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의 외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수유-너머야말로 사실상 인문학 콘텐츠를 판매하는 집단으로 이미 자본주의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않았는가. 우연히 어느 인터넷 게시판 논쟁에서 이런 요지의 덧글을 읽고 마음이 계속 무거웠다.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것 역시 그 해소되지 않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옳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말은 명쾌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가혹하게 느껴지는 지적이었다. 이것이 단지 내가 수유-너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수유-너머를 바라봤을 때 나올 수 있는 지적이고, 거기에 무슨 반론을 달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저 의도와는 무관한 효과로서 수유-너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씁쓸했던 것은 다만, 그 비판이 대상에 대한 어떠한 이해의 의지도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아니, 애당초 그것은 대상에 대해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비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식의 비판은 마치 자신을 중심으로 단단한 성벽을 둘러쌓고 그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은 채 고함만 쳐대는 비판처럼 느껴진다. 

푸코가 계보학적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을 때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로부터 거부당했다. 푸코의 연구방식이 자신들의 고유한 방법론적 틀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푸코가 역사학자들로부터 폄하되었던 사실이 내게는 수유-너머에 대한 비판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확고하게 구축된 장소로부터 결코 벗어날 생각이 없이 오로지 그 안에 진을 치고 앉아 이질적 대상을 규정하고 비판을 가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쉬운 만큼 또한 가볍고 폭력적이다. 대상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지만, 그 거리가 몰이해에서 비롯한 것일 경우 비판은 더 이상 비판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그것은 차라리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대상을 잔인하게 재단해버리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나 역시 수유-너머 주위를 배회하면서도 그런 거리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유-너머에서는 인문학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에서와는 다른 관계 맺기 방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확실히 새롭고도 놀라운 방식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제안에 대해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부담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리라. 내가 그들의 제안과 환대에 기꺼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담감을 느끼며 발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사회 체제의 속성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그런 낯선 관계 맺기의 세계에 동참하는 일이 그동안의 사회 체제에서 자연스레 습득한 개인주의적 생활 양식의 일부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모험을 위해 또 다른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나로서는 여간해서 쉽게 그곳의 사회에 끼어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적어도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잔인하게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프로크루스테스가 탄복할 만한 별다른 획기적인 방안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오늘도 그저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수유-너머를 기웃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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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30대로 보이는 남자 손님과 대판 싸웠다. 싸우면서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이런 싸움을 손꼽아 기다려 왔는지를. 나랑 싸웠던 그 남자는 처음에 나에게 '씨발년'이라 했고, 그 다음에는 '법대로 하라'고 했으며, 좀더 지나서는 '법이면 다냐'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새파란 것이 어디서 반말이냐'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로 감정 상하지 말고 좋게 끝내자'며 나를 타일렀다. 그는 감정의 제어가 서툴고 말에는 어떠한 논리도 없는, 한마디로 단순하고 과격한 유형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성품은 유순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 싸움이 너무나 재미없게 끝나버린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가 좀 더 지능적이고 광포했더라면, 아니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논리력이라도 갖추었더라면, 싸움은 훨씬 더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그가 내 뺨이라도 때려주었으면 싶었다. 만약 내가 뺨을 맞았다면 나는 그 즉시 테이블을 뛰어 넘어가 그에게 덤벼들어 목덜미를 갈기갈기 물어 뜯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 실로 혼신을 다해 싸울 태세였던 것이다. 싸움이 불러일으키는 흥분과 긴장, 그것이 주는 쾌감은 그만큼 엄청났다. 싸움은 그동안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게 몽롱한 상태로 늘어져 있던 온몸의 세포들을 하나 하나 흔들어 깨워 주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경찰을 부르겠다고 외치는 순간, 나는 극도의 쾌감 속에서 마치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싸움이 싱겁게 끝나버리자 말할 수 없이 허탈했다. 정말이지 오늘보다 훨씬 더 악랄한 손님을 만나고 싶다. 씨발년 따위보다 몇십 배는 더 강력한 욕을 얻어듣고 싶다. 나의 호전적 본능을 일깨워줄 인간 말종을 만나서 경찰한테 붙잡혀갈 때까지 피 튀기는 육탄전을 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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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8-0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본적으로 성품은 유순한 사람이었다' 요게 싸움을 참으로 허무하게 만들죠--;
스트레스가 많으신가봅니다^^;

수양 2010-08-0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레스로 인해 나날이 전투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중입니다. 허허
 

일찍이 지혜로운 철학자가 천명하였듯이 우리는 말 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침묵은 어쩌면 최소한의 양심이나 예의 같은 게 아닐까. 삶에도 뼈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성분은 오로지 말할 수 없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것이리라. 말이라는 것은 대저 얼마나 본질로부터 먼 곳에 있는가. 그것은 얼마나 남루하고 곤궁한가. 우리는 묵직한 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막을 횡단하는 한 마리 낙타처럼 육중한 말들 속에 파묻혀 끝끝내 고독하리라. 무수한 말들은 모조리 실패할 운명이다. 세계의 모든 비밀은 말 속에서 더욱 더 견고하게 은폐될 것이므로. 말이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체념 속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쓰고 그냥 살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결국 내 삶의 언저리에서 변죽만 울려댈 것이었다. 그러나 말문이 막혀버린 세헤라자데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 이제는 알겠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끊임없이 자맥질을 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굴러 떨어질 바위를 열심히 밀어올리는 시지푸스처럼, 절망적이고도 힘차게 무슨 말이든 지껄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쓴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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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케이블 채널 QTV에서 하는 '순정녀'라는 오락프로를 거의 한 회도 안 빼먹고 열광적으로 시청하고 있다. 이 프로에서는 매 회 열 명 남짓한 여자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해서 서로 순위를 정한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순위의 기준은 대략 이런 식이다. 가장 가식적일 것 같은 여자, 가장 뒷담화 심할 것 같은 여자, 가장 남자를 밝힐 것 같은 여자 기타 등등. 순위를 정하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진진한데,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인신공격성 발언이 쉴새없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여자 연예인이 방송 도중 성희롱에 가까운 막말을 해서 인터넷이 잠깐 들썩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내뱉은 원색적인 막말에 대해 비난을 쏟아부었고 그녀는 졸지에 인간 말종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녀를 도덕의 잣대로 심판하기보다 차라리 그녀의 막말에 더없이 환호하는 편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좀 더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 같다. 사실 비난했던 사람들 역시 이미 충분히 즐거움을 향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방식으로 막말의 즐거움을 향유한 셈이다. 비난은 즐거움의 우회적 표현이다. 어쩌면 비열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 프로를 좋아하는 까닭은 굉장히 잔인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이루어졌던 검투사들의 경기를 연상케 한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피 튀기고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호했던 당시의 로마 시민들과 오늘날 나를 비롯한 QTV 순정녀 시청자들의 궁극적 차이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순정녀 출연자들은 매 회 방송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처참한 막말을 내뱉으며 만신창이가 된다. 우리는 그들의 공멸에 환호하고,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대가로 출연료를 지급받는다. 아마도 그 옛날 로마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 검투사들이 받았던 급료와 비슷한 수준일 것 같다. 방송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순정녀 출연자들은 언제나 씩씩하고 용감하다. 그들은 존재론적 비애마저도 쿨하게 헤쳐 나간다. 검투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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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는 ‘실물재산’(real property)이나 ‘부동산’(real estate)이라는 말에서의 ‘실’(real)이 라틴어 res, 즉 ‘사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의 real, 즉 ‘왕실의(royal), 왕에 속하는’을 의미하는 말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real의 어원으로 보자면, 소유물이 real한 까닭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소유물이 언제든지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 빼앗기거나 파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쉽사리 가시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적 상해를 야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어느 한 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권력의 위치에 있으면 대개는 강제나 요구, 협박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조적 불평등 관계에서 비롯한 구조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치우친 상상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무엇인가. 여기서 그레이버는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첫째는 ‘현실과 이성 사이의 통로’로서의 상상력으로,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상상이 환상이나 공상으로 추락하기 이전, 고대와 중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상상의 개념이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정적이거나 독립된 것이 절대 아니며, 물리적 세계에서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의 프로젝트 속에 있고, 그런 까닭으로 인해 언제나 변화하며 적응해 간다.” 

두 번째는 ‘해석 노동’으로서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권력이 작용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의 작업이다. 가령, 직원은 자신과 상사와의 관계가 불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사의 눈치를 보고, 배려하고, 상사의 속마음은 어떤 상태인지 신경을 쓴다.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해석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불평등과 지배의 구조 속에서 소수의 엘리트만이 전자, 즉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노동에 종사하고, 노동자는 해석 노동에 해당하는 상상력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재밌는 것은, 그레이버가 ‘상상적 동일시에 의한 해석 노동’을 노동의 일차적 형태로 보면서, 맑스가 말한 노동 소외의 개념을 바로 이 해석노동에 의해 발생하는 소외로 본다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본질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면서, '소외' 역시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허구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소외라는 것은 인간이 비본질화된다는 것인데, 만약 인간에게 어떤 항구적인 본성, 본질이 부재하다면 소외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소외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개념일 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이같은 반론에 대해 그레이버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실제로 있는 것은 무한하게 복합적인 존재들이지만 그런 존재들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통합된 주체로 상상해야 하며, 실제로 있는 것은 사회관계들이 이루는 혼란스럽고 경계가 없는 네트워크지만 그런 사회관계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통합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 나는 이것이(소외의 경험이) 구조적 폭력의 필연적 결과로 상상력이 뒤틀리고 파괴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은 시위나 퍼포먼스 같은 직접행동 전략을 통해 국가 권력에 반격을 가한다. 그들은 직접행동이 ‘창조적 전복 행위의 상황’들을 창조하고, 행위자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상상의 역량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 선동가 집단 크라임씽크의 선언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을 내고 우리를 형성할 새로운 현실을 일궈 나가며 우리의 자유를 만들어야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습관, 관습, 법, 또는 편견의 관성에 방해받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의 창출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몫이다.”   

광우병 파동 때 광화문 촛불 집회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사실 나를 집회로 이끈 것은 광우병 걸린 소보다도 광화문 현장의 무정부적 상황이 전해주는 난장의 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건대 당시 광화문에는 별의 별 집단이 다 있었다. 뉴라이트 할아버지, 해병대 아저씨, 극좌파 선동조직, 북치고 춤추는 청년들, 예수천국 불신지옥 팻말 든 아줌마, 붉은 악마, 걸인 등등. 시민이라기엔 너무나 야생적이고, 폭도라기엔 너무나 평화로웠던 사람들.  

내가 진정 놀랐던 것은,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이 뚫렸을 때 그 구멍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도무지 수습이 안 되는, 인간들의 엄청난 에너지였다. 분출하는 힘! 탈주하는 힘, 힘들! 우리는 다 함께 정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이성과 합리로 설명하기 위한 의식적인 명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레이버의 표현을 빌면) 국가권력에 의한 불평등 구조가 낳은 모든 규율과 조직과 체제로부터의 일탈과 해방- 무의식의 심층에서 우리가 열망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바로 그러한 염원이 촛불이라는 하나의 즐거운 축제로 승화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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