는 중독성이 강했다.

 

그러나 혼자였다면 결코 감행하지 못할 비행이었으리라. 일찍부터 어줍잖은 패거리 문화에 눈뜬 나는 기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소인배에 불과했다. 나의 객기는 치졸하게도 집단에 속해 있을 때만 과도하게 발휘되었다. 그 시절에는 비행으로 고무된 집단 의식이 나를 구성하는 정신적인 영역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단이라는 것은 확실히 어떤, 환영을 만들어낸다. 집단 안에서 대담해진 자기 모습을 실제의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 소심하고 자의식이 희박한 인간에게 집단이 주는 매력이란 어쩌면 그런 환영에서 오는 도취감이 아닐까.

 

오로지 집단 안에서만 용맹하고 집단 안에서만 잔인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치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경험으로 미루어 나는 그들의 용맹성이 상당 부분 허구임을 확신한다. 그들의 결속력은 기실 나약하고 별볼일 없는 개별자들의 부실한 연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실로 용맹한 사람은 오롯이 홀로 존재할 때 가장 담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연대만이 비로소 웅숭깊은 울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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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사람들과 동동주를 마시면서, 직업적 자질 부족으로 여겨질 만큼 나는 지나치게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최소한의 수준이라도 갖춰야 할, 연출되고 각색된 사랑조차도 나에게는 전적으로 부재한 듯하다. 아무래도 나는 나에게 너무나 사로잡혀 있고,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나의 가장 큰 문제이자 결함인지 모르겠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데, 내가 이제까지 이성애이라고 할 만한 감정을 느꼈던 상대 역시 언제나 자신에게 단단히 매몰되어 있는 유형의 인간-그들은 부인할지라도-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끼리의 연애 감정이라는 것은, 애당초 헌신이나 희생이나 베풂 등의 숭고함과는 거리가 먼, 그저 자신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타인에게까지 일시적으로 확산된 형태로서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본질적으로는 자기애에 불과한, 지극히 유아적이고 미성숙한 수준의 감정밖에 발휘할 수 없는 탓에,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끼리의 연애란 필연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동주를 마셨던 밤에는 이름도 성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과 급격한 속도로 친해져서 죽마고우처럼 어울렸다. 일요일 오후에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훌륭한 열람실을 갖춘 구립도서관을 발견했고, 필름 두 롤은 여전히 현상하지 못했다. 이제는 제법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좋다. 부끄럽고 우습고 곤란했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미안했던 또 한 주말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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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군국주의에 대한 나의 흥미는 여기까지 관찰하게 되면 이제 사라져버려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수고하는 것조차도 성가신 느낌이 든다. 나는 더욱 높은 장소로 오르고 싶어진다. 더욱 넓은 시야에서 인간을 조망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지금 독일을 종횡으로 그저 맹렬하게 활약시키고 있는 이 군국주의의 형태를 더욱 원거리에서 더욱 사소하게 관찰하고 싶다. -나의 개인주의 p.180

이렇게 말하는 소세키의 태도를 소극적이라고 힐난할 수 있을까? 모두가 사르트르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또한 사르트르만이 정답도 아닐 것이다. 나는 차라리 소세키에 동조한다. 더 높은 층위에서 세계의 사태들(그리고 그 사태들이 빚어내는 사태까지)을 조망하는 작업은, 단순히 관조나 방관으로 규정될 수 없는, 소극성으로는 더 더욱 폄하될 수 없는, 나름의 내적 치열성을 담보로 하는 활동일 수 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여질지라도 내적인 차원에서는 적극적 고투일 수 있다.     

세상의 미시적인 에피소드에 울고 웃으며 기력을 탕진하는 일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그 모든 에피소드를 야기하는 근원적 실체와 흐름을 파악하는데 에너지를 쏟는 편이 얼마 남지 않은 내 몫의 생을 그나마 의미있게 보내는 일일 것 같다. 인식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메타 언어를 배우고 싶다. 물론, 오로지 미시적인 에피소드만이 우주의 실체이고, 메타언어 궁극의 종착지 역시 미시적인 에피소드인 것을 안다. 비행은 어디까지나 비옥한 대지에 안착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 역시. 그러나 당장은 날고 싶다. 치솟고 싶다. 이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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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날이었다. 귀기를 품은 바람이 머리칼을 헝클어놓을 때마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곤 했다. 음침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목구멍까지 가득 찬 깔깔한 감정들이 하루종일 기분 나쁘게 넘실댔다. 감전이라도 된 고양이의 곤두선 털처럼 하루 종일 온몸의 신경이 빳빳했다. 이런 날의 상념이란 대체로 비생산적인 생각의 연속일 뿐이고, 언제나 그 끝은 우울이다. 내 안의 음침한 곳에 썩은 물처럼 고여있는 우울. 아무리 건조한 곳에 두어도 좀처럼 제거되지 않는 습기마냥 끈질긴 성질의 그것.

 

오후 내내 나의 직업이 죽음에 기식하는 사업이 아닌가 냉소했고, 장사치 특유의 위장된 친절과 가식적인 호의를 베푸는 데 익숙해진 내 모습을 한없이 자조했다. 날마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함몰하는 시간들은 대체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지 분개했으며,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나의 파멸을 공모하는 것만 같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끝없는 자기비하와 비애의 한편에서 외부를 향한 알 수 없는 적대감과 공격성은 종양처럼 자라나고. 다감한 격려와 온갖 종류의 호의도, 냉소와 독설로 무색하게 만들어버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서 하루를 보냈다.

 

결국 안부를 물어온 소중한 이의 전화마저 거칠게 받고 말았다. 청소를 핑계로 전화를 끊었으나 방 안의 티끌 하나 줍지 않았다. 간다던 모임도 가지 않았고. 글을 쓰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은밀하고 어두운 감정일수록 활자로 배설할 때 묘한 해방감과 기쁨을 느낀다. 아, 그러니까 오늘은 날씨 탓이다. 날씨를 핑계로 악의적 인간을 자처하는 고약한 심사의 배후가 대체 무엇일까만은 그래도 날씨 탓이라고 둘러대자. 오늘은 지나치게 날씨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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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가 책에서 얼만큼의 지식을 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책에서 얻는 깨달음이란 우리 의식 체계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관념의 재확인 같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재확인에서 비롯한 기쁨일 거야. 진짜 깨달음은 언제나 활자 너머의 실재하는 삶 가운데 날것으로 있다. 진정한 지적 성취는 오로지 실천과 체험을 통한 의식의 확장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을 거야. 대략 이런 말을 내뱉고 나서 S는 조만간 몽골로 떠날 거라고 했다.

S가 했던 말을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도 똑같이 한 적이 있다.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S가 딱히 니체에 열광하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니체를 구태여 탐독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는 충분히 니체적이다. 말하자면 S는 니체를 사는 사람이고 나는 니체를 쓰는 사람인 것이다. 읽고 꿈꾸고 실천하는 세 가지 절차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그의 과감성이 잠시, 부러웠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 먹기로 한다. 비록 모험가의 것보다 외양은 화려하지 못하겠지만, 조금은 갑갑한 현재 나의 삶도 나름의 실천과 체험으로 받아들여볼 수 있겠지. 우리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가든 삶을 대하는 데 있어서 핍진한 태도를 잃지만 않는다면, 깨달음의 밀도는 지리적 활동 반경보다도 세월의 무게에 좀 더 비례하기 마련이리라. 이런 걸 자기 위안이라고 하는 걸까마는. 아무래도 나는 시험에 떨어진 이후 부쩍 체념조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체념의 정서까지도) 어쩐지 자꾸만 막강한 미지의 권력에 의해 아주 오래전부터 부여된 내 몫의 역할인 듯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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