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결혼이야기 1 또하나의 문화 11
또하나의문화 편집부 / 또하나의문화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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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실 우리 나라에서의 결혼이 도구적인 관계들의 결합이라면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면들을 다른 곳에서 해결한다는 것이 반드시 결혼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이 매우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유대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위기지만 결혼이란 기본적으로 역할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다른 문제지요.

조혜정 내가 볼 때는 그래서 오히려 못 쓰는 것 같은데요. 결혼을 역할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니까 별로 문제 의식을 못 느끼는 것이지요.

김은실 그렇지요. 한쪽은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데 다른 한쪽은 문제를 느끼고 글을 쓰겠다고 하니까 골치가 아파지는 거죠. -23쪽

 

그러나 고백하자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승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된 배경에는 나 역시 결혼이 ‘기본적으로 역할의 조합’이며,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면들을 다른 곳에서 해결하는 것이 반드시 결혼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적인?) 쪽으로 생각이 전환된 바가 크다고 해야겠다. 물론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유대는 중요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역할의 조합이 상호 간에 만족스럽게 이루어진 이후라야, 다시 말해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차원에서의 관계가 충족이 된 이후라야, 그러한 유대 역시 차후적으로 지속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몇 번의 연애 경험을 통해 나는 역할 수행이 관계의 지속에 있어서 좀 더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전제가 된다는 걸 통렬하게 깨달았다. 상대에게 바라는 기본적인 역할 수행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혹은 역할 수행에 있어서의 견해 차가 갈등의 요소가 된다면, 처음에 견고했던 정서적인 유대마저 종내에는 파탄날 수밖에 없더라. 이 문제와 연관하여 근래에 나 자신에 대해 내린 결론은, 나 같은 인간 유형이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순응하기로 결정했다면 정서적인 유대는 필연적으로 다른 곳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며 그렇다면 그것이 되도록 건전하게 승화된 형태일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다.

 

이소희 이번 호를 진행하면서 30대 친구들과 결혼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혼 구조 속에 들어갔다가 너무 괴로우니까 빠져나갈 것인가, 그대로 있을 것인가 열심히 주판알을 퉁겨 보는 거였어요. 그러다가 결혼에서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고 그대로 결혼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치열한 과정을 겪고 난 후 결혼에 안주한 친구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네가 왜 결혼에 안주하기로 했는지를 풀어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 이야기는 결혼이 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 서로의 필요에 의한 기능적인 관계일 뿐이라는 겁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결혼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었다는 거지요. -24쪽

 

서로의 필요에 의한 기능적인 관계. 나는 이런 관계가 냉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데. 씁쓸하게 생각되지도 않고. 그거야말로 결혼의 본질이 아닌가.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에서 법륜 스님이 그 지점을 매우 정확히 꼬집고 있다. 그는 부부라는 관계 자체가 원래 대부분의 경우 극도의 이기심으로 맺어지는 관계라고 하면서, 이기심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강조한다. 결혼이 괴로운 것은 인과응보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니, 이미 네가 그 괴로운 길을 스스로 택한 이상, 애당초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이 전적으로 포기한 채 오로지 죽었다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최대한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그저 수양하며 사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족

그렇다면 나는 왜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동반되는 이 새로운 기능적 관계 맺기를 자발적으로 택하고자 하는가. 무엇보다도 출산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뭐, 꼭 결혼을 안하고 애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지나치게 전위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좀처럼 엄두가 안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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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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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는 파시즘 사회를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자체의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되는 하나의 극단적 귀결로 봤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까지 해명해주지는 못한다. 강제 불임, 수용소 수감, 대량 학살 등 나치 시대에 자행되었던 야만적 광기에는 어떤 해석이 뒤따라야 할까. 이 책은 나치즘을 “근대문명의 병리사”로 이해하고, 나치즘과 근대문명의 밀월 관계를 나치 시대 일상사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나치즘을 근대성의 그늘진 배면으로 보는 이같은 관점에서는 나치의 인종주의 역시 근대문명의 발전 도상에서 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나치가 수용소에 격리시킨 대상은 비단 유태인뿐만이 아니었다. 집시, 비행청소년, 부랑자, 동성애자, 정신분열증자 등 사회적 유용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모든 일탈 분자들이 “공동체의 이방인”으로 한데 묶여 똑같이 수용소에 수감되고 학살되었다. 진보의 이념을 함축하는, 유전생물학에 근거한 지극히 근대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비롯한 인종주의는, 나치가 일탈 분자들을 배제, 격리하고 나아가 존재를 말살시켜버리는 일련의 과정을 가능케 한 이념적 명분으로 기능했다. 인종주의는 결국 “서양 근대문명의 중핵을 표출하고 있었던 것”.

 

푸코 역시 나치 시대의 인종주의와 우생학을 근대의 생명관리정치 권력이 작동하는 원동력으로서 언급한 바 있다. 인종주의에 근거한 격리 수용과 대량 학살 뿐만 아니라, 훈련과 규율, 통제와 감시, 철저하게 구획된 영역 안에서의 제한적인 자유, 일상생활의 원자화 등등 이 책이 묘파하고 있는 나치 시대의 일상 풍경은 푸코가 말한 근대 정치 권력의 작동 양상이 가장 첨예하고도 노골적으로 구현된 역사적 사례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나치즘을 근대의 외설적 이면으로 보는 순간, 나치즘은 더 이상 흘러간 지난 날의 일탈적 과오도, 근대 경제체제가 내부 모순 끝에 당도하게 될 미래의 극단적 종착점도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엄존하는 현실적인 위험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나치즘을 고찰하는 일이란 결국, 근대가 발전하면서 노정시킨,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위험 요소들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며, 그것은 곧 그 자체로 오늘 당장 우리의 삶이 비극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실천이기도 하겠다.

 

사족 1

나치 시대에 벌어진 흥미로운 일탈의 한 사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대에 미국과 유럽을 풍미하던 스윙 문화가 나치 사회에도 유입되기 시작하는데, 스윙 문화라는 게 그 속성상 나치가 장려하는 비정치적인 대중오락에 전적으로 부합함에도 불구하고 스윙에 심취한 청소년들의 일탈이 체제를 교란하는 위협적 요소로 인식됨에 따라 결국 나치 정부가 스윙 청소년들을 근절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는 것(8장). 체제가 부과한 정언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선의의(?) 결과가 궁극에는 체제를 위협하는 짓이 되어버리고 마는 이 기묘한 역설을 어떻게 응용(?)해볼 수 있을까. 고민해볼 일이다. 저항과 탈주는 어쩌면 이토록 '웃프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기에.  

 

사족 2

나치 체제에 대한 인민의 적극적 동의는, 체제가 거듭되는 실제의 혹은 가공의 새로운 성공들을 내세움으로써 안전과 상승과 유의미한 삶의 전망에 대한 인민의 기초적인 일상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확보될 수 있었다. 나치 체제의 출발 자본은, 패전과 인플레이션과 대공황에 끼어버린 바이마르 공화국이 격심한 불안을 야기하자 수많은 독일인들이 사이비 해법이라도 움켜잡았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카리스마적인 총통 신화는 새로운 실제 혹은 가상의 성공을 끝없이 추구함으로써 독일인들이 일상의 경험을 통해 망상에서 깨어나는 일을 막아야 했다. -p.108

 

일체의 환상 없이, 비루함과 처참함을 있는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를 견디는 것도 크나큰 용기이며 능력인 것 같다.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다만 정견(正見)하는 것. 독일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이 정견의 능력이었는지도. 꿈꾸지 않는 것. 불안과 위태를 나이브한 방식으로 봉합하며 쉽게쉽게 살지 않는 것. 끔찍한 현실을 두 눈 부릅뜨고 견디는 것. 환상으로 시야를 덧칠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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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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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71년 겨울, 일본에서 어느 급진 좌파 학생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비밀 기지를 꾸린다. 이후 두 달 동안 일어난 일은 끔찍했다. 조직원 열두 명이 동료들의 손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 권력 다툼도, 치정극 때문도 아니었다. 혁명가로서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정신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신체를 학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생활 태도가 불량하게 느껴지거나 공동작업에서 실수를 한 동료를 골라내어 영하의 추위에 세워놓고, 밥을 안 주고, 집단 구타하는 식으로 차례차례 죽여 나갔다. 

 

“진정한 혁명가는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 놓여도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원들은 동료의 죽음을 ‘패배사’로 규정했으며, 나약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동료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땅에 묻었다. 희생자 중 누군가는 자신의 나약함을 반성하며 죽여 달라고 애원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지도부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부하들을 제대로 정신무장 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구타에 참여한 조직원들은 “폭력에 참가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죄책감 자체를 뛰어넘어야 할 자신의 정신적인 나약함”으로 여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다고 하나 학생운동조직 멤버들은 대부분 중산층 출신의 고학력자 젊은이들이었으며, 논리적으로 사고할 줄 알고 자기 반성 능력도 뛰어난, 지극히 평범한 정상인들이었다. 심지어 조직의 우두머리는 사건 이후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자기 비판을 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광기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보며 내가 그런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을 만큼 사리 분별을 못하게 된 상태였다거나 상황을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리했던 것이다.” 

 

이성이란 사리에 치우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협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비이성이란 사적인 열정을 대표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불화를 빚어낸다. 보편적이고 공정한 진리의 기준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안녕에 으뜸가는 요소라고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시각은 합리성이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시대에는 물론이고, 합리성이란 자신이 동조할 수 없는 부분에서 살인으로 해결해버릴 만한 배짱도 없는 사람들의 헛된 꿈에 불과하다며 합리성을 경시하고 거절하는 불행한 시대에는 더더욱 지당하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中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러셀의 이런 말도 도무지 허튼 망언처럼 들리고 만다. 숙청은 결코 우발적으로 행해진 광기의 잔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집단구성원들의 민주적인 결정에 의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된 사건이었다. 급박했던 당시 상황 속에서 숙청이 하나의 기이한 유행으로 자리잡게 된 심리적 메커니즘 역시 어떤 고유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폐쇄 사회 안에서 배출되지 못하고 쌓여가는 공격적인 에너지가 바야흐로 임계점에 육박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든 내부적으로 소진시키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융성하게 된 집단적 향유의 극단적 형식이 곧 숙청이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이성은 무엇이고 비이성은 무엇이며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성과 비이성이란 차라리 뫼비우스의 띠의 안팎과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교한 논리 회로를 따라가서 끝내 비이성의 문을 열고 나오는 일이야말로 인류가 반복하는 영원한 희비극이 아닐지. 저자의 말대로 이 사건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떤 사람이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 '멀리'라고 하는 공간적 간격 역시 따지고 보면 주관적인 기준점으로부터 상정되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신체 학대와 고문과 살인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더없이 끔찍한 최악의 행위로 파악하는 현대사회야말로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상태인지 모른다고. 연합적군 사건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서적 반응이야말로 유사 이래 전무후무할 만큼 극도로 생명을 중시하는 기이한 휴머니즘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궤변인가. 하지만 무엇이 비이성인가. 무엇이 광기이며 무엇이 비극인가. 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온 걸까. 어디쯤에서 헤엄치고 있는 걸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헤엄을 칠 뿐이다. 적군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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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모두 이 자리에서 '멀리' 와 있더군요. 여기랑 다른 곳에 가 보면 금방 느껴져요. (그러니까 도시에 있다가 시골에 가 보면. 문명 속에 있다가 인디언들 읽어 보면...등등)

수양 2013-02-24 23:55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종종 일부러라도 '다른 곳에 가보는' 연습을 해야할 것 같아요. 깜짝 놀라기 위해서요.
 
루쉰 현대의 지성 118
다케우치 요시미 지음, 서광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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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전쟁 당시 소집 명령을 받고 중국 전선으로 떠나기 전 지은이가 유언의 심정으로 남긴 책이라 한다. 중국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중국문학 연구자의 운명이란 얼마나 얄궂은가. 삶이 던지는 잔혹한 물음에 응답하기 위한 방편으로 무엇보다 저자 본인을 위해 써내려갔던 책이어서일까. 읽기가 쉽지 않다. 다소 난삽하게 느껴지기마저. 친절한 위인전 같은 걸 기대했다가 예상 밖에 루쉰이라는 한 인간의 심층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여정으로서의 글쓰기를 만났다.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 이리저리 가늠해 보면서 조심스럽게 수정하고 덧붙여 나가는 조형적 글쓰기. 실마리를 추적해 들어가다 막다른 골목이 나오면 되돌아 나오기도 하는 그런 글쓰기. 그 쉽지 않은 글쓰기를 뒤좇다 보면 서서히 루쉰이라는 인물의 상(像)이 떠오른다.

 

내면 깊은 곳에서의 루쉰은 개인주의자이고 회의주의자였으며, 과감히 말하면 비관주의자요 허무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낡은 사회의 위선을 고발하고 자유에의 갈구를 호소하는 소설을 썼다는 것은 "작가가 작품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처음부터 작품 밖에 서서 작품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루쉰은 애당초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허무의 심연을 내면에 포함한 고독의 정신이 어떻게 현상으로서 계몽가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저자는 ‘계몽가 루쉰’을 부단히 생성해내는 근원적 동력으로서 '문학가 루쉰'을 불러낸다.

 

문학가란, 혹은 문학가로서의 자세란 무엇일까. 저자의 언설을 추려보면 그것은 고통을 예민하게 지각하고 그 고통과 쉼 없이 대결하는 삶의 태도를 일컫는다. 이를 위해서는 불편과 고통을 낳는 모든 가치들에 대해 끊임없이 부정하고 저항해야 한다.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된다. 루쉰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과거의 낡은 가치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진보적 가치들 또한 부정했으며 종국에는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는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에 절망하는 자기 자신마저 부정했다.

 

심층의 기저에 완고한 뼈대를 이루고 있는 무(無)에 대한 근원적 자각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결국, 자신과 철저하게 대립하는 소설을 써낸다. 그것은 곧 자기반역이자 자기희생이다. 게다가 연후에는 엄정한 자기 추궁 끝에 소설마저도 버려버린다. 그는 그렇게 끊임없는 부정성의 운동 속에서 혼돈과 모순을 살아내었다.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성실한 생활인으로서, ‘쩡짜’적으로 살았다. 저자는 여기서 어떤 순교자적인 에토스를 읽어낸다.

 

다케우치가 그려내는 루쉰은 하나의 육중한 슬픔으로 와 닿는다. 차라리 그것은 강철로 된 무지개 같은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슬픔의 질감과 규모를 머리로밖에 헤아리지 못했다고 적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직 온전히 가슴으로는 실감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적는 편이 정직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할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원래 쉽게 읽어버릴 수 없는 책이라야지 옳다. 루쉰이라는 사람의 내면의 내용에 부합하는 타당한 형식으로서, 안개 낀 깊은 숲처럼 그렇게 이루어져 있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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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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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이란 나라는 덕치를 치세의 모범으로 여겼지만, 그 전성기는 정작 영조와 정조 같이 마키아벨리적인 군주들에 의해 구가되었다. 역사가 역설적으로 말해주듯이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란, 끊임없이 칭송되면서도 정작 그 존재는 좀처럼 증명되지 않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의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근대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가 그렇듯이. (명쾌하게도 니체는 그런 것들을 '사랑스런 허영심'이라 불렀다.)

 

존재하지 않는 의상을 실재하게 만드는 것은 제스처다. 마치 옷을 입고 있는 듯이, 지금 여기 소매에 달린 레이스가 몹시도 거추장스러운 듯이 행동하는 과장된 제스처. 이 책에서 예를 들면, 정조가 대신들 앞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지극히 효성스런 제스처. 그러니까, 중요한 건 제스처다. 허구를 기능하게 만듦으로써 더 이상 허구를 허구가 아니게 하기 때문에. 이때의 제스처라는 것은, ‘허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시지푸스 식의 비장한 류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추구함으로서 비로소 허망한 걸 허망하지 않게 만드는 거니까. 

 

덧_

이 책을 읽어봐도 역시 이덕일은 역사학계의 황우석인 듯. 학계의 자정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인 듯. 어쨌든 그의 책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어떻게 의심을 할 수가 있을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독자로서는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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