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의 허기 - B급 주방장 박찬일 에세이
박찬일 지음 / 경향신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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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 9. 7

 

입맛은 보수적이다. 나는 19살에 하숙을 시작했는데, 3년간 살았던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는 강원도 분이셨다. 강원도는 척박한 기후 탓에 식재료가 다양하지 못해 음식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분의 손맛은 기가 막혔다. 특히 김치 종류를 정말 잘 담그셨다. 음식 솜씨가 그다지 좋지 못한 엄마 아래에서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음식에 길들여졌고 그분의 김치를 김치맛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경상남도 쪽의 김치는 멸치 액젓을 많이 쓰고 간이 강하다. 날이 더우니 변질을 막기 위해 그렇게 된다. 김치는 위로 올라올수록 싱거워지고 물이 많이 생긴다. 경상도에서는 처음부터 국물김치를 담지 않고는 김치에 물기가 별로 없는데 서울식 김치는 아예 김치를 담고 국물을 만들어 붓기까지 한다. (김치명인 이하연의 명품김치, 웅진 리빙하우스, 2009, p.45 서울, 경기식 배추김치 레시피 중 거의 마지막 단계 생수에 소금을 녹인 다음 김치소를 넣고 남은 그릇에 부어 남은 양념을 헹궈 김치통에 자작하게 붓는다참조) 다만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는 그때 이미 서울 생활 30년이 다 되어가는 분이셨고 오랫동안 하숙으로 집안을 일으키신 분이라 그분의 음식이 강원도 음식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평균적인 서울식 음식을 하지 않으셨을까.

 

하숙을 끝내고 자취의 생활이 이어졌다. 먹는 일에 그다지 살뜰하지 못했던 나와 집에서 이미 10명 가까운 대식구의 식생활을 책임지고 있던 엄마의 조합은 김치 공수를 아주 드문일로 만들었다. 그 즈음의 나는 김치를, 아니 집밥 자체를 거의 먹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라면 먹을 때 김치를 먹지 않는다. 별 이유는 없고 딱히 김치를 먹어야 할 이유를 몰라서.) 어쩌다 김치를 먹고 싶을 땐 사다 먹었다. 종가집 김치 만세. 그러다 스물 여섯 살 무렵, 여섯달 정도 서울 가정식 요리를 배우러 다니면서 내 요리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뒤 해외로 떠돌던 시절, 나는 온갖 김치를 다 내 손으로 담아 먹었는데 김치 명인 이하연 여사의 책이 내 김치 바이블이었다. 귀국해서는 다시 종가집 김치를 찬양하는 중이다.

 

친정과 시댁은 같은 지역에 있고, 남편과 나는 학번이 네 개 차이난다. 남편이 4년 먼저 서울에 온 거다. 남편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졸업으로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살고 있다. 불쌍한지고. 그의 대학시절 하숙집 아줌마의 출신지역은 어딘지 모르겠으나 그도 나와 비슷한 지경의(사실은 울 엄마보다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더욱... . 평생 돈을 버는 일로 바쁘셨으니 음식 따위 하실 일이 없으셨을 거다.) 엄마를 둔지라 자연스럽게 서울 음식을 음식의 기준으로 잡았다.

 

나도 이렇고 남편도 이러니 평생 경상도 김치를 그리워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한데 2-3년 전부터 나는 명절에 친정에서 늘 김치를 한 통씩, 그것도 아주아주 큰 통으로 받아오고 있다. 처음에는 묵은지를 먹고 싶어서 얻어온 거였는데, 얻어온 친정김치(때로는 큰언니의 산청 시댁김치일 때도 있다)로 끓인 김치찌개는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돼지 목살을 듬뿍 넣고 푹 지져낸 김치찜의 걸쭉한 국물을 흰 쌀밥에 얹어 비빈 걸 한입 가득 넣었을 때, 오래 끓여 물러진 김치의 긴 줄기를 밥 위에 척 걸쳐 입에 가져갈 때, 남편과 둘이 동시에 아 이 김치찌개 진짜 맛있다, 찬양을 하던 그 순간에. 생각했다. 아 당신과 내가 늙었나 보다, 고향 음식이 맛있다니.

 

입맛은 보수적이다. 변한줄 알았으나 결국은 그 자리로 돌아간다. 내가 처음 먹었던 그 맛을 기억하고 그 최초의 기억으로. 또한 음식은 과거 회귀 본능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먹으면 사람을 그 음식을 맛있게 먹던 그 순간으로 돌려놓는 놀라운 마법을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음식에세이를 쓰고 읽는다. 음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매개로 한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박찬일의 글이 청승스럽다라고 이야기 했다. 아마도 박찬일이 자꾸만,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기에 청승스럽다고 느꼈던 것 같다. 출간순서로야 이 책보다 한참 뒤의 책 이지만, 내가 읽은 순서로야 이 책보다 먼저인 그의 책 밥 먹다가, 울컥에서 박찬일은 말하고 있다. “나는 결국 평생을 살아도, 옛날만 사는 것 같다.”(p.8).

 

이 책에서 박찬일은 끊임없이 자신을 과거로 돌려놓는 옛날을 살게 하는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 허기질밖에. 옛날에 먹었던 그 음식들을 지금 되살려 먹을 방법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그가 여전히 덤덤해서 더 청승이 느껴지는 어조로 과거에 먹었던 음식에 대한 추억담과 과거에 자주 갔던 식당에 대한 이야기와 어린시절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읽고 있다보면 때로는 마치 내가 그 자리에 가 앉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도, 초등학교 앞에 오던 해삼 멍게 리어카를 본 기억이 있고, 토마토를 썰어 넣은 냉면을 먹은 기억이 있거든. 토마토 냉면은 그렇다 쳐도 해삼 멍게 리어카라니, 이분과 나는 띠동갑쯤 되는데도 그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건 아마 내가 바닷가 출신이어서 그럴 거다.

 

다시 한번, 입맛은 보수적이다. 음식에 대한 추억은 사람을 그 시절로 끌고 간다. 젊어질 수는 없어도 젊을 때 먹었던 음식을 다시 먹을 수는 있다. 비록 그 음식을 먹고 도로 묵이라고 해라.” 했다던 선조와 같은 말을 하게 될지라도.

 

이 책에서 박찬일은 단순히 음식 이야기만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요리사로서의 인생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저기 자세하게 많이 풀어 놓는다. 다른 책에서는 별로 자신의 식당 경영 이야기나 음식 철학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에서는 유독 현실비판적인 구석이 많다. 사라져가는 노포에 대한 아쉬움이라든가, 다량의 화석 에너지를 태워가며 해외에서 공수되는 식재료에 대한 비판. 거기에 이어 저 잘생기고 착하며, 더구나 요리 솜씨도 좋고 말도 잘하는 한국인 셰프들을 좁은 스튜디오에 몰아넣고 농담이나 나누는 존재”(p.249)로 만드는 현 세태에 대한 비판까지. 이 글을 읽다보면, 이 사람은 세상 사는 게 참 답답하겠다, 그러니 청승스러워질밖에.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두려워할 줄 아는 건 지혜의 진면목’(p.189)이라는 그의 말처럼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가 있기에 두려워지고 두렵다보니 이 두려움을 모르던, 또는 이 두려운 상황이 벌어지기 이전의 옛날을 자꾸만 이야기하게 되는 건지도. 그리고 일갈하게 되는 것이다. ‘식탁에도 도덕이 필요하다’(p.211) 라고. 비건이 될 자신은 정말 없지만(우울할 땐 고기 앞으로 가야하니까) 내 식탁의 도덕에 관해서 생각해 볼 때다. 엄마의 식탁이 그 없는 음식 솜씨에도 얼마나 도덕적인 식탁이었던가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 입맛의 보수성은 그 도덕성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말이다, 도덕은 가장 최고의 식도락을 즐길수 있게 하기도 한다. 비행기 타고 날아와 농축된 석유를 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푸아그라니 세계 3대 진미 중의 하나라는 송로버섯을 먹는 것만이 식도락이 아니다. 진짜 식도락은 제철 음식을 딱 그 계절에만, 아니 심지어 겨우 며칠동안에만 먹을 수 있는 그 음식을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죽나무 순을 날로 먹어본 적이 있는데, 그 가죽나무 순을 따다 주신 분이 말씀하셨다. 이걸 따서 비닐에 넣어서 가져오는 동안 맛이 약간 변해버렸다고. 가죽나무 순이 열기에 데었다고 표현하셨다. 그렇다고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오면 맛이 더 변한단다. 그리고 심지어 가죽나무 순을 이렇게 날로 회처럼 초고추장에 찍어먹을 수 있는 건 한해 중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뭐 그 가죽나무 순 먹겠다고 또 화석연료 때어가며 그분이 사는 산골마을에 찾아가면 그 가죽나무 순도 농축된 석유를 먹는 것과 뭐가 다를까마는. 어쨌든 그런 진짜배기 미식에 대한 생각들을 했다.

 

다시한번, 박찬일의 에세이는 참 좋구나.

 

2024. 9. 8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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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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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따뜻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러면서도 늘 재미있는, 미미 여사 다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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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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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 9. 6

 

미미여사의 에도시대 시리즈물을 한국에 출간된 것에 한해서는 다 읽었다. (사실 현대를 배경으로한 책들도 다 읽었다.) 한국인의 정서로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도 있었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측면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질성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러한 이질성과 거리감이 괴담이라는 장르를 즐기는데는 플러스 요소가 된다. 그야말로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이질감과 거리감이라고 하면 맞겠다.

 

책 날개 미미여사의 작가소개와 더불어 항상 나오는, “에도 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매우 강했습니다.” 라는 말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짧은 문장의 전반부는 문장자체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만 그 내용은 상상의 영역을 넘어선다.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대라는 것. 전쟁을 치르는 중도 아닌데 그럴수 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후반부는 미미 여사의 글을 읽는 내내 묘하게 거슬렸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대감을 느끼기엔, 미미여사의 에도시대는 각자도생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일본은 한반도는 겪지 않고 지나간 중세를 꽤 오래 겪었다. 중세와 봉건은 동의어가 아니다. 국토가 아래 위로 길고 험한 지형이 군웅할거의 시대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각 지역을 지배하는 패자(성주, 지배자, 토호)가 있고, 그 패자에게 모든 것이 묶여 있는 사람들, 거주 이전의 자유도 직업선택의 자유도 없다. 신분이 세습되기로야 조선의 봉건사회도 마찬가지였으나 직업 자체가 세습되지는 않았다. 조선의 농민에게는 과거 응시권이 있었고, 과거에 급제하면 신분이 달라졌다. 일본은 그렇지 않았다. 이라기보다는 농에 가까운 신분이었고, 부모로부터 세습되는 직업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인 조선에서 모든 백성은 왕의 백성이었다. 일개 지방 향반(그래봐야 지도 왕에게 지 목숨을 맡긴 왕의 백성중 하나)이 함부로 그 목숨을 취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보면 어느땅 아무개 향반이 자기네 노비를 함부로 죽인 사건에 대한 숱한 재판 기록이 있다. 사유재산으로 취급되던 노비의 목숨조차 왕의 관할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없는 시대였다. 일본과 매우 다르게. 중세를 지나고 있던 일본은 그 땅의 주인에게 그 땅에 살고 있는 주민의 생사여탈권이 주어졌다. 통치형태의 차이에서 오는 생명의 경중 차이다.

 

미미여사가 다루는 에도시대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이 중앙집권을 시작한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중앙집권을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그렇게 강력한 중앙집권(중앙집권의 가장 큰 상징은 각 지방에 중앙 정부의 관리를 파견하는 것이다. 에도 시대는 그러한 중앙집권이 완성되지 않은 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뭐 일본사에 대한 큰 지식은 없으므로, 미미 여사의 글을 비롯한 그 시대를 다룬 일본의 소설들을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이 완성되지 않은 나라여서 나의 목숨은 내가 사는 땅의 통치권자에게 달려있다. 이 책의 두 번째 이야기 <단단 인형>에서 다루고 있듯, 한 고을의 사람 전체를 쓸어버리듯 없애버리는 이야기도 별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를 듣는 도미지로의 반응대로라면, 그다지 드문 이야기도 아니어서 한국의 사람들이 어사 박문수 이야기와 전우치 이야기, 춘향전의 어사출도 장면에 익숙하듯 에도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익숙한가보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어사출도는 끽해봐야 한두사람의 목숨이라면 일본의 이야기는 마을 전체의 이야기라는, 살해의 스케일이 다르다.

 

조선의 정서에 익숙한 한국사람으로서는 사람의 목숨을 간단히 뺏을 수 있는 시대에 대한 감이 모호하다. 그런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인가가 와닿지 않는다.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는 조선에 익숙하니. 겨우겨우 중세 농노의 개념과 비슷한 일본의 중세를 이해하면 음,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위화감은 달라지지 않는다. 거기서 미미 여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대감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 유대감이라는 게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늘 자신에게 천형처럼 주어진, 또는 자연재해처럼 주어지는, 뜬금없는 불행에 맞닥뜨린 사람이 홀로 그것을 헤쳐 나가고 견뎌내는 이야기로 읽혔다. 자신의 운명에 홀로 맞서 꿋꿋히 이겨내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감동을 주었지만 유대감연대의식은 글쎄. 도무지 어찌해 볼 길 없는 거대한(그리고 폭력적인) 힘 앞에서 묵묵히 견디는 사람에 대한 응원은 가능하지만.

 

표제작 <청과 부동명왕>은 한자 표제를 볼 생각을 하기 전엔 ()과 부동명왕이라고 생각했다. 에도시대 중국은 청나라이기도 했으니 청나라와 관련있는 얘긴가 했고, 뭐 그런 걸 떠나 그냥 푸른색을 뜻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부동명왕의 이미지가 나에게는 푸른색이기도 해서. 헌데 청과(靑瓜 물외, 오이, 노각)’였다.(제목을 잘 봐야한다, 처음부터. 그러니까.) 노각 모양이 정수리 뒤에 붙어 있는 무면(無面)의 부동명왕이라니. 귀여우셔라. 그리고 여기서 드디어 미야베 미유키가 그리고 싶었다던 유대감을 읽었다. 홀로 견디는 사람과 그 홀로 견디는 사람을 도와주는 다른 사람, 그리고 그 홀로 견디는 사람에게 의지해 자신의 재앙을 견디는 사람, 자신도 견디는 중이면서 재앙을 견디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 처음으로 미미여사의 글이 따뜻했다.

 

뭐 다음 수록작 <단단인형>에 가면 또 바로 홀로 견디는 여인 오빈이 나와버리지만. 이사와야의 몬이치가 미루라무라 마을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오빈이 만든 단단인형이 몬이치의 자손들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연대와 유대감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연약한 한 개인의 용기와 정의감에 대한 이야기와 한 여인의 보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서 애틋하면서도 맘이 아팠다. 오빈의 삶이 대체 어땠을까 싶어서. 무슨 마음으로 살았을까, 외로웠을 텐데 하는. 미미여사의 글이 종종 이렇게 아프게 읽히는 이유는 이런 단독자의 외로움 때문이다. 아마도 다들 이렇게 외롭게 견뎌왔기에 미시마야 흑백의 방이 생기고 오치카와 도미지로와 같은 청자가 필요한 거 아닐까. 연대하지 못하고 유대감이 없기에. ‘하고 버리고, 듣고 버리는청자와 화자의 일회성의 관계를 연대나 유대로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말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이 있다. 삶의 압박이 너무 심해지면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사랑이란 나를 중심으로 한 비롯되는 동심원과 같아서 사람들은 다들 몇 개의 층위를 가진 동심원을 자신의 주변에 두르고 그 원안에 들어온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들과만 연대할 수 있다. 자기애로 시작하는 동심원은 자녀, 배우자, 혈육, 친구, 민족 등의 층위를 가지고 넓어져 간다. 삶의 고난이 커질수록 그 원의 층위는 얇아지고 지름은 줄어든다. 당장의 내 삶이 힘들 때, 사람들의 인심은 각박해진다. 목숨을 간단히 뺏길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삶의 압박이 또 있을까. 사랑의 곳간을 채울길이 막막한 거다.

 

리뷰라는 게 그렇다. 글을 쓰다보니 새삼 알겠다. 미미 여사의 글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신간이 나온다는 말이 반가울만큼 기다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묘한 이질감과 위화감을 느끼는 그 이유가 리뷰를 쓰다보니 정리가 된다. 나로서는 연대라고 믿지 못하는 것을, 연대라고 믿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기묘한 엇박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2024. 9. 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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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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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마음속이든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묻고 대답을 얻는다 해도 전부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매번 묻다가는 귀찮아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말없이 서로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갈 수밖에없다. 본심 같은 건 캐물어 봐야 소용없다.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진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진실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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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 동네서점의 유쾌한 반란, 개정증보판
백창화.김병록 지음 / 남해의봄날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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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 2024. 9. 3

 

과거에 메이커시장표는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었다. 시장표는 쌌고 메이커는 비쌌다. 어차피 파는 장소는 비슷했다. 시장의 난전이거나, 그 시장 안에 들어있는 작은 가게이거나. 물건에 그 물건을 만든 자의 이름(그야말로 maker)이 붙어있느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 이름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이 붙어있기만 하면 모두 뭉뚱그려 메이커였고, 비쌌다. 왜냐면 시장표의 품질은 들쑥 날쑥이어서 믿을 수 없지만 메이커의 품질은 늘 균질하여 믿을 수 있으니까.

 

그 메이커가 각각의 브랜드로 분화하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각자가 신뢰하는 메이커가 달라졌고 메이커라는 뭉뚱그린 말 대신 각각의 브랜드명을 부르기 시작했다. 삼성, LG, 나이키, 아디다스. 내 주변에는 백색 가전은 LG” 라고 외치는 분이 있다. 본인의 TV가 삼성 제품이 아니어서 빨리 고장 난 거라 믿는 분도 있다. 나이키 운동화는 발볼이 좁아 불편하고 아디다스가 발이 편하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 그 물건을 보기 이전에 그 브랜드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 경험치는 어느 정도는 맞다.

 

물건만 그런 게 아니다. 돌고 돌아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브랜드는 취향에도 관여하기 시작한다. 각각의 출판사는 주력으로 출간하는 장르가 있다. 종합출판을 지향하는 시공사, 민음사 등의 브랜드에서도 임프린트를 내는 이유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니까. 낯선 작가에 낯가림이 심한 나는 특정 출판사에서 그 작가의 책이 두 권 이상 출간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 작가 여기서 책을 두 권이나 내다니 기본은 하는 작가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거다. 이또한 브랜드에 대한 믿음이다.

 

책에 관한 책은 일단 사들이고 보는 인간인 지라 예전엔 일단 보이는 족족 사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책에 관한 책에조차 신중하게 된 건 따라 살 수 없을만큼 많이 출간되기 때문이었고,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하잖아, 싶은 책도 꽤 많아서였다. 특히 서점 관련 책들이 그러 했다. 그러나 이 책을 발견한 순간에는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펼치기 전부터 잘 쓴 책이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남해의 봄날>이라는 출판사, 그 브랜드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책은 책에 관한 책이어서 읽은 것이 아니다. 저자에 관해서도 전혀 초면이라 알 턱이 없고 오직 출판사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한 독서다.

 

<남해의 봄날>이라는 이 특이한 이름의 출판사를 처음 만난 책은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이라는 책이었다. 책에 관한 책 만큼이나 음식 에세이도 좋아하는데 이건 무려 남해 바다 밥상이야기란다. 얼른 사서 읽었다. 잘 쓴 책이고 잘 만든 책이었다. 출판사 이름이 하도 특이하고 낯설어서(2014년 경의 이야기다) 스치듯 기억에 담았다. 다음 책은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책이었다. 출판사 이름을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꽤나 유심히 보았다. 책 날개에 있는 출판사 설명도 꼼꼼히 읽었다. 출판사가 통영에 있다고, 그래서 남해의 봄날이라는 근사한 사명을 지었구나, 신기하다, 통영에서도 출판사를 운영할 수 있구나. 뭐 이런 잡다한 생각들을 하였다. 그 다음에 읽은 책이 월인정원이었고, 그 다음은 가업을 잇는 청년들이었다. 물론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남해의 봄날에서 나왔다고해서 읽었는데 내 취향과 전혀 맞지 않는 책도 있었다. 다만 이쯤되면 <남해의 봄날> 출판사의 책이라면 대략 신뢰를 깔고 가도 되겠다 수준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나의 그러한 신뢰를 다시 한 번 공고히 해 주었다. 이 책 직전에 읽은 책방에 관한 책 몇 권이 아 진짜 너무하네 싶은 책이어서 기대치 자체가 아예 낮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책은 꽤 잘 씌어진 책이다. 우리나라 전국 동네의 작은 책방들을 탐사하고 소개하는 글들은 딱 고만고만하게 나쁘지 않은 정도, 그러나 작가 부부 백창화 김병록이 쓴 자신들이 숲속작은책방이야기는 좋았다. 그들이 책방을 짓고, 열고, 운영하면서 한 생각들을 쓴 글. 특히 일단 방문하면 책 한 권은 꼭 사서 가야한다는 책을 강매하는 서점이라니. 커피와 차를 파는 대신 그러는 거라면, 충분히 납득 가능이다. 나는 그들의 그 합리적인 뻔뻔함(뻔뻔함이라는 표현의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쓰기 싫은 말인데, 당당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전체적인 느낌이 담기지를 않는다.)이 가장 좋았다.

 

책을 하도 모아대니 남편은 종종 나중에 중고책방을 열거냐고 물었다. 내가 과연 이 책들을 팔 수 있을까? 라고 대답하자 남편은 몹시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래 그에게도 이 무모한 소비에 대해 납득 가능한 이유는 필요하지 싶었다. 그래서 깊이 고민한 척, 말해줬다. “나중에 너 퇴사하면, 강원도 산골에 정원이 딸린 예쁜 집을 사자. 거기서 정원 가꾸면서 나는 북까페를 할게, 너는 소를 기르렴.” 내가 제시한 청사진은 남편의 마음을 꽤 움직인 모양이었다. 소를 기르는 게 마음에 드는 건지, 이 무의미한 소비가 의미가 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음이 위안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과연 불특정 다수에게 내 책을 보여줄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겠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한적한 시골에서 정원을 가꾸는 삶은 원래도 꿈꾸었던 거라 거기에 북까페 또는 중고책방의 꿈을 끼워넣어 보았다. . 의외로 꽤 괜찮은 이야기 같아 보이기도.

 

소설가 김영하는 그의 소설에서 인간이 왜 문학을 읽는지에 관하여 말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 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 주었다.

 

김영하, 작별인사, 복복서가, 2022, p. 276

 

이 책 백창화 김병록 부부는 그야말로 내가 앞으로 살 수도 있을 삶을 상상속에서 살아보게 해 주었다. 시골 생태마을 안에, 가정식 서점이라니, , 가정식 서점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고, 민박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다만 예쁘게 꾸민 정원과 목공과 중고책도 파는 예쁜 서점이라면 이건 살아 볼 만 했다. 그리고 이 책의 작가만이 아니라 출판사 자체도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제시해주고 있었다. 통영에서 하는 출판사, 그런데 꽤 잘되는 출판사를 넘어서 이렇게 좋은 책을 만든다고. 생각해보면, 통영에서 못할 건 또 뭔데? 싶었다. 그러게, 왜 굳이 서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돈을 벌어야하니까 싫은 서울에서라도 꾸역꾸역 참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만일 책이 팔리지 않으면 우리 둘이 나눠 갖자는 마음으로 책방 문을 열었다.

내가 좋아서 책을 사고, 책을 읽고, 그 책이 너무 좋아 주위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그 책을 팔아 밥을 먹는다는 일. (p.155)

 

이런 게 책방이라면 충분히 살아볼 만하겠다 싶어 남편에게 목공을 배우러 가라고 말했다. 나는 책을 제공 할테니 너는 책장을 제공하라고. 이 얼마나 공평한 역할분담이란 말인가. 한석봉과 엄마도 한 명은 글 쓰고 한 명은 떡 써는 역할분담을 했는데. 부부도 계산은 정확해야지. 남편은 또 한번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 결혼식장에 내가 네 멱살을 잡고 끌고 들어간 건 아니니까 뭐.

 

책리뷰를 쓰고 있지만 출판사 리뷰가 된 느낌. 남해의 봄날 출판사,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내 주시길.

 

2024. 9. 4.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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