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내가 무려 시 시, 시 같은 걸(편의상 시라고 해두자) 끼적여 보게 된 건 전적으로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슬픈 시는 병균과도 같아서 사람을 한없이 쇠약하게 만든다. 이 시집을 읽고 나서 며칠을 끙끙 앓았다. 당연히, 내가 처음으로 썼던 시는 심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였다. 나는 내 시가 몹시 훌륭하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을 심 시인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한동안 심 시인의 이메일을 추적하느라 인터넷을 이 잡듯이 뒤졌던 것인데, 그러다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시인의 약력을

노선을 잃었다 /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 둘 다 // 멸망하는 세계가 나보다 명랑하다 / 휴일과 섹스는 빼고 // 버스 맨 뒤에 앉아 버스 맨 앞을 노려본다 / 지금 건너는 다리는 소실점까지 길게 난 흉터 같다 / 그래서 좋다 // 차창에 기대 노루잠에 빠진다 / 치어 떼처럼 망막 위를 헤엄치는 빛의 산란 / 꿈속에서조차 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 숨 꾹 참고 강바닥을 걸어 도강(渡江)한다 // 뒤돌아보면 /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 꿈과 현실 / 둘 다 // 같은 고백을 여러 번 통과하며 / 형형색색 분광하는 생 / 지루함은 나의 무지개 / 내 그림자는 빛의 정반대 / 내 언어는 정반대의 정반대 // 버스는 갈팡질팡 달린다 / 그래도 좋다   -<미망Bus> 전문

가장 먼저 등 돌리데 / 가장 그리운 것들 / 기억을 향해 총을 겨눴지 / 꼼짝 마라, 잡것들아 / 살고 싶으면 차라리 죽어라 / 역겨워, 지겨워, 왜 / 영원하다는 것들은 다 그 모양이야 / 십장생 중에 아홉 마릴 잡아 죽였어 / 남은 한 마리가 뭔지 생각 안 나 / 옛 애인이던가, 전처던가 / 그미들 옆에 쪼르르 난 내 발자국이던가 / 가장 먼저 사라지데 / 가장 사랑하던 것들 / 추억을 뒤집으니 그냥 시커멓데 // 나는 갈수록 추해진다 / 나쁜 냄새가 난다 / 발자국을 짓밟으며 나는 미래로 간다 / 강변 살자, 부르튼 발들아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전문 

이런 시를 썼던 사람이, 어떻게, 아니 어떻게, 세상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난생 처음 써본, 시이자 팬레터를 끝내 발송하지 못한 까닭은 전적으로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온통 실패와 좌절과 굴욕과 오욕과 비애로 점철된 생애를 살아온 것만 같은 시적 화자와 달리 시인의 약력은 너무나 화려했던 것이다. 당초 시인과 시적 화자를 분리하여 헤아리지 못한 내 무지 탓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때 받은 충격은 실로 상당했다. 시집으로 추정컨대 그는, 삶의 기구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알콜중독자나 금치산자를 능가하는 인물로, 남들한테 인간 말종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한없이 처절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했는데, 약력이 말해주는 그는 소위 엄친아였다

나는 분개했다. 시집을 읽은 뒤 한동안 시달렸던 정신적 몸살이 마치 사기를 당한 것처럼, 그래서 보상을 받아야 할 어떤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당한 비극을 누군가 또 다시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한 가지 경고를 남겨둔다. 만약 당신이, 삶의 곳곳에는 무수한 비밀들이 숨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총체적인 모습은 대개 이력으로 압축된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또 시적 화자가 시인이고 시인이 곧 시라고 믿는 독자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시집을 읽고 나서 얼굴이 시집 껍데기 만큼이나 샛노래지면서 한동안 끙끙 앓게 된다면, 이후로 절대 팬레터 따위를 보낸다고 스토커처럼 시인의 신상을 추적하지 말지니. 괜한 방정을 부렸다가는 배신감에 몸을 떨게 될 것이다

물론, 싱거운 농담이다. 시인의 화려한 이력을 알고 나서 잠시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 되긴 했지만, 내가 한때 시 같은 것이라도 끼적여본 경험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심 시인의 덕분이니 지금도 나는 그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그런데 왜 나의 시작(詩作) 활동이 한때가 되어버렸는가 하면, 당연히 붙을 줄로만 알았던 신춘문예에 떡 하니 떨어지고 나서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는 현실을 통렬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나는 지금도 신춘문예에 자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진다

이천명의 다리가 떠오른다. 신문사 앞에서, 혹은 우체국 앞에서 주저하는 다리들. 검은색 갈색 구두들. 이천 명의 손도 떠오른다. 다방에서, 빈 강의실에서, 방바닥에서, 스탠드만 켜놓은 책상 위에서 원고지 위를 방황하는, 원고지를 거칠게 찢어버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수천 개의 손들. 느닷없이 뭉크의 그림이 연상된다. 크리스마스가 그리고 올 것이다. 남들은 술집에서, 교회에서, 혹은 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이들은 일찍 귀가하리라. 신문사에서 보낸 전보가 없느냐고,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느냐고, 이들은 불안스럽게 가족들의 얼굴을 살펴볼 것이다. 어떤 사람은 1231일까지도 전보를 기다리리라. 11일자 신문을 펼쳐보는 떨리는 손들, 찌푸린 눈들, 신문을 집어던지는 성난, 혹은 맥빠진 동작들이 보인다. 자신의 친구가 응모했는데 당선자가 누군지 알고 싶다며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오는 본인도 있으리라.   -기형도 전집 p.276 <어떤 신춘문예> 중에서 

이 꽁트가 하나도 웃기지 않고 하염없이 슬프기만 한 까닭은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후로 나는 한동안 정말로 열심히 한국시를 읽어댔다. 시 아닌 모든 텍스트들이 더없이 시끄럽고 천하고 불결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읽기도 열심히 읽었지만 쓰기도 많이 썼다. 완성된 시는 내가 봐도 가히 한국시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을 파천황의 명작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당연하게도 그 시들을 모두 신춘문예에 출품하기로 결정을 했다단 한 편의 중복투고도 없이 오로지 메이저 신문사만 골라서. 어디까지나 내가 틀림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리라는 근거없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인의 궁기를 음식과 질병으로 표현한 시가 인상깊었다는 문태준 시인의 예심평을 읽었을 땐, 아무래도 당선소감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믿을 수 없게도(물론 주위에서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모든 신문사에서 떨어졌다. 내 예상치 못한 낙방은 심보선 시인의 약력을 알게 된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분노를 몰고 왔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하나같이 꾀죄죄하고 다들 나보다 훨씬 못 쓴 것 같았으므로 더욱 더 통분할 일이었다. 성질이 나서 그 길로 시 나부랭이 끼적이는 일을 때려치워버리기로 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자칫하다 내 꼴이 기형도의 꽁트에 나오는, 20년 넘게 신춘문예에 응모 중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릴까 염려되어 초장에 재빨리 나의 문학적 자질 없음을 인정하고 시작(詩作)에 대한 일체의 열망을 황급히 폐기해버렸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간혹 요즘의 한국시는 더 이상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다느니 재미가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건 아마도 원한 감정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역시 쓴 글은 얼마간 묵혀뒀다 봐야 제대로 보이는 법인가. 몇 개월 후 낙방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 신춘문예에 보냈던 시들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이런 게 붙을 리가 있나. 한때 나름의 시혼을 불태워가며 밤새워 적었던 시였건만, 다시 읽어보니 이럴 수가, 흡사 간밤에 서리를 맞아 시들어버린 꽃들처럼 죄다 상태가 처참하였다. 순간 나는 그 모든 시들을 한 톨의 미련도 없이 휴지통에 처넣어 영구 삭제해버리고 말았다. 며느리도 봐서는 안 되는 괴문서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기 때문에. 심 시인을 향한 순정어린 팬레터였던 내 첫 번째 시 역시 그렇게 다른 시들과 함께 일거에 몰살당하고 만 것인데, 지나고 보니 가끔은 그 시 하나만이라도 살려둘 걸 그랬지 싶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느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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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1-20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연히 이력을 먼저 보고 시를 읽기 시작해서 그 정도의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지만, 그 느낌이 어떠셨을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이력이라는 게 얼마나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가 생각해보면, 결국 그 사람의 일부분에 대한 정보뿐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력에 나타나지 않은 이력은 오히려 저렇게 시인의 입을 통해 쏟아내는 시 속에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해요.
저도 심 보선의 시, 참 좋아합니다. ^^

수양 2010-11-21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여운을 제대로 간직하기 위해선 제멋대로의 상상 속에서 자라난 시인을 그저 그대로 신비롭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는데, 저의 쓸데없이 과도한 스토커짓이 그걸 훼손해버린 셈이니 배신감도 뭐 다 제 탓이지요. 그러나 정말 이력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길기까지 했어요. 거의 120년은 사신 분 같았어요-_- 어찌나 놀랐던지;;;

자운 2011-09-10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음에 닿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심시인의 시를 저도 좋아합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물체(things)는 어떤 점에서 합치한다”(에티카, 정리13의 보조정리2)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사물에 공통적이며 부분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 동등한 것은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에티카, 정리 37)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합치하는가.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개체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나 동등한 ‘그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이를 ‘공통개념’으로 정의한다. 올덴부르크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가령 림프와 카일(당시 혈액의 구성성분으로 알려진 것들) 등등이 각각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비례를 이루어 결합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면, 그것들은 이런 측면에서 피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피 안에 피의 입자들인 림프와 카일을 서로 구분할 수 있고, 그 입자들이 서로 만나 밀쳐내기도 하고 자기 운동의 일부를 전달하기도 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작은 벌레가 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작은 벌레는, 우리가 우주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듯이, 피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피의 각 입자를 부분이 아닌 전체(각각 하나의 온전하고 고유한 전체)로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 벌레는 어떻게 모든 부분들이 피의 일반 본성에 의해 변양되고 서로 적합하게 되도록 강제되는지 결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각 신체가 특수한 방식으로 변양되어 실존하는 한에서, 전체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전체와 일치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주의 본성은, 피처럼 제한된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무한하므로, 그 부분들은 이 무한한 능력의 본성에 의해 무한히 변용되고, 무한한 변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체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나는 각 부분이 전체와 아주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피 속에 사는 벌레는 피를 구성하는 하나의 입자로서 이미 피의 흐름을 타고 있지만, 벌레는 피 자체를 외부의 개별적인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벌레의 인식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벌레는 림프와 카일이라는 외부의 대상이 제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서 저마다의 운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벌레와 림프와 카일에게 공통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의 흐름이다. 벌레와 림프와 카일은 피의 흐름을 함께 타고 있다. 그들은 피의 일부로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어울려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또한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다. 리듬이 사람들 각각의 특이적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리듬은 춤추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분유하고 있는 어떤 속성이다. 속성을 분유하고 있지 못한 개체는, 그러니까 리듬을 타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춤동작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리듬을 타기 시작한 사람은 그 리듬에 맞추어 다양한 동작들을 만들어내고, 사람들과 더불어 춤출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리듬이 고정불변한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개체가 리듬에 참여하게 되면, 리듬은 그 개체로 인해 변화한다. 마치 새로 온 사람이 모임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듯이.

(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인식 수준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개체들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리듬과 하모니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개체적 수준에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이미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것에 맞추어, 그것에 몸을 맡기어, 그것을 한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신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미 신의 일부로서 신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림프와 카일이 피의 입자로서 피의 흐름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리듬의 장(場)에 참여해서 그 안에서 리듬을 타면서 동시에 그 리듬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원자 물리학의 아이러니와도 비슷하다. 원자 물리학에서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원자라는 관찰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대상이 관찰되는 과정의 연쇄에서 관찰자가 그러한 연쇄의 마지막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시물리학에서는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반드시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원자를 터럭 끝까지 파고들면 우리는 원자와 하나가 되어버린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원자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상을 아원자 수준까지 파고들면, 개체로서의 대상은 휘발해 버리고 타아개념 또한 무의미해져 버린다. 존재는 없고, 가능성(확률)과 관계만이 남는다.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개념과 미시물리학 이론(‘미시’라는 것도 사실상 인간 개체의 수준에서 봤을 때의 ‘미시’가 아닌가. 우주적 관점에서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현실야말로 ‘미시적’인 종류일 것이다. 어쩌면 아원자 입자의 내부 세계와 내가 부딪히는 일상의 현실, 그리고 별의 운행과 은하의 생멸을 포함하는 우주적 사건들- 인간 개체의 수준으로 분류해 볼 수 있는 이러한 각각의 차원의 장(場)에 어쩌면 프랙탈 모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어떤 동일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을 내가 사는 현실세계에 응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실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내 앞에 무자비하게 던져진, 불변의 운명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내가 그것에 개입함으로써 극적으로 변화한다. 내가 현실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개입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현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아상(我想)이라고 부를 것이다. 스피노자라면 그것을 '우리 신체에서 생산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고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다만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낸 변용, 즉 이미지일 뿐이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상을 허망한 것으로 본 반면에, 스피노자는 우리가 만들어낸 그 모든 환상, 상상, 착각, 환각, 즉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의 모든 착각에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는 없는, 그러나 신의 섭리라고 할 만한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그에게 인간 정신의 상상하는(내지는 착각하는) 능력이란, 의지가 이성을 방해하여 생긴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덕(능력, virtu)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근본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하라지는 대상이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마저 착각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감각이 인식하고 마음이 해석해낸 것들 모두는 의식 안에서 시공으로 확장되어 나타난 것이며, 지각된 대상을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착각 때문에 대상화된 것입니다. 모든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이 전체적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하라지는 참된 앎을 위해 우리의 관점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사물을 분리된 마음인 개체적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보라고, 근원으로부터 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근원'이다.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는 그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입니다. 그때, 오직 그때에만 전체적인 인식, 바른 봄과 이해가 있게 됩니다."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이란 어떻게 보는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근원으로부터 볼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나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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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요리도 젬병인데 잘 됐다. 요리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해 평소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있던 사람에게 생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는 단연 희소식이다.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싸그리 사라졌다. 생으로 먹으면 되고, 그게 어려우면 끓이거나 삶거나 쪄먹으면 된다. 사과를 예쁘게 깎을 필요도 없다. 껍질채 먹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원시인처럼 살겠다는 내 포부를 들은 동생이 원시인의 평균 수명을 넌지시 알려줬다. 10세 전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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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찾아갔던 계룡산 마음수련원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버리라고 했다. 나를 버리라는 게 그 단체가 가르치는 명상법의 핵심이었다. 나를 버리고, 버리고 있는 나도 버리고, 심지어는 나를 죽여버려라. 그래서 거기서 수련하는 원생들은 밤마다 다함께 복창했다. "죽어라! 죽어라! 다 죽어라!" 누가 봤으면 밀교 집단의 섬뜩한 주문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개체로서의, 현상으로서의 나를 초월하기 위한 우스꽝스럽고도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라고 했던 자가, 그러니까 그런 획기적인 명상법을 창시했던 자가, 정작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후에는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 엄청난 '나'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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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라지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했던 것과 놀라울 만큼 흡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사용하는 개념어와 전달하는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이고 논리적이라면, 마하라지는 은유적이고 시적이다. 글이라는 것이 본래 전달의 목적으로 쓰여지는 거라면, 각각의 방식 모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볼 때 저마다의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스피노자가 정의한 ‘실체’라든가 마하라지가 말하는 ‘절대’에 대해 단지 그들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없는 경이와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독서를 통해 일시적이고 간접적으로 우주의 본성을 가늠해보는 이런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내 수준에서는 강렬한 독서 체험이었다 할지라도 결코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일시적으로 도취된, 잠시 고양된 마음 상태일 뿐이다. 너무나 사소한, 개체의 한 현상이다. 

독서라는 활동은 어디까지나 대상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일인데, 과연 그런 것이 개념으로 이해될 만한 영역인가. 진정한 인식은 오로지 지난한 명상 수행을 통한 직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굉장히 내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이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 만큼은 글을 읽고 머리를 굴려서 이해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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