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기와 삶 읽기 1 -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바로 여기 교실에서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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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레포트와 토론 내용이 고스란히 실려있는 이 책을 읽어보면, 같은 학교 같은 학번 사이에서도 사고의 깊이와 글의 수준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히 그러게 마련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 당연함을 생생한 교육 현장 속에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확인하게 되니 느끼는 바가 또 다르다. 저마다의 색깔과 밝기로 빛나고 있는 인간들을 보편의 척도에 맞추어 일괄적으로 양성하고 분류하려는 제도적 노력 자체의 과격함에 대한 환기는 둘째 치고, 인간의 사고 능력의 성장이라는 것이 개인의 역사와 교호하면서 얼마나 섬세하고 개별적인 궤도를 그리게 되는 것인지, 인간 지성의 깊이와 폭의 변화 양상은 또 얼마나 무궁하고 역동적일 수 있겠는지 (이 책의 본래 의도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지점에서) 별 생각이 다 든다. 교육을 업으로 하고 있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될 정도니 교육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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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 서재에 들다
고전연구회 사암 엮음 / 포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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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은 서실을 꾸밀 때 흔히 당호를 지어 편액으로 내걸고 스승이나 벗에게 청하여 서재에 부치는 기문(記文)을 얻었던 모양이다. 기문이란 서재 주인에 대한 소개, 서재의 건축 계기, 당호의 의미와 유래, 서재에 거하면서 항상 유념해야 할 자세, 당부와 바램 등을 적은 짧은 글인데, 책으로 비유하면 머리말에 실린 헌사나 발문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조선시대 때 쓰여진 기문들과 각각의 기문에 얽힌 인연과 사연들을 맛깔나게 엮어놓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로부터 느낀 바가 있어 나도 훗날 집을 마련하면 거실을 서재로 꾸며봐야겠다. 소파와 텔레비전 대신 책장과 오디오, 향초, 다탁 겸 서안(書案), 틈틈이 모은 아기자기한 문구와 다구(茶具)들을 모셔놓고, 서재에 어울리는 근사한 당호를 짓고, 솜씨 좋은 서각가에게 부탁드려 제작한 편액을 벽에다 걸어놓고, 나 스스로 기문을 지어 낭독하는 것으로 현판식도 거행하면 좋겠다.

 

서재에 즐겨 머물면서 "세상의 번잡함과 화려함을 뒤로하고, 삶의 마지막이 부귀영화로 치달리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면서, 오로지 책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고 사색하며 몸을 닦고 본성을 기르는"(장현광) 개인적인 사업에 힘쓰는 가운데, 가끔은 벗들을 불러들여 “삶은 닭을 찢어 먹으면서 술을 마시고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김택영)도 나누어야지.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일이나, 가만 생각해보니 정작 집을 장만할 길이 요원하구나. 이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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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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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식이 부모를 혹은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경우처럼 외설적인 사건이 또 있을까. 영조는, 왕조의 역사에서 많은 이들이 때로는 한번쯤 욕망했으나 감히 아무도 직접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친히 두 손을 걷어부치고 대명천지에 감행해버림으로써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추문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추문의 진앙이던 사도세자가 앓았다는 병환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만성적으로 지니고 있게 마련인 불안강박증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혹자는 화풀이로 궁인 여럿을 죽인 사도세자의 행적이 가히 사이코패스 수준이기 때문에 그를 마냥 당쟁의 희생양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비를 비롯한 영웅호걸 대부분을 사이코패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살인이 극도로 터부시되는 이 시대야말로 역사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무후무하게 억압적인 사회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사도세자는 정치력 부족으로 주위에 정신과적 상담을 나눌 만한 인물을 두지 못한 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권력의 정글 속에서 점차로 신경증이 악화되어간 것 같다.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 교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질 자체가 매우 섬약하고 소심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런 면이야말로 왕도 사이코패스도 되지 못한 모든 평범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전형적인 특성이 아닌가. 임오화변은, 인간의 평범성이 초자아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라는 점에 있어서 언제 읽어도 무시무시하다. 세상의 모든 걸출하지 못한 인물들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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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의 불만 - 새로운 우파의 출현과 불안한 징후들
이택광.박권일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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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 강남좌파, 중간계급 등으로 일컬어지는, 기존의 꼴통 이미지와는 차이를 두는 새로운 우파의 불만과 열망을 분석하고 있다. 3장 김진호의 글 <기독교 우파와 신귀족주의>에서는 해방 정국 이후부터 간략하게 주류 기독교 사회의 변천사를 훑어보고, 오늘날 한국의 중상위 계층이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강남의 대형 교회 신도들이 보여주는 신앙 문화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짧은 글임에도 무척 흥미롭다. 자본주의와 순접하여 번성해온 한국 기독교 사회의 풍속과 문화사를 사회학적으로 살펴본 책이 좀 더 있지 않을까. 관심이 간다. 그나저나 이 책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젊은 필자들은 좀 더 숙성의 기간이 필요할 듯. 젊은 세대들에게도 이런 식의 책을 통해서 발언의 기회가 있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같은 또래인 내가 봐도 상대적으로 내공이 많이 딸려 보이는 점은 안타깝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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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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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일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과장된 비유일 뿐 오늘날 실제로 일하다 죽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만약 어떤 일터에서 그런 일이 빈발한다면 응당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녀들의 세계에서 죽음은 수사가 아니라 엄존하는 현실이었다. 해녀들은 대개 칼 손잡이 끝에 끈을 매달아 손목에 단단히 감고 입수를 하는데, 바위에 달라붙은 전복에 칼을 꽂았다가 칼이 전복에 박혀 빠지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고 숨이 차 죽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네들은 한겨울 바닷물에 얼어 죽고, 해파리에 물려 죽고, 상어에 잡혀먹는 등 실로 갖가지 횡액에 목숨을 잃었나보다. 물질하다 보면 조류에 실려온 다른 마을 해녀 시체를 만나는 일도 빈번했던 모양이다. 익사자가 생기면 주로 베테랑급 해녀들이 해수면의 미묘한 색변화를 살피고 바람의 방향과 조류를 계산하여 시체를 찾아냈다고. 그러나 내일의 목숨을 잇기 위해 오늘에 목숨 걸었던 해녀들의 생활사를 누가 감히 처절하다 연민할 수 있을까. 내게는 차라리 위대한 전설처럼 아득하고도 감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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