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영원한 /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방관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게 배신자가 된다. 뒤늦게 모반이니 전복이니 운운해보지만 그런 계획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모반을 막기 위해 모반을 궁리하고 전복되지 않기 위해 전복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복종하고 순응해야 할 대상이 없으면 나는 무너질 것이다. 그런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을 꿈꾸는 일이 바로 내 삶의 운동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니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어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도 나는 영원히 그럴 수 없으리라. 끊임없이 갈망하기 위해서는 갈망을 낳는 이 구조가 결코 전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알라딘 서재라는 것도 말하자면 일종의 갈망의 제스처(약간의 허영기가 가미된)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닐까. 가장 그리운 것들은 가장 먼저 등 돌린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사실 그리운 것들을 가장 먼저 배신하는 것이 나인지 모른다. 그런 혐의로부터 죽을 때까지 떳떳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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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가계’로 상정하는데, 이 가계의 수입원은 꼭 임금만이 전부가 아니다. 특히 제3세계의 경우, 자급생산에서 얻는 수입이나 소상품생산으로 인한 수입 등 하나의 가계 안에 여러 가지 수입원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월러스틴은 임금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수입원을 가지는 가계를 반(半)프롤레타리아 가계로, 임금이 가계 수입의 절대적 비율을 차지하는 가계를 프롤레타리아 가계로 지칭하고, 자본가가 프롤레타리아 가계보다 오히려 반프롤레타리아 가계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화(化)가 덜 된 반프롤레타리아들을 고용하는 편이 좀 더 효율적인 착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최저 임금선보다 임금을 더 적게 줘버리면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해지므로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반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최저 임금선보다 임금을 적게 주어도 부수적인 수입원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노동력 재생산이 가능하다. 임금 외 수입원 때문에 근근이 생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반프롤레타리아 가계가 많은 사회에서는 고용주가 반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절대적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할 수 있게 되고, 노동자는 자신이 이전시키고 있는 잉여가치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고용주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주워듣기로는, 실제로 산업발전 시기 남미에서는 노동자가 가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력마저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자의 초과착취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가 무리 없이 잘 돌아갔던 까닭인즉, 노동자들 사이의 호혜적 관계에 바탕을 둔 증여경제(앞서 월러스틴이 말했던 자급생산이나 소상품생산이 유통되는 경제)가 당시 첨예했던 시장경제의 모순을 훌륭하게 보완해 주었다는 것이다. 가계 내의 자급생산이나 소상품생산,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호혜적 증여 경제’- 이것은 곧 시장경제 체제 안에 존재하는 비-시장경제적 부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시장경제적 부문이란, 곧 체제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외부’다. 말하자면, 체제 안에 존속하는 외부가 체제의 균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수단으로 소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을까. 착실한 양분으로 공급되는 ‘외부’가 아니라, 곰팡이처럼 혹은 종양처럼 자라나는 발칙한 ‘외부’를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증여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기생하는 방법, 화폐의 운동으로 돌아가는 경제에 화폐 개념 없는 경제가 기막히게 편승하는 방법, 가난한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화폐가 별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의 경제가 시장경제체제의 잉여를 효과적으로 향유하는 방법을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의식구조가 탈자본주의적으로 전환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물질에 대한 도착적 욕망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방법이야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길(금욕이 아니라 해탈)이 참으로 요원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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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에 따르면 인간의 생산 활동의 동기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충성, 법적 책임감, 공동체적 계율, 이념과 사상, 명예와 자부심, 용기, 권력욕 등 실로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한다. 경제학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때로는 비합리적이기까지 한 미묘한 심리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이 이익추구라는 경제적 동기에 의해 활동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하나의 물리적 현상으로 패턴화하고 과학화한다.

굉장히 실사구시적인 학문인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경제학에서는 인문학에서 맡아볼 수 있는 향취가 전혀 나지 않는다. 까닭은 이 학문이 처음부터 뭔가 완전히 탈색되어 버린, 박제되어버린, 흡사 레고인간 같은 주체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점이야말로 경제학의 태생적 오류이자 난센스가 아닐까. 존재론적 비합리성 속에서 부단히 합리성을 추구하며 그 학문적 날을 벼리어 나가는 경제학의 세계에서는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이라는 근대적 감수성이 낳은 가장 근대스러운, 근대다운, 근대적인 학문이 아마도 '경제학' 같다. 어쩌면 우리는 먼 훗날에, 마치 지금의 우리가 고대의 점성술을 바라보는 태도로 이 학문을 인류학적으로 흥미롭게 탐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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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 이영주
 
쪽문 옆에서 언니는 잠이 든다. 저녁이면 마당에서 펄럭이는 셔츠의 한쪽 소매를 만지던 언니. 동생은 더러워진 빨래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을 날지 않는 새들은 동작을 멈출 줄 아는 도롱뇽 같아. 끝에 닿기 전에 한 번쯤 정지하는 일 말야. 언니는 동물도감을 펼치고 도롱뇽 꼬리를 부엌칼로 잘라 낸다. 쪽문을 드나들다 키가 큰 언니는 매일 밤 흰 목을 구부린다. 난간에 걸친 달이 몸속에 뼈를 세울 때마다 언니는 어깨가 아프다. 그를 찾아가도 될까? 이제 더 이상 손발이 자라지 않으므로 언니는 밤마다 짐을 꾸린다. 오늘의 달은 구겨진 흰 셔츠처럼 마당에 떨어진다. 쪽문을 떠나기 위해 언니는 립스틱을 바르고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묵을 곳은 분화구밖에 없어. 달의 도면을 펼치고 도롱뇽이 분화구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1 내가 골룸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음습한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반짝이는 절대반지를 움켜쥐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있고 싶던 마음일 때, 어둡고 따듯한 골방에 숨어들어 모든 촉수를 내부로 말아넣고 온종일 웅크린 채 지내고픈 마음이었을 때, 나는 스스로 즐거이 유배 당하고 싶었다. 꼬리를 떨쳐버리고 분화구 안으로 들어간 언니, 언니도 나와 같았을까. 

2 하늘을 날지 않는 새들은 의젓하다. 살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베어낸 도롱뇽처럼, 더러워진 빨래에 대해 아무 말 없는 동생처럼, 단념할 줄 아는 짐승들은 모두 의젓하다. 그것은 슬픔을 견디는 고귀한 방식이다.

3 마당에서 펄럭이는 셔츠는 난간에 걸친 달처럼 닿을 수 없이 찬란했겠다. 그러나 셔츠는 언니에게 고작 한쪽 소매 정도만을 허락할 뿐이다. 그마저도 오늘은, 달조차 "구겨진 흰 셔츠처럼 마당에 떨어"지고 마는, 그런  날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살기 위해 단념했을 때, 단념하고 도롱뇽처럼 제 몸뚱이 일부를 잘라 삶에게 내어주었 때, 언니는 이제 더 이상 “손발이 자라지 않는” 의젓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 언니가 곱게 단장하고 길 떠나는 곳은 "깊은 잠 속"이다. 그리고 깊은 잠 속에 도착해 여장을 풀 곳은 "분화구"다. 분화구는 뜨거운 내부이자, 안에서 바깥을 향해 최초로 그 뜨거움을 터뜨리는 입구이다. 분화구는 자폐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분출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기도 하다. 언니는 그곳에서 "첫사랑"인지도 모를 "그"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것들이 모여 한 권의 시집이 되었을 것이다.  

4 이 시는 아마도 시인이 발표 후에 약간 손을 본 듯하다. <2007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 2007)에 실려 있는 것과는 몇몇 구절이 다르다. 나도, 바뀐 시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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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외상은 끊임없이 기억됨으로써 보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상 자체가 전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는 건 일종의 부작용이다.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증오와 적개심이 아닐까. 원한감정이야말로 지난 시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외상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것까지 유산으로 전수받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빨리 떨쳐버려야 한다. 원한의 정서(소화불량에 걸린 감정)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신경증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어도 신경증자는 결코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정말 자유로운 사람은 분열증자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적개심이나 원한감정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그는 자신을 어떤 것과 대항하는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환상적인 세계에 근거해 자신을 규정한다. 그는 진정한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포섭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이 제일 어려운 사람이 분열증자라고 했다. 분열증자에겐 자유와 해방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그가 펼치는 즐거운 망상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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