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화가에 의해 무궁하게 변주된다. 밤하늘 그림은 화가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심리적 자화상 같기도 하다. 오경환이 바라본 밤하늘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는 우주다. 그가 그린 천체는 형이상학적인 법칙에 의해 명멸한다. 엄정하고 명징한 우주의 현현이 청신한 새벽 공기처럼 정신을 맑게 한다. 정좌하고 명상에 잠겨 사색하길 종용하는 우주다. 

반면에 강요배의 우주는 어머니 가슴팍처럼 푸근하다. 강요배의 우주 앞에서는 누구나 한 마리 온순한 짐승이 될 것이다. 볼이라도 부비고 싶은 따듯한 하늘이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받아줄 것 같은 인정 많은 우주다. 관념에 사로잡힌 백면서생의 창백하고 가는 손이 아닌, 흙 만져서 투박하고 거친 어머니 손과 같은 우주다.  

호안 미로의 밤하늘은 또 어떤가. 그의 밤하늘은 지금 축제 중이다. 노르망디의 밤하늘을 그렸다는 그의 성좌(星座) 연작은 온갖 선율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캔버스까지 음역을 확장시켰다. 선율을 타고 기이한 생물체들이 밤하늘에 생동한다. 그의 우주는 떠들썩한 분열증자의 우주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는 얼마나 즐겁고 신이 났을까.  

 

그림 제목은 위에서부터 남천南天(오경환), 미리내(강요배), The Nightingale's Song at Midnight and the Morning Rain(호안 미로 Joan Miro). 호안 미로의 생애와 그림에 관심 있다면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를 추천한다. 성좌 연작 뿐만 아니라 시기별로 달라지는(심지어는 여덟살 때 그린 그림도 들어있다) 작가의 화풍까지 훑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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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는 사회의 후진성을 절감한 인텔리겐차들이 등장하여 브나로드운동을 벌인다. 그들은 자본주의 진입의 문턱에 서있던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되어가길 바랬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러시아가 어떤 면에선 이미 사회주의 국가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 나라에는 오래 전부터 '미르'라는 촌락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어떤 면에선 사회주의자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이상사회의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볼셰비키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후 국가가 점진적으로 소멸하리라고 보았지만, 제정 러시아에서 국가의 지위라는 것이 과연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국가의 권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제정 러시아에서 황제의 지위란 것은 이미 '소멸' 단계에 가까운 상태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은 내멋대로의 추측이지만, 전제왕권체제에서 황제의 존재라는 것은, 광대한 영토에서 구속감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어떤 질서와 통일의 필요성을 느껴서 스스로 구심점을 만들어낸 결과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는, 제정러시아가 꼭 자유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전근대적 사회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는데 합리적인 정치체제를 갖추고, 세부적으로는 촌락자치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어떤 면에선 이미 '선진적 사회주의 국가'였던 러시아는,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심각하게 불안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유입이 사회를 계몽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뒤틀리게 만들고, 혼란을 부르고, 그 결과 반동적으로 일어난 것이 혁명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러시아 역사는 맑스가 얘기한 사회주의이행론이랑은 그닥 상관없이 펼쳐진 셈이다.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맑스의 사회주의이행론이 역사가 진보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따른 가상적인 시나리오였다는 것을 (사회주의 이행론을 그토록 체현하려 했던)이 나라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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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때 이 여자들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을 달리 해보게 되었다. 표백된 일상을 전시한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악취와 비린내가 진동하는 삶의 비밀에 대해 함구할 줄 안다는 얘기일 텐데. 수치스럽고 남루한 것을 조용히 묻어둘 줄 안다는 것, 이건 아마도 어른들의 세계에서의 기본적인 양식인지도 모른다. 덮거나 가린다고 해서 악취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것을 애써 견디고 있는 것이리라. 참고 견디되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사력을 다해 아폴론적 포즈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녀들은 마치 발레리나 같다. 발레리나처럼 우아하다. '어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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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225페이지에는 자신이 얼마나 문학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리서치 문항이 들어있다. 저자가 심심해서 작성해본 것이라고. 
 
1.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씩 문학 분야의 책을 읽는다: 날마다는 아니어도 한 달에 총 30페이지 이상은 읽는다.
2. 홀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무언가 메모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 핸드폰은 메모장이나 다름없다. 문자의 9할이 스팸인 걸 보면.
3. 문득 얼마나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았는지 깨달아질 때가 있다: 시는 틈틈이 읽는 편.  
4. 서점에 가면(책을 살 것도 아니면서) 문학코너를 꼭 둘러본다: 가끔 충동구매를 하기도.
5. ‘백석’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백석’이라는 발음 자체가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 같다. 옛날에 백석의 시에 대해 몇 자 적어본 게 있다.
6. 아무런 이유 없이 포털 사이트를 통해 시인과 소설가의 이름을 검색해본 적이 있다: 나는 한때 아무개 시인의 중증 스토커였다(지금은 고쳤다).  
7. 시인이나 소설가의 블로그나 홈피 방명록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김소연 시인의 블로그에 글을 남긴 적이 있다.
8.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누군가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 습관적으로 표지를 확인하고 괜찮은 경우 얼굴도 확인한다.
9. 신문의 책 광고나 서평 기사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신문을 잘 안 읽어서 패스.
10. 문학전문 출판사 이름을 세 개 이상 알고 있다: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
11. 최근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모름.
12. 문학잡지를 다섯 차례 이상 사본 적이 있다: 자랑하는 건데, 계간 창비에 독후 소감을 보낸 게 당첨되어 일 년 구독권을 선물 받았다.      
13. 자신에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권위에의 호소를 하자면 사주 봐준 아저씨가 그렇다고 했다.
14. 경제와 정치, 스포츠에 휘둘리는 삶에 자주 염증을 느낀다: 음. 그런 것 같다.
15.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신인 공모에 응모해본 적이 있다: 있다. 다 떨어졌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나는 ‘현저하게 문학적 자의식을 가진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다. 15문항 모두 예스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문학병 말기 환자' 평가를 받을 뻔 했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지만, 삶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될 수 있으면 문학을 멀리하고 싶다. 이것은 그러니까, 너무 멋진 남자를 일부러 외면할 때의 심리와도 비슷하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퍽이나 가소로운 일이겠다. 내 모든 방면의 독서가 그러하듯 나는 아직 문학의 숲에 깊숙이 진입하지도 못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확실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문학이 그것이 발산하는 매력에 비해서 너무나 연약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종교와 예술(문학)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역시 너무나 연약하다. 연약하고 무력하다.  

앞으로 책 읽을 시간이 나면 되도록 사회과학서적을 읽어보자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 건, 그런 책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딱딱하기 때문이다. 딱딱한 책이 좋다. 나를 딱딱하게 만들어 주니까. 내가 좀 더 딱딱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구조가 딱딱 나누어지고 논리가 딱딱 서서 전달할 말만 딱딱 했으면 좋겠다. 정한과 회한과 감상에 젖어 쓸데없이 수다스러워지고 싶지 않다. 그런 식의 유약하고 낭만적인 태도는 실생활에 장애가 되면 되었지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문학적 정취에 잠긴 생활을 견제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맑스는 처절하게 분노했지만 자본론을 남겼다. 나는 그것이 분노를 표출하는 우아하고 고차원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문학적 자의식을 가진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라니,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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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헤는밤 2010-12-2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안녕하세요 ^^ 처음 뵙습니다.
알라딘 서재를 즐겨찾기 해놓고 가끔 들르던 유령독자입니다. ^^
오늘 글 읽으면서 수양님의 위트 덕에 함박 웃으며 저는 어떤 독자인지 나름 질문들에 답해보았네요.ㅎ
저로서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걸쳐있는 -어느 쪽도 아닌- 책을 보고 있다보니, 문학적 자의식을 지니신 수양님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

blackpearls.tistory.com 까만진주씨

수양 2010-12-2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서치에 참여해주신 점 제가 작가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 또 함박 웃으시라고 나름 위트를 구사해 본 건데 웃어주시길 바래요. 큭큭
 

나른한 비 / 함기석

삭발머리 소년 로꾸거가 뒤로 걷는다
찰방찰방 빗길을 걷는다
구두 가게로 들어간다
구두를 벗어주고 돈을 받아 나온다
이발소 뒷문으로 들어간다
머리를 길게 길러서 앞문으로 나온다
죽음이 웃는다 죽음은
카페 창가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체크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소년이 묻는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죽음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도 네 아빠처럼 샐러리맨이야
오늘 밤 아들에게 살해될 한 노인을 기다리는 중이야
요즘은 일이 많아 매일매일 야근이란다
소년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신호가 바뀌자 차들이 일제히 뒤로 달린다
빗방울은 하늘로 떨어지고
달랑달랑 불알을 흔들며 저녁이 온다
담배가 점점 길어진다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감아서 들으면 피가 모자라다는 악마의 소리가 나온다고 떠들썩했던 때가 있었다. 혹시 시인은 거기서 무슨 시적 모티브라도 얻은 것일까. ‘나른한 비’라는 제목처럼 이 시에서 소년은 시간을 되감는 나른한 환각 속에서 멸(滅)하는 것들과 대면한다. 빗방울이 하늘로 떨어지고 차들이 일제히 뒤로 달릴 때, 죽음은 카페 창가에 앉아 고독하게 술을 마시고 저녁은 "달랑달랑 불알을 흔들며" 선정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것이 뒤로 가는 시간 속에서 현실적인 것은 오로지 이 둘 뿐이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을 크레바스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이 시는 크레바스의 시간대에 대한 기록 쯤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걸 기록할 만한 능력은 오로지 소년 ‘로꾸거’에게만 있겠다. 우리는 기록으로서의 시를 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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