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을 이야기하기에 정의-공리-정리-증명으로 이어지는 <에티카>의 서술 방식은 다소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과연 기하학적 증명이라는 서술 형식이 신의 섭리라는 내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오히려 첨단 그래픽 영상 예술이라든가 신비로운 시적 잠언, 혹은 오랜 종교적 수행에서 얻은 영성 체험과 같은 형식을 통해서 훨씬 효과적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강렬한 엑스터시의 상태에서 환상적으로 신을 체험하는 것보다 오히려 감정의 고조없이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스피노자식 접근법으로) 신성을 헤아리는 편이 일상에 내재하는 신성을 지속적으로 느끼며 살아가기에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예전에 수유너머에서 <에티카>를 읽을 때 고병권 선생님과 식사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다. 서가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꺼내라면 망설임 없이 <에티카>를 선택할 것이라고 하시던 선생님은 강독 시간 내내 너무나 즐겁고 신나하셨다. 선생님의 강의는 언제나 기쁨과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특히 <에티카>에서 최고조였던 것 같다. 선생님의 <에티카>는 양장으로 되어 있지 않은 오래된 판본이었는데(서광사, 1990) 그렇게 너덜너덜한 책은 난생 처음 봤다. 어찌나 여러 번 펼쳐보셨는지 책 귀퉁이가 닳아지다 못해 아예 버선코처럼 들려서 가만히 놓아두어도 저절로 펼쳐지려고 막 기지개를 펴는, 무슨 정체모를 생물체 같은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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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1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끊임없이 반복한 책은 '기지개를 펴는 생물체'로 둔갑(?)하는군요.^^ (약간 으스스한데요) 고병권 선생님이 닳도록 읽은 책이 스피노자라는게 좀 의외인데요. 니체라면 모를까^^ 스피노자의 신에서 종교체험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습니다.^^; 곧 원자로가 곧 폭발할 것처럼 보도가 나오던데, 내일은 목도리로 얼굴과 손 발을 꽁꽁 감싸야 할 듯 합니다. 몸 조심하세요...^^(이건 좀 이기적인가요...)

poptrash 2011-03-18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병권 선생님이 닳도록 읽은 책은 맑스일 것도 같은데. ㅎㅎ 저도 한 번 듣고 싶네요.

수양 2011-03-1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독 때마다 나눠주신 핸드아웃만 모아도 책 한 권 나올 거 같아요. 아마도 언젠가는 스피노자에 대한 책도 내시지 않을까요^^
 

주체가 비참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중개자. 지젝은 물신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그러나 지젝은 물신주의를 단지 현실도피적인 행동으로만 여기지는 않으며, 오히려 물신주의로부터 영웅적이고도 실존적인 행위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물신주의는 “텅 빈 상징적 형식에 대한 허황된 고집"이지만, 언제든지 “도전적인 상징적 행동”으로 전화할 수 있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텅 빈 형식 자체를 고집하는 행동은 오히려 내용에 충실하다는 표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의 물신주의는 주체가 극한적인 상황에서 실존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것의 한 예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이 1953년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이다. 당시 진압을 명령받은 군인들은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총을 쏴댔지만 노동자들은 총에 맞아가면서도 대오를 이탈하지 않고 숭고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혼비백산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농성 내내 그들이 주문처럼 합창했던 노래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노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단해서는 안 될, 죽음 앞에서도 매진해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행위였다. 그러니까 시베리아의 노동자들은 노래 부르기라는 어떤 하나의 강력한 물신주의적 행위를 통해 실존적 주체성을 확립했던 셈이다. 

사람마다 물신의 대상은 다양할 것이다. 농부에게는 자연이, 자본가에게는 돈이, 광신도에게는 성상이, 얼리어답터에게는 신제품이, 그리고 내게는 아무래도 책이 물신의 대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이 나의 현실에 아무런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독서활동에 지적 유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거의 위악에 가까운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책읽기라는 이 텅 빈 상징적 형식에 대한 허황된 고집을 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독한 책을 내 나름의 분류법에 따라 서가에 가지런히 진열해놓고 공연한 만족감을 느끼는 일종의 성화(聖化) 작업 역시 결코 중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젝이 말한대로 물신주의적 태도가 상황에 따라서는 도전적인 상징적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책에 대한 나의 병적인 물신주의에서도 어떤 조그만 미지의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자기합리화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물신주의의 긍정적 잠재력에 대한 지젝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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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kh 2014-05-2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수용과 감응의 면에 있어서 모든 예술 형식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분야는 아무래도 평면조형미술 장르가 아닐까. 이미지로서의 예술 작품은 소설이나 음악과 달리 시간성마저 응축되어 있다. 문학작품이나 음악이 세계를 시간성 속에서 점진적으로 펼쳐내어 보여준다면, 이미지는 그것이 가지는 무시간성 내지는 초시간성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강렬한 세계를 현시한다. 은폐된 진리가 드러나는 하이데거적 순간을 체험하는 데 있어서는 평면조형만큼 적합한 매체가 또 없을 것이다. 

한때 이미지가 담아낼 수 있는 세계의 극한을 표현해보고픈 허황된 열망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이카루스가 태양을 꿈꾸고 산악인이 에베레스트를 꿈꾸듯이 나도 회화가 표현해낼 수 있는 궁극의 정점을 꿈꾸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너무나 허황되었기에 차라리 순진한 야망이었지만, 세계를 관통하는 응축된 이미지를 단 한 점이라도 내가 창조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의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때는 얼마나 확신했었는지. 

궁극의 이미지를 꿈꾸었던 내게는 바넷 뉴먼의 작품들이 무척이나 각별하게 느껴진다. 오로지 붉고 거대한 그의 작품은 여타 예술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상 그 이상을 불러일으킨다. 딱히 신앙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자들이 종교 의식을 통해 느끼게 되는 환희와 열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바넷 뉴먼의 작품에서 최초로 종교적 감정에 견줄 수 있을 만한 형이상학적 감흥을 느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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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3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7 0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문객(이하 방): 책읽기를 즐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순간이 지나면 영화를 보며 즐기거나, 등산을 하며 즐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너무 과하면 소비성입니다. 한국의 도서관에는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하는 낙이 있지요. 
주인장(이하 주): 제게 독서는 소비이자 자기계발이자 성장입니다. 영화나 등산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려운 것 같네요. 요즘에는 도서관에도 좋은 책이 많습니다. 
방: 미국 동네에는 벤자민 프랭크린의 지시로 만들어진 공공도서관에 엄청난 양의 책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 읽기란 불가능하지요. 도서관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책을 찾아 읽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주: 목적 있는 독서도 좋고 목적 없는 독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하면서 목적은 수정되고 만들어지고 변경되는 것이니까요. 
방: 돈, 취직, 연애를 지적 성장보다 더 중요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책에서 읽은 내용을 진지하게 토론하려는 것을 일종의 낭비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거든요. 
주: 낭비로 볼 수도 있지만 생산적 토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돈, 취직, 연애가 궁극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방: 책 읽는 것으로 토론하는 것은 학창시절에는 도움이 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책이 만들어진 다음의 정보는 실제로는 가치가 없는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점을 깨닫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렸지요. 
주: 동의할 수 없군요. 
방: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 분들의 가족은 반드시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특히 부인으로 되시는 분은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 점도 아셔야 합니다. 
주: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아마 괜찮을 겁니다. 
방: 책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책에 파묻혀 살다가 실수로 몇 권의 책을 폐지로 버려버린 아내에게 매질을 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거의 반복되는 이야기지요. 
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매질'을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네요. 
방: 그리고 좀 아프시겠지만,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저는 님과 아무런 이해득실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인생의 선배로 진심어린 충고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할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책을 자꾸 찾는 것이 아닌지를. 
주: 제 직업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네요. 저는 '책 만드는' 출판 편집자로서, 책을 읽는 것은 자기계발이자 업무이자 취미이자 삶이자 이념입니다. 독서는 저의 가장 중요한 '현실'입니다. 
방: 편집일로 직업상 매일 책을 읽어야하는데 취미로 또 책을 읽는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시면 삶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나요? 
주: 기계적/중립적 균형보다는 몰입의 극단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독서에 몰입해 있을 뿐이지 삶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  

평소에 간간이 들여다 보는 어느 다독가의 블로그에 갔더니 주인장이 방문객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라딘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결코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방문객의 말이 절실하게 와닿는다. 이 대화에서 주인장은 책읽기의 소모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항변으로 자신의 직업을 내세우고 있기라도 하지만, 나의 직업을 떠올려보면, 나 자신은 이런 자기합리화조차도 가당치 않은 처지가 아닌가. 나는 출판 편집자도 아니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도 아니며 진보단체의 활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구태여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거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찾아 읽어야 할 하등의 이유나 필요성이 내게는 없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책과 삶을 철저히 분리시키게 되었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작품을 다룬 서적을 탐독하면서도 나의 이력은 결코 현대미술적(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학이 좋으면서도 내 삶은 결코 낭만주의나 리얼리즘이나 실존주의로 치달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좌파 사상가들의 글귀에 감전이 되더라도 책을 덮고 나면 그 뿐, 나를 둘러싼 이 부조리한 세계 만큼은 끝끝내 변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발칙하고 불온하고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것에 탐닉하되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미로서만 지속되어야 할 뿐 내 실제적 삶은 결코 그리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지독히도 이율배반적인 자기준칙... 어쩌면 욕망과, 그러한 욕망을 금하려는 욕망 간의 애증 관계, 이 사도마조히즘적 자기 쟁투야말로 내 삶의 행보인지 모르겠다.

독서, 특히 인문학 방면의 독서는 현실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잠시 동안이나마 불온한 상상에 빠져들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불온한 상상은 절대로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위안이 될 뿐이다. 저 방문객의 말처럼 내게는 독서가 명백한 도피의 수단인 것이다. 독서는 내게 좌절된 욕망의 출구이며 사치스런 지적 쾌락주의에 다름아니다. 돈 쥬앙이 아름다운 여인을 탐하듯 나는 내게 지적 자극을 주는 책을 탐할 뿐이다. 목적도 없고 대의도 없이 그저 현실을 벗어나서 책을 읽는 상황 자체를 즐길 뿐이다. 방문객은 이런 짓이 실제 생활에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적고 있다. 나 역시 독서 활동 일체를 작파할 정도의 통렬한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일이 지나야 할 것 같다. 아직 안 읽은 책들, 탐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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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0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수양님. 글. 와닿네요. 혹시 제 블로그에 옮겨 놓아도 괜찮을까요?^^

수양 2011-03-02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그러면 영광이지요^-^ 저도 빵가게님 글 잘 읽고 있답니다^-^

2011-06-1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책은 다들 재미로 읽는것 아니였나요? -_-?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사건이다. (...) 사랑에 대한 라캉의 정의("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말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기치도 않게 열정적 사랑을 고백하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 확인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가능한 긍정적인 응답보다 앞서 일어나는 것은 외설적이고 난폭한 어떤 것이 침입했다는 느낌이다.

(...) 사물로서의 타자가 지닌 이 심연에서 우리는 라캉이 '정초적 말(founding word)'로 의미한 것, 즉 한 사람에게 어떤 상징적 타이틀[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을 부여하고 상징적 동일성을 구성함으로써 그, 그녀를 공언된 존재로 만들어주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내 주인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를 대할 의무를 스스로 지며, 마찬가지로 그에게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p.71~73, <HOW TO READ 라캉>,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中에서 

사랑을 고백한 자는 초조할까? 아니, 오히려 그는 선제공격을 가한 자로서 여유롭다. 그는 고백을 함으로써 그동안 암묵적으로 합의되어온 상대와의 심리적 안전거리를 기습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 상대의 공간에 허락없이 침입하여 상대를 함부로 새롭게 명명하고 관계의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장악한다. <HOW TO READ 라캉>(슬라보예 지젝, 웅진 지식하우스, 2005)에서는 이러한 도발 행위를 일컬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의 폭력성'이라고 적고 있다.  

사랑을 고백한 자는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처신할 수 있다. 만약 상대가 수락하면 그는 사랑을 쟁취한 승리자가 될 것이다. 상대가 거절하면? 그는 불운한 로맨티스트가 될 것이다. 피해자가 되어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받을 수도 있으리라. 어떤 경우에도 그는 용기있고 선량한 인간으로 남는다. 수세에 몰리게 되는 것은 오히려 고백을 당한 쪽이다. 고백을 당한 자는 고백한 자의 욕망에 의해 일방적으로 호명과 응답의 게임에 끌려나와 수락 혹은 거절이라는 제한된 선택지를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떤 것도 그에게는 유리하지 않다. 수락할 경우 그것은 상대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거절할 경우 그는 가해자가 되어 원치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순종하거나 아니면 해를 입히거나.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한이다. 

고백을 당한 자가 자신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이 게임에서 손을 떼는 최선의 방법은, 고백이 이루어진 상황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고백을 받지 않은 듯이 행동함으로써 고백 당한 자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올가미는 이미 던져졌으므로 이 모든 사후적 책략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결국, 이 게임에서 우위에 서는 것은 언제나 사랑을 고백한 자다. 그는 고백을 함으로써 명명자가 되고 권력자가 된다. 지더라도 이기는 게임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요는 이것이다. 고백을 당하지 말고, 고백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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