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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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성당 이야기》




이 소설은 출간 당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1990년대 말 체코의 베스트셀러 였다고 한다. 실은 이전에는 체코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움베르트 에코에 대한 체코의 답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기에 또한 고딕 문학을 크게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많은 기대를 안고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은 뭐랄까, 고딕 스릴러의 특징이라고도 하는 음산함, 무거움, 기묘함, 잔인함 등이 한꺼번에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영어권의 사건과 속도감, 반전이 특징이 스릴러 소설들을 주로 읽다가 접한 이 소설은 정말 색다른 느낌 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기대와는 달리 소설을 읽기는 참 어려웠다. 앞서 말한 대로 속도감에 익숙해진 탓, 그들 역사에 대해 잘 몰랐던 탓에 책장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참으로 어려웠던 것이다. 읽다가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대단한 것은 어려웠지만 끝내 손에 놓을 수는 없게 만든 소설이랄까? 소설에서 묘사하는 체코의 건물, 거리, 특히 성당과 과거 역사에 대한 묘사들은 기본 지식이 없는 나에게 굉장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인터넷을 뒤지며 언급된 성당의 모습을 찾아보기도 하고, 체코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며 읽어야 했기에(그럼에도 제대로 잘 알지는 못했던) 흐름이 많이 끊기기도 하고, 주인공의 가장 큰 특징인 <건물에 손을 대면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 도 환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바람에 집중을 잘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K라 불리기 원하는 경찰이며, 등장인물들은 모두 독특하고 기괴하며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만일 영화로 만들어 졌다면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일 테지만 귀에 진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K의 상사라든지, 키가 작고 등이 굽은 프룬슬릭이나 그와 반대로 거인처럼 생긴 남자 그윈드의 대화나 모습에 대한 묘사 등 또한 흐름을 따라가는데 참으로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특히 소설 초반부 아버지와 주인공이 함께 성에 가는 장면 등은 과연 이 소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책을 다 읽은 후에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어느 정도 걷어 낼 수가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프라하에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발목 인대에 밧줄을 꿰어 종에 달아놓기도 하고, 다리를 찢어 높은 곳에 달아놓기도 한다. K는 자신이 보호하려던 사람이 살해당하자 결국 경찰을 그만둬야 했지만 좀 전에 언급한 거인 그윈드의 요청으로 이 사건들에 깊숙이 개입하며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자꾸만 살인은 벌어지고 단서는 그 사람들이 살해 당하기전 창문으로 날아든 돌맹이. 그러나 자신도 몰랐던 과거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알게 되고 서서히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결말은 생각했던 방향과 달랐다. 아슬아슬하고 섬뜩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다 작가는 결말 부분에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숨겨 놓은 것이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여름에 읽기에 딱 좋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음산하고 엽기적인 고딕풍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 소설을 참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다만, 만일 나처럼 아무런 지식 없이 이 소설을 읽다보면 중간에 지쳐버릴 지도 모르니 꼭 소설의 맨 뒤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고 난 뒤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체코의 역사와 가톨릭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만일 내가 그럴 수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게 읽지는 않았을 거란 아쉬움이 많이 든다. 소설은 추천할 만하다. 내가 이렇게 혹평으로 보이는 언급을 하는 이유는 재미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힘들게 읽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소설 장르의 특성한 자세한 이야기를 쓰지는 않겠지만 앞서 말한 대로만 한다면 아주 즐거운 독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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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영원히 계속되리
김태연 지음 / 시간여행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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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영원히 계속 되리》




처음 접해보는 수학소설. 내가 생각하는 수학은 그저 숫자를 계산하는 수준이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것. 워낙 수학 머리가 없어서 문과를 선택했고, 수학 물리학 등은 대학가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란 희망을 가졌지만 심리학을 전공하니 통계학 때문에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함수를 비롯해 사인 코사인 이런 거는 정말 아예 이해자체를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다보니 수에 대해 내가 참 큰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數 또한 철학이고 사상이고 인문학이었음을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1,2,3에 이렇게 깊은 뜻과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왜 우리는 더하기 빼기에, 시험 치는 용도로만 수학을 대하다가 이자, 복리, 돈 계산만 잘 하면 된다에서 수학적 고민을 끝내버리게 만든 걸까? 이는 물론 수학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겠지. 우리나라 교육의 총체적 문제겠지.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억수종'과 관련이 있다. 불교 종파에서도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전해 내려온, 심지어 같은 억수종 승려들조차도 이 종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정말로 은밀한 단체. 그곳에서 법맥을 이은 '한초'가 임종 전에 자신을 이어 법통을 이어갈 인물을 결정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양자 '구영일'과 승려 '능오'이다. 구영일은 한초에게는 세속에서 자신의 가문을 이어갈 양자이고 능오는 자신의 제자이다. 또 한명의 중요 인물은 구영일의 사촌으로 한초의 양자 물망에 올랐던 '구영구' 그리고 그의 장인. 억수종은 수數 를 화두로 삼아 정진하는 종파이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수학은 내가 알던 수학이 아니다. 직선과 점, 수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다. 이 수안에 진리와 생명과 우주의 법칙이 들어있다. 불교의 가르침과 수학, 주역과 동, 서양 철학을 넘나들며 늘어놓는 의문과 진리의 말은 참으로 오묘하다. 이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수를 만나고 몇 십 년의 시간을 지나며 억수종의 비밀을 파헤치고 또 한 쪽에선 직지심경을 비롯한 고대 유물을 찾으려 한다.


구영일은 수학을 전공했고, 구영구는 사학을 전공했는데 이 두 지점도 수와 만난다. 우리 민족이 남긴 빗살무늬토기, 다뉴세문경, 고인돌이 숫자 '1'에서 만나고, 한글 창제의 뒤에 1불교의 교리가 숨어있는데, 이 불교 또한 숫자와 만난다(108,28). 1,2,3,5,7 로 이어지는 소수의 원래 이름이 화랑할 때 랑을 쓴 '낭수' 였으며, 우리 민족의 정수라 불리는 천부경 또한 가장 중요한 수인 '1'과 연결이 된다. 이 소설에는 또한 정말 다양한 수학에 대한 이론들과 학자들이 등장하는데 해석학, 유클리드 기하학, 미적분학, 제타함수, 리만가설 등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이론과 학자들이 주인공들의 경험과 이야기들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불교의 대선사들과 공안이야기 시기상으로는 나말여초, 고조선 그 이전의 시대까지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플라톤이나 아인슈타인 등의 철학자와 과학자의 이름까지도 거론된다. 수 하나로 이런 인물들과 물리학, 천체 물리학에 건축, 세시풍속까지 연결되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또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종교의 허상까지 짚어주고 있으니 작가의 상상력과 인문학적 소양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혀를 내 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내 수준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을 뿐.


얼마 전에 읽었던 김병훈 저자의 <해커 붓다>에서 만났던 이야기와 상통하는 불교이야기를 만났을 때는-지구를 넘어서는 윤회의 이야기-소름이 끼치기도 했고, 특히 마지막 '억수종'의 비밀이 드디어 드러났을 때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삼각산 도사와 주역에 도통한 선생이 나왔을 때는 정말 귀가 솔깃하기도 했고.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차원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 세상이 돈의 굴레에 갇힌 답답한 곳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생명력과 신비를 간직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우울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 소설을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 눈과 가슴이 조금은 넓어진 것 같아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작가의 전작 《이것이다》또한 꼭 읽어 보고 싶다. 색다른 소설을 원한다면, 순수한 학문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면, 나처럼 뭔가 신비로운 것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꼭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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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바다로 간 달팽이 10
장정옥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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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나는 개인적으로 조선사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로 선조, 광해군, 인조까지 이어지는 시기와 정조 대왕이 승하하신 후, 그리고 일제에게 나라를 통째로 넘겨주었던 때를 꼽는다. 관리라는 자들에게 민생보다는 자신의 당파의 이익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환란까지도 안중에 없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겨우 어진 왕이 서 개혁정책을 펴 놓아도 그 후 정권이 역시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 때문에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온 산천을 피로 물들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왕은 절대자이기보단 자신들의 당파에서 세운 사대부들의 대표 격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리저리 휘둘리고 제대로 된 정책 또한 펼치지 못했다. 선조는 아예 나라에 전쟁에 터지자 스스로 천조라 여기던 명나라로 가 살기만을 바라기 까지 했으니.


이 소설《비단길》은 정조 대왕이 승하하신 후 신유년에 일어났던 천주교 박해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대왕대비 김씨를 주축으로 하여 다시 정권을 잡은 벽파는 남인 시파들을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를 재물로 삼았다. 이를 재물로 남인의 중심인물들을 대부분 처단했으며 고을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잡혀온 사람들은 모진 고문을 통해 아무개의 이름이라도 토설하게 만들어 또 잡아들였으며, '5가 작통법'을 시행해 서로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게 만들었다. 이러니 빌린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섭섭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재산을 갈취하기 위한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거짓 고발 또한 끊임없이 이어졌다.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신유년 순교자 선암 정약종과 이웃에 살던 수리의 가족과 엮어서 보여준다. 수리의 아버지 여문휘는 보부상으로 비단길로 장사를 떠나던 길에 노름할 돈을 빌려달라던 동료의 청을 거절하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친구의 고발로 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던 차에 천주교 신자인 친구의 이름을 말하고 만다. 고발로 목숨을 건지긴 했으나 결국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비단길로 떠나버린다. 그의 아들 수리와 할머니 어머니는 그런 여문휘를 기다리며 누에를 치고, 비단을 만들며 삶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이웃에 선암 정약종 가족이 이사를 오게 되는데 수리는 훌륭한 인품과 깊은 학식을 지닌 정약종의 제자가 되어 스승이 순교하던 그날까지 그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들의 가족과 식솔들과의 이야기도 큰 축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엔 정약종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의 이야기, 그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으며 그 시대 사람들이 하였을 고민들과 민초들의 한, 실상을 살펴볼 수 있다. 가렴주구에 빠진 관리자들, 민초들의 고혈을 빼먹는 양반들, 천주학을 학문으로 종내에는 신앙으로 받아들인 선 지식인들의 고민과 이야기들이 한 점 한 점 아름답게 수놓아 진다. 하늘아래 모든 이들은 똑같이 소중하고 평등하다는 천주의 말씀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상상하기에도 버겁다. 그들이 갖가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절대 놓을 수 없었던 믿음과 신의를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특히 정약용에 비해 역사적으로 관심밖에 있었던 선암 정약종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어 참으로 좋았다.


그렇게 지켜온 믿음과 학문과 진리였건만 지금의 천주교와 개신교를 비롯한 천주 신앙의 모습은 어쩜 이렇게 변질되었는지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진 않았으나 지금 교회의 모습은 초기의 신실함과 순교자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지 않은가. 오늘도 전교를 이유로 인도에까지 찾아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사찰에서 '땅 밟기'를 하는 신도들의 모습이 기사화 되어 비난을 받는 것을 보았다. 목숨을 내 놓고서라도 자신의 믿음과 동지들을 등지지 않았던, 자신들을 죽이려한 악마 같은 그들도 사랑으로 용서하고자 하였던 그 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그런 아름답고도 슬픈 소설이다. 많은 분들에게 읽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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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히구라시 타비토가 찾는 것 탐정 히구라시 시리즈 1
야마구치 코자부로 지음, 김예진 옮김 / 디앤씨북스(D&CBooks)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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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히구라시 타비토가 찾는 것》




예전 작가 이외수의 소설 <황금비늘>에서 시각장애인이 전시회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장면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던 적이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는가. 소설 속 전시회장의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고 그건 책을 읽는 나 또한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한 점 한 점 그림 앞에서 탄식을 내 뱉기도 하고 어떤 감흥을 느끼는 그 남자에게 다른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강한 기운과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끼는 장면이 이어지며 나 또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가 바로바로 감각을 느끼는 눈, 코, 귀, 입, 피부 이 너머의 것은 정말 없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느끼는 이 감각은 정확한 것일까? 혹시 더 많은 감각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소설《탐정 히구라시 타비토가 찾는 것》의 주인공 타비토는 앞서 말한 인체의 감각 중에 오로지 '시각'만을 가진 남자다. 다른 촉각, 후각, 미각, 청각은 뇌 속에서 미묘하게 변형되어 주인공이 감지할 수 있는 '시각'으로 감지된다. 그러기에 인간이 보지 못하는 감정의 흐름, 기운, 느낌, 겉으로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탐정이라고 하지만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소유하다 잃어버린 물건은 어찌 보면 별것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바라보면 그 안에 어떤 추억이나 의미가 담긴 경우를 볼 수 있다. 누구에겐 이루지 못한 사랑이고<의자의 목소리>, 또 누구에겐 속죄하기에 늦어버린 죄의식일 수도 있으며<무엇을 찾으시나요?>, 누군가에겐 다시 오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풍경의 신비>일 수 도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남들이 가진 오감대신 오로지 시각 하나만으로, 아니 어쩌면 오감을 넘어선 다른 감각으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며 그들의 못 다한 사랑을 연결시켜 주기도 하고, 추억의 장소를 찾도록 해 주기도, 마음속의 죄책감을 내려놓게 하기도 하며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이야기는 잔잔하면서도 흥미진진하고, 주인공이 가진 독특한 이력과 추리와의 절묘한 조화로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때론 작가 '히가시가아 도쿠야'풍의 엉뚱하고 어설픈 듯 보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도 무척 감칠맛이 나며,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으로 이어가는 솜씨도 정말 일품이다. -이 작품은 <탐정 히구라시 타비토가 잃어버린 것>으로 이어진다.- 소설은 주인공이 사람들의 물건을 찾는 일이 주 골격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의 비밀스런 과거와 사연이 하나하나 밝혀지며 긴장과 호기심을 이어간다. 가볍지만 가볍지 않고, 긴장감 있지만 오싹하지는 않으며, 읽다보면 주인공들을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다음 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아주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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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신예용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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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




캐나다 퀘백. 늘 따뜻한 햇빛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 곳. 평화롭고 목가적인 시골마을.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곳. 그 곳에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계란을 숨기던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나무로 만든 계란에 그림을 그리며 부활절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부활절을 맞아 특별히 마을을 정화하는 의식으로 저주가 깃든 해들리 저택에서 '교령회'를 하기로 결정한다. 마을 사람들은 영매(위카인)를 불러 이 의식을 주관하는데 이 의식 중에 겁에 질린 여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한 가마슈 경감은 이 의식을 주관한 영매, 참가한 사람들을 방문하며 사건을 해결할 단서를 수집한다. 소설은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양상으로 해결되는지 등의 사건 중심이 아닌 인물들 간의 관계와 심리묘사에 더욱 치중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는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 《폭스 밸리》와 참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또 이런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는 경찰들끼리의 팽팽한 대립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전 작을 읽지 않아서 몰랐지만, 전작에도 등장하는 가마슈 경감이 소속된 경찰 내부의 비리와 대립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경찰들 사이의 긴장감도 마을의 살인 사건과 거의 비등한 무게로 다뤄지고 있다.


사망한 여자는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서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곁에는 늘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이런 문제들이 얽히다 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 문제가 쌓이기도 한다. 다소 지루한 듯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중반부를 넘어서며 탄력을 가지게 되는데 전반부의 등장인물들과 마을의 묘사는 평온함 속에 뭔가를 감춘 듯 한 느낌을 잘 표현 한 것 같다. 의식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하나 펼쳐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 인간관계와 심연의 표현이 참으로 탁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안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의 찌거기 들이 쌓여갔고, 인간의 겉모습과는 다른 어두운 면에 대한 묘사도 참으로 탁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아쉬운 점은 번역에 대한 것이다. 왜 모든 말을 다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고 프랑스어 발음대로 적어놓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부연 설명을 해 놓은 것인지, 설명이 필요한 단어들은 각주로 따로 처리하지 않고 역시 작은 글씨로 설명을 해 놓은 것인지, 심리묘사들이 이어져 조금 지루할 수 있는 소설에 이런 번역은 몰입을 하는데 조금 방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가브리가 신음 소리를냈다. "메르드 Merde 젠장. 올여름에 내 자리를 물려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앞으로 어쩌지?"

"매, 스 네파 포시블 Mais, ce n'est pas possible 말도 안돼. 틀림없이 디카페인 커피였다고요." 무슈 벨리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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