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슬픔과 원망, 공포와 두려움 따위에 질려 딱딱하게 굳어지지 말 것. 왜냐하면 딱딱하게 굳어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전 우주적 댄스에 동참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니까. 아니, 그것은 실존하면서도 실존하지 못하는 자기 모순에 다름 아니니까. 딱딱해지지 말고 대신 고통을 멀리서 조감할 것. 그리하여 그 고통이 나와 함께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고 있음을 알 것. 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고통에 아름답게 화답하고 있다는 뜻. 아름답게 조응하고 있다는 뜻. 그렇게 무엇에든 화답할 것. 조응할 것.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대로 표현할 것.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분유하고 있는 실체의 부분들을 마음껏 펼칠 것. 웃고 뛰고 구르고 만세 부르고 춤 출 것. 전 우주에 흘러 넘치는 리듬에 몸을 맡길 것. 만물과 함께 약동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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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적 자아를 지탱하는 것은 공허다. 그들은 거대한 무(無)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마치 신기루처럼 혹은 투명인간처럼,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 자체가 부조리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유일하게 '없음'을 눈치채버린 사람들인지 모른다. 히스테리는 그것에 대한 형벌인지도.

 

그들은 끊임없이 몰두할 만한 ‘어떤 것’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무’라고 하는 자기를 덮어 씌워버림으로써 간신히 윤곽을 만들어 낸다. 오로지 그 윤곽을 통해 비로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은 무엇보다도 원대하고 강력해야 한다. 거대한 공허를 완벽하게 덮어 씌워버리기 위해서. 또한 그것은 견고하고 튼튼해야 한다. 쉽게 구멍이 뚫려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리로 모든 게 다 빨려들어가 버릴 테니까.

 

원대하고 강력하고 견고하고 튼튼한 것. 실로 막강한 것. 그런 게 사랑, 부, 권력, 명예 따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스테리적 자아한테 그런 것들은 너무 약하다. 그런 것들은 모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인데 관계라는 건 허물어지기가 너무도 쉬우니까. 그렇다면 히스테리적 자아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택할까. 그는 진리를 택할 것이다. 진리는 결코 허물어지지 않으니까. 아니, 허물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리니까. 그는 아마도 진리 중에서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진리- 철학이나 신학에 목 매달게 될 것이다. 사제의 학문에 목 매다는 것이 그가 생을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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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일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도 결정적으로는 모두 재미가 좌우하는 것 같다. 관심과 집착, 싫증과 무관심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발생과 소멸의 한 주기- 그것을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라 한다면 그러한 사건의 국면을 좌우하는 요소들은 결코 윤리나 정의, 명분, 강제, 책임감, 자기 절제 따위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차라리 껍데기이고 둔갑이다. 그러니까 기표 같은 것들이다. 기의를 잊어버리고 기표만을 과도하게 의식하게 될 때, 내 안에서는 극렬한 반동 현상이 일어난다. 집착을 끊기 위한 집착. 명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명분. 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제. 반동과 재반동이 거칠고 게다가 비본질적이기까지 한 격랑이라면, 재미는 격랑 아래의 도저한 흐름이다. 그것은 사건을 좌우하는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심급이다. 재미난 것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내 안에서 어떤 새로운 발생이 일어난다. 그리고 내 안의 촉수들이 일제히 발기하는 바로 그런 순간에 비로소 나는 어떤 강렬한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재미에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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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다시 이런 글을 적고 싶다. 저런 글을 쓸 때의 내가 가장 나다운 상태였던 것 같다. 예전에는 세상이 나에게 농을 걸어오면 나는 그것을 제법 즐겁게 받아쳤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웃음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을까. 웃음의 파산. 웃음의 금치산자. 요새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란다. 너무 정색을 하고 있어서.

 

웃음과 장난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것이 늙음의 표식인 것을 알기에 더욱. 강자에게 힘이 있다면 약자에겐 깊이가 있다는 말이 (물론 이 말은 약자를 변호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강자에겐 웃음이 있는데 약자에겐 심각함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소설가 아무개는 삶 앞에서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만 장난칠 수 없는 삶이야말로 죽은 삶이 아닐까. 생명의 본질은 유희라는 점에서.

 

내 인생이 소설이라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나 이문구의 <관촌수필>같은 종류였으면 좋겠다. 암담하고 서글픈데 한없이 웃긴 인생. 모두가 슬피 우는 상황 속에서 눈치없고 실없고 방정맞은 사람이고 싶다. 어두운 상황에서 피식 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강자적인 힘이 아닐까. 심각하고 무거운 사색보다는 해학과 유머를 간직한 글이 더 건강하다. 다시 그런 글을 적고 싶다. 아니, 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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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이라는 대립항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나르시시즘적 낭만주의자들의 특성이 아닐까. 그들에게 현실은 언제나 둘 중 하나다. 너무나 숭고하거나 너무나 비참하거나. 그것은 신파다. 삶을 호도하는 신파다. 살아가는 일은 그다지 숭고할 것도 비참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저 철저하게 우리의 욕망대로 살아갈 뿐이다.

 

대의라는 건 허위의 관념이다. 대의에 대한 포기도, 대의를 위한 포기도 모두 허위의 관념이다. 우리는 결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대의를 위해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포기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얻게 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그는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라느니 희생이라느니 하는 잡다한 수식을 걷어내고 냉철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가 간절히 욕망하는 삶의 방향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게 좋으니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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