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고객님을 사랑한다. 간이랑 쓸개도 내어준 지 오래다. 바로 그 이유로 어제는 고객님의 아들과 선도 아니고 소개팅도 아닌 이상한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시대가 고객님을 사랑하는 시대라지만 고객님의 아들까지 사랑할 수는 없지 않나. 야근하는 기분으로 조신하게 앉아있는 내내 이제는 내가 별 걸 다하는구나 싶었다. 정자세가 아니라 거나한 자세로 술을 한 잔 더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아서 귀가하는 길에 동생을 불러내었다. 
 
술을 먹으면 왜 느닷없이 옛날 생각이 날까. 동생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봄소풍을 가서 쌍절곤을 뺏긴 적이 있다. 엄마가 소풍간다고 특별히 준 용돈을 전부 털어서 산 쌍절곤이었는데 어느 심술궂은 놈이 동생을 협박해서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십 년도 지난 그 일이 어제 갑자기 떠올랐다. 야 그때 너한테서 쌍절곤 뺏어간 놈... 아 그 나쁜 새끼... 나 그때... 진짜 화났었다... 쌍절곤 뺏어간 놈... 아... 씨... 그 씨발롬... 야 그때 내가 그 놈 데려오라고 했었잖아... 내가 패준다고... 근데 지금 생각해도 또 화가 나... 왜 남의 쌍절곤을 뺏어가냐고...     

술을 먹으면 느닷없이 시도 생각난다. 야... 너 찬기파랑가 알지... 그게 그런 내용 아니냐... 같은 가지에 나서도 가을바람 불면 여기 저기 다른 곳에 떨어진다고... 한 가지에 나도 가는 곳이 다 다르다고... 야 그러니까... 너나 나나 그렇다는 거 아녀... 그게 왜 이렇게 슬프냐... 그런데 오늘 아침에 술 깨고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이없게도 그건 찬기파랑가가 아니라 제망매가였다. 어차피 동생은 술주정인 줄 알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지만.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가노라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질 나뭇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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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제주도 여행을 떠올려 보면 비행기 타본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본 나로서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까마득한 풍경이 실로 오금이 저리는 비현실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부터 착륙하는 순간까지 창유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도저히 떨어질 수가 없었다. 신문물에 전율하던 구한말 개화파들의 심정도 이보다 더 강렬하지는 못했으리라.

기내에서 이토록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승객은 (내가 봐도) 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까 손에 땀을 쥐며 노심초사하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신문을 보거나 심지어는 아예 창을 닫아놓고 잠을 자고 있더라. 우주의 신비가 목전에서 펼쳐지는데 저토록 태연하다니 저들은 대체 비행기를 얼마나 밥 먹듯이 탄 사람들이란 말인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에도 비행기는 창공을 우아하게 날고 있었다. 아니, 우아하다 못해 그것은 심지어 약간은 게으른 편이었다. 창밖으로는 그 어떤 물체도 휙휙 지나가지 않았다. 몽글몽글한 구름 덩어리들과 장난감 같은 도시들, 주름진 산맥까지도 비행기 못지않게 우아해서 그저 서서히 자리를 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내도 별 움직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천 미터 상공에서 시속 몇 백 킬로로 날고 있는 물체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치고는 다들 너무나 태평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정체된 상황 속에서 비행기는 한 시간 만에 벌써 제주도였다.

믿거나 말거나, 비행기를 타는 동안 나는 잠시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가 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인간보다 더 장수하는 것들, 이를테면 나무나 암석의 시간을 일시적으로나마 간접 체험한 기분이었달까. 허풍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간접 체험을 통해 나는 작게는 하루살이의 시간과 크게는 성운의 시간까지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신이라고 말하는 무시간성의 존재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도무지 비행기 따위에는 견줄 수도 없이, 지극히 빠르고 또한 지극히 느릴 그 존재에게는 시공을 초월한 만물의 부단한 생멸이 어떻게 그려질까?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나는 기내에서 그 누구보다도 과도하게 흥분한 승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얼마나 정적인 상태로 있었는지. 얼마나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머물러 있었는지. 아, 이 글을 쓰고 있으려니 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다. 돌 속에서 흐르는 것만 같던 그 오묘한 시간을 또 다시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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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혹은 일기처럼 무어라 끄적거리고 있으면, 마치 '나'라고 하는 정당하고 확고한 무언가가 일시적으로나마 뚜렷하게 존재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된다. 써놓은 글쪼가리의 질과는 상관없이 그냥 그런 과정 속에서 단단한 자기존재감 같은 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구축되고 인식되는 '나'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환상적이다. 마치 상상계의 아이가 거울을 보고 홀로 즐거워하는 것처럼 서글픈 촌극이다. 그러나 실은,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나' 따위는, 그러니까 텍스트를 통한 자기확인이라는 것은, 애당초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 지극히 무의미한 유희라는 생각... 그것은 마치 신기루 같다. 무언가를 읽는 일이 나에게는 진리를 구하는 일도 앎에의 의지도 아니라 그저 도피하는 일인 것만 같다. 도피하여 혼자만의 신기루를 지어내는 일만 같다.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아무 것도 적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하루를 충직하고 유의미하게 보내는 내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혐의가 점점 더 뚜렷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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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때 일이다. 자정을 넘어서면서 명박산성 앞의 시위는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시위대 중 앞쪽에 포진해 있던 일부 무리가 산성을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자고 선동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선동과 동시에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어디선가 정체모를 대형 스티로폼 벽돌들이 속속 등장했다.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로 동원된 것인지 명박산성 못지 않게 궁금해지는 스티로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위대 앞의 무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티로폼 벽돌을 하나 둘 쌓아올려 명박산성을 뛰어넘을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 행렬의 꽁무니에 있던 사람들은 반쯤은 시위를 즐기러 나온 방관적인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시위가 과격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청와대로 진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스티로폼 벽돌을 치우라고 난리였다. 갑자기 나타난 스티로폼 벽돌로 인해 '산성을 뛰어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 '스티로폼을 치워라, 말아라', '청와대로 돌진하자, 말자' 하는 의견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시위대는 돌연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명박산성 앞의 시위 무리가 내분으로 아수라가 되어가는 동안, 시위대 뒤켠에서는 퍽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청년들이 북치고 장구치며 노래를 불러댔고, 한쪽에선 통닭을 시켜먹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차량 운행이 통제된 거리 곳곳에는 빈 소주병들이 심심찮게 굴러 다녔다. 열에 받쳐 악다구니를 질러대는 시위대 전방의 무리들에 비하면, 후방에 포진해 있던 사람들은 상당히 얼빠지고 심드렁한 상태였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심 뭔가 즐거운 기색이었다. 나는 문득 명박산성 바로 앞의 과격한 시위대 무리가 후방의 아나키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정부와 격전을 벌이는 최전방의 투사들처럼 생각되었다. 

명박산성을 뛰어넘어 청와대로 진격하는 게 대체 미국산 쇠고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스티로폼까지 준비했던 그 과격한 정치 조직은 대체 청와대까지 쳐들어가서 뭘하려고 했던 걸까. 이명박 볼기라도 때리려는 계획이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시에 어쨌든 산성을 넘자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순전히 그건 아나키적 해방 공간이 좀더 확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후로도 나는 무질서하고 방만한, 그러면서도 이유없이 달뜨게 되는 집회 특유의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만끽하러 촛불에 몇번 더 참여했었다. 촛불시위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정치적으로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불순분자였다. 내가 좀 더 평화를 지향했다는 점만 빼면, 촛불을 핑계로 억눌린 생의 에너지를 분출하고자 닭장차를 때려부쉈던 사람들(분명 이런 자들도 있지 않았을까?)과 나는 심정적으로 완전히 한패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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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0-09-0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기자들 월급은 나와야 하는데;;;
 

논리가 탄탄한 글은 시 만큼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라고 쓰고 후회한다. 때를 가리지 않는 이 구제할 수 없는 감상벽을 어찌할 건가. 아마도 내가 비판적 읽기에 취약한 까닭은 논리적인 독해를 해야 할 텍스트조차도 순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서 감상적으로 소화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도 얼마나 '아름다운 글'이라 여기며 읽었는지. 제발 이제는 사회과학서적들을 그런 방식으로 읽는 태도를 버리고 싶다.  

쓸데없는 감상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시와 그림 따위를 멀리 하고 논리적인 글들을 많이 읽어 나가야지 않을까. (그러나 과연 시를 끊는 게 가능할 지) 사유가 빈곤한 감상주의는 삶을 쉽게 신파로 몰아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칠흑 같은 정념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도 말했듯이 인간은 냉철한 인식을 통해 비로소 정념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감상이 배제된 인식, 요즘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면 오로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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