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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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훈의 글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문학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장에 대해 “전압이 높은 문장” 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가 마음먹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전압을 준 글은 쉬이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조바심과 약간의 짜증이 나는 일이다.
어느 순간 몰입해서 읽었는가 생각하면, 어느새 눈은 글자를 읽는데 머리는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짜증을 내며 책을 던져버릴 법도 한데, 김훈의 글은 쉽게 팽개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하여 내 책장에는 김훈의 책이 여섯 권 꽂혀 있는데, 나는 그 중 두 권을 아직도 읽지 않은 채 꽂아 두고 있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꽤나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내가 김훈이라는 한 작가를 인지하게 된 것은 당연히 2001년 독서계를 휩쓸고 간 소설 『칼의 노래』덕분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김훈 世說” 이라는 소제를 달고 나오는 그의 짤막한 에세이들 때문이다. 나는 그의 위악에 가까울 정도로 솔직한 에세이를 좋아한다.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가 보수주의자임을 인정하고, 페미니즘에서 파생되는 여성의 능력에 대한 예찬을 부정하고, 한여름 여성의 노출패션을 찬양하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위치에 올라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경직된 사회에서 그는 “오버한다” 싶을 정도의 솔직함으로 글을 쓴다. 위악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거침없는 그의 문장들은 그러나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내는 위악적인 문장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를 역설가라 말한다.
하기야, 역설은 그가 가장 많이 구사하는 수사법이기는 하다.

올해, 김훈의 두 번째 世說은 “순정한 처사(處士) 김훈이 몸으로 써낸 사람살이의 풍경”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제목은 그의 수사법 그대로 “밥벌이의 지겨움” 이란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 ‘밥벌이’라는 명쾌한 이름을 붙일 줄 알고, 그것이 지겹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솔직함이 짧은 에세이에 묻어 나온다.
단지, 버려 주었으면 좋았을 뻔한 글이 너무 많다.
여기저기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서 묶어낸, 그래서 세설(世說)이라는 이름을 붙인 에세이집인 것 같은데, 해서 동어반복의 글들이 많다. 결과적으로는 김훈, 이라는 네임 벨류에 대한 훼손이 될 텐데…… 걱정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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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동방미디어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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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학 2학년 겨울에,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을 독파했던 일이 있었다.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다, 이상문학상의 초기 스타일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딱히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뭐랄까, 일종의 소설 트랜드를 읽어 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걸 바탕으로 레포트를 썼다가 이쁨 받았지, 울 샌님한테. ^^

무라카미 류는 내가 일본문학에 학을 띠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만약, 그의 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즈(버려진 아이들의 반란으로 초판 번역됨)』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하루키나 바나나, 가오리, 에이미 등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무라카미 류는 나에게 엽기코드로 다가왔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애널 섹스의 개념조차 없을 때, 읽었던 코인로커 베이비즈는 며칠동안 잠을 못자게 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랬음에도 이 책을 읽었던 것은
1.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마음먹었기 때문
2. 그의 데뷔작이자 자전적 소설이었기 때문에 이놈은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을 쓰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두 가지 이유가 전부다. 그나마 아쿠타가와 상 수상집을 읽기로 한 건, 울 샌님의 강압에 의해서다. 움. 일본문학은 별로 맞지 않고, 나는 유미리도 싫다만, 또 시키는 건 잘한다.

얼마 전, 자주 가는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 누가, 책을 처분하겠다는 글을 올린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처분 목록 중의 하나가 이 소설이었고, 처분 이유가 16살 된 늦둥이 동생이 자기 방에 들어와 이 책을 들춰 보는 걸 보고 얼른 치워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란다. 도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그 정도의 반응인가, 하는 호기심에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붉은 딱지는 한층 더 유혹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읽던 책을 던져놓고 읽었는데,

마약, 그룹섹스, 동성애, 약물중독, 난교파티……

16살 된 동생이 들춰 본다면 좀 심란해 지는 소설임에는 틀림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소설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의 취향과는 전혀 반대되는 소설임에도.

소설의 주인공 류는 기지촌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저 이태원쯤 되려나.
그곳에서 그는 일본인 여자와 미군의 난교파티를 주선하고, 마약을 나눠주며, 아무런 미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게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딱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이, 이것이 굳이 나쁘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눈앞에 주어진 일이고 막상 움직여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것일 뿐.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약과 난교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뭘 해야 겠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는 70년대 초중반 일본 사회의 상실감에 관한 소설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되고 싶은 것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지겨워 미치겠는 그 상실감이 이 소설만큼 확연하게 드러난 것도 드물 것 같다.

물론, 어린이날 읽기에는 좀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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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love 1 : 냉정과 열정사이 세트 - 전2권
에쿠니 가오리.쓰지 히토나리 지음, 김난주.양억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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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고 에쿠니 가오리에게 기함을 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이 책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자주 가는 서평 홈의 주인장이 써 놓은 리뷰를 읽고 다른 책을 주문하면서 함께 끼워 넣어 주문을 하였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 주인장이 리뷰를 쓴 책을 거의 다 구입했다. 아마, 내가 이 책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나의 독서취향이 꽤나 비슷하다는 판단보다는 그의 독서취향이 몹시 다양하면서도 꽤나 고급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그는 꽤 수준 높게 책을 고르는 편이다.

책의 형식은 꽤나 참신하고 독특하다고 평가받는 모양인데,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런 식으로 치고받는 이야기, 그러니까 여자 주인공 아오이와 남자주인공 쥰세이, 둘이 함께 사랑하고, 그 사랑이 끝난 이후의 이야기를 각각 글로 써 낸다는 건, 여기저기에서 많이 시도되었던 형식 아닌가? 그런 형태는 꽤나 매력적일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를 알기만 한다면.

단지, 이 책이 좀 더 참신한 것은, 그간은 한명의 작가가 각각의 인물을 대변하는 형태였지만 이 소설은 두 명의 작가가 하나의 사랑이야기를 엮어 내려갔다는 것 정도. 덕분에 문체도 느낌도 달라서(개인적으로는 츠지 히토나리가 쓴 Blu쪽이 마음에 들었다.) 입장의 차이도 그만큼 확연히 느껴져서 좋았다는 것 정도?

음. 글쎄.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다른 작가가 쓴 것 치고는 두 등장인물의 성격이 너무 비슷하다. 헤어진 이후에 각각의 연인을 만나지만 서로를 잊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둘 다 개인적인 세계에 침잠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는 것도 그렇고…… 성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연애를 하게 되는 거야 정해진 이치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비슷한 사건전개와 성격 유형을 보여줄 거라면 굳이 두 사람의 작가가 필요했을까? 아, 문체와 느낌의 차이는 매력 있었다.

두 권을 다 읽어내리고 나서 느낀 건데,
이 책을 정말 맛있게 읽으려면, Rosso와 Blu를 동시에 한 챕터씩 읽는 거다. 아오이 쪽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준세이의 이야기, 다시 아오이, 다시 준세이, 이런 식으로.
나한테도 누가 그렇게 읽으라고 가르쳐 주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아오이의 이야기를 먼저 읽고 준세이의 이야기를 나중에 읽었다. 그것도 6개월이나 묵혀둔 뒤에. 억울해라. 

이 소설의 기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히토나리 덕분인 듯싶다. 서사의 유연성이랄까 튼튼함이랄까, 제대로 된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히토나리 덕이다. 그에비해 가오리는 감성에 기대어 열심히 따라갈 뿐이랄까.

20대 초반에, 동경에서 서로가 주변인인 사람으로 만나 동질감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해 간 두 사람이, 남자 아버지의 방해와 남자의 일방적 오해로 헤어지게 되고, 8년간이나 떨어져 살다가 10년 전의 약속을 지켜 동경이 아닌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는 참신하고 재미 있다기 보다는 허접하고 지루한 연애담이다. 이 허접하고 지루한 연애담을 나름대로 산뜻하게 바꾸어 놓는 것은 히토나리쪽. 뭐, 그러니까 굳이 원한다면 Blu만 구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걸 읽으면서 궁금해 진 게 있는데,
원래 독자란 주인공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특히 그것이 연애담의 주인공일 때에는) 조연에게는 한없이 매몰차지게 되면서 쉽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 아오이의 연인 마빈과 준세이의 연인 메미 양쪽 모두를 위하여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8년의 세월 내내 서로를 잊지 못하고 살아온 두 사람에게 마빈과 메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준세이는 애써, ’메미와 헤어진 다음 10년 후에, 그녀를 아오이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Blu / p.193)‘ 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메미와의 사랑도 사랑이었다고 정당화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편으론,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아오이를 잊을 수 없어.(Blu / p.218)'라는 말로 메미와의 모든 시간들을 부정해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마빈에 대한 아오이의 태도에서도 딱히 다르지 않다. '나는 마빈에게 일상적으로 상처를 주고 있다(Rosso / p.185)'라고 느끼며 그것에 대해 짜증을 느낄 정도로 미안해 하면서도, 이야기를 하자는 마빈에 대해 ‘나한테는 할 말이 없었다. 한마디도, 그것만은 분명했다. …… 다만 준세이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내 말이 통하는 사람은 쥰세이밖에 없다(Rosso / p. 202-203)'라는 말로, 마빈의 모든 의미를 깡그리 부수어 버린다.

어차피, 연인이란, 타인에 대해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only one을 외치기 위하여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것을 정당화 시키려는 태도는. 죽어도 서로를 잊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다른 사람과 사랑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아오이와 쥰세이는 서로의 사랑에 대해서만 1/2의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메미와 마빈과의 사랑에 대해서도 1/2의 책임을 져야 한다.

가끔은, ‘여자에겐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던 이수영의 노래 가사를 ‘사람에겐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진리로 봉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최소한, 과거의 사랑으로 현재의 사랑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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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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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매력적일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에서다. 구성이 뛰어나게 잘 되었다든지(이인화), 독특한 문체의 아름다움 이라든지(김훈), 천재적인 발상이라든지(로저 젤라즈니,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런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각각의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분명 소설의 본령은 서사에 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요소들을 벗어나 재미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는 소설은 소설로서의 가장 큰 매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 가발다의 이 첫 장편소설은 매력적이다. 특별히 뛰어난 문체도 구성도- 실제 구성은 좀, 엉성한 편이다- 아닌 이 소설의 매력은 그 서사에서 나온다.

이 소설은 아내를 버리고 떠나는 남자와, ‘버림받은 아내’를 위로해 주는 ‘아내를 버리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다. 일종의 액자소설적 구성이라고 해야 할까. 외형적 틀은 일단, 버림받은 아내인 나, 클로에의 이야기다. 남편 아드리앵은 새로운 여자와 바람이 나 딸 둘이 있는 클로에를 버린다. “어떤 남자를 사랑해서 그와 함께 두 아이를 만들고서도 어느 겨울날 아침 그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 다는 사실을 알게”(p.42)된 클로에는 충격으로 멍해져 있고, 그녀를 잠시나마 쉬게 해 주기 위해 클로에의 시아버지인 피에르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의 ‘시골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그 시골집에서 머무는 동안 클로에는 시어머니 쉬잔을 버리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 마틸다를 버려야 했던 시아버지 피에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설의 중심 서사는 피에르와 마틸다의 사랑이야기다. 그러니까 제목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에서 ‘나’는 피에르이고, ‘그녀’는 마틸다인 셈이다.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클로에와 아내를 버리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버려야 했던 피에르는 처음, 전혀 반대의 위치에서 대치하게 되지만, 클로에는 시어머니 쉬잔과의 동일시에서 점점 벗어나 마틸다에게서 일치감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남편 아드리앵에게서 버림받은 일의 충격에서 조금씩 회복되어간다. 물론, 그 전까지 몹시 서먹하였던 시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됨은 물론.

작가 안나 가발다는 비교적 균형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아내를 버린 아드리앵의 손을 들어주지도, 가정을 지킨 피에르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그저, 그녀가 말하는 것은, 사랑의 방식에 관한 것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피에르의 입을 빌어 작가가 하고 있는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집스런 딸아이는 좀더 행복한 아빠랑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행복의 요소가 빠지고 의무와 책임만이 남은 사랑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그런 형태로라도 사랑을 쟁취? 또는 지킨 피에르의 아내 쉬잔은 행복하였을까.

그런 면에서 안나 가발다가 클로에의 시선을 취한 것은 매우 훌륭한 전략이었다. 버림 받은 것으로 고통을 당하는 여인을 화자로 삼음으로해서 피에르와 마틸다에게 가는 일방적인 동정여론을 차단했고, 그 차단을 통하여 균형잡힌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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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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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저, 우울하고 감수성 짙은 소설을 기대했었다. 열 여섯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앞부분 1/3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그저 그것만 가지고는 로맹 가리를 세계적 작가라고 칭하기에는 분명 아쉬움이 있다. 우울하고 감수성 짙은, 그런 수식어에 로맹 가리는 하나를 더 추가한다. 반전이라는. 첫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만으로는- 흠, 좀 놀라운 결말이군, 정도 였다가 두 번째 《어떤 휴머니스트》의 반전은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다. 알라딘의 서평에서는 "오 헨리 혹은 서머셋 몸 풍의 반전"에 강한 작가라는 말을 해 놓기는 했었지만 그것이 이런 것을 뜻할 줄이야.

로맹 가리의 소설집을 읽다보면, 단순한 반전이라는 생각보다는 "그래, 이게 원래의 인생이지, 인생은 이런 거야."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매 단편마다 들어있는 마지막의 반전에서는 '헉!'하고 놀라기보다는 '피식-' 하고 웃게 되거나 낮게 한숨을 쉬게 된다. 로맹 가리풍의 반전의 묘미는 그런데 있다. 그러니까, 뒷통수를 치게 되는 반전이라기보다는, 설마, 설마, 설마, 하다가 역시나 그랬군, 하는 반전이랄까. 또한 그것이 이 소설집의 가치를 조금쯤 떨어뜨리는 가장 큰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음, 이 작가는 이런 식의 반전을 써먹는 작가였지, 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면, 그 다음 번의 반전부터는 별로 놀라게 되지 않는다. 반전이 반전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고 할까. 한데 모이는 것에 따르는 시너지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되는 소설집이다. 소설가 김인숙은 "로맹 가리를 통째로 만나는 기쁨"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나로써는, 또는 로맹 가리 본인으로써는 글쎄, 라고 고개를 내젓게 되는 초이스였다. 내가 편집자라면 이런식으로는 책을 만들지 않았을지도. 그래도 역시나 《류트》의 반전은 놀라웠다. 《가짜》의 반전이, 너무 쉽게 예상 할 수 있었던 것이어서 맥빠졌던 것에 반해.

삶에 대한 로맹 가리의 시선은 차갑고 회의적이다. 그에게 비치는 세상의 색깔은 흐린 잿빛, 안개 낀 바다의 흐릿함. 그런 것들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회의를 로맹 가리는 담담하고도 냉철한 문장으로 엮어 나간다. 소설의 분위기도, 스토리도, 문체마저도 회색. 그러므로 자살로 생의 결말을 맞는 그의 생은 오히려 당연해 보이는 것이다.

괜찮은,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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