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은 인간이 지지만, 책임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책임의 범주를 벗어난 것들, 파시즘이나 자본권력이나 그런 것들은 그저 도저하게 '작용'할 뿐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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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량리. 그곳은 요란스런 동네였다. 날마다 정체모를 약장수가 목청을 높이며 성분이 의심스런 엑기스를 선전하고, 주위로는 언제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노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요설을 경청했다. 전대를 찬 아낙들은 쌍소리를 주고받으며 육탄전을 벌였고, 그러다 어느 한쪽이 물벼락을 맞고 나가떨어지기도 했으며, 그 사이 색색의 조각보로 온몸을 둘둘 만 노숙자가 거리를 배회했고, 노상에 자리를 펼친 점쟁이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행인들을 쏘아보는가 하면, 골목 한복판에선 알코올중독자가 대(大)자로 뻗어있고, 그 와중에도 대낮부터 소주를 걸친 아주머니들은 코끝이 새빨개진 채 대관령 코다리 미역을 팔았다.

 

보이는 것마다 정신없고 촌스럽고 지저분한 동네였다. 나는 청량리에 직장이 잡힌 이후로 그곳의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멸시와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긁어모아 거리 곳곳에 오물처럼 투척했다. 브라질 다방의 더러운 간판에 조소를 날리고, 길거리표 엑기스를 의혹에 가득 찬 시선으로 쳐다봤다. 거리에 만연한 각박한 정서와 경박한 분위기가 내게 조금이라도 옮겨 붙을까봐 결벽증 환자처럼 몸을 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곳은 소위 588이라 불리는 사창가 일대였다. 요란법석의 아수라를 헤치고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면 마치 겹겹의 꽃잎 속에 은신해 있는 꽃술처럼 사창가가 펼쳐져 있었다. 속눈썹이 삼 센티씩 되는 아가씨들이 반짝이는 드레스를 차려입고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에게 588은 긍정이나 부정을 떠나 애당초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단언컨대 싫었다. 그런 곳이 직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조차 못마땅했다. 모순적이었던 것은, 그곳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감정적인 거부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 또한 내가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동안 읽은 몇 권의 책들 덕분에 장식적으로나마 몸에 걸치고 있던 인권의식이나 공동체의식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청량리라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의지와 무관하게 불쑥불쑥 솟아나는 악의적 감정들은, 관념으로만 익힌 시민적 도덕률이 얼마나 알량하고 허구적인 종류인지를 명백히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2 도저히 호감이 가지 않는,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환경과는 천양지차의 동네였지만 어쨌거나 그래도 청량리는 내 일터였다. 싫든 좋든 나는 그곳에서 하루하루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게 청량리는 대면하고 싶지 않지만 끝내 외면할 수도 없는 그런 동네였다. 퇴근 후 카메라를 챙겨들고 청량리 일대를 찍으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런 미묘하고도 복잡한 심사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588은 청량리에서도 가장 꺼려지는 곳이었지만, 나는 망설임 끝에 마지막으로 거기까지도 카메라에 담았다. 결코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의무감에 가까웠다. 불편한 대상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불편을 느낀 데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모른 척 하고 싶은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한 의지이자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겠다는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당시의 나 자신에게는 제법 정의롭게 여겨졌을지 몰라도 관계 맺기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히 이기적이었다는 사실, 그것이 결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진정한 방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사진 찍기라는 행위가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로 타자를 이해하려는 대단히 자족적인 활동이며,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3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동안 내가 청량리에 대해 갖게 된 최초의 우호적인 감정은 동정심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동정심의 배후에는 나이, 생활 환경, 경제력, 지능, 사회적 지위 전반에 걸쳐 나의 총체적 처지가 대상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이 전제되어 있었다. 타자를 나보다 열등한 위치로 상정해놓은 상태에서 발휘하는 동정심이란 얼마나 위선적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와 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 일에 불과했다. 명확한 선을 그어놓고 선 너머를 혀를 차며 바라보는 것, 이것이 당시 내가 느낀 동정심의 실체라면 실체였다.

 

자기 방어를 위해 대상과의 간극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정은 혐오와 닮아있다. 어쩌면 동정과 혐오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 아닐까. 그래서 동정을 베푼 대상은 언제든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복될 수 있는 게 아닐까.

 

4 어떤 대상을 향해 렌즈를 들이민다는 행위는 내가 그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피사체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행위인 것이다. 사진 찍기는 청량리라는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한 가지 방법론이었다. 일정하게 유지되는 거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나의 사진 찍기는 동정이나 혐오라는 감정과도 그 내적 맥락이 닿아 있었다.

 

사진을 찍는 행위의 배후에는 어떤 심리가 내포되어 있을까.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수전 손택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하려는 주체의 욕망을 읽어낸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곧 주체와 대상의 특정한 관계 맺음인데, 이 과정을 통해서 마치 주체는 어떤 지식을 얻은 듯, 그래서 어떤 힘을 얻은 듯 느낀다는 것이다. 이때 카메라는 불편함을 주는 이질적 대상을 포획하여 박제함으로써 불온한 타자를 제압하는 데 소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사체와의 정서적 교감이나 유대가 부재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렌즈 들이밀기로 이루어지는 사진 찍기는 피사체에게 자행되는 명백한 폭력이다. 사진으로 포획되는 순간 대상은 실재성을 상실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대상, 즉 타자는 더 이상 ‘도래하는 낯선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타자는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한 시나리오의 한 요소로 전락해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활용된다. 그리고 그런 때의 타자는 나의 현재에 아무런 작용을 가하지 않는, 그저 먼 곳에 고정된 채로 존재하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사진을 찍음으로써 나는 타자에게서 후퇴하여 자신 속에 숨어버린 채 인식주관의 입장만을 취하는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5 동정과 혐오라는 감정, 그리고 사진을 찍고 다녔던 나의 행동. 이 모두에는 전적으로 ‘공재성’이 부재해 있었다. 파비언에 따르면 공재성이란 ‘동시대를 사는 것’이다. 그것은 격리된 다른 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질이다. 나는 청량리라는 경제공동체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량리 사람들과 전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관찰자의 시선으로 셔터를 눌러댈 때 뿐만이 아니라, 약국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약을 조제해서 팔고 상담을 할 때조차도 철저히 그들과 나는 ‘시간의 계층화-공간화’를 이루고 있었던 게 아닐까.

 

파비언에 따르면, ‘시간의 계층화-공간화’는 마치 인터넷 익스플로러 창에 두 개의 동영상을 띄워두듯이 세계를 분할하여 각각을 별개의 공간으로 만들어 사유하는 공상적 분리기제다. 이는 곧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즉각적인 이동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때 각각의 세계는 병존하면서 동시에 분리된 장소로서 존재한다. 파비언은 시간의 계층화 또는 시간의 이층적 배분이 공재성을 거부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얘기한다. 더불어 그는 공재성의 거부가 응답 가능성으로서의 책무에서 자기를 면책하고 부끄러움의 불안에서 도주하기 위한 수단임을 지적하고 있다.

 

6 나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청량리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서 '부대끼는 게' 옳았으리라. 부대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고 시달리는 것이다.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성가시게 하고 성가심을 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대낌이란 이해하려는 대상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삶의 규칙을 공유해 나가는 일이다. 파비언은 “열려있다는 것은 폭력이나 항쟁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폭력이나 항쟁은 뛰어난 공재성의 양태”라고 말한다.

 

폭력과 항쟁은 곧 ‘소통의 찢김’이다. 온몸으로 소통의 찢김을 감내하며 대상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것, 그리하여 대상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서로 함께 부대끼는 것. 그것은 내가 사진찍기라는 활동을 통해서는 결코 당도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칼 포퍼는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포퍼가 말한 ‘새로운 이해’라는 것은 소통의 찢김을 감수하면서 얻게 되는 고통스럽고도 핍진한 체험, 그러한 체험을 통한 이해에 다름 아닐 것이다.

 

7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공재성의 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내가 다시 청량리로 돌아갔을 때 나는 청량리 주민들과 공재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부대낄 수 있을까. 알았다고 해서 나는 과연 안 만큼 실천할 수 있을까. 알아도 쉽게 실천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앎과 실천 사이에 놓인 괴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 하나의 문제. 공재성을 확보한 관계에서도 타자와의 간극은 엄연히 존재하질 않는가. 그 간극은 우리가 저마다 독립된 개체로서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간극이다. 타자에 가닿는 것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서늘한 심연을, 심연의 간극에서 비롯하는 존재론적 고독을 우리는 어떻게 품어 안아야 할까.

 

8 타자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가장 완벽한 이해는 자신을 포기하고 스스로 이해하고 싶은 타자가 될 때이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론적 닮기, 즉 미메시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미메시스는 인식론적 모방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외적 형태의 재현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제 몸의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의 분장술과 같은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가리킨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과연 현실적으로 탈아(脫我)를 통한 대상과의 합일이 가능할까. 근대적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면 존재론적 닮기 역시 지나치게 시(詩)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게 아닐까.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홀로 있는 존재로 성립된 주체가 타자와 관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성주의적 길로서의 ‘지식’과 신비주의적 길로서의 ‘무아경’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언급하며 그 두 길이 모두 적합지 않다고 말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대상이 주체에 흡수되어버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주체가 대상 속으로 흡수되어버린다는 점에서 모순적이게도 이 두 가지 극단적 앎의 방식은 이해하려던 타자 자체의 소멸을 가져와 버린다는 것이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결코 좁혀지지 않는 타자와의 간극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노래한다. 어쩌면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간극이란, 그러니까 너와 나의 간극이란,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는 비밀스런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시인의 말처럼 정말로 바람이 춤추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간극은 더 이상 타자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대상과 내가 매순간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생성의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메워야 할 결핍이 아니라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미지의 공간으로서 간극을 인식할 때, 타자와 나는 비로소 “불편한 우정”(진은영)을 쌓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불편한 우정’이란 앞서 언급한 ‘부대낀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타자와의 간극을 가능성을 배태한 미래적 장소로 보는 이런 관점에서는 ‘어떻게 간극을 극복하여 타자에 도달하느냐’가 아니라, ‘타자와의 간극을 어떻게 가꿔 나갈 것인가’로 그 문제 설정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어떻게’에 대한 한 가지 방법론으로 유머의 가치를 언급하고 싶다.

 

9 사진찍기가 대상과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대상 인식 방법이라면, 유머는 그 심리적 거리감을 일시적으로 무화시켜 버림으로써 대상과 융화하는 방법이다. 전자가 이성적 관찰이라면 후자는 감성적 어울림이다. 전자가 인식론적 제스처라면 후자는 관계론적 제스처다.

 

실질적으로 유머는 적대가 발생할 수 있는 국면을 진정시키는 훌륭한 완충제로서 기능한다. 적대라는 것은 나와 외부의 대상과의 적대에만 국한된 양상이 아니다. 내 안의 무수한 타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 또한 하나의 적대적 상황일 수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 웃음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기억한다면, 유머야말로 강자의 어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머는 슬픔과 고통의 정신적 내면화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들을 신체에서 털어버리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10 약국에는 날마다 별별 사람들이 다 찾아왔다. 노숙자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 약국에 살림을 차리려 했고 깡패들은 쓰레기 더미를 투척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진동하는 악취로 존재감을 알리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적선 좀 해달라고 생떼를 쓰는 부랑자도 부지기수였다. 이들과 부대끼면서 뛰어난 공재성의 한 가지 양태를 보여주었던 사람이 바로 과장님이다. 내가 혀를 내두르며 조제실로 도망가 버릴 때마다 그녀는 넉살과 타이름으로, 때로는 욕설과 삿대질로 그들과 어울렸다. 과장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보다 훨씬 많이 웃고 화내고 욕하고 수다스러웠는데, 그녀가 약국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기본적으로 끈끈하고 찰진 어떤 것이 있었다. 그 어떤 것이란, 자동인형처럼 뻣뻣한 나의 태도에는 도저히 부재한 무엇이었다.

 

웃고 화내고 욕하고 대들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눙치고 하는 일련의 모든 소통 양태가 한때는 한없이 통속적이라며 냉소했던 적도 있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누구나 저렇게 모서리가 닳고 닳은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싶어 우울한 적도 많았다. 오랜 시간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옹이처럼 생겨났을 장사치 특유의 성정이 과장님에게서 느껴질 때마다 그것이 곧 나의 미래의 모습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암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통속적이라 냉소했던 장사치 특유의 성정이야말로 공재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그 성정의 기저에 깔려있던 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나 싶다. 관념적 사변으로는 결코 습득되지 않는, 오로지 부단한 부대낌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단단하게 쌓여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서의 어떤 애정 말이다.

 

11 이제까지 나는 공재성과 그것의 적극적 양태로서의 부대낌, 유머와 인간애 등을 열쇠말로 삼아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았다. 이 글을 쓴 이후로도 나는 무수히 다양한 청량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각각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또 다시 새로운 타자와 온몸으로 불화를 겪게 될 것이며, 매번 다른 종류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한,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타자 이해의 문제는 결코 관념으로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구체 속에서 매번 새롭게 의미화 작업이 요구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지옥이란 다름아닌 타인들이라고 했고, 니체는 생의 고통을 대지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축제로 받아들인 바 있다. 그렇다면 타자와 타자성을 사유한다는 것이야말로 생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그리하여 생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타자에 대한 성찰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의 난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더불어 혼자인 삶’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타자에 대한 사유가 계속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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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쉬 2015-11-2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이...
보물 같네요.
책 속 구절인 줄 알고 무슨 책인지 찾아봤다는

수양 2015-11-28 03: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달아주신 댓글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봤는데 이런 맙소사 우르르 몰려오는 닭살크리를 어찌할까요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밤 11시 정도가 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았을 때 복도 끝에 시커먼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어서 화들짝 놀란 적이 몇 번 있었다. 동생이었다. 까무러치는 내 꼴이 우스운지 동생은 담배를 비벼 끄며 킬킬대고, 나는 멋쩍어서 짐짓 심장 떨어지겠다고 타박을 놓곤 했다. 그렇게 둘이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투닥거리다가 나란히 집으로 들어온 게 두어번 쯤 될까. 

그런데 참 모를 일이다. 언젠가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귀가할 때마다, 동생이 어두운 복도 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면, 그래서 또 나를 깜짝 놀라게 해주었으면 하는 실없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기대는, 원래 기대라는 게 그렇듯이, 들어맞을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다. 물론 어긋났다고 해서 좌절할 건 없다. 복도가 텅 비어 있다면, 동생은 틀림없이 집안에서 퀭한 눈으로 컴퓨터를 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럼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았을 때 아무도 없으면 왠지 허전하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때 그것은 아무리 미소한 종류라도 어찌할 수 없는 허전함을 동반하는 것이다. 사소한 반복에도 규칙성을 부여하고 괜한 기대를 품는 버릇은 얼마나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습관인지. 동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은, 그저 담배를 태우거나 컴퓨터를 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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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쟁과 타도만이 성장의 유일한 방식은 아닐 것 같다. 성장이 좋음으로 나아가는 일이라면, 좋은 무리와 어울림으로써 그들에게 영향 받아 나 자신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 이것도 성장의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무리 안에 들어가 그들과 공통개념을 분유하기 시작하는 것,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그 안의 리듬을 타는 것. 감응(정서모방)을 일으키는 것.

 

2 니체는 힘을 주고, 스피노자는 기쁨을 준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일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올라타서 바라본 세상이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3 "아버지가 그랬다, 시란 쓸모없는 짓이라고. 어느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기왕이면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 시집 <목련전차>에 들어있는 손택수 시인의 말. 쓸모없는 짓이 비단 시 뿐일까. 허망한 줄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 허무에의 긍정.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사명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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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절미 먹고 배탈 났다는 할아버지한테 약 드렸더니 좀 있다가 다 토했다. 주룩주룩 토한 것이 전부 다 맹물이었다. 인절미가 힘없이 녹아있는 맹물이었다. 속이 안 좋아서 물 밖에 못 먹었다고 주룩주룩 입을 닦아주면 또 주룩주룩 마침내 거죽만 남은 할아버지가 텅 빈 물병 같은 표정으로 잠시만 쉬어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무서웠다. 이렇게 토하고 토하다가 결국 픽 죽어버릴 것 같아서.

 

흥건해진 약국 바닥이 괜찮았던 건 결코 내가 너그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죽음을 환기하게 된 순간 앞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계속 괜찮을 뻔 했는데, 할아버지가 별안간 설사할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 역시 설사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여기서 누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더니 다행히 휴지를 둘둘 말아서 밖으로 나가셨다. 멀건 토사물만 남겨놓고 허깨비처럼 휘청휘청.

 

이것이 어젯밤의 일이다. 오늘 점심때 할아버지가 믿을 수 없이 씩씩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서는 다 나았다고 한다. 어젯밤에 똥 어디서 누셨는지는 안 물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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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2012-05-2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독서리뷰를 보던 중 서재까지 와서 본의아니게(타인의 사유의 흔적들을 훔쳐보려는 의도는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ㅠㅠ) 생명연습을 읽게 되었습니다. 도둑글읽기처럼 보고만 가도 흔적은 남지 않겠지만, 아닌 밤중에 킬킬대는 재미를 주신 부분에 대해 감사의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 댓글을씁니다. 감사드려요.

수양 2014-03-21 19: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생명연습 코너에 글쓰는 일이 뭔가 괜한 헛짓거리 같아서 언젠가부터 안 쓰고 있는데...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지금은 정체 상태지만 나중에 다시 정성들여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